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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무속 세계에 얽힌 사연들'
    20년 전(2002년)에 어느 방송사가 방영했던 TV극 <장희빈>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 한창 재(再)방영하고 있어서 자연히 그 내용에 끌려 시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회(79~80회)에서는 좀 특이한 장면이 나와서 그것에 끌려 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보았던 기억이다. 희빈 장씨가 막례란 무녀를 끌어들여 중전을 음해하는 공작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취선당에 차려놓은 신당에 미리 마련된 중전(왕후 민씨)의 얼굴을 표적삼아 화살을 겨냥해 과녁(눈알)을 명중시키는 짓거리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무당 막례가 몇 차례 화살을 당기다가, 직접 쏘아보라고 희빈 장씨에게 활을 넘겨주니까 거침없이 화살을 당기고 있다. 중전 민씨가 큰 타격을 받아 빨리 죽도록 만들어 보려는 무당 막례의 계획된 만행에 서슴없이 가담하는 희빈 장씨의 잔인한 모습이다. 장희빈은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죽게 되면 그 자리에 다시 자기가 오를 것을 걸기대(乞期待)하며 그런 저주의식을 주저 없이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민씨 사후(死後)에 최숙빈의 발고(發告)로써 밝혀짐으로 인해 그녀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술(巫術)과 부패 권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로 손을 잡은 사례를 볼 수 있다. 김동리 작가의 장편소설 <을화>(1978)에는 주인공인 어미 을화와 아들 영술 사이의 기막힌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어미 을화(乙火)는 무당 신분이고 그녀의 아들 영술이는 예수교 신자이다. 영술이가 마을 교회엘 들렀다가 우연히 그의 생부를 만나게 된 뒤로, 그가 아비 집에 찾아가거나 머무는 일이 잦아진 것을 극력 반대하는 어미 을화와 아들 영술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게 된다. 어미와의 대립 끝에 영술이 나흘간이나 귀가하지 않는 동안, 을화는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며 식음을 전폐한 채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영술이, 지난 제 감정적 처사를 반성하며 귀가한 다음날 새벽, 을화는 아들의 성경책을 몰래 빼내 불에 태우며 굿을 벌이고 있었고, 이 현장을 목격한 영술이 그 불을 끄려고 근처의 물그릇을 집어든 순간, 을화의 식칼이 아들의 왼쪽 가슴을 찔러버린 것이다. 칼을 맞은 영술은 다음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무당에게는 모자지간의 관계조차 제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무슨 불가침의 영역이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녀의 양심(또는 사랑)이란 것이 그녀 특유의 ‘엑스터시(황홀경)의 유지’만큼도 그 자신에게 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기원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조선백자 마리아상>(1979)에는 사기장이[陶工] 김신봉이란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상당히 늦게 예수교도(속칭 천주학쟁이)가 된 편이기는 하지만 신앙만은 아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는 청년 신도이다. 그런데 그의 사기장촌에도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불어닥쳤고, 그도 동료 도공들이 먼저 잡혀간 광주목의 관아로 자수 형식으로 걸어들어갔다. 이가환 광주 목사(부윤)의 온갖 회유와 협박, 아니 견디기 힘든 장타(곤장 타격) 등의 악형에도 굴하지 않던 신봉이가 그만 마지막 한 순간에 힘없이 무너지면서 “소인은 하느님을 모릅니다.”라고 배교를 선언해버리고 만다. 이는 무당인 장모의 딸, 곧 ‘신봉의 아내’가 벌인 고도의 심리전술에 그가 휘말린 때문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배교자로 만들고서 자기들의 무속 세계로 그를 끌어들여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그녀가 남편이 취조 받는 옥으로 갓난아기까지 안고 들어와서는 남편 대신 자기가 처벌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게 무당인 그의 장모의 머리에서 미리 짜낸 작전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장판(杖板) 위의 아내가 곤장을 맞는 소리, 거기에 놀란 아이의 자지러진 울음소리…. 게다가 매질에 축 늘어져 있던 아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하느님 같은 건 모른다고 제발 어서 말씀드리세요.”라고 애걸하는 속에서, 결국 신봉이는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무속세계의 끈질긴 대결의식과 그 만만찮은 파괴력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껏 우리는 한 사극과 두 소설 작품들 속에 나타난 무속 세계의 권력지향 성향과 대(對)기독교 파괴력의 실상 등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런 것이 사극이나 문학작품 속에 보이는, 그 수준에 그치는 실상일 뿐이냐는 것이다. 이런 무당 이야기들은 결코 작품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실제론 우리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것이다. 전(前) 박 정부 시절, 최 모(某)란 무녀가 국정 책임자를 맘대로 좌지우지하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그 책임자도 몰락하게 한 사례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7-25
  • [사설] 목회적 봉사를 넓게 보는 페러다임의 전환 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든 그 시대의 사회적 가치관은 주류종교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산주의 이념이 곧 그 사회의 종교적 가치관을 대체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주류종교가 여럿으로 사회적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므로 다종교사회라 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론에 따른 헌법질서가 작동하고 있어 사회가 잘 조화되고 있다. 지난 1일에도 전국적으로 지자체 선거가 실시되어 질서있게 새로운 지도자들을 선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자 선출에 교회를 비롯한 사회적 가치관을 제공해야 할 종교집단의 영향력은 매우 미흡했다. 이런 현상을 흔히 우리사회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다. 세속정치도 당연히 우리사회의 주류적 종교에서 그 가치관이 제공되어야 한다. 현대 우리사회 구성원의 약 절반에 이르는 인구가 종교를 믿고 있고, 그 가운데 신구교 기독교 인구는 전체 국민의 약 35%나 된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전국에 6만여 개의 교회당이 있고, 매 주일 그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신도 수는 줄잡아 약 6백여 만명이나 된다. 거기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인간이 살아가야 할 건강한 삶의 기본 도덕과 규범이 설파되고, 현대인의 윤리적 삶의 질서를 배운다. 그것이 곧 사회적 가치관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과연 그 기능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솔직히 지금 한국교회의 신앙은 '영육의 하나의 온전한 삶'이 아니라, 영과 육의 삶을 따로 보는 '일종의 이원론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거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60여 개의 인가받은 목회자 양성대학이 있고, 거기에 또 각급 교단이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설립 운영하는 소위 무인가 신학교가 전국에 1백여 개 이상이 있다. 이들 신학대학이나 신학교들은 하나같이 교회를 봉사하는 '목양(牧羊) 목회자' 양육에만 심혈을 기울이지, 사회를 봉사하는 '목민(牧民) 목회자' 양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에는 '목양 목회자' 못지 않게 '목민 목회자'도 절실히 요구된다. 목민 목회자는 직장선교회를 비롯해 시장, 기업, 지자체 등 사회 전반에서 목회적 봉사를 감당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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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6-28
  • [사설] 6·25 상기 72주년, 교회의 언어로 평화를 요구하라
    유물 사관을 토대로 하는 공산주의는 기독교 사상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같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동방정교회가 대변하던 러시아와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동구라파, 그리고 아직도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 등에서 그래도 교회가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 교회가 과연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공산주의 또는 공산당과 기독교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통해 몸으로 체험한 바 있다. 올해가 6.25 72주년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전쟁 중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오로지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생명을 잃었다. 그때 정치적인 죽음은 두고라도, 순교자만 수 백명이 넘는다. 어찌 그 비참함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세월이 많이 가고 나니 한국교회 안에서도 북한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이 많이 희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북한을 다른 시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6.25를 일으키고 같은 민족 앞에 직접 총부리를 겨눈 자들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남북이 공히 전후 세대가 역사를 이끄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가는 그들과도 만나는 날이 오겠지만, 북한 공산당은 핵으로 무장하고 아직도 남한에 대해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이런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교회의 언어로 평화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 소리가 비록 미미할지라도 하나님이 듣고 일어서시면, 땅이 진동하며 열국이 전율하고 영원한 산이 무너지는 날이 오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합 3:6).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 약속과 이 소망을 붙잡고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민족에 수난을 가져온 북의 공산집단에 대한 경계의 끈은 결코 늦추지 말아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2-06-28
  • [연지골] 성도의 교제
    ◇역사적 기독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통적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가 사도신경이다. "I Credo,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박해 시대부터 단편적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6세기 경, 보편적 기독교를 지칭하는 가톨릭의 정통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역사적 기독교가 채택한 수많은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많은 성도들이 사용해온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사도신경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이어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탄생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예수의 그리스도 주' 되심을 고백하며, 성령의 사역과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한다. 그리고 죄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것이 사도신경의 내용이다. 이 가운데 특이한 것은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맺은 모든 인간 관계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곧 여기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이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 간의 교제는 육적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예루살렘'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6장 '성도의 교통'은 "모든 성도들은 성령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 그의 은혜와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영광 안에서 그와 교제를 갖게 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서로 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 연합에서 떨어져 있다면,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미날리티(Nominality)이다. 자신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갖고, 기독교인으로서의 모범된 삶을 산다고 자부할지라도, 교회공동체의 연합 안에서 교제가 끊어졌다면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금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공동체에서 '가나안'(안나가) 교인으로 전락한 노미날리티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주일예배는 온라인으로 드리고, 매일 성경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십일조와 헌금은 모아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고, 또 주일예배는 온라인으로 드린다 할지라도, 거기에 성도의 교제가 빠졌다면 그 예배는 온전한 예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의 날은 성도들의 사귐을 위한 특별한 교제의 날이다. 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주일예배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제는 단순한 '친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성도(聖徒)의 사귐'(Holy Communion)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공동체 내에서 성도 간의 분쟁이나, 또는 목회자와 교인 간의 갈등은 옳지 않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고백은 우리의 찬송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그가 어떤 교파, 어떤 개교회에 속했던 간에 모두가 '하나'이고, 또 '하나'가 되어 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에서도 성도의 교제를 중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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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사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3월 16일)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 키릴 총대주교 간에 줌(Zoom)으로 대화를 나눈 얘기가 한달 반이 지난 이달 초에 공개됐다. 교황은 총대주교에게 “우리는 평화의 대로를 추구해야 하고, 무기 사용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퓨틴의 잘못된 행동을 쫓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총대주교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위협당하고, 서방이 소련 해체 이후에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긴 것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퓨틴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은 “우리는 국가가 임명한 성직자가 아니고, 예수의 언어가 아닌 정치의 말을 사용하면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처럼, 같은 기독교신앙을 믿는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시민들과 어린이들까지 죽이는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70년 전 6·2 5 전쟁을 겪은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남의 일 갖지 않은 감정으로 새록새록 솟아난다. 기독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며 네 오른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네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전쟁을 무조건 반대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평화의 종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기독교 역시 '정당한 전쟁'은 인정한다. 정당한 전쟁이란, 전통적으로 공격이 아니라 방어하는 전쟁,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가 그 피해를 보상 받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이르는 말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공적인 인물이 수행하는 전쟁’, 독재자나 해적 등으로부터 ‘참된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세우기 위한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규정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를 ‘ 합법적 전쟁’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말한다. 남의 국토와 재산을 빼앗기 위한 침략전쟁은 반대해야 하지만, 폭력과 불의로부터 양심의 자유, 국가의 평안, 재산과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의 불가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어떤 명분으로도 인정받기 어려운 ‘불의한 전쟁’ 이다. 그래서 세계가 비난하는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2-06-14
  • [사설] 한국교회, 공부하는 목회자 시대를 열자
    세계 교회 가운데 한국교회 만큼 바쁜 목회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교회는 매일의 새벽기도회부터 수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주일날 두세 차례 거듭되는 주일예배에 이르기까지 한 주간 내내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거기에 심방이나 결혼주례 또 장례나 중직자들의 회갑연, 또는 시찰회나 노회 등 교회 안팎에 목회자의 참여가 필요한 온갖 모임이 있다. 그러다보니 마음 잡고 앉아 책 한 권 읽을 여유를 갖기 어려워 가장 중요한 설교 준비도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다. 설교가 재탕 삼탕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매 주 같은 시간이 되풀이 된다. 교계에는 많은 수의 출판사들이 있다. 이들 대다수의 출판사들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책을 발간한다. 그러나 15만 여명에 이르는 목회자를 가진 한국교계에서 출판사들은 기껏 초판 1000여 권을 발행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 1000권조차 소비가 되지 않아 창고에 쌓이고 재판을 하는 신간은 그리 흔치 않다. 물론 관심을 끌만한 수준을 갖춘 책을 찾지 못하는 출판사의 영세성에도 문제가 있지만, 목회자들이 자기네의 전공서적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목회자는 대학교수 집단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학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고, 3년의 신대원 및 대학원 과정을 거친다. 그러면 대학과정만 최소 8-10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다른 학문의 세계라면 이 정도 학력을 쌓으면 누구나 전문가 대접을 받게 된다. 물론 목회자 역시 전문가 중에 전문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다른 학문 세계 사람들은 전공학문의 새로운 지식을 계속 업그레이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세계에서 남에게 뒤쳐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책 읽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목회자들이 모이면 그 화두로 이번에 어떤 책을 읽었는가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을 보기 어렵다. 기껏 책에서가 아니라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정보로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은 너무 가벼운 처사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 책에서 설교가 나오게 해야 한다. 매일 성경을 읽는 것처럼, 먼저는 목회의 전공분야를 읽고, 역사나 문학 그리고 철학이나 과학적 관심 분야를 읽어야 한다. 현대교회의 설교자는 그래야 한다. 선생(先生)은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먼저 공부한 사람이다. 즉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책을 읽지 않고는 리더가 될 수 없다. “모든 책은 살아서 오늘 내게 얘기하고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2-06-14
  • [연지골] 직업윤리와 양심의 문제
    ◇ 법무부장관 한동훈은 후보자 시절, 민주당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던 일명 '검수완박' 법안에 대해 이대로 통과되면 결국 국민만 손해를 보게 된다고 지적했다가 당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을 함부로 팔지 말라'는 항의를 받았다. 이에 한동훈은 그 법을 집행할 법무부장관 후보자로서 침묵하는 것은 '직업윤리와 양심의 문제'라고 되받았다. 이 말은 정치인이나 공무원 뿐 아니라, 목회자에게는 더욱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성경은 한 사회의 지도자가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벙어리 개'와 같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고 규탄한다(사 56:10,11). ◇ 직업윤리와 양심의 문제, 이 세상에서 '목회자'라는 직업은 정치인처럼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처럼 인기를 누리거나 돈벌이가 되는 직업도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봉사직일 뿐이다. 이 봉사직은 더우기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거나 또는 경제적 이득을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사명감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직업의 종사자들보다 더 직업윤리 의식이 강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직은 매우 힘들고 따분한 직업이 된다.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과 다른 점은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자부심이 함께 있는 것이다. ◇ 양심의 문제 역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에 있어 가장 우선하는 것이다. 장로회 정치 원리 제1조는 "양심을 주재하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이 각인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어... 그 양심대로 할 권리가 있으니 아무도 남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는 목회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세상 권력이나, 교권이나 혹은 상사나 선배의 눈치를 살피느라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바른 목회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직업윤리와 양심의 문제는 그가 그 직업에 충실한 바른 직업인인가, 아니면 사이비 직업인인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양심은 천부적인 것이고, 또 양심을 주재하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이 양심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이의 양심은 수정같이 맑고 깨끗하여 작은 먼지에도 반응하지만, 어떤 이의 양심은 발바닥같이 둔하여 왠 만한 모래알에도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벙어리 개'란 말은 도둑이 담을 넘는 것을 보고도 짖지 않는 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개는 집에서 애지중지 키울 이유가 없다. (요즘 애완견의 경우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사회가 건강하려면 한동훈과 같이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직업윤리와 양심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직업군에서 많이 일어나야 한다. 목회자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란 말을 듣지 않으려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목회자들이 이 말을 중요한 화두로 삼는다면 우리 교회와 사회가 매우 건강해 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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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어른의 고집이 아이들의 교육을 망친다’
    6월 1일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에서는 광역 단체장, 국회의원 보궐, 기초단체장, 지역 광역의원, 비례대표 광역의원, 지역구 기초의원, 비례대표 기초의원, 그리고 광역 교육감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현 여당인 국민의 힘이 상당수의 자리를 탈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는 광역시·도 교육감 선거라고 본다. 교육감은 매년 100조원에 가까운 예산을 사용하면서, 대한민국의 교육과 학생들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자리이다. 그 동안 우리 교육 현장은 대부분 진보 계통의 교육감들이 교육을 좌지우지해 왔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교육감 가운데 14명이 진보였다(전교조 출신이 10명, 민교협 출신이 4명) 그 동안 진보 교육감들이 벌여온 교육 행정은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 무상급식 등 진보 정치의 실험 무대처럼 여겨졌다. 진보 교육감들은 학생들에게 시험에서 해방, 인권 강화 등을 시키는데 주력했는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도 학력 저하, 사교육비 급등 등의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진보 교육감들이 지난 10여년 간 주력하여 만든 혁신학교는 전체에서 22.6%나 차지하는 2,696개교나 된다. 고등학교 혁신학교의 경우 전국 평균보다 3배 가까이 기초학력이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아 실력이 뒤떨어지는 학생들이 서야할 곳은 어디이겠는가? 학생들을 과도하게 공부하는데 몰아넣어서도 안 되지만, 당연히 갖춰야할 실력을 쌓을 기회조차 낭비한다면, 이것은 바른 교육이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이번 2022년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계속 혁신학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의 성적 하향화는 학생들의 개인 문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진보 교육감들은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학생들이 누리지 않아도 될 과도한 권리를 주어서, 피교육자 신분인 자신들을 망치고, 교권이 흔들리는 일들을 해 왔다. 그리고 잘못된 성 평등, 성 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의 인성을 망치게 하지 않았는가? 학교에서 젠더교육, 성적 자기 결정권, 콘돔사용, 피임법 등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거기에다 좌편향 인권교육, 이데올로기를 대입한 민주교육 등은 결국 진보 교육감들의 성향에 맞춰 학생들을 이념의 아바타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가? 교육감 선거에서는 매번 2,000억원 정도의 선거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 많은 선거비를 국민의 세금에서 지출하고, 각자 들어간 선거 비용을 뽑아내기 위하여 부정은 없을까? 일선 교육감들이 집행하는 돈은 엄청나다. 2022년 교육부 예산이 89조 원이다. 이 중 상당수가 각 교육청을 통하여 집행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은 14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서울시의 교육감 선거는 상당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위 말하는 진보 교육감을 교체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은 38.1%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보수 교육감 후보 3명이 받은 득표율은 53.2%이다. 보수 교육감 후보들이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하여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서울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면, 당연히 보수 교육감이 당선될뿐더러, 진보 교육이 망쳐놓은 공교육을 되돌릴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왕설래하던 후보 단일화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은 쪼개진 상태로 교육감 선거를 치르게 됨으로, 뻔히 알면서도 진보 교육감 후보에게 교육감 자리를 헌납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어른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계속 멍들게 될 것이다. 물론 단일화라는 형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들이 교육을 망치는 것을 보면서(보수 후보들도 이 문제를 다 지적함) 자기들의 정치적 야망과 권력의 욕심으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낸 것은 매우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우리 아이들 교육의 미래와 공교육 회복을 감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채우려다, 망쳐버린 결과는 교육의 미래를 위해 간절히 바라던 국민들의 바람도 헌신짝처럼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2022년 6·1지방선거의 최대 잘못은 서울시 교육감 보수 후보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일이며, 이것 때문에 또다시 교육 망가지기를 지켜보아야 하는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실망은 크다. 이제는 진보 교육감들의 교육 행태에 대한 국민들과 학부모들의 감시가 강화되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6-14
  • [토요시평] 대통령 취임식장의 인사(人事)법
    지난 5월 10일 국회의사당에서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이뤄지고(윤석열 대통령은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고, 문 대통령 시절에 승승장구하여 검찰총장까지 지냈지만, 문재인 정권하의 절대권력을 수사한 것 때문에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검찰총장직을 물러나고,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 만에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음) 역사적인 취임식까지 거행하게 된 것이다. 위대한 국민이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직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되게 한 촛불세력에 의하여 탄핵되어 4년 9개월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풀려나서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아직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과, 고 전두환 대통령 부인, 노태우 대통령 딸도 뒷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입장하기 전 다른 분들은 단상에 앉아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마지막으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나는 문 대통령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전직 대통령과 다른 전직 대통령 가족들과 손이라도 잡으면서 인사를 나눌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 내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서일까? 무안해서일까? 미처 보지 못해서일까? 사실 그런 인사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나누기 어려운 기회일 것으로 본다. 전직 대통령과 물러나는 대통령이 지난 시간들 속에서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여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했다면, 마음이야 어떻든지 간에 ‘미안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건강하십시요’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면 얼마나 국민들이 보기 좋았을까? 우리나라는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하여 열세 분의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그중에 한 분은 망명지에서 돌아가시고, 두 분은 짧은 임기를 마쳤고, 네 분은 감옥에 갔었고, 한 분은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아직도 한 분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다. 국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었고, 국민을 위한 가장 큰 봉사의 자리에 있었지만, 결말은 불행한 경우들이 많았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때는 미국의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 원로의 모습을 보일 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그것이 왜 안 될까? 우리나라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정당이 다르면 마치 원수 대하듯, 특히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분들이 정치적 견해의 다름으로,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 민망하다. 정치색이 다르다고, 후대의 잣대로 선대의 지도자를 평가하여 문제가 있다며 보복을 한다면, 이는 국민이 불행하고 국가의 품격이 떨어진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분들도 그 당시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또 나름대로 업적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적을 대하듯 하는 모습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그저 한 자리에 어렵게 모였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분이 거침없이 손을 내밀고 짧은 인사라도 나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면에 취임하는 대통령과 부인은 깎듯이 직전 대통령과 전임 대통령을 예우하는 것을 보았다. 온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넓은 마음으로 덥석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아량이 있다면, 대통령들이 국민통합이니, 협치니, 상호 갈등 해소니 하는 정치공학적이고 공허한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국민들 앞에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실제 모습은 아닌 것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지금까지 저래왔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걱정이 된다. 정치가들은 흔히 국제적으로 유명 정치인이 사망하면, 조문(弔問)을 가는데, 그곳에서도 각국의 정상 사이에 ‘조문 외교’가 벌어진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면 역시 그곳에서도 ‘막후 외교’가 벌어진다. 정치를 하는 분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고 본다. 그런 감각이 있다면,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경축의 자리에서 어찌 ‘경축식 인사’나 ‘취임식 인사’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성경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것, 화목하게 하는 것, 용서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한다. 대통령을 지낸 분들은 자신의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이며, 국민 대통합의 정신과 자세를 항상 잃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의 인사법, 아쉬움으로 남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5-21
  • [사설] 부차 민간인 학살 만행 유엔과 서방세계에 책임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결국 21세기에 상상할 수 없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세계는 러시아 군대의 부차 학살 현장을 보고 민간인 학살을 막지 못한 유엔의 존재 의미를 묻고 있다. 부차 뿐 아니라 다른 도시와 농촌에서도 민간인 학살과 여성에 대한 강간 살해가 계속 보고되고 있다. 아마도 이 추악한 전쟁이 끝나고 나면 1950년 한국의 6.25와 같이 우크라이나에서도 수만 수십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올 것으로 보여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인간은 그 속에 천사와 같은 착한 마음도 있고, 사탄과 같은 악마성도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세계관은 '인간이 중심'이라면서도 인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인간 속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만물보다 고귀한 영적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에 인권의 존엄성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구권에 자유주의의 바람이 일어나 많은 위성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할 때 더 이상 참혹한 전쟁은 없을 것이라 믿었는데,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대의 발톱을 드러내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전세계가 이처럼 비참한 인권유린을 목도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거대한 유엔은 이를 막을 아무런 조치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 말에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러시아의 퓨틴과 같은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르는 범죄자에게는 유엔의 경제적 제재만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전세계가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 러시아 자체를 조각 내 더 이상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무고히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는 결국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 유엔이 할 일이 아닌가. 지금의 유엔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없다면 이를 해체하고 그런 힘을 갖는 기구로 다시 조직될 필요가 있다. 러시아군의 부차 학살 만행을 막지 못한 책임이 유엔과 서방세계에 있다. 원칙론만 내세우지 말고, 세계가 일어나 지금 당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아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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