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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안전불감증이 가져온 대참사
    지난달 말 핼러윈데이에 이태원에서 벌어진 대참사는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그 좁은 골목에서 수백명이 떠밀려 압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사회가 아직도 안전불감증에 빠져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안전불감증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을 잃고 '안전, 안전'을 강조해 왔는가. 그런데도 아직 우리사회에?안전의식이 미약해 벌어진 일이다. 온 국민은 이번 이태원 사건에 있어서 특히 경찰의 조치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 10만 군중이 모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은 질서유지를 위해 이태원 파출소에 겨우 137명만 배치했다고 한다. 이 열 배 1370명을 배치해도 모자랄 판인데, 경찰은 처음부터 안전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에도 안전에 대한 메뉴얼이 있을 터이지만, 이 날 이태원에는 그 메뉴얼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오늘날 대한민국 정도 되면 국민의식에서 안전 제일주의가 우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국민의식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치안은 세계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는 아직도 안전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지니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민 안전교육이 절대로 필요하다. 사후약방문으로 사고가 난 후에 비로소 '재발방지'만 외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국민안전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밖에 없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공교육 기관에서의 교육뿐 아니라, 동네 노인정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 안전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번 이태원 사건에서 보여준 것은 오늘날 국가 공직자들의 국가관이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매우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국가 공직자들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세계 10대 경제력과 문화를 수출하는 대한민국의 공직자의 정신세계가 그 수준에 미달한다면 사회발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공직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그 직을 원할히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근본적이고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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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12-30
  • [사설] 건강한 한국교회를 지향하며
    본보는 이달로 1991년 11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에큐메니칼운동을 표방하고 창간된 지 31주년이 되었다. 창간 이후 약 29년 간은 거의 매주 발간 해 오던 것이 코로나 정국을 맞아 지난 2년 간은 한 달에 한두번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직원도, 경제력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교계에는 모든 행사가 사라지고, 기자가 취재를 하려 해도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애독자들에게 구독료도 제대로 청구하지 못한 채로 지나갔다. 그래도 이만큼 버틴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한다. 실은 교계 문서선교, 특히 주간지 발행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인건비는 기본이고, 종이값과 인쇄비, 그리고 발송비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부담이 많다. 특정 교단이나 단체에 소속하지 않은 순수 연합지는 모두 광고비와 구독료와 뜻있는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그러나 항상 부족해 다음 주 신문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또 한 호의 신문이 발행된다. 그러니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교계에는 크게 두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하나는 특정 교단의 회보로서 교단지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교계언론으로서 연합지이다. 교단지는 교단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신문이고, 연합지는 본보와 같이 일체의 특정한 후원이 없이 살아가는 신문이다. 그 편집방향이 다를 뿐 둘 다 중요하다. 바로 교계의 역사를 기록하는 문서선교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계언론을 교계의 거울이라 한다. 거울에는 피사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얼굴에 때가 묻었으면 묻은 대로, 어느 한쪽이 찌구러졌으면 찌구러진 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더럽다거나 찌구러졌다고 해서 거울을 깨뜨려버릴?필요는 없다. 자신의 얼굴을 닦으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계언론을 중요시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교계가 경제력이 크지면서 광고조차 교계언론을 외면하고 대부분 영향력이 많은 일반 상업지로 간다. 교계가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연합지에 광고를 지원해 주어 교회와 함께 가게 해야?한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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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12-30
  • [연지골] 라틴 교부 제롬
    ◇ 초대교회 교부 중 탁월한 인물에 제롬(Jerome, 345-420)이란 라틴(서방) 교부가 있다. 교회사에서는 그를 가리켜 히에로니무스(Heronymus)라고도 한다. 그의 원래 라틴 명이 <소프로니우스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달마티아 접경 지역인 스트리디온(지금의 헝가리 지방)에서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로마에서 귀족의 자녀들과 함께 유명한 문법학자 도나투스(Aelius Donatus)와 수사학자 빅토리누스(Victorinus)의 지도를 받아 법률가가 되었다. 그는 아주 근면하고 공부에 충실해 철학자 키케로(Cicero)를 비롯한 고전 작품을 읽었다. 그는 로마에서 세례를 받고 엄격한 금욕생활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 그는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가 죽게 될 만큼 극심한 금식 중에?희한한 꿈을 꾸었다. "영에 사로잡혀 어떤 힘에 끌려가 빛이 매우 밝은 심판대 앞에 섰다. 주위에 눈부신 빛을 발하는 어떤 분 앞에 엎드려 차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분이 '너는 누구며 무엇하는 사람이냐 '고 물었다. 이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다시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의 추종자이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괴로움 속에서 '오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그는 이후로 다시는 세상적인 책들을 읽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는 이 맹세를 가지고 꿈에서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 제롬은 라틴 교부 가운데 가장 박식하고, 가장 웅변력이 뛰어나고, 가장 흥미로운 저자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생애를 다하는 날까지 쉬임 없이 가르치고 배우고 글을 썼다. 하루라도 끼니를 거르면 안되듯 책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주전 250년에 유대인 학자들이 번역한 헬라어 성경(칠십인역)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칠십인역은 번역상의 오류도 있었고, 그것을 필사하고 또 다시 필사하는 과정에서?실수는 증가하였다. 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 전혀 엉뚱한 내용이 되기도 했다. 이에 제롬은 라틴어 성경을 히브리어로부터 직접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장년이 된 후에 시리아 광야에서 5년간 금욕생활을 할 당시 회심한 한 유대인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 이후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가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위해 정착한 곳은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근교였다.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교회를 세우고, 여성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많은 책들과 사본들에 둘러싸여 번역사업에 착수했다. 제롬은 랍비 바르 아니나(Bar-anina)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사업을 시작한지 2년 후 주후 405년에 불후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역을 출판했다. 이를 '불가타'역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 칠십인역이 끼쳤던 것 같은 영향을 불가타역은 라틴 기독교 세계에 끼쳤다. 그는 철학자요 수사학자요 문법학자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통한 학자였다. ◇제롬은 해석학과 교회사와 교리적, 윤리적 저서 등 수없이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또 신구약 성경주석도 썼다. 창세기, 대선지서, 소선지서, 전도서, 욥기, 시편, 마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의 주석을 남겼고, 교부들과 성인들의 역사, 기독교문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논쟁적인 교리적 . 윤리적 저서들 가운데는 아리우스파 논쟁, 오리게네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 등도 다루었다. 그가 친구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들은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당시 교부들의 삶과 교훈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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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기자수첩] 히틀러의 ‘더 큰 거짓말’과 한기총의 '이단 음모론'
    조작된 논리에 ‘애국’을 가미한 저급한 선동 이대위에 오른 문제적 발언들, 정작 아무도 해명 안해 ◆ 세계 근현대사에 있어 최악의 지도자이자, 그릇된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지목받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유일무이한 당대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연설이었다. 민족 우월주의에 바탕한 그의 탁월한 연설은 그를 희대의 선동가로 만들었다. 대중들을 어떻게 하면 흥분시킬 수 있고, 또 흡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600만 대학살 등 전 세계가 경악할 엄청난 범죄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에게 선동당한 대중들의 투쟁적 지지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완전한 선동을 위해서는 필히 거짓이 동반된다. 그것도 소소한 거짓이 아닌 판 자체를 뒤엎을 어마어마한 거짓을 말이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거짓에 선동된 대중들에 '일말의 의심'은 찾아볼 수 없다. 근거와 이유, 상황과 명분 등 모든 것에 반하는 어처구니없는 거짓일지라도 그들은 그 결론에만 집중하고 흥분할 뿐이다. '음모론'을 즐기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확인을 받기 때문이다. ◆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관련 이단성 이슈가 연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가 “모세오경만 성경이고, 나머지는 해설서다” “나는 메시아 나라의 왕”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성령의 본체” 등의 발언과 특히 아들 전OO을 '독생자'로 지명한 사실을 문제 삼으며, 이를 "명백한 이단사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연히 전 목사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전 목사는 이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인데, 문제는 아무도 왜 전 목사가 이단이 아닌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전 목사가 아닌 주변 이슈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모습이다.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했던가? 한기총의 운영과 임시체제, 이대위 조직 등 별건의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한기총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거짓이다. 이번 사태에서 이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새로운 주제를 등장시켰다. 바로 소강석 목사, 이들은 전광훈이라는 커다란 이슈를 소강석이라는 더 큰 이슈로 덮으려 했다. 히틀러가 말한 '더 큰 거짓말'을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소강석 목사인 셈이다. 자연스레 소 목사라는 이슈는 음모론으로 조작된다. 북한과 전 정권이 배후에서 소강석을 통해 전광훈을 제거하려 한다는 ‘더 큰 거짓말’은 이슈의 물타기를 위한 철저한 선동이었다. ◆ '애국'이라는 미끼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전체주의적 음모론, "나의 상상이 곧 너희의 세계다"라는 히틀러의 말이 한국교회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슈와 선동, 거짓과 음모로 뒤덮인 이번 사태를 한국교회는 다시 담백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 사태의 출발점은 과연 어디인가? 우리의 궁금증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현재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에 또다시 소명의 기회를 부여했다. 우리는 이제라도 이번 이슈에서 ‘메신저’가 아닌 본래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아들을 독생자로 지칭한 전 목사의 발언이 한기총에서 어떻게 소명될 수 있을지? 그게 이번 이슈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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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8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총성(銃聲)을 멈춘 성탄절’
    성탄절이다.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다.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아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다기보다는 자신을 더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주장이 앞서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혹은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의 허다한 것들을 앞세우는 모습들도 본다. 복음보다 사상과 이념, 정치적 견해, 지역색, 세속적 가치를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허물어트리는 악한 일들에 동조하는 지도자들도 있다. 그가 영(靈)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육에 속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또 우리에게 평화의 모습은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평화)케 하는 ‘하나님 자녀’의 성품은 있는가? 어떤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사납고, 거칠고, 막 나가고, 일방적이고, 자기 우월적이고, 상대를 무시하며, 하나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는듯한, 매우 모독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잘못했다는 마음이나 사과하는 것에 인색한 것을 본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그들 가운데 한때는 하나님께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았지만, 나중에 사단의 조종을 받고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져, 하나님께 버림받은 교만한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2022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성도(聖徒)된 우리의 모습을 겸손하게 하고 그 행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지켜 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툼이 없는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역사를 살펴보면, 성탄의 주님은 전쟁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멈추게 한 적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4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인데, 이날은 이상하게 총을 쏘고 대포를 발사하는 일이 없이 잠시 조용해졌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일군 부대에서 먼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프랑스군 병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밤 10시경 독일군이 찬송을 부르니, 우리들은 프랑스 국가(國歌)를 부르고, 독일군은 다시 자신들의 국가를 부르고, 우리는 출정가를 불러 서로 응답하면서, 남자 수천 명이 노래를 부르니 마치 동화(童話)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죽음의 한복판 전장(戰場)에서 연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전투를 쉬고, 적군을 향하여 총을 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서로 휴식시간을 갖고, 상대편을 찾아와서 고향을 묻고, 담배를 권하고 초콜릿을 나눠주고 기념품을 교환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받은 훈장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이런 성탄절 휴전을 경험한 병사들이 1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주님께서 주신 성탄의 평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사납고 날카로와진 우리의 모습을 평화로 바꾸면 어떨까? 먼저 상대편의 입장을 바꿔 놓고 배려해 보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비판하고 판단할 일이 있을 때, 상대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억울하지 않을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상대편의 명예와 인권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그가 속한 공동체를 허무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되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성숙한 생각들이 평화를 만들어 간다고 본다. 그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우리가 겪는바 평화(화평)를 깨는 요인은 남을 무시하는데 있다. 남은 변두리에 두고 자기가 중심에 서려는데 있다. 성탄의 주로 오신 예수님은 본체(本體)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종(從)의 형체로 오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낮추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런 주님을 닮지 않고는 성탄의 참 평화를 맞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총구(銃口)를 겨누고 있는가? 그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움과 시기와 분쟁과 다툼을 멈추고, 남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바꾸는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낮아진 마음으로, ‘고요하고 거룩한 밤’을 진심으로 맞아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12-24
  • [기자수첩] 선 넘은 ‘인포데믹’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야
    기독교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끔직한 루머들 한국교회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악성루머 근원지 발본색원해야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자신을 겨냥한 연이은 가짜뉴스에 결국 발끈하고 나섰다. 이번에는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이단 규정 관련, 그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억측인데, 밑도끝도 없는 가짜뉴스에 소 목사는 "이제 그런 왜곡된 주장은 그만하라"는 정중한 경고를 날렸다. 한기총은 지난 12월 7일 임원회에서 전광훈 목사를 '명백한 이단'이라고 결론내린 이대위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 이를 실행위로 넘긴 바 있다. '독생자' '메시아 나라의 왕' '성령의 본체' 등 전광훈 목사의 여러 발언에 심각한 이단성이 있다는 것으로, 현재 해당 이슈는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다. 문제는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또다시 이번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소강석 목사를 소환해,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강석 목사는 자타공인 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 상당한 유명세와 영향력을 지닌만큼, '소강석' 이라는 '키워드'를 등장시키기만 해도 관심은 폭발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소 목사를 자기 진영의 '주적'으로 설정함으로, 반대로 자신들은 그 영향력의 '피해자'로 만드는 단순하지만 매우 야비한 방법을 차용한다. 지난 수년 간 일부 진영의 정치 집회를 이끌었던 '동력'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마냥 '유명세'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목회자로서는 차마 상상치 못할 루머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퍼져 나가고 있다. 사실 소 목사는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 등 한국교회 지도자로 올라선 후 줄곧 가짜뉴스에 시달려 왔다. 초기에는 "교계를 편가르기 한다"거나 "정부에 사과했다"는 등 왜곡적 해석을 이용한 교묘한 가짜뉴스가 주를 이뤘다면 나중에는 추측을 넘어 아예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미자립교회 격려금 지원이었다. 코로나로 힘겨워하는 작은교회 목회자들에 100만원의 격려금을 전달한 것을 두고, 소 목사가 목회자들을 정권 규탄 집회에 참여토록 한 것이라는 끔찍한 루머를 퍼뜨린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악성 '인포데믹'에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양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준과 원칙이 무너진 신앙,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한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같은 신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마저 품게 한다. 이들의 타겟은 비단 소강석 목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한때 교계를 떠돌았던 또다른 가짜뉴스에는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원로), 장종현 목사(백석대 총장),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 류영모 목사(한소망교회) 등 대형교회를 담임하거나 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을 친북인사로 명시했었다. 근거나 이유는 중요치 않다. 애초에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는 ‘거짓’에 굳이 공 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 악성루머의 근원지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더 이상 이런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사회 정치에서 방출된 더러운 부산물이 교계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2-09
  • [기자수첩] 한교총의 무너진 ‘순번제’, 결코 가볍지 않다
    기존 연합단체의 과도한 정치질과 금권을 비판하며 등장한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류영모 목사)이 출범 6년여 만에 정치의 늪에 빠져 또다시 삐걱거릴 태세다. 한교총은 지난 18일 인선위원회를 통해 차기 대표회장에 이영훈 목사(기하성 총회장)와 공동대표회장에 권순웅 목사(합동 총회장), 송홍도 목사(대신 총회장) 그리고 장종현 목사(백석 총회장)를 선임했는데, 이를 두고 애초에 짜여진 판이었다는 나름 근거있는 의심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룰의 파괴를 통한 '새판 짜기' 한교총의 임원 인선은 '선거'가 아닌 '순번제'를 통해 이뤄진다. 교세에 따라 가, 나, 다, 라 군으로 나뉘는데, 각 군에서 순번에 따라 한 명의 대표회장 후보를 추천하고, 이들이 대표회장 혹은 공동대표회장으로 인선받게 된다. 한교총이 5회째 회기가 이어지는 동안 순번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각 군에 속한 교단들은 자기 차례에 대한 인지가 분명했고, 별다른 분란없이 항상 한 명의 군별 대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올해 가군에서 돌연 군별 대표 선출을 놓고 '경선'까지 등장하며, 애초 순번제라는 룰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리고 순번제에 따라 대다수가 예상했던 장종현 목사(백석 총회장)가 이 경선으로 탈락하게 된다. 룰의 파괴를 통한 '새판 짜기', 하지만 번듯하기만 한 이 새판이 결코 달갑지만 않은 것은 연합운동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신뢰'에 심각한 금을 남겼기 때문이다. ‘순번제’는 한교총의 정체성, 무너진 분열의 명분 한교총은 본래 '분열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그리고 한교연에서 다시 한교총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가장 심각한 오점을 남긴 삼단분열의 결과물이 바로 한교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분열체'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한교총은 자신들의 창립 명분을 기존 연합단체의 과열된 선거제도에서 찾았다. 금권과 비리로 가득한 대표회장 선거로 인해 연합운동의 본질이 깨지고, 또 지도자의 자리는 심히 권력화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교총이 대표회장 선출에 있어 '선거'가 아닌 '순번제'를 택하고, 1인체제가 아닌 3인의 공동 대표회장 체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분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신들의 명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번제'는 안으로는 한교총의 정체성이자, 밖으로는 정의와 신뢰로 새롭게 탄생한 새 연합단체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그렇기에 이번 대표회장 인선 과정에서 '순번제'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교총의 정체성이 깨어진 것, 분열의 명분이 무너진 것, 이번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더욱이 과도한 정치질을 방지코자 택했던 '순번제'가 무너진 것은 앞으로 한교총에 본격적인 정치 다툼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케 된다. 무엇보다 '경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임원회와 인선위가 과도한 권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모든 총대가 동등히 참여하는 한기총이나 한교연의 선거보다 훨씬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애초에 순번제가 가지는 단점은 분명했다. '인물'에 대한 선택이 불가하다는 것, 얼마 전까지 합동측이 총회장 선거의 과열을 막고자 치렀던 '맛디아식' 선거의 부정적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리스크를 감안하면서까지 순번제를 택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선거 자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부작용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번 대표회장 인선 과정은 ‘순번제’에 정치가 대놓고 개입한 형국이다. 이도저도 아닌 부작용의 결정체, 이를 일각에서 ‘정치력’이라는 단어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심히 불편한 것은 정치의 개입은 한국교회의 수많은 분열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간 한국교회의 가장 큰 이슈였던 ‘연합운동 통합’에 대한 관심은 어느새 한교총의 재분열에 대한 우려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1-30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무는 없는가? ’
    최근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 가운데 MBC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시킬 수 없다고 하여 시끄러웠다. 이에 대하여 MBC와 언론 단체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런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대통령실에서 그런 조치를 내렸다면, 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MBC의 제3노조가 발표한 성명에 보면, 왜 MBC가 그런 조치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제3노조가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MBC는 얼마 전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할 때 사석 발언을 타사 기자들에게 알렸고, 또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자막에까지 넣어 방송하였다. 그리고 특파원들이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의원들을 욕을 했다고 백악관과 국무성에도 알렸다. 그리고 전에도 MBC가 보도한 행태를 지적했는데,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손혜원 의원 투기 의혹 보도를 미적거렸고, 조국 법무부장관 의혹에 침묵했고, 울산시장 관권 선거 의혹을 사실상 은폐했고, 똑같은 총선용 비례대표정당을 민주당에는 ‘의병정당’으로, 야당에는 ‘위성정당’이라 불렀고, 천문학적 피해를 일으킨 라임 펀드와 옵티머스 자산운용 사건을 축소 보도하였고, 대장동 비리 의혹을 외면하다 유00로 꼬리를 자르려 한 의혹을 받았고, 공수처의 전방위 통신사찰에 대하여 침묵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 3월 대선 100일간 선거 기간에는 단 하루도 예외 없이 편파 보도를 하면서, 윤석열 후보 인터뷰를 방송하면서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틀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MBC는 편파 보도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로는 진영을 뛰어 넘는 언론노조가 되자고 하면서, 지난 2017년 MBC의 비민주노총 기자 88명이 기자 업무를 빼앗길 때 침묵했다고 꼬집는다. 그렇기 때문에 ‘MBC 구성원들은 지금이라도 특정 정당의 선전도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언론의 본모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언론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생긴다’고 피끓는 호소를 하고 있다. 흔히 MBC를 ‘노영방송’(勞營放送)이라고 한다, 노조(勞組)에 의하여 움직이는 방송이요, 언론이라는 것이다. MBC는 과거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가 정부의 37개 부처 기자실을 3곳으로 통•폐합하여 언론에 대못을 박았고, 기자들도 허가 없이 공무원을 만나지 못하게 할 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확연하게 편파, 왜곡 보도를 하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대통령실의 국익을 위한 조치에는 한껏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MBC의 불공정 보도를 우려하고 비판하는 일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MBC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이미 잃어버렸는데도, 그에 대한 반성은 없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아주 빈약하다. MBC의 이런 태도에 보조를 맞춘 것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언론들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등록된 우리나라 언론은 총 5,154개(일간전국종합신문 23개, 일간지역종합신문 124개, 경제일간신문 13개, 스포츠일간신문 6개, 일간외국어신문 2개, 기타전문일간신문 55개, 무료일간신문 1개, 전국종합주간신문 33개, 지역종합주간신문 554개, 전문주간신문 673개, 공영방송 19개, 민영방송 12개, 종교특수방송 8개, 종편보도채널방송 6개, 지상파 DMB 3개, 인터넷언론 3,594개, 통신사 28개)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62,80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언론들이 있는데, 이제는 편파, 왜곡을 일삼는 MBC 방송의 영향력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에 즈음하여 사회 일각에서는 MBC 폐방 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언론의 역할과 영향은 지대하다. 그만큼 언론이 잘못된 보도를 할 경우, 돌이키기 어려운 폐해를 사회와 국가와 국민들에게 끼치게 된다. 자신들은 공정한 방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형성시키고, 더 나아가 국익을 손상시켜 국민들을 피로감에 시달리게 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탄한 소리인가?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임과 의무는 없다는 것인가? 남을 비판하고 사회적 부정과 부패를 찾아내고 알리는 언론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자리에 있어야 그 일들이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맞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계 언론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흔히 말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거기에다 선교적 사명까지 감당해야 한다. 교회연합신문이 창간기념일을 맞는다. 축하드리며, 지금까지도 어렵게 교회의 현장을 지키면서 기독교 언론 역사를 만들어 왔지만, 앞으로도 한국교회를 지키는 보루(堡壘)의 역할에 더욱 매진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11-19
  • [기자수첩] 양심에 화인 맞은 한기총의 '꾼'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한기총의 임시 체제가 오랜 기간 지속되며, 대표회장 선출을 위한 총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연합기관 통합 결의에 따른 임시총회의 조치로 쉽사리 새 총회를 열지 못하는 임원회의 속사정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2년 넘게 계속되어온 임시체제에 대한 불만 역시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 조만간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결단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다만 문제는 혼란 중에 본색을 드러낸 소위 '꾼'들의 난립이다. 겉으로는 한기총의 정상화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자신의 잇속을 먼저 탐내는 이들 '꾼'들이 오히려 한기총의 정상화를 가로 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 특히 현 임원진에 반발해 세워진 한 비상 조직은 그야말로 '꾼' 정치의 정점을 찍고 있다. 각각 나뉘어진 정치적 진영에 양다리, 세다리를 걸치며, 매일 자신의 살 곳을 옮겨 다니고 있는 이들이 이 조직에 모여 스스로를 한기총의 양심이라 자랑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인다. 어제 자신들이 속한 진영에서 함께 비난하고, 욕을 토해냈던 상대에게 오늘은 뒤로 몰래 손 내밀며 아부하는 모습은 자신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상황에 맞춰 배신 가능한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양심이 화인 맞아 불타 없어진 양, 스스로 행한 일조차 남의 탓으로만 몰아가는 후안무치적 행태는 왜 이들이 '꾼'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나타낸다. 최근 한기총의 가장 큰 이슈인 '경매 사태'를 비난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수가 임대료 체납이 시작됐던 당시부터 현재까지 주요 임원진으로서 한기총을 직접 운영해 온 당사자였다. 사무총장, 공동회장, 서기, 각 위원장까지 섭렵하며, 한기총의 주요 요직에 있는 동안 이들은 매월 쌓여가던 임대료 체납 문제를 모른 채 방치했었다. 한기총의 최고 조직인 임원진으로서 방치했었던 일들을 이제와 뒤늦게 몇몇에게만 책임을 몰아가는 것을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심지어 체납이 시작된 당시의 사무총장과 근 수 개월 전까지 임원을 맡았던 인물들이 이러한 비난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늘상 자신들이 한기총을 지키고, 수호했던 진정한 ‘주인’들이라 자처했던 이들이, 정작 한기총의 위기 앞에서는 남의 집 불타는 것 바라보며 그저 궁시렁대는 무지렁이 ‘객’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이들 중 그 누구도 이번 경매 위기에서 단돈 1만원도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기총이 처한 진짜 위기가 무엇인지를 반증하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1-15
  • [기자수첩] 이건희 회장과 소강석 목사, 그들은 왜 변화를 말했나?
    "마누라 자식 빼곤 다 바꿔라" -고 이건희 회장- "변화해야 할 것에는 빨리 순응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소중하게 지켜라" -소강석 목사- 현대사회의 최대 재앙으로까지 꼽혔던 코로나 펜데믹이 지난 3년의 광포한 시간을 뒤로한 채 서서히 막을 내려 가고 있다. 서로의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가 점차 사라지고, 가다서다를 반복했던 학교와 직장의 일상은 이제 대부분 정상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혼란하기 그지없다. 마치 코로나의 후폭풍이 교회에만 매섭게 잔존하는 듯, 한국교회의 코로나는 여전히 'Ing'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교회 스스로를 향해 냉철한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왜 한국교회의 코로나는 끝나지 않고 있는가? 무엇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나약하게 만든 것인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패착은 변화에 대한 실패다. 70~80년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겪은 한국교회는 그때의 감흥을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가장 부흥했던 그때의 모습을 교회의 모범으로 정형화 시킨 점이다. 한국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 밖에 없던 것은 '변화' 자체를 스스로 정한 '모범'에서 벗어난 반교회적 사고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결국 한국교회를 매우 약하게 만들었다. 자그마한 물결에도 흔들리는 조각배가 되어, 막막한 망망대해 위에서 불안한 항해를 계속해 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위기대응능력을 전혀 키우지 못한 한국교회에 있어 코로나 펜데믹이 집채만한 해일처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것이다. 1517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모습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변화해 왔다. 장로교회의 핵심인 개혁(Reformed)은 바로 온전한 변화에서 출발한다. 개혁을 거부하고 변화를 멈추는 교회는 결코 온전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새에덴교회의 모습은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코로나 초기 방역 대응부터 예배 대처, 지역사회와의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차별화된 선진성을 보여줬다. 여기에 최근에는 엔데믹 시대에 걸맞는 시스템, 엔데믹의 이후를 대비한 목회 전략 등을 선보이며,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고 있다. 새에덴교회의 돋보이는 위기대처 비결의 바탕에는 '변화'에 주저하지 않았던 개혁정신이 있었다. 끊임없이 갈고 닦은 변화를 통해 갖춘 '기본기'는 지난 3년 간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를 가능케 했고, 변화가 곧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고 이건희 회장과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 개혁에 대한 공통적 시각을 견지한다. 지킬 것은 철저히 지키되 바꿀 것은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적 비전이다. 이러한 그들의 추진력은 세계 최고의 기업 '삼성'을 만들었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된 '새에덴교회'를 있게 했다. 지난 코로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모범적 모습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당연한 정답들이 때로는 시대에 뒤처진 케케묵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변화의 출발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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