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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수공전도 펼칠 만한 것이었는가’
    전투 중에는 화공(火攻)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수공(水攻)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사자성어 속에는 화공 관련 책임론이 내재되어 있다. 촉나라의 마속 장군이 제갈량의 분부를 무시하고 자행자지함으로써 적(위병)의 화공을 받아 패전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참수형을 받은 비극이 그 말 속에는 들어 있다. 불이 난 뒤엔 남는 것이라도 있지만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터도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마속(馬謖)의 비극에서 보듯이 화공도 무섭기는 하지만, 다른 사례에서 볼 때 수공은 더 무서운 데가 있다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초한지>에는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가 서로 싸우는 중에 전자를 대표하는 한신 장군과 후자의 항장(降將; 투항 장군) 장한 사이에 벌어진 폐구성 전투에서 한신이 펼친 수공전(水攻戰)으로 인해 장한의 폐구성 수비군이 전멸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괴된 잔도가 복구되지 않는 한 한나라 군대가 쉽게 자기의 폐구성을 공격해 올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장한 장군은, 그만큼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서도, 갑자기 들이닥친 한나라 병사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게 사면초가라고 판단되자 장한 장군은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삼국지>에는 수공전의 실상이 더러 나타난다. 위나라의 조조가 하비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여포를 잡기 위해 수공전을 펼친 것이 주효해 마침내 여포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또 조조가 원소의 본거지 기주성을 포위해 수공 작전을 편 결과 끝내 그 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 조조에 대하여 다소 불안감을 지닌 <삼국지> 독자들에게 조조의 수공 성공 사례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다음(관우)의 수공전이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싶다. 관운장에게 밀린 번성의 조인(조조의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조조가 우금과 방덕 두 장수를 파견하였다. 노련한 우금을 대장으로 삼고 젊은 방덕을 선봉장으로 삼아 대대적인 군대를 동원해 번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런데 선봉장 방덕이 관운장과 맞붙어 싸울 때, 첫 날은 100여 합을 겨루고도 결판이 나지 않아 관운장을 놀라게 했는데, 둘째 날 50여 합을 겨루고도 결판이 나지 않은 채 돌연 방덕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라오는 관운장을 향해 방덕이 갑자기 화살을 쏘아 관우의 왼쪽 팔을 관통시켰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우금이 방덕을 불러들이고 나서, 관우와 방덕 간의 직접적인 병기 대결은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금·방덕의 군사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성의 뒤쪽으로 주둔지를 옮기고 나자 관운장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는 수하들에게 곧 우금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공전을 펼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 연일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주변 양강의 물이 불어나고 있었으며, 우금의 병사들은 좁은 증구천 골짜기로 몰려 있었기 때문에 관우는 자기 병사들로 하여금 상류의 물을 가두었다가 적시에 그 물을 터뜨릴 계획이었다. 며칠 뒤 실제로 큰물이 번성 주변으로 넘쳐흐르며 우금의 병사들을 덮쳤을 때, 관우와 우금 간의 싸움은 관우 쪽으로 결정적 승리가 찾아와버렸던 것이다. 우금은 사로잡혔고, 방덕 역시 물에 빠진 채로 사로잡혔다.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나버린 것이다. 이제는 유럽 쪽의 수공전 이야기로 가 보기로 하겠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속국(?)인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획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일명 ‘피의 법정’이라고 불렸던 그 무서운 재판소를 과도기로 하여, 종국엔 저네들 식의 종교재판소를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안에도 설치하겠다고 나오자 지금껏 지배국 스페인에게 순종적이기만 했던 네덜란드인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성상파괴운동을 시발로 하여 터진 무장투쟁의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확대되었으니, 곧 저항군 세력의 거점이었던 레이덴에서 맞붙은 양쪽의 전투(1574)는 그들의 생명줄이라고 할 제방을 허물어 물바다를 만들며 결사 항전한 네덜란드 군의 우세 쪽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어 갔던 것이다. 사실 스페인군이 레이덴을 포위했을 때의 레이덴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1년 가까운 포위 작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있었으며, 그 결과 아사(餓死)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시민군은 저항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패망해 죽을 바엔 지금껏 그들의 생명줄로 여겨왔던 둑(제방)을 무너뜨림으로써 스페인군을 몰아낼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고, 게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결국 스페인군은 거센 바다물결 앞에 맥없이 패퇴하고 말았다. 수공전도 정당방위의 목적에서라면 용인될 수 있는 일임이 입증된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2-24
  • [기자수첩] 4차산업혁명시대 속 러다이트 운동과 기독교
    ◆ 근대 인류 발전의 가장 결정적 사건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으니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변화를 통해 전 세계 사회, 경제, 정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산업혁명'은 인류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단초가 된다. '산업혁명'은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힐만한 일이지만, 당시 모든 이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18~19세기 영국의 가장 보편화된 산업 중 하나가 바로 섬유를 가공하는 '방직업'이었는데,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방직기가 숙련공의 역할을 대신하며,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한 것이다. 모든 공장은 인건비도 들지 않고, 대량생산마저 가능한 방직기를 들여놨고, 그 결과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아침에 삶이 파괴된 노동자들의 분노가 향한 종착지는 바로 '방직기'였다. 방직기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일자리를 잃을 이유도 없고, 또 월급을 받지 못해 굶을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방직기'를 직접 파괴하기 시작한다. 발전을 거부함으로, 자신들의 잃어버린 위치를 되찾고자 했던 것, 변화와 발전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19세기에 일어났던 '러다이트 운동'은 이후 시대가 한 번씩 크게 도약 발전할 때마다 종종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20세기 후반 컴퓨터의 보급과 맞물린 과학기술시대의 도래는 네오러다이트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러다이트 운동'이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시작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AI가 모든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며, 결국 인간의 존재가치가 없어질 것이라는 본질적이 우려다. 과거 영국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처지와 매우 닮아있는 이 우려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찾기 위한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을 꿈꾸고 있다. ◆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러다이트 운동'은 의외로 기독교계에도 널리 뻗쳐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절대적이라 여겼던 목회자의 영역마저 AI가 침범할 것이라는 우려로, 특히 코로나를 지나며, 새롭게 자리잡은 '온라인 예배' 문화가 'AI 설교'도 마냥 판타지가 아닐 수 있음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 분위기에 일부 목회자들은 제4차산업혁명시대에 보내는 기대의 한 켠에 자신의 존재적 가치마저 혹여 위협받을 수 있다는 걱정과 우려를 토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변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로 이어지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폐쇄적 교회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 반복됐던 '러다이트 운동'이 주는 교훈은 하나다. '공의' '공익'을 전제한 시대의 발전과 흐름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이 방직기계를 파괴해 자기 자리를 되찾고자 했지만,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결국 또다른 방직기계였다. 하지만 새롭게 변화한 시대는 인간이 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을 선사한다. 네오러다이트운동가들이 컴퓨터의 보급·발전에 반기를 들었지만, 결국 컴퓨터의 발전은 새로운 산업 환경 속에 수많은 직업을 양산해 냈다. 파도가 클수록 이를 넘고자 하는 서퍼들은 결코 파도에 맞서지 않으며, 파도의 흐름에 순응하는 원리와 같다. ◆ 그렇다면, 좀 더 직접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영역을 AI가 대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대전 유성에 위치한 국립중앙과학관에는 향후 AI로 인해 사라질 직업군이 나열되어 있다. 그 곳에는 텔레마케터, 계산원, 청소부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이고, 촬영기사, 측량기사, 건설 노동자 등의 기술집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판사, 기자, 학자 등 일에 있어 사고와 판단이 고도로 요하는 직업들도 AI가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이 중에 '종교인'은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기술 뿐 아니라 작가의 감정이 요구되는 화가조차 사라지는 직업군에 들어가 있지만, 종교인은 없다. 이 간단한 그림은 목회자의 영역을 결코 과학의 기술로 대체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AI가 대신 전할 수 없는 것은 그 분의 뜻에 대한 근본적 이해도 불가능할 뿐더러, 결정적인 사명이 없기 때문이다. AI는 과학적 기술과 기존에 입력된 통계로 자기 역할에 대한 판단을 한다. 하지만 설교는 단순히 지식과 통계, 정보로 이뤄지는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주권적 관계와 성경에 대한 의미적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AI는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목회자의 '감성'이 바로 설교에 녹아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영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희생’이라는 감성은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더욱 빛날 수 밖에 없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2-23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분열을 치유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우리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어디를 보아도 분열이 없고 다툼이 없고 분파로 쪼개져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치와 이념성은 가족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도 심각하다고 한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 권사님이 전해 준 이야기이다. 지난해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딸과 사위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 ‘어머님 이번에 00후보(진보성향 후보)를 찍지 않으면 어머님과 3년 동안 왕래를 끊을 것입니다’ 또 다른 권사님은 딸과 사위가 어른을 뵙기 위해 왔는데,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진보 후보와 보수 후보를 각각 지지하는 발언으로 다투더라는 것이다. 최근에 모 신문사가 지난해 말 여론조사를 했는데,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이 특정 법무법인 변호사 30여 명과 새벽까지 술자리를 했다는 것이 거짓으로 판명이 났는데도, 정당을 지지하는 것에 따라 의식 차이가 확연하게 달랐다고 한다. 즉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짓일 것’으로 믿는 사람이 77.9%이고, 아직도 ‘사실일 것’이라고 답한 것이 13.9%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사실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69.6%를 차지하고 거짓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11.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슈화된 사건이 진실이 밝혀져도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에서 철회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조사에 의하면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식사 자리(술 자리 포함)는 ‘불편하다’가 40.7%로 나타났고,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불편하다’가 43.6%로 더 높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당을 지지하는 층이나 야당을 지지하는 층이나 비슷한 양상이라고 한다. 또 현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을 여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87.6%를 차지하고 있으나, 야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32.2%만이 잘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전 정권이 방역을 잘한다고 지지했던 사람들이 84%나 된다. 그야말로 내가 지지하는 정권은 어떻게 해도 지지하고, 내가 싫어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묻지마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언론사에서 역시 지난해 말, 여•야 국회의원 170명을 대상으로 ‘현 정부가 진행 중인 수사가 과거 정치보복 논란과 비교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여당 쪽의 의원들은 정치보복 성격을 느낄 수 없다가 80.6%, 달라진 것이 없다가 7.5%, 정치보복 성격이 약해졌다가(오히려) 4.5%, 정치보복 성격이 강해졌다가 1.5%, 모르겠다가 6.0%를 차지했다. 반면에 야당쪽 의원들은 정치보복 성격이 매우 강해졌다가 91.8%, 정치보복 성격이 조금 강해졌다가 6.2%, 달라진 것이 없다가 1.0%, 정치보복 성격 느낄 수 없다가 1.0%였다. 정치에 대하여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 국회의원 사이에서도 자가당착(自家撞着)이 매우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 수사 후 분열된 국론을 어떻게 봉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여당 의원들의 40.3%는 ‘법적 시비는 법정에 맡기고 언론•정치권은 수사 확대 해석을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야당 쪽에서는 33.0%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수사 과정과 결과를 철저히 공개해 의혹을 불식해야한다’는 응답이 여•야 각각 29.9%, 18.6%로 나타났다. 그리고 여당 의원들은 ‘법치국가에서 법대로 수사하는데 국론분열 발생 시각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이 28.4%,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야당 지도부와 대화 등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44.3%를 차지하였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있다.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빈부갈등, 도농(都農)갈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최대 246조원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었는데,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갈등지수가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갈등을 유발시키는 세력은 무엇보다 정치권이다. 그들의 목적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고 국가의 발전과 근간을 세우는 일보다,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능한 집단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교회부터 앞장서서 우리 사회 분열을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지역색을 띤 모임부터 모두 해체해야 한다. 선교든 친교든 이런 모임 자체가 망국적 지역색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힘을 합해 총회 임원을 선출하는 행위들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특정 정파를 지지하여 표를 ‘몰빵’하는 독재적, 독단적 행위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분열과 갈등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패를 쪼개고 편을 갈라서 으르렁거리는 반신앙적 반성경적 세속 행위를 묵인하고 따르겠는가? 한국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나가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1-21
  • [사설] 성경은 많이 읽어야 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시대마다 두 가지 주체에 의해 이끌려 왔다. 하나는 '성령'이고, 또 하나는 '성경'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사도들을 부흥현장으로 내몰았고, 성경이 확정된 중세교회는 성경이 부흥을 이끌었다. 그러다 교리논쟁에 휩싸여 성령도, 성경도 교권의 통제를 받게 되자, 교회는 곧바로 이단정죄의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를 역사는 '가톨릭 암흑 시대'라고 한다. 이때 다시 역사에 새로운 빛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 성경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주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기독교의 모든 규범은 이 성경에서 나온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경을 깊이 상고해야 한다. 아무리 재능있는 설교자라도 성경을 많이 읽어 성경에 능통한 사람을 능가할?수는 없다. 어떤 종교의 지도자이든 그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종교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은 66권의 신구약 '성경'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목회자가 되려면 최소한 이 성경 66권은 제대로 통달해야 한다. 그냥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장절을 다 외울 수는 없어도 창세기 하면 창세기 각 장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수십독, 혹은 수백독 성경을 읽어 눈 앞에 훤히 그 내용이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책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성경을 역사적 기독교가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기독교의 성경 해석을 무시한 채, 자신이 어느 날 성경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며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신학적 훈련이나 성령의 조명 없이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 교회를 이끌 신학생들이나 새로운 목회길에 나서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한다. 한글성경뿐 아니라, 영어나 독일어 또는 원어 성경 헬라어나 히브리어도 해독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성경은 66권을 다 보편성으로 읽어야지 어느 특정 책만을 편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
    • 연지골
    • 사설
    2022-12-30
  • [사설] 한국 기독교인들의 양심의 문제
    아직도 우리사회에 복지 사각지대에서 경제적 무게를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자들이 있다. 올해만 해도 4월에 서울 창신동 모자 사건, 8월에 수원 세 모녀 사건, 또 지난달 서울 신촌 모녀 사건 등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우리사회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동사무소나 지역 행정 당국에서도 파악하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그들이 드러내 놓고 자기의 사정을 말하기 전에는 그 어려움을 알기가 어렵다. 행정체계 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동사무소 복지사들이 놓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관심 깊게 살펴보는 것이 교회나 종교계가 할 일이다. 성탄절이나 연말연시 뿐만 아니라 평소에 교인들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살펴야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 헌금 25%는 교회 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또 25%는 교회 밖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면했다고 한다. 16세기 칼빈의 시대의 경제 사정은 오늘날 우리시대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교회의 헌금 절반을 어려운 이웃에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칼빈의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운영되는 장로교 중심의 교회이다. 따라서 우리도 칼빈의 정신대로 교회헌금을 소외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함이 옳다. 또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행정장국의 정상적 시스템으로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구호단체 등에 소액이라도 후원하여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직업을 가졌거나 소득이 있는 사람이면 한 달에 1만원 정도는 누구나 후원할 수 있다. 그것이 모이면 긴요한 일에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더 이상 생겨나서는 안된다. 특히 이 문제는 한국 기독교인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 연지골
    • 사설
    2022-12-30
  • [연지골] 주교 암브로시우스
    ◇ 초기 기독교가 교리 논쟁이 한창이던 4세기에 유명한 교부 중에 암브로시우스(Ambrose, 374-397년)가 있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주교로서, 저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에게 세례를 베푼 멘토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암브로시우스가 주교가 되는 과정이 특이하여 교회사에서 크게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당시 서방제국의 주요 지역 가운데 하나인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라인강 서쪽 지역)를 통치하는 총독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 북부를 다스리는 집정관(장관)이 되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 가는 제2도시로서 황제들이 자주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로마 사회의 새로운 종교로 등장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도시였다. ◇ 그런데 암브로시우스가 374년, 그곳 장관으로 부임한 때에 이 도시의 주교가 죽고 후임자 선출 문제를 놓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직전 주교는 니케아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 파의 카바도키아 출신 아욱센티우스(Auxentius)였다. 그때 가톨릭 파와 아리우스 파 간에 후임은 서로 자기네 편 사람을 주교로 세워야 한다며 분열이 일어났다. 대다수 시민들은 정통 파인 가톨릭 쪽에 지지를 보냈지만, 발렌티아누스 2세 황제의 어머니인 유스티나 황후가 아리우스 파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가운데 여차하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조짐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자신에게 이 사태를 진정시킬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암브로시우스는 이 험악한 분위기를 설득키 위해 중재에 나섰다. ◇ 다행히 양측은 그의 의견에 동의해 주교를 뽑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양측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가 회중?앞에 나서서 발언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뒤쪽에서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고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세우세요,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세우세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거기 모인 회중은 일순간에 압도되어 "아멘, 아멘!" 하고 동의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그 당시 세례도 받지 않은 교리문답자에 지나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는 당황하여 "나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는데 무슨 주교입니까 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밀라노 시민들은 가톨릭 파든, 아리우스 파든 어느 한쪽에서 주교가 나오게 되면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중립적인 암브로시우스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 자칫 큰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그는 결국 8일 만에 승복했다. 곧바로 사제들이 세례(44세)를 베풀고, 이어서 밀라노 주교로 임명했다. 세례로부터 주교가 되기까지 불과 3일이 걸렸다. 그런데 그는 이때부터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평생을 교회를 위해 산 초기 기독교 세계에 위대한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수행 중에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있다. 돈오돈수란 말은 불교의 수행 진리를 오랜 기간 배우지 않고도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깨닫는 것을 뜻한다. 이후 암브로시우스는 아리우스에 대해서 단호히 비판하고, 니케아 신앙이 승리를 거두게 하는데 이비자했다. 암브로시우스는 바로 기독교의 정통주의와 그 사상을 돈오돈수 한 셈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계에는 전통 있는 교단이나 명망 있는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도 정통성과 깊은 영성을 가진 설교자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이들이 기독교 진리를 돈오돈수 한 사람들이다. 
    • 연지골
    • 연지골
    2022-12-30
  • [사설] 안전불감증이 가져온 대참사
    지난달 말 핼러윈데이에 이태원에서 벌어진 대참사는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그 좁은 골목에서 수백명이 떠밀려 압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사회가 아직도 안전불감증에 빠져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안전불감증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을 잃고 '안전, 안전'을 강조해 왔는가. 그런데도 아직 우리사회에?안전의식이 미약해 벌어진 일이다. 온 국민은 이번 이태원 사건에 있어서 특히 경찰의 조치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 10만 군중이 모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은 질서유지를 위해 이태원 파출소에 겨우 137명만 배치했다고 한다. 이 열 배 1370명을 배치해도 모자랄 판인데, 경찰은 처음부터 안전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에도 안전에 대한 메뉴얼이 있을 터이지만, 이 날 이태원에는 그 메뉴얼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오늘날 대한민국 정도 되면 국민의식에서 안전 제일주의가 우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국민의식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치안은 세계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는 아직도 안전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지니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민 안전교육이 절대로 필요하다. 사후약방문으로 사고가 난 후에 비로소 '재발방지'만 외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국민안전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밖에 없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공교육 기관에서의 교육뿐 아니라, 동네 노인정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 안전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번 이태원 사건에서 보여준 것은 오늘날 국가 공직자들의 국가관이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매우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국가 공직자들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세계 10대 경제력과 문화를 수출하는 대한민국의 공직자의 정신세계가 그 수준에 미달한다면 사회발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공직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그 직을 원할히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근본적이고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 연지골
    • 사설
    2022-12-30
  • [사설] 건강한 한국교회를 지향하며
    본보는 이달로 1991년 11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에큐메니칼운동을 표방하고 창간된 지 31주년이 되었다. 창간 이후 약 29년 간은 거의 매주 발간 해 오던 것이 코로나 정국을 맞아 지난 2년 간은 한 달에 한두번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직원도, 경제력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교계에는 모든 행사가 사라지고, 기자가 취재를 하려 해도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애독자들에게 구독료도 제대로 청구하지 못한 채로 지나갔다. 그래도 이만큼 버틴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한다. 실은 교계 문서선교, 특히 주간지 발행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인건비는 기본이고, 종이값과 인쇄비, 그리고 발송비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부담이 많다. 특정 교단이나 단체에 소속하지 않은 순수 연합지는 모두 광고비와 구독료와 뜻있는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그러나 항상 부족해 다음 주 신문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또 한 호의 신문이 발행된다. 그러니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교계에는 크게 두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하나는 특정 교단의 회보로서 교단지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교계언론으로서 연합지이다. 교단지는 교단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신문이고, 연합지는 본보와 같이 일체의 특정한 후원이 없이 살아가는 신문이다. 그 편집방향이 다를 뿐 둘 다 중요하다. 바로 교계의 역사를 기록하는 문서선교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계언론을 교계의 거울이라 한다. 거울에는 피사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얼굴에 때가 묻었으면 묻은 대로, 어느 한쪽이 찌구러졌으면 찌구러진 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더럽다거나 찌구러졌다고 해서 거울을 깨뜨려버릴?필요는 없다. 자신의 얼굴을 닦으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계언론을 중요시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교계가 경제력이 크지면서 광고조차 교계언론을 외면하고 대부분 영향력이 많은 일반 상업지로 간다. 교계가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연합지에 광고를 지원해 주어 교회와 함께 가게 해야?한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 연지골
    • 사설
    2022-12-30
  • [연지골] 라틴 교부 제롬
    ◇ 초대교회 교부 중 탁월한 인물에 제롬(Jerome, 345-420)이란 라틴(서방) 교부가 있다. 교회사에서는 그를 가리켜 히에로니무스(Heronymus)라고도 한다. 그의 원래 라틴 명이 <소프로니우스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달마티아 접경 지역인 스트리디온(지금의 헝가리 지방)에서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로마에서 귀족의 자녀들과 함께 유명한 문법학자 도나투스(Aelius Donatus)와 수사학자 빅토리누스(Victorinus)의 지도를 받아 법률가가 되었다. 그는 아주 근면하고 공부에 충실해 철학자 키케로(Cicero)를 비롯한 고전 작품을 읽었다. 그는 로마에서 세례를 받고 엄격한 금욕생활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 그는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가 죽게 될 만큼 극심한 금식 중에?희한한 꿈을 꾸었다. "영에 사로잡혀 어떤 힘에 끌려가 빛이 매우 밝은 심판대 앞에 섰다. 주위에 눈부신 빛을 발하는 어떤 분 앞에 엎드려 차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분이 '너는 누구며 무엇하는 사람이냐 '고 물었다. 이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다시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의 추종자이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괴로움 속에서 '오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그는 이후로 다시는 세상적인 책들을 읽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는 이 맹세를 가지고 꿈에서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 제롬은 라틴 교부 가운데 가장 박식하고, 가장 웅변력이 뛰어나고, 가장 흥미로운 저자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생애를 다하는 날까지 쉬임 없이 가르치고 배우고 글을 썼다. 하루라도 끼니를 거르면 안되듯 책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주전 250년에 유대인 학자들이 번역한 헬라어 성경(칠십인역)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칠십인역은 번역상의 오류도 있었고, 그것을 필사하고 또 다시 필사하는 과정에서?실수는 증가하였다. 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 전혀 엉뚱한 내용이 되기도 했다. 이에 제롬은 라틴어 성경을 히브리어로부터 직접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장년이 된 후에 시리아 광야에서 5년간 금욕생활을 할 당시 회심한 한 유대인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 이후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가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위해 정착한 곳은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근교였다.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교회를 세우고, 여성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많은 책들과 사본들에 둘러싸여 번역사업에 착수했다. 제롬은 랍비 바르 아니나(Bar-anina)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사업을 시작한지 2년 후 주후 405년에 불후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역을 출판했다. 이를 '불가타'역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 칠십인역이 끼쳤던 것 같은 영향을 불가타역은 라틴 기독교 세계에 끼쳤다. 그는 철학자요 수사학자요 문법학자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통한 학자였다. ◇제롬은 해석학과 교회사와 교리적, 윤리적 저서 등 수없이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또 신구약 성경주석도 썼다. 창세기, 대선지서, 소선지서, 전도서, 욥기, 시편, 마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의 주석을 남겼고, 교부들과 성인들의 역사, 기독교문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논쟁적인 교리적 . 윤리적 저서들 가운데는 아리우스파 논쟁, 오리게네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 등도 다루었다. 그가 친구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들은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당시 교부들의 삶과 교훈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 남아 있다.
    • 연지골
    • 연지골
    2022-12-30
  • [기자수첩] 히틀러의 ‘더 큰 거짓말’과 한기총의 '이단 음모론'
    조작된 논리에 ‘애국’을 가미한 저급한 선동 이대위에 오른 문제적 발언들, 정작 아무도 해명 안해 ◆ 세계 근현대사에 있어 최악의 지도자이자, 그릇된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지목받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유일무이한 당대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연설이었다. 민족 우월주의에 바탕한 그의 탁월한 연설은 그를 희대의 선동가로 만들었다. 대중들을 어떻게 하면 흥분시킬 수 있고, 또 흡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600만 대학살 등 전 세계가 경악할 엄청난 범죄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에게 선동당한 대중들의 투쟁적 지지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완전한 선동을 위해서는 필히 거짓이 동반된다. 그것도 소소한 거짓이 아닌 판 자체를 뒤엎을 어마어마한 거짓을 말이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거짓에 선동된 대중들에 '일말의 의심'은 찾아볼 수 없다. 근거와 이유, 상황과 명분 등 모든 것에 반하는 어처구니없는 거짓일지라도 그들은 그 결론에만 집중하고 흥분할 뿐이다. '음모론'을 즐기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확인을 받기 때문이다. ◆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관련 이단성 이슈가 연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가 “모세오경만 성경이고, 나머지는 해설서다” “나는 메시아 나라의 왕”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성령의 본체” 등의 발언과 특히 아들 전OO을 '독생자'로 지명한 사실을 문제 삼으며, 이를 "명백한 이단사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연히 전 목사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전 목사는 이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인데, 문제는 아무도 왜 전 목사가 이단이 아닌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전 목사가 아닌 주변 이슈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모습이다.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했던가? 한기총의 운영과 임시체제, 이대위 조직 등 별건의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한기총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거짓이다. 이번 사태에서 이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새로운 주제를 등장시켰다. 바로 소강석 목사, 이들은 전광훈이라는 커다란 이슈를 소강석이라는 더 큰 이슈로 덮으려 했다. 히틀러가 말한 '더 큰 거짓말'을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소강석 목사인 셈이다. 자연스레 소 목사라는 이슈는 음모론으로 조작된다. 북한과 전 정권이 배후에서 소강석을 통해 전광훈을 제거하려 한다는 ‘더 큰 거짓말’은 이슈의 물타기를 위한 철저한 선동이었다. ◆ '애국'이라는 미끼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전체주의적 음모론, "나의 상상이 곧 너희의 세계다"라는 히틀러의 말이 한국교회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슈와 선동, 거짓과 음모로 뒤덮인 이번 사태를 한국교회는 다시 담백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 사태의 출발점은 과연 어디인가? 우리의 궁금증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현재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에 또다시 소명의 기회를 부여했다. 우리는 이제라도 이번 이슈에서 ‘메신저’가 아닌 본래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아들을 독생자로 지칭한 전 목사의 발언이 한기총에서 어떻게 소명될 수 있을지? 그게 이번 이슈의 핵심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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