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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왜 성경과 성탄절을 문제 삼나?'
    최근에 불교 언론을 보니, 불교계에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성탄절’에 대하여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립해서 사용해야 한다며 내부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즉 성경은 ‘바이블’로, 성탄절은 ‘기독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불교계가 ‘석가탄신일’로 하든 ‘부처님 오신 날’로 하든 상관한 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시 의회 연설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가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문제 삼아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결의했다고 한다. 불교계는 ‘종교 편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그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모양새다. 정부에서는 이번 5월부터 전국의 70여개 사찰들이 그동안 오랫동안 받아오던 ‘문화재 관람료’ 대신 이를 100% 국가에서 보전(保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이 자그만치 올해에만 419억 원이 지원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언론들에서는 각 사찰들이 문화재 관람료를 ‘무료’로 한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것이 무료인가? 각 사찰들이 현장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려면, 불교의 문화재를 관람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심지어 법원에서도 그런 행위는 ‘부당하다’고 판결까지 내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고 수고하지 않아도 재정 지원이 이뤄진다. 그야말로 정부와 지자체가 따박 따박 재정을 지원해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무료라고 하는가? 이것은 엄연히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에서 보전해 주는 것이다. 불교계의 이런 모습에 2021년 국회에서 모 의원은 ‘봉이 김선달’이란 말을 사용했다가 불교계로부터 호되게 항의를 받고, 항복하기도 했다. 혹자는, 이처럼 불교계가 문화재 관람료 대신 국가로부터 100% 재정 지원받는 것은 우수한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정책 차원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동안 정부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국가 예산 집행을 하지 않았던가? 지난해 문화재청이 낸 보도자료에 의하면, 2023년 문화재청 예산을 1조 2,935억 원으로 잡았고, 그중에 문화재 보존 예산으로만 6,814억 원을 책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상당수의 금액이 불교계의 문화재 보존에 사용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문화재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동안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이 계속 종교계에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들어갔지만, 그에 대하여 공개적이며 투명한 감사(監査)는 제대로 이뤄졌는가를 묻고 싶다. 어찌 보면 불교계는 국내에서 오래된 종교라고 하여, ‘종교 우대’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타종교에 대해서 ‘성경은 바이블로, 성탄절은 기독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로, 가톨릭은 카톨릭으로 해야 한다’는 논의를 했다고 하니, 어리둥절해진다. 사실 불교계는 전에도 기독교가 성탄절에 기독교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성탄 트리’를 세우면서 트리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시비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십자가는 안 되고 별을 달라는 것이다. 별은 되고 십자가는 안 된다는 이유는 뭘까?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 우리 기독교가 불교의 상징물에 대하여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불교계가 타종교에서 사용하는 고유한 용어까지 독점하고 있으니 바꿔야 한다고 거론하고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볼썽사납다. 이런 것들이 종교 간 다툼을 일으키는 발단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종교 간에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려면 그 종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하여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무리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불교를 보면, ‘종교 차별’을 주장하면서, 여러 사안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점(先占)하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눈에 띤다. 그러나 종교 간에 간섭함이 도가 지나쳐, 타종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명칭과 활동까지 따지고 든다면 이를 우리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각 종교는 종교 화합을 통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이를 보여줌으로 국민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종교가 국민들에게 짐이 되고, 배척의 요인이 될 것이다. 종교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정치 집단도 아니다. 종교의 본분은 국민들의 영적, 정신적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하는데 치중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5-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부활(復活)과 부활절(復活節)’
    지난 3년간 한국교회는 코로나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내(室內)에서도 마스크 벗기가 실행되는 가운데, 이번 부활의 예배에는 그동안 쉬고 있던 성도들도 함께 나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언제나 부활의 감사 예배는 기대와 설렘과 기쁨과 엄숙함의 은혜가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온갖 괴롭힘과 모욕과 야유, 조롱과 비난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감사하여 눈물이 난다. 세상에서 나의 슬픔을 위하여 울어주고, 기쁨을 위하여 함께 웃어주고, 내가 아플 때 대신 앓아 주고, 그리고 나의 잘못의 짐을 지고 죽어줄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할 사람들이야 다소 있겠지만, 나를 대신하여 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면서까지 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해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세상에 대하여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아무 욕심도 없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셨다. 당신의 몸은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죽음의 희생으로 내어놓으시고, 복음 전파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육신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고, 영혼은 하나님께 의탁하고, 심지어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십자가 밑에서 병사들이 제비뽑아 나눠 갖는 것도 두고 보셨다. 그야말로 빈손, 빈 몸이셨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세상에서 작은 욕심 때문에 때로는 마음이 상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부끄럽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명백하다.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代贖) 제물로 주시기 위한 것이다. 어떤 종교도, 어떤 종교의 교주도,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그런 사랑을 베푼 경우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만 자신을 ‘메시야’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100여 명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분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다가 끝내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극진하고도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희생과 사랑을 보여 주었는가? 부활(復活)은 영어로 Resurrection으로 되살아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활절(復活節)은 영어 표기가 다르다. Easter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과는 좀 다르다. ‘Easter’란 말은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봄’과 ‘다산의 여신’인 이스터(Eostre)에서 나온 것인데, 초창기 영국 교회에서는 지역 전통과 연계하기 위하여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로 명명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우리 신앙은 절기(節氣)인 부활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참 의미와 소망을 되새기는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감사와 믿음과 소망을 더하기 위하여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날마다 부활의 소망이 더욱 또렷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다. 뭘 이루셨는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셨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동시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류의 영혼 구원 계획을 이루셨다. 또한 구약 성경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언된 메시야 오심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대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죽어주심도 이루셨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마귀를 멸하신다.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데, 절기가 아닌, 부활의 은혜, 부활의 능력, 부활의 기쁨, 부활의 삶, 부활의 증인, 부활의 소망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지금도 이단(異端)들은 구약 성경의 절기 지키기를 가지고 정통교회를 공격하고, 성경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4-12
  • [기자수첩] ‘부활’의 거룩한 가치를 훼손한 ‘꾼’들의 저급한 정치질
    140년 역사에서 처음 시도된 '부활절 퍼레이드'가 막을 내렸다. 화려한 볼거리와 놀거리, 그리고 성경 속 아이템을 활용한 부활절 홍보 등 다양한 준비가 돋보인 이번 퍼레이드는 답보상태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이벤트로서의 분명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나름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생각보다 저조한 인파와 맥락없는 퍼레이드, 애매하기만 행사장 구성은 보는 시각에 따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특히 행사의 핵심인 부활절 퍼레이드는 마땅한 기준 없이 그저 흥미위주의 나열식 볼거리에 집중한 듯한 느낌이 강했다. 차라리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스토리 위주의 퍼레이드를 구상했다면, 부활의 의미도 살리고, 시민들의 관심도 높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폐해는 부활절에도 계속되는 내부의 총질이었다. 일부 기독교 정치꾼들이 특정 정치이념에 사로잡혀, 건전한 부활절 행사를 '종전협정 퍼레이드'라는 근거 없는 거짓으로 포장해, 140년만의 부활절 축제에 시작 전부터 찬물을 끼얹었다. 아무리 정치이념에 눈 먼 이들의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부활’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를 아는 정상적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시도조차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그리스도 부활의 거룩한 축제마저 저급한 정치질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기독교인의 이름부터 내던졌어야 했다. 더구나 이번 퍼레이드는 일체의 인원 동원 없이 일반인 관람객이 주를 이뤘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는 비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외국인도 상당했다. 스스로의 애국에 함몰된 '꾼'들은 적어도 그들에게 세계교회의 선두라고 자부하는 한국교회의 추한 이면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한국교회의 첫 번째 부활절퍼레이드가 불교의 청계천 연등축제처럼 정례화 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맺을지, 내년에도 우리가 퍼레이드를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결정이 적어도 내부의 총질로 좌우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4-10
  • [기자수첩] 한교총, 국가 미래를 위한 공존과 상생을 말하다
    대립과 갈등, 분열과 정쟁으로 치달은 우리 사회의 총제적 위기에 한국교회가 부활의 노래로 화해와 상생의 매개가 될 것을 선언했다. 코로나를 지나며 더욱 심해진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국민들을 위해 시대의 중재자로서 이제라도 제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은 부활절을 앞두고, 최근 발표한 목회서신을 통해 시대의 위기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국민적 결단, 그리고 교회의 책임을 언급했다. 특히 더욱 거세지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대립을 염려하며,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이제는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현실적이고도 대승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극단적 대립 속에 상실된 우리 사회의 이성과 상식에 대한 전위적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맹목적인 진영 논리와 무분별한 정치적 해석에 기반한 비난과 비판은 결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 고민이 될 수 없음을 확실히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목회서신에서 한교총은 부활절 퍼레이드, 이단사이비 문제 등의 교회의 이슈 외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튀르키예 및 시리아 지진 피해, 국내 대형 재난 등 다양한 국내외 주요 사건들을 언급했다. 특히 최근 가장 큰 국민적 논란으로 떠오른 한일관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과거를 잊어서도 안되지만, 결코 과거가 미래의 방해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매우 현실적 조언으로, 평화를 통한 상생과 협력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본 자세임을 확실히 했다. 사실상 한일관계에 대한 양 진영의 찬반 의견을 모두 수용한 본 서신에서 한교총은 '일제'와 '일본' 두 단어의 사용을 철저히 구분했다. '일제'는 과거침략과 억압에 단호히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으로, '일본'은 대한민국과 동북아의 미래를 위한 공존의 상대임을 명시한 것이다. 한교총은 먼저 "일제의 강제징용 문제는 대한민국과 미래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이를위해 우리 정부가 일본과 대화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 평가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과거 일제의 폭압과 수탈로 상처받은 국민감정을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다는 점에 다소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동북아의 지정학적 파고를 맞닥뜨려야 하는 우리 대한민국은 중심을 잡고 주변국을 상대해야 한다. 과거 침략자였던 주변국이지만 대화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며 미래지향적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에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정신으로 더욱 견고해야져야 한다"며 "분노와 복수만으로 주변국을 이겨낼 수 없고, 대화를 통해 평화를 이루고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현실적 조언을 잊지 않았다. 특히 일본과의 공존과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과거를 덮거나,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최근 국민적 충격을 줬던, '3.1절 일장기' 사건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번 목회서신은 근래 보기드문 매우 중립적인 메시지라는 점이 눈에 띈다. 사회는 물론 교회내부도 극단적 정치 대립에 신음하는 상황에, 상당히 이성적이고도 현실적인 분석이 주를 이뤘다는 평가다. 이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으로서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할 뿐 특정 진영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반영된 노력으로 최근 정치 대립의 일선에서 선 교회들에 국민들의 지탄이 쏟아지는 상황에 이미지 변화를 위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교총이 목회서신을 통해 말한 한국교회의 스탠스와 사회를 위한 조언은 분명했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공존과 상생을 통해 밝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긍정의 메시지다. 좌우로 나뉘어 서로를 노려보는 지금의 이념 구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미래는 없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는 서로가 함께 바라보는 바로 그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 시대를 위한 역사적 변화에 한국교회가 앞장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교총 목회서신 전문: http://www.ecumenicalpress.co.kr/news/view.php?no=55113>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3-28
  • [사설] 이 시대 우리의 희망이 오로지 한국교회에 있다
    한국교회는 장로교 중심의 교회이다. 세계 개신교 가운데 장로교는 생각보다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교파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장로교가 약 76%를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너도 나도 교단을 만들어 교단이 300여 개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런 교단 분열을 막을 방법도 없고, 통제할 기구도 없다. 그동안에는 연합과 일치라는 에큐메니칼운동이 중심을 잡고 있어서 그런대로 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일탈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에큐메니칼 연합도 산산이 쪼개져 그 기능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니 여차하면 교회당을 가지고 교단을 탈퇴해 독립해 나가는 목회자가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또 교회 안의 청년세대를 대표해 오던 신실한 지성인들이 목회자들에 대한 불신으로 교회를 떠나 노미날리티가 되어가고 있다. 노미날리티는 주일예배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를 말한다. 그리하여 매년 줄어드는 교인수가 교단마다 몇 만명씩 보고된다. 그래서 1천만 기독교인은 고사하고, 주일날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은 400만에도 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통계도 나온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을 파괴한 장본인이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에큐메니칼 교단이라는 예장 통합측이다. 통합측은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마땅히 그 중심을 잡아야 할 지도적 위치에 있다. 그런데 통합측이 '보수'에 줄 서 있는 처지가 되고, 교권에 눈 먼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교계 연합단체들을 조각내 군웅할거 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통합측 목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을 개선해 보려는 의지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 안에 통합측의 리더쉽이 매우 약화되었다. 대관절 한국교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순절 기간 내내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그럼에도 뽀족한 방법이보이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강력히 나타나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 시대 민족의 소망이, 이 나라의 희망이 오로지 한국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희망에 부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3-03-27
  • [사설] 한국교회 전도만이 살길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 9월 장로교 107회 총회에서 명확히 드러난 문제는 한국교회 성도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감소한 성도수는 예장통합이 34,000여 명, 합동이 90,000여 명, 고신이 13,000여 명을 비롯, 주요 장로교단에서만 최소 20여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외 군소 교단을 전부 조사한다면 그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 간 한국교회에 정말 큰 사단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 전국 6만 교회에 안수 받은 전임 목회자만 20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생활비만 해도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데, 교세가 급감하니 자연히 헌금도 줄어들 것 아닌가. 그러면 목회자를 모실 수 없는 교회가 늘어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목회자들은 세속 직업을 찾아 교회를 떠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아직도 우리의 복음을?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3천만이 넘게 남아 있다. 이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전도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던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전도에 목숨을 걸었는데, 대한민국처럼 전도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교인이 줄어들고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뭔가 우리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보편적 교회에서 이단시 되는 '사이비' 집단이나 신흥종교가 오히려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고, 막상 '진짜 복음'을 가졌다는 기성교회는 잠잠하고 있다. 마치 물고기가 스스로 물 따라 떠밀려 와 그물 안에 들어온 것만 잡는 정치망 어업처럼, 교회당 지어 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당 밖에 사람들이 모두 우리교회 예비 신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나설 일은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교인들과 교회를 떠나 행불자가 된 옛 교인들을 찾아 심방하는 일과 주일학교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도하는 일에 모든 힘을 경주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지역의 교회들이 초교파적으로 힘을 모아 전도에 나서는 것도 좋다. 개교회는 총동원 전도에 목표를 정하고 모든 교인의 체계적인 전도훈련이 필요하다. 그 길만이 한국교회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그 사명은 전도에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3-03-27
  • [연지골] 라틴 교부 터툴리아누스
    ◇주후 3세기 라틴(서방) 교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가 터툴리아누스이다. 본명이 '퀸터스 셉티머스 플로렌스 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nus Florens Tertullianus)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는 150년 경에 북아프리카 카테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총독부의 백부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당시에 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을 다 받았다. 그리고 로마에서 정치학, 법률학, 웅변술 등을 공부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믿게 된 것은 주후 190년 경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유대인 및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는 일과 엄격한 도덕생활에 전념했다. ◇교회의 '장로'였던 터툴리아누스는 라틴 신학과 교회 어학의 원조이다. 그리스도교에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고, 로마 교회의 감독 제도를 정착 시킨 씨프리아누스의 선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3세기 초부터 당시 이단시 되던 몬타누스 파의 주장을 변증하는 일에 나섰다.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주의자로 규정된 몬타누스 파는 대체로 정통 교리를 신봉했지만, 교리와 생활에 너무 엄격하여 광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이단과 이교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우던 그가 이제는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이 비도덕적이며, 그리스도교 생활에 형식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도교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가 남긴 주요 저서로는, 변증서에 유대인들과 이단에 대한 '변증학'(Apologeticus), '영혼의 증언에 관하여'(On the Testimony of the Soul)가 있고, 논쟁서에 영지주의자들을 논박하는 '이단 대처법'(On the Prescription of Heretics), '세례에 관하여'(On Baptism), '영혼에 관하여'(On the Soul), '그리스도의 육체에 관하여'(On the Flesh of Christ), '육체의 부활에 관하여'(On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와 '기도에 관하여', '참회에 관하여', '인내에 관하여'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박해 때 도피하는 행위와 재혼을 비판하고, '육에 속한 자들'과 '신령한 자들'이라는 글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두 그리스도인이 한 소망, 한 언약, 한 예배로서 결합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들은 형제자매이며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이고, 한 정신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금식하고, 피차에 훈계하며 권고하고 또한 의지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에도 함께 가고 성찬에도 함께 참례한다. 부부는 고난과 핍박을 피차에 함께 나누며… 이들은 함께 병자를 심방하고 불쌍한 이웃 돕기를 즐겨하며, 구속 받음이 없이 자유로 구제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기꺼이 하나님의 제단에 예물을 바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이들의 찬양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 연지골
    • 연지골
    2023-03-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한국교회,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최근에 한국교회 교계 연합 단체가 목회에 관한 데이터연구소를 통하여 한국교회 2,000명 성도들에게 ‘주일 예배 형태’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내용을 밝혔다. 이 자료에 의하면 코비드19가 번지기 시작하던 2020년 4월에는 교회에 출석하여 현장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의 비율이 13.6%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2023년 1월에는 67.5%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반면에 온라인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2020년 4월 52.2%에서 2023년 1월에는 16.0%로 대폭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온라인이나 가정 예배, 기독교계 방송 듣기, 다른 교회 예배 참석 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회 예배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비율도 21.6%나 된다. 그리고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도 5.8%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 현장 예배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교회로 인도할 대책을 조속히 강구(講究)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응답한 것이 2012년에는 22.5%였다면, 2017년에는 20.3%였고, 올해 조사에서는 15%에 그쳤다고 한다. 즉 기독교인의 숫자도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코비드19는 이래저래 한국교회에 위기를 몰고 온 것이다. 현장 예배의 완전한 회복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성도들이 교회를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유명한(?) 일부 교회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그렇지 못한 교회는 성도들이 줄어들어, 일종의 모이는 교회와 모이지 않는 교회 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양적인 성장에 목표를 두었다면 이제는 질적 성장을 위한 일에 몰두해야 한다. 과거 한국교회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할 때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불과 2%도 안 되었지만, 엄청난 일을 감당한 적이 있다. 사회적 선한 영향력은 숫자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고, 구원받은 참 성도는 적은 숫자로도 얼마든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코비드19 상황에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어쩌면 교회의 허수(虛數)는 아니었을까? 성도들이 구원받는데 필수적인 것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와 예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시적인 팬데믹 상황이라고 교회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믿음의 분량(分量)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질적으로 더욱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지도자가 될 신학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현재 각 신학교에서는 미달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각 교단들은 같은 교단 안에도 여러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이를 발전적 통•폐합을 통하여 실제적이며 건강한 영적 역량을 기르게 하여 제대로 훈련된 목회자를 배출하는데 힘써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비드19를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문제에서조차 사사기 시대와 같이,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대처하고 대면 예배를 비난하는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일삼는 일들이 있어,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또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가볍게 보도록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앞으로 유사한 일들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때를 위해서 신학교육을 철저하게 하고 정예화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 세 번째는 미자립 및 예배처로 존립하기 어려운 곳들을 조사하여, 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각 교단들은 어려움을 당한 교회의 영적 자원을 최대한 흡수하여 각 교회에 분산하여 사역을 감당하게 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에 상당한 위기가 닥쳐왔는데, 이를 간파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고,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선한 영향력이 줄어들도록 궤계(詭計)를 부릴 것이다. 이번에 한국교회 ‘주일 예배 상황’에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일반인들이 댓글을 단 것을 보면, ‘요즘 보기 드문 반가운 소식이라’는 사람도 있고, ‘(교회)코로나 진원지 역할을 했다’고 왜곡하고, ‘꼭 교회를 나가야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교회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더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위기를 보는 시각과 그 대처함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본질적인 것(예배를 회복하고 참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에 일치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또 비본질적인 것(기득권, 명예, 분파적 행동)에는 포기하는 자유함을 얻고,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는(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일에 하나가 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3-22
  • [기자수첩] 엔데믹 시대 속 ‘원 리더십’의 붕괴, 한국교회의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한때 9부 능선을 넘기도 했던 보수 연합기관 통합 작업이 올 들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한국교회의 오랜 숙원이었던 ‘대통합’을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놓치는 상황을 자초한 것인데, 기대가 워낙 컸던 만큼 아쉬움이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무너진 대통합’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그 결과에 대한 누군가의 잘잘못이나 책임을 분명히 따져야겠지만, 그 전에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년 여 한국교회가 통합을 그토록 외쳤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원 리더십’의 재건에 있었다.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 이어지는 보수 연합기관의 3단 분열 이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원 리더십’이 붕괴됐고,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권위는 삽시간에 무너졌었다. 무너진 권위와 사라진 신뢰, 여기에 추가된 목회자들의 도덕적 추락 앞에 한국교회가 쌓아왔던 100년의 공든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나마 분열의 화를 피했던 NCCK 등의 진보세력은 건재했지만, 동성애·포괄적차별금지법 등 기독교 본래적 가치마저 이념의 구호로 가리는 반기독교적 행태를 반복하며,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교회 회복의 관건은 보수 연합운동의 재건에 있었고, 그 핵심 작업이 바로 ‘연합기관 대통합’이었던 것이다. 애초 ‘원 리더십’의 붕괴에서 출발했던 한국교회의 위기는 그 유일한 해법으로 꼽힌 ‘연합기관 대통합’이 사실상 좌절되며, 위기 그 자체의 원점으로 돌아왔다. 허나 분명히 깨달아야하는 것은 지금의 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또 위험하다는데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의 고착화다. 워낙 목표에 근접하며, 교계 대내외적인 기대를 모았던 만큼, 실패에 따른 후유증 역시 그에 비례하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과도한 실망은 앞으로도 통합은 절대 불가하다는 좌절로 이어지며, 사실상 통합을 단념케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통합 과정에서 드러난 당사자들의 행태는 한국교회 구성원들의 실망을 배가시키고 있다. 연합기관 대통합이라는 궁극의 염원을 무시한 채, 온갖 이권과 정치적 계산으로 9부능선 앞에 선 통합을 주저앉힌 그들의 행태는 사실상 “교권이 통합을 원치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을 확인시켰다. 한국교회 내부에서 교권에 대한 신뢰가 다시 한 번 무너졌다면, 외부적으로는 ‘원 리더십’이라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더욱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에는 그나마 주요교단들이 참여하는 ‘한교총’이 부족하나마 대사회적 대표 역할을 감당해 왔지만, 올 들어 한기총이 정상화를 이뤄내며, 규모에서 얻어냈던 그 대표성마저 분산되고 있다. 규모에서는 한교총이 압도적일지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한기총의 ‘네임밸류’가 정상화의 기류에 맞춰 최근 급부상하며, 다시 한교총과의 교계 대표 자리를 두고 무한 대립마저 예고하게 된 것이다. 냉정히 이는 오히려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가장 위기에 처해있던 2년 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그때는 한교총 대표회장이었던 소강석 목사가 분명한 리더십을 갖고, 정부 및 대국민과의 소통을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정부를 상대하는 소 목사의 방식에 대한 반대 여론도 일부 있었지만, 그 반대조차 소 목사를 한국교회 대표로 인정했기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한국교회의 리더십은 하나로 모여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부분은 연합기관에 대한 무관심이다. 엔데믹 시대로 접어들며, 한국교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어느새 국민들은 한국교회의 대표가 누구인지?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곧 대사회적 영향력의 감소로 이어지며, 한국교회의 사회적 존재감이 추락된 상태로 고착하게 만들었다. 한국교회가 가장 우려했던 그 것, 바로 기독교 울타리 안에 갇힌 ‘교회’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대통합 프로젝트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원탁 테이블’ ‘공동성명서’ 등 지난 2년 전 분열 이후 처음으로 이뤄낸 의미있는 성과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 등 사회적 악법의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 3개 기관이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공동 성명’조차 내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위기를 느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아직 대통합의 꿈은 끝나지 않았기에 누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3-20
  • [사설] 한국교회가 경계할 것들
    한국기독교는 이제 그 역사가 140여 년에 이른다. 이 기간 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주류종교로 자리잡았다. 6만여 개의 교회와 1천만 신도가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사회에 기독교만한 역동적 종교집단은 아직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 신행(信行)에 있어서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신행 즉 믿음(信)과 행함(行)이 일치할 때 비로소 바른 신앙(正信)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신앙은 사이비 신앙(似而非 信仰)이 되는 것이다. '사이비'란 겉모양은 비슷하나 그 본질은 전혀 다른 가짜를 이르는 말이다. 이단(異端)은 교주우상주의나 정통교리에서 이탈한 현상임으로 쉽게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사이비는 그 분별이 쉽지 않다. 사이비 신앙에는 기복주의나 맹신주의 또는 신비주의 등도 있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사이비는 교회의 사유화, 교회의 상업화, 교회의 정치화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이 교회의 사유화, 교회의 상업화, 교회의 정치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이 교회의 타락이다. 300여 개로 갈라진 교단의 분열을 틈타 교회간판을 달고, 교세를 확장하고, 교인들의 헌금으로 부동산을 늘려 그것을 사고 파는 목회자들, 교회를 마치 세속적 상업주의 집단처럼 운영하는 대형교회들, 또 애국을 빙자해 교인들을 선동하고 헌금을 제 멋대로 사용하는 교회지도자들이 그런 부류이다. 이런 교회지도자들은 신앙이 아니라 돈 몇 푼씩 들고 다니며 그것을 흔들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한다. 지금 한국교회에 에큐메니칼운동이 실종되고, 연합과 일치가 파괴된 배경에도 이런 자들의 행태가 있다. 한국기독교는 지금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인들이 피땀 들여 지은 많은 교회당이 이단집단으로 넘어가고 있고, 일부 세속적 욕심을 앞세우는 목사들에 의해 사유화 되어 가고 있다. 소위 정통교단에 속한 교회들도 여차하면 교단을 탈퇴하고 무소속으로 도망간다. 그리고는 기회를 보다가 교회당을 팔고 목사가 그 돈을 챙겨 깔고 앉는 것이다. 거기에 실망한 교인들은 욕하며 교회를 떠나간다. 그들은 교회당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떠나고 마는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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