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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한국교회 교세 감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신뢰 추락은 교세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년간 이어진 코로나 정국에 장로교 주요 교단에서만 약 80여만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 전체를 따진다면 아마도 여기에 배를 더해야 할지도 모른다. 참으로 위기이다. 이런데도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들은 이러한 교세 감소에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로 잠깐 빠졌지만 결국은 되돌아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이라기 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로서, 개교회에 적을 두지 않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노미날리티(일명 가나안 교인)로 남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90년대 이후 각종 세속 언론 매체들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보도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일탈, 교인들 간의 갈등과 분열 등이 교회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져 사회적 불신을 가져온 데 원인이 있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예배를 장려한 영향이 크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전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대안은 기도와 설교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기도운동의 열정이 식어 부흥회도, 사경회도, 기도원도 모임이 많이 줄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설교가 기복주의로 기울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민족복음화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의 은혜로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기복(祈福)에 호소하는 설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기도운동의 활성화와 바른 설교에 있다. 바른 설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없는 설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강화(宗敎講話)일 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것이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 오셔서 인류를 위해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증언하는 것이 바른 설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역사는 죄로부터의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희생의 정신이요,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봉사의 정신이다.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기복 아닌 바른 설교가 요구된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회복과, 교세 감소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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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3-11-02
  • [사설] 종교개혁기념 제506주년을 맞아
    1517년 중세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 비기독교적 교리와 제도에 대한 성경적 개혁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개신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이다. 현재 한국에는 천주교와 정교회 등의 기독교 교파들도 있지만, 한국에서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를 이르는 말이 되고 있다. 그만큼 현재 한국에는 종교개혁에서 파생한 이 개신(改信) 교파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성공회나 감리교 같은 감독파(에피스코팔 처치)도 있고, 장로회주의와 같은 개혁파(리폼드 처치)도 있으며,침례교나 회중파같은 환원파도 있다. 이들을 모두 통털어 그냥 '개신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세의 종교개혁운동은 신·구교 간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똘레랑스를 통해 종교개혁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다. 개신교는 '개혁이 완성된 교회'가 아니고, 역사 속에서 '개혁이 계속되는' 진행형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개혁하는 교회'라고 부른다. 따라서 개신교는 오늘날도 개혁운동이 멈춰서는 안된다. 개혁운동이 멈추는 순간에 그 교회는 개혁 이전의 중세교회로 회귀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러한 딜렘마에 빠져들고 있다. 첫째, 대교단들의 이기주의이다. 대교단의 이기주의는 교권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이 교권주의가 남의 신앙 경험을 쉽게 이단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오로지 자리 다툼으로 교계의 연합과 일치를 파괴하기도 한다. 둘째, 대교회 중심의 탐욕이다. 사람도, 헌금도 모두 대교회가 쓸어간다. 그런데도 교단 차원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같은 노회, 같은 지방회의 어려운 지체들마저 외면한다. 이렇게 되면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가 아니다. 셋째, 종교개혁 기념 행사조차 줄어들고 있다. 10월이 되면 종교개혁 기념 축제가 교회마다, 교단마다, 신학교마다 떠들썩하게 준비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기념 행사를 쉽게 만나기 어렵다. 종교개혁기념 예배와 학술대회나 세미나, 또는 음악회, 연극, 영화, 바자회, 독서토론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여기에 안 믿는 친척이나 친구 등을 초청해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기념 행사가 시들해지면 우리의 신앙도, 열심도 시들해 질 것이다. 종교개혁 기념 행사가 곳곳에서 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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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3-11-02
  • [연지골] 설교-하나님의 말씀
    ◇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고 한다. 여기에 이 '말씀'(Word)은 그냥 '말, 낱말, 단어'를 뜻하는 word가 아니고, 헬라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것으로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이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한다. ◇ 만물을 지은 창조주로 표현되는 이 어떤 존재에 대해, 본문은 "아버지의 독생자"(14절), 또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8절)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이 독생자를 칭하는 고유명사 '말씀'(Word)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say 또는 speak)고 할 때, 보통명사 '말씀'이 구분되지 않아 혼돈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 구원사에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이다. 이 성경에는 독생자에 대한 계시가 나타나 있기 때문에 말씀이다. 둘째는 '보이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독생자가 성육신(Incarnation) 하여 세상에 오사 행하신 것을 오늘날 기념하는 것이 성찬이다. 셋째는 '들리는 말씀'으로 설교이다. 설교는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 말씀이다. ◇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이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역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증언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목사가 설교란 이름으로 성경 본문 한 절 읽어 놓고 아침 신문에서 본?이야기나, 또는 자신의 신변 잡기를 코미디언처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애국심을 부추기며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또한 종교적 강화(講話)나 기복적 축복(祝福) 역시 마찬가지이다. 설교는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행한 구속 사역을 이 시대에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 하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역이 증언되지 않는다면, 그 설교가 아무리 훌륭한 종교적, 윤리 도덕적 가르침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는 대체로 기복적(祈福的)이어서 소시민들의 기복주의에 경도(傾倒)되어 있다. 따라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으로서의 힘을 잃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사역에 대한 바른 설교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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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국가 부채, 누구에게 갚으라는 것인가’
    빚을 지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무조건 남의 돈으로라도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는 심보는 도둑의 마음으로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사업이나 기업하는 분들에게는 채무 없이는 기업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국가의 여러 금융 기관들의 활동도 이런 금융 서비스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개인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빚에 의존하고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결국은 망하게 된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나라가 위험해지는가? 과거에 우리 정치권에서는 야당에서 정부에게 국가 채무가 GDP(국내총생산)의 40%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자신들이 말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내로남불인가? 참고적으로 ‘국가 채무’와 ‘국가 부채’는 다른데, 국가 채무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상환의무가 있고, 지급 일정이 정해진 채무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공무원 급여, 국채, 지방채 등을 말한다. 그리고 국가 부채는 미래에 지출할 재정부담까지 추계해서 산출하는데, 이를테면,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을 포함한다. 우리나라가 1948년 건국과 같은 정부 수립 이후 약 70년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국가 채무는 660조 원이었다. 그런데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5년간 늘어난 부채는 무려 408조 1,000억 원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모든 정권에서 졌던 부채보다 약 61%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 들어서기 전까지 국가 채무는 GDP 대비 40.1%였는데, 문재인 정권이 끝난 시점인 2022년에는 54.3%로 14% 이상 상승하였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이 속했던 정당이 주장한 것에서 상당히 지나친 상태이다. 물론 국가 채무비율이 높다고 나라가 곧 망하는 것도 아니고, 채무비율이 낮다고 국가가 안정된 것도 아니다. 다만 국가 부채율이 높아도 신용도가 높고, 다른 방법(다른 나라에 대하여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지하자원, 원유 같은 것을 다량 보유함)으로 그 채무를 갚을 능력이 있다면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과연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그럴 능력이 되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역대 정권하에서 국가 채무의 증가액을 보면, 김대중 정부에서 85.4조 원, 노무현 정부에서 143.2조 원, 이명박 정부에서 180.8조 원, 박근혜 정부에서 170.4조 원인 것에 비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408.1조 원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빚으로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국가 부채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 70년간 1,433조 원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5년간 무려 770조 4,000억 원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국가 부채는 2021년에 사상 최초로 2,000조 원을 넘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있었던 2022년까지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는 1,068조 4,000억 원이었다. 이것은 국민 1인당 2,200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 빚은 우리 후손들에게 미리 가불하여 쓰게 되므로, 그들에게 빚을 떠넘긴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2023년 말까지 국가 부채 예상은 문재인 정부가 넘겨준 부채 금액에서 더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부지런히 구미(歐美)와 중동 등에서 ‘세일즈맨 외교’를 통하여 국가 수출과 국가 신용도를 높이고 있다. 분야별로 보면, 원전, 수소, 친환경 에너지, 미래 차, 금융, 관광, 방산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해외 수출을 독려•신장시키고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 경제력을 튼튼히 하고, 국가 기반을 굳건하게 세우기 바란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수십조 원의 성과를 내었고, 최근에도 중동지역을 방문하여 100조 원대가 넘는 경제 분야 수출 약속을 받아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 주도 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지도자들이 이런 활동들을 활발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과 그들의 그릇된 정책으로 국가 채무와 부채가 늘어나고 결국 나라가 망한 국제적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벌지는 않고 쓰기만 하고, 막대한 빚을 내서라도 잠시의 호사스러움과 인기를 누리려는 지도자는 국가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엄청난 국가 부채를 만들어 후대들에게 짐을 져 주는 것은, 일종의 범죄가 아닌가? 우리는 내로남불 정권의 빚더미 잔치 국가를 경험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내로남로(내게 사랑이면 남에게도 사랑이어야)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10-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독립운동가들을 더 욕되게 하지 말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인물들이 있다. 홍범도, 김원봉, 정율성이다. 홍범도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 그의 유해(遺骸)가 구 소련 지역에서 운구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국가에서 제1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건국훈장을 받은 분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데, 홍범도도 받은 것이다. 홍범도는 이미 1962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는데, 그를 더욱 크게 격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1962년 당시에는 홍범도에 대한 구 소련측 정보가 없었기에, 그의 독립군 당시의 기록만으로 포상하지 않았나 싶다. 홍범도가 독립군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1921년 이후 구 소련의 자유시에서 일어난 참변과 그 이후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의아한 측면이 강하다. 일본군에 쫓겨 독립군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자유시에 모였을 때, 소련의 적군(赤軍) 참여 여부에 따라 대대적 학살을 당한 비극은 두고두고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해를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부대는 적군에 들어갔으며, 그는 모스크바에 들어가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상금과 권총, 군복 등을 받았고, 소련군 대위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련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런 홍범도를 역시 문재인 대통령 시절, 독립군 여러 명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 세울 때에 함께 세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가 과연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귀감(龜鑑)이 되느냐는 것이다.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지난(至難)한 어려움이 있을 때, 독립군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에는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가 소련 사람으로 살았기에 오히려 북한에게는 관련이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인물은 김원봉이다.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의 뿌리’라고 추켜세우고, 그에게 훈장을 추서하려 했다. 김원봉은 처음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 색채를 띤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가 의열단과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하나, 언제나 그는 공산주의 계열에 섰다. 그는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섰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국가검열상,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6.25전쟁 중에는 북한군의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여 전쟁을 독려하므로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김일성과의 권력 암투에서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역시 김원봉은 영원한 공산주의자로, 국군의 뿌리는커녕, 이 나라를 비극으로 몰아넣고 공산화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임에 틀림 없다. 지금 밀양에는 그의 의열기념관이 있다. 세 번째 인물은 정율성이다. 그는 현재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행진가’를 작곡하여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군대가 싸울 때, 중공군을 크게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북한에도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6.25전쟁 때에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우리의 소중한 궁중악보를 가져갔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중국에서 죽었고, 중국 공산당이 만든 혁명투사 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이다. 그런 그를 위해서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기념관을 만들고, 거리를 조성하고, 조형물을 만들고, 기념음악대회를 하는 등 한껏 기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고 모두, 기릴만한 업적이 되는가? 한때 일제와 맞서 독립 혹은 광복군 활동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공훈이 없거나, 반대로 공산주의 활동을 함으로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우리 자유대한민국에서 추앙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는 나라 잃고, 국가의 주권이 없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며,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자유대한민국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한다면 국가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들이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탓하기에는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평가하기에는 일정 부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괜히 그분들을 높인다고 들먹거리다가, 과거의 모든 행적이 들춰져 전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민망하고 볼썽사납다. 그분들에게 ‘독립운동’을 넘어 ‘건국’이라는 좋은 옷을 입혀 드리려다 오히려 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엄연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자꾸 변명하고, 항변하고, 두둔하고, 덮으려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편향된 사람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9-19
  • [기자수첩] 부처에게 귀의하겠다는 기독교의 목회자들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를 염려하는 말은 단순히 WCC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미 우리 한국교회 저변에는 혼합주의가 매우 뿌리깊게 자리 잡았고, 이제는 더이상 기독교의 절대적 유일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기가 도래했다. 진보 기독교계가 이번에는 제대로 사고를 친 모양새다. 이들은 오는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대회'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문제는 '삼보일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삼보일배(三步一拜)는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다. 그것도 단순한 수행법이 아니라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1보에 부처님께 귀의하고, 2보에 법(가르침·진리)에 귀의하며, 3보에 스님들께 귀의한다는 매우 절대적인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이 '삼보일배'를 무려 기독교 목회자들이 한다는 것이다. '10.29 할로윈 참사'는 전 국민 모두가 슬퍼했고, 또 안타까워 한 불의의 사고였다. 물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서로 엇갈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교회가 사망자를 추모하고, 또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꾸준한 노력은 분명한 의가 있다. 하지만 왜 그 방법을 굳이 '불교'의 수행법으로 해야 하는가? 아무리 '추모'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목회자들이 삼보일배를 하는 것을 과연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기독교'는 단순한 사상이나 문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은 아무 종교와 혼합해도 되는 그런 타협의 가치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 구원을 믿는다면, 적어도 부처에게 귀의하겠다는 '삼보일배'는 입에 담아서도 안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8-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586운동권’ 세대들 반성문을 써야’
    현재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는 소위 말하는 ‘586세대’가 상당수 있다. 이들은 1960년대에 태어났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대략 나이로는 50대들이다.(2020년 총선 기준) 이들이 제도권 정치에 대거 참여한 21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가운데 58%가 ‘586세대’이다. 지역구 당선자만 놓고 보면 61%가 ‘586세대’이다. 이는 국회의원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이다. 우리 헌정 사상 이렇게 많은 세대가 한꺼번에 국회 의석 다수를 차지하기로는 역대 최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이 세대는 1980년대 대학가에 데모가 한창일 때, 자신들도 여기에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자부심을 갖는 세대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현실정치에 적용하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586세대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권의 모습은 어떨까? 586세대 가운데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민의의 전당’에 들어갈 때 기대와 우려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려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586세대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586세대라고 모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또 그 시대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제도권에 들어가 모두 정치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그 시대에 함께 캠퍼스에서 운동권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2023년 광복절을 맞은 지난 15일, 의외의 ‘반성문’을 내놓았다.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580여 명이라고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이 자리에는 ‘586 운동권’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함께 자리를 했는데, 그래도 대부분은 586세대이고, ‘586 운동권’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반성문을 들어보자. ‘586 운동권’ 세대가 말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 벌였던 잔치판을 설거지하여 다음 세대가 새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하자. 먼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담긴 반대한민국적이며, 일면(一面-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적인 역사 인식부터 치우자. 민주화운동의 상징 자산을 주사파가 사취하여 독점 이용하는 이런 어이없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잘못을 바로 잡자’고 하였다. 젊은 세대는 이런 말을 하였다. ‘민주를 말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헌정을 무너뜨렸고, 노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위해 더 어려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 연금 고갈, 부동산 폭등으로 수혜를 받지 못한 계층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희망조차 포기해야 했으며, 미래 세대는 수백 조의 나랏빚까지 떠안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다른 ‘586 운동권’ 세대는 ‘이제는 정말 북한체제를 추종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그런 세력들과는 완벽히 결별한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화 세력이 출범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 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장 경악한 것은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 다수가 조국(전 법무부장관) 가족의 비리를 강하게 비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님이 옳았다. 저희들이 틀렸다. 이 순간 우리는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고 통렬하게 반성한다. 같은 시대, 같은 운동권을 형성했던 사람들의 눈에도 현재 제도권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586 운동권’ 세대에게서 ‘민주화 운동’의 변질을 느끼는 모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586 운동권’ 세대는 전 정권하에 여당의 대표에서부터 국회의원, 장관, 사법부의 중직, 각계각층의 요직, 정치권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바라보는 ‘586 운동권’의 행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은 ‘주사파의 폐해’ ‘내로남불’ 이조 시대에나 있었던 ‘당파 싸움의 재현’ ‘민주화운동의 망령’ ‘피해자 코스프레’ ‘방탄 국회의 선봉장’ ‘제 편 감싸기’와 같은 분위기가 묻어 난다. 그들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참된 민주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빙자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결핍 상태를 현실 정치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반 서민들의 상식에서 보아도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막무가내(莫無可奈)이다. ‘586 운동권’이 제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586 운동권’ 세대가 밀물처럼 몰려 들어간 21대 국회를 보면, 그런 기대를 함께 했던 것이 오히려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철저하게 국민들 앞에서 ‘반성문’을 써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고, 민의(民意)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지도자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8-19
  • [기자수첩] 얇은 '매트’와 투박한 ‘샤워기’에 담긴 새에덴교회의 진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가 이제 마지막 폐영식만 앞두고 있는 가운데, 대회 파행의 책임에 대한 공방이 심히 뜨거워지고 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메이저 대회인 만큼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인데, 문제는 일부 언론들의 자극적인 보도 행태에 엄한 한국교회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이틀새 주요 공중파 언론들이 잼버리 대회에 참가한 한국 대원들이 외국대원들과 비교해 열악한 교회시설에 배정됐다는 내용을 보도하며, 국민들의 공분을 자극했다. 해당 기사는 '역차별'이라는 키워드로 타 인터넷 언론들로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교회는 아이들을 매트 한 장 달라 주고, 강당 바닥에 재운 몰염치한 곳이 됐다. 당시 보도에 등장한 경기도 용인의 한 교회는 바로 새에덴교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이자, 한교총 대표회장을 역임한 소강석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다. 현 시점 한국 기독교의 얼굴이라 볼 수 있는 새에덴교회가 한순간에 아이들을 천대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은 결코 일개 교회만의 문제로 끝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물론 보도의 전체적인 주제는 교회가 아니었다. 잼버리 대회가 숙소 배치 후에도 여전히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고발과 비판이 목적으로, 교회는 바로 그 비판을 위한 매개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론들의 시선이 심히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대원들이 강당 바닥에 매트를 깔고 자고, 개조된 세면대에서 샤워를 한 것도 맞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이 '천대'가 아니라 교회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점이다. 새에덴교회가 대회 조직위와 지자체 등으로 부터 숙소제공 협조를 요청받은 것은 고작 하루 전이다. 전교인 수련회가 한창이던 상황에 이를 수락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지만, 곤경에 빠진 아이들을 섬기겠다는 결단으로 모든 인력을 잼버리로 돌리게 된다. 언론에서 ‘얇은 매트’라고 표현했던 그 매트는 밤새 전국을 수소문해 무려 대구에서 공수해 온 매트다. 서울 경기 지역 내 매트는 씨가 말랐고, 그나마 구입 가능한 매트는 너무도 얇았기에 아이들이 편히 잘 수 있는 두꺼운 매트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뒤진 노력의 결과였다. 언론이 지적한 대로 제대로 된 샤워실은 갖추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이 최대한 불편치 않도록 교역자들이 밤을 꼬박 새며 수도를 교체하고, 샤워기를 설치했던 것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샤워실을 제공해 주지 못한 미안함의 수고였다. 무엇보다 언론이 담아내지 않은 것은 바로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의 진심이었다. 새에덴교회에 입소한 400여명의 대원들은 숙소 이전 의사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대부분 새에덴교회에 남길 희망했다. 교회를 찾은 처음 그 순간부터 메디컬처치팀을 가동해 아이들의 건강부터 체크했고, 더위에 지친 아이들의 체력을 위해 고열량의 식사와 아이스크림, 생수, 간식 등을 무제한으로 제공했다. 이 뿐 아니라 아이들이 캐리비안베이에서 신나는 하루를 보내도록 지원했다. 오히려 소강석 목사와 교역자들은 단 한순간이라도 아이들이 불편한게 있을까 긴장을 놓치 못한 채 며칠을 보내야 했다. 공간이 분리된 2인실 방에 푹신한 침대가 있고, 번듯한 샤워실이 갖춰진 숙소로 갈 수 있었지만, 대원들은 자기 의지로 ‘얇은 매트’와 투박한 ‘샤워기’를 택했다. 새만금의 땡볕에서 제대로 된 돌봄 없이 고생을 거듭한 그들의 숙소 선택 기준은 별점보다는 제대로 된 보살핌이 먼저였던 것이다. 언론이 그토록 비꼰 ‘매트’와 ‘샤워기’는 대원들에 있어 ‘역차별’이 아니라 바로 ‘최고의 섬김’이었다. 소강석 목사는 언론 보도로 한참 뒤숭숭한 상황에서도 SNS를 통해 자기 교회를 찾은 대원들을 먼저 챙겼다. 혹여라도 아이들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다른 숙소로 보내주고자 했지만, 아이들 스스로가 새에덴교회에 남겠다기에 감사함으로 더 깊이 섬기겠다고 전했다. 소 목사는 "편안하고 편리한 시설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교회의 진심이 아이들의 편안한 웃음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줬다고 생각한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에서 웃고 즐기고 있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기특하고 대견하다"고 말했다. 잼버리 대회의 가장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아이들이다. 이제 고작 하루 밖에 남지 않은 지금, 새만금에서 아이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보듬는 것은 최고급 시설이나 화려한 공연이 아닌 바로 대한민국의 진심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8-11
  • [기자수첩] 인터콥의 목숨 건 ‘이슬람 선교’, “비판은 틀렸다”
    "이슬람 선교 쉽지 않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한다. 이를 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한기총 정서영 대표회장이 인터콥의 이슬람 선교를 문제삼는 일부 교계와 교단을 향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목숨을 내걸고 이슬람 국가에 뛰어든 선교사들에 지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이를 뒤에서 팔짱끼고 비난만 하는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지난 28일 한기총 이슬람대책세미나에서 나온 정서영 대표회장의 강단있는 발언은 현재 이슬람 선교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순과 편견을 정면으로 저격한다. 이슬람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위험한 이슬람 선교를 굳이 왜 해야 하느냐는 모순뿐인 발상은 결국 한국교회 세계 선교의 극단적 쏠림 현상을 만들어냈다. 세계 선교 2위라는 자랑스런 숫자 뒤에 가려진 한국교회 선교의 현실은 세계 지도의 일부분에 다수 한정되어 있다. 물론 모든 선교지는 언제나 인력과 재정이 부족하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나, 대부분의 교단과 단체들이 이슬람 국가를 외면하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세계 최대 이슬람선교단체로 꼽히는 인터콥선교회(본부장 최바울 선교사)의 존재는 '위험'을 외면하는 일부 한국교회 선교의 모순을 상충한다. 한국교회가 선교대국으로 세계 선교에 앞장서는 기독교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은 '이슬람 선교'를 빼놓고서는 결코 거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선교는 없지만 이슬람 선교의 위험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특히 기독교, 혹은 기독교 국가를 테러의 목표로 삼은 이슬람의 '지하드'는 이슬람 선교사에 있어 단순한 위협을 넘어 목숨 자체를 담보로 하게끔 한다. 그렇기에 일부 교회가 위험한 이슬람 선교를 금하는 것 역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선교'라는 단어는 언제나 '순교'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이 그랬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지며, 선교를 행했다. 20억에 이르는 무슬림은 전 세계 80억 인구 중 무려 1/4을 차지한다. 이슬람을 포기한 세계 선교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세계 종교지형에 있어 기독교의 침체와 대비되어 무슬림의 증가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현실은 이슬람 선교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슬람 선교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도 한국교회를 대표해 목숨을 내걸고 이슬람의 선교 현장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교회 전체가 합심해서 이를 지원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허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현실은 '외면'을 넘어 '비판'의 지경에 이르렀다. 정서영 대표회장의 말처럼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이슬람 선교를 하지도 않으면서 비판만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인 것이다. 오히려 심히 방어적으로, 무슬림의 테러가 전 세계 어디로 향하든 우리나라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분위기다. 말 그대로 한국만 ‘이슬람 청정지역’으로 방어하면 된다는 것인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슬람 세력을 단순히 모스크 사원 앞에서 돼지고기를 굽는다고 해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슬림에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총칼로 무장한 그들의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무기가 아니다. 이슬람을 무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역사가 증명했고, 오히려 자극할수록 그들을 더욱 강하게 뭉치게 했다. 무슬림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복음 뿐이다. 테러를 멈추는 것 역시 복음밖에 없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무슬림을 살리고, 전 세계를 살리는 것이다. 이슬람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다원주의자들은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화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허나 세계 종교학자들은 전 세계 20억의 무슬림 중 약 20%를 극단 과격주의 세력으로 분류한다. 총 4억명, 미국 전체 인구조차 훨씬 상회하는 이들이 과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이슬람 현지에서 활동해야 하는 이슬람 선교를 결코 일반적 선교의 기준에서 이해하면 곤란하다. 군인에 있어 평시와 전쟁시의 대응요령이 전혀 다르듯이 이슬람 선교 역시 선교의 방법과 정도, 대응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보며 단순히 ‘과격하다’라고 단정 짓는 것은 ‘이슬람’이라는 전제를 간과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세계 최대 이슬람 선교단체인 ‘인터콥’은 한국교회를 넘어 세계교회의 분명한 자산이다. 무엇보다 하루가 다르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슬람을 무력이 아닌 복음으로 억제할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7-29
  • [사설] 5.18 가짜 유공자 철저히 조사하여 밝혀라
    1980년 광주사태라고 불리우던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등록된 사람은 4346명이라고 한다. 그 중에 67명은 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불교 스님이나, 천주교 신부, 기독교 목사 등인데,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이들 종교인 중 57명이 가짜 유공자이고, 그 가짜 유공자 중목사가 33명으로 최다라고 한다. 이건 어디서 나온 근거인지 아직 명확한 것은 아닌듯 하나,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하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18 민주화 운동에 목사가 많이 참여하였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 목사 유공자 중에 가짜가 제일 많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기독교인들의 양심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건이다. 이들이 유공자로 등록된 후에 정부로부터 수억원씩 보상비를 받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목사들이 가짜 유공자로 등록된 후에 보상비를 받아 챙겼다면, 이거야 말로 한국기독교를 국민과 역사 앞에 매우 부끄럽게 만든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이 그렇지 않고, 어떤 특정 세력이 기독교를 음해하기 위해서 5.18 가짜 유공자 중에 기독교 목사들이 많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라면 한국기독교 입장에서 절대로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정부는 5.18 유공자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여 진실을 밝햐야 한다. 특히 가짜 유공자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그 명단을 소상히 밝혀 국민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 진짜로 가짜 유공자로 끼어든 사람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면, 그 자신이나 또는 돌아가셨다면, 그 유족들이 스스로 그 명단에서 삭제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도록 하는 것이 옳다.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대로 살 것을 맹세하고 목사로 나선 사람이 거액의 보상비에 눈이 어두워 국민과 역사를 속이고 가짜 유공자 행세를 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5.18 민주화 운동 가짜 유공자 문제는 그냥 지나쳐서는 절대로 안될 일이다. 이제까지 드러난 의혹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도록 정부든, 국회든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빠른 시일 안에 무엇이 진실인지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 연지골
    • 사설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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