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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올3월 마지막 주는 고난주간이다.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를 앞에 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뇌와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없었으면 영광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즉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념주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중 한번 기념하는 고난주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된다.물론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가 아니고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가 고난받을 때 흩어졌던 제자들도 그리스도가 부활한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럼에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때마다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증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에 앞서 주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의 고난을 새기는 것은 모든 성도의 의무이다. 이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를 구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영성적 삶을 살아야 한다. 8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고난주간을 보내는 행사가 많이 달라졌다. 이 역시 세속화의 영향이다. 고난주간에는 각 교회에서 특별채플을 열고 고난을 주제로 하는 영성훈련을 개최할 수 있다. 학생회나 청년부 등이 하루쯤은 금식하며 기도회를 갖는 것도 좋다. 그리고 부활주간만이 아니라 이 고난주간에 성찬식을 갖는 것이 더 의미있다. 특히 이 고난주간에는 남과 다투지 않으며, 노래방 등의 여흥을 멀리하고, 성경을 상고하며 명상함이 좋다. 역사적 기독교는 초대교회부터 고난주간에 금욕하고 절제하며 기도했다. 이는 세속생활에 바쁜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자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훈련이다.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의 잘못된 교리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많은 아름다운 전통을 버리고 왔다. 그럼에도 주님의 고난주간과 부활절만은 역사적 교회의 중요한 유산으로 간직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교회는 참여하는 청중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고난주간 내내 시간을 정해서 교회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림이 좋다. 그것이 곧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에게도 영성훈련의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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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3-25
  • 불굴의 확신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과도로 찌른 김기종은 “우리나라는 반(半)식민지 사회이고, 북한은 자주정권”이라는 인식하에 분단종결을 위해서는 반미·반일 등 ‘외세 배척’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차용해야 한다는 논리에 서서 소위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을 전개해 온 것이다. 이는 반미 좌파인사들이 갖고 있는 사상적 흐름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종은 주한 미국대사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불굴의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확신을 ‘테러’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표출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오늘날 전세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역시 ‘불굴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슬람국가(IS) 건설을 위해 자기 한몸을 불사르는 ‘자폭의 전사’로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가운데는 종교적 광신도도 있고, 정치적 극단주의자도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족주의자, 사상적 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상가도 있다. 그런데 김기종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족주의자인가, 또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적 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한 사상가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다만 3대 세습이라는 북한의 ‘사이비 자주정권’을 위해 불굴의 확신을 가진 맹목적 추종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문제는 우리사회에 김기종과 같은 맹목적 북한 추종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국회와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정치권에도 있고, 교수나 교사 등 지식인 사회에도 있으며, 문화예술인들 가운데도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계에도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특히 기독교 목사들 가운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이들은 아직 칼이나 총을 들고 나서지 않았을 뿐,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보는 것은 동일하다. 이들이 언제 자신의 이념을 밖으로 표출해 ‘테러’에 나설지는 아무도 모른다.◇이같은 ‘불굴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순전히 ‘종교적 테러분자’들도 있다. 자신과 다른 남의 신앙을 ‘이단’으로 공격하는 이단감별사들이 그들이다. 이단감별사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한국교회가 모두 이단에 넘어갈 것이라는 강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한몸을 바쳐 이단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불굴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단연구라는 이름아래 멀쩡한 목회자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상대의 인격을 살해하는 일종의 종교적 테러이다. 칼이나 총을 사용해야만 테러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불굴의 확신이 한 공동체나 그 사회를 분열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이런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교훈 아래 있지 않는 자는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라는 성경을 곧이곧대로 적용해 이단에 대해 단호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 그들의 잘못은 누가 지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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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8
  • 시인 윤동주 서거 70주기에 임해-임 영 천 목사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가 세상을 떠난 지 지난 2월16일로 고희(70주기)를 맞았다. 1917년(12월30일) 태생으로 1945년(2월16일)에 서거했으니 고작 이십칠 년여를 살고 생을 마감한 셈이다. 그는 그 짧은 생애에 ‘서시’와 ‘별 헤는 밤’ 등을 비롯한 주옥같은 시 작품들을 다수 남겨놓아 후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십자가’와 ‘새벽이 올 때까지’ 등 이른바 기독교 시편들을 남겨놓아 문학과 종교(기독교) 간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도록 해 주었다. 실제로 그의 조부 윤하현 씨는 그곳(명동) 교회의 장로였으며, 동만(주)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목사는 그의 외삼촌이었다. 요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을미년(2015) 올해는 조국 광복 70주년의 해이고, 동시에 민족 분단 70주년의 해이기도 한데, 여기에 더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서거 70주년의 해이기도 하니, 올해는 여러 면에서 민족사적(民族史的)인 의의가 대단히 큰 해인 것 같다.서거 당일(2.16)에 해당하는 날 연세대학교 윤동주추모사업회가 주관해 루스채플에서 추도예배와 추모공연, 그리고 시·산문 창작대회 시상식 등 여러 행사들이 열렸다. 그러나 이 행사는 국내 인사들에게까지도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다소 한산한 행사로 비쳐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오히려 70주기 추모 행사는 이국(異國)인 일본 땅에서 더 성대하게 치러졌던 게 아닌가 판단된다. 당시 윤 시인의 ‘죽음’의 형무소가 자리 잡고 있었던 후쿠오카(福岡) 시에서, 또 그가 초기 한 학기 동안 재학한 바 있는 도쿄(東京)의 릿쿄대(立敎大)에서, 그리고 그가 전학[편입]해서 더 오래 다녔던 교토(京都)의 도시샤대(同志社大) 등 여러 곳에서 윤동주 서거 70주기 추모행사들이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한적한 행사로 치러진 것에 비해, 오히려 일본에서는 더 성대한 행사들이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다소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윤동주의 죽음과 관련해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일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런 적극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더욱 열성적이었던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행사가 순전히 일본인 자신들만의 열정에 의해 기획되거나 치러진 것이 아니란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일본 문화인[지식인]들로 하여금 윤동주 관련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도록, 또는 윤 시인의 비극적인 문제를 두고두고 자신들의 양심에 따른 고통의 문제로 여기게끔 만든 한국인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일본의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문화인]들의 그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오늘의 결실이 맺어졌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윤동주에 대하여 의문이 들던 몇 가지 문제점들이 근래에 다소 해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도쿄의 릿쿄대학 재학 시절 소위 까까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과 창씨(개명)의 사실, 그리고 겨우 한 학기 다니고는 다음 학기에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편입[전학]해버리고 만 일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가 방학이 되어 잠시 집에 들렀을 때, 배우 율 브린너를 연상시키는 까까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그 릿쿄대학 안에 소위 단발령이 내려졌던 때문이었다. 군국주의 교육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라누마 도추(平沼東柱)’란 그의 창씨(개명)도 같은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군국주의 교육의, 지시 일변도의 강압적 분위기 때문에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가 한 학기 만에 도쿄 지역을 떠나 교토 지역의 대학으로 옮기게 된 것도 알고 보면 릿쿄대학의 그 강압적인 군사교련 교육을 시급히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우리는 송몽규(宋夢奎)란 인물에 대해 더러 들어본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같은 북간도 태생으로 윤동주와 같은 해(1917)에 태어나 같은 해(1945)에 삶을 마감한, 윤 시인의 동갑내기 형(고종사촌 형)이자 친구였던 독립운동가 말이다. 그는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역시 같은 죄목으로 갇혀 있다가 윤동주가 죽은 직후 3주 만에 불귀의 객이 된 청년 문사이다. 그가 접견(면회) 온 사람들(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매일 밤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동주가 어떤 생체실험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항간에 떠돌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실제로 규슈대학 주도의 생체실험이 당시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오늘날 공인되어 있는 터이다.) 70년 전 차가운 일본 형무소에서 쓸쓸히 죽어간 윤동주 시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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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5-03-18
  • 총신대 이사회 한 발 양보해 분쟁 막아야
    예장합동측 총회와 총신대 재단이사회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붙이치고 있다. 총회는 지난해 제99회 총회에서 총신대 길자연 총장이 교단헌법 제3장 제2조 3항에 의거 정년이 초과했으므로 사퇴시킬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재단이사장과 재단이사들에 대해 모든 총회 공직을 정지시키킨다는 결의를 했다. 재단이사회는 이에 반발해 "총회 결의 원인 무효 및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해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재단이사회는 13일 재단이사 선출을 하면서, ‘총회운영이사회 선출, 재단이사회 선출’이라는 원칙을 깨고 독자적으로 이사를 선출했고, 또 총회에 맞서 관례를 깨고 총신대 졸업식에 총회장의 설교를 허하지 않았다. 이로써 일단 재단이사회가 승리한 듯이 보인다.그러나 이는 반드시 재단이사회가 승리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면 총회는 이미 총회실행위원회를 열어 총회 결의를 불이행한 재단이사 5명을 앞으로 5년간 공직 정지 결의했고, 재단이사장에 대해서는 소속 노회로 하여금 “목사직 정직”을 시행하라고 하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속 노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으면 총회는 그 노회에 대해 회원권을 정지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합동측은 교단의 분열 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합동측 총신대는 사학법에 의해 이사회가 중심이 된 다른 일반대학과 달리 정관 제1조 목적에 “총회의 지도하에 인류사회와 국가 및 교회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사회가 이 정관 목적조차도 인정할 수 없다고 버틸 수는 있지만,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대원이 중심이 된 총신대가 사학법만을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총회가 신학원을 통제해버리면 총신대가 인적 물적 자원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총신대가 이렇게까지 된데는 재단이사회가 총회법을 무시하고 총장을 선임한데 그 원인이 있다. 물론 총신대 이사회는 사학법에 의해 독자적으로 총장을 선임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총회가 설립한 대학을 이사회가 설립자를 배제한 채 운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단이사회와 합동측 총회는 한발씩 양보하여 분쟁을 막아야 한다. 합동측은 한국 장로교회의 장자교단으로 최대 교단이 아닌가.
    • 연지골
    • 사설
    2015-03-18
  •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망하는 사람들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명을 받아 목회길에 나서 오로지 믿음 하나로 30-40년 노력 끝에 꽤 큰 교회를 이루고 자녀들도 잘 교육시켜 먹고 살만큼 만들어 놓고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면 후임자를 놓고 갈등을 빚는다. 애써 이루어 놓은 교회를 남주기 아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 중에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면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세습하려 한다.이는 분명히 중세의 역사적 기독교가겪은 교회의 폐해이다. 이를 막아보겠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통합측과 감리교를 비롯한 몇몇 교단들이 소위 세습방지법을 만들었지만, 그것도 편법을 쓰게 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심지어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습을 단행하려는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 끝내 갈라지는 교회가 비일비재하다. 과연 이런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라 할 수 있겠는가? 마치 우리사회 종교집단 중 샤마니즘적 신앙을 가진 불교인이 돈벌이 수단으로 세운 '무당절간'처럼, 교회에도 주인이 있어 그 교회를 제 마음대로 사고 팔며 자녀에게 세습한다면 그런 교회를 누가 신뢰한단 말인가.그래도 그 교회가 그만큼 크게 된 배경에는 교인들이 그 목회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자로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 교회에 출석도 하고, 선교를 위해 헌금도 하는 것이다. 그 헌금이 대부분 목회자와 그 가족들의 노후나 장래를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면 누가 그런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하려 하겠는가 말이다.갑자기 늘어난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고 군소교단뿐 아니라, 버젓한 교단 소속 교회의 목회자들조차 이런 이유로 세속적 이익을 앞세워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다. 그러고도 그 잘못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교인들을 향해서는 교권을 앞세워 치리권을 행사한다.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장본인은 목회자 자신인데, 그로인해 다치는 사람들은 교인들인 셈이다. 이를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한다. 도둑이 주인을 향해 매를 든다는 뜻이다.그런데도 교단이 이런 목회자를 단속하지 못하니 어찌 개교회 분쟁이 끊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연지골
    • 사설
    2015-03-18
  • 데스크칼럼/서철원 교수의 주장 무엇이 진실인가?
    데스크칼럼 서철원 교수의 주장 무엇이 진실인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보수주의 신학자인 서철원 교수(총신대 전 부총장)가 지난 1월 28일 서울 종암동 종암중앙교회에서 개최된 ‘개혁신학을 말한다’라는 강연회에서 다락방 전도총회 류광수목사를 가리켜 “그의 가르침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구원(죄 용서)이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이번에는 “나는 류광수목사를 이단이라고 말한 일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서 교수의 이 발언은 무엇이 진실인가?과연 류광수목사의 설교에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구원이 없는가? 단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탄의 이름보다 강하므로 파워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고만 말하는가? 당연히 누구든 그 가르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원이 없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이단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의 대속에 바탕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구원이 없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한기총이 류광수목사의 이단 문제에 대한 재검증을 시작했다. 바로 서철원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 교수는 또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헷갈린다. 그러므로 서 교수가 공개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만약에 서 교수의 주장대로 류광수목사의 설교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면 개혁파와 한기총이 류목사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고, 서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이 분위기에 따라 예사로 남을 이단으로 매도하는 심각한 도덕적해이에 빠져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합동측이 산해원부활의교회 이태화목사의 신학을 검증할 때 서철원 교수는 신학위원이었다. 합동측은 연구 결과 이태화목사는 이단성이 없음이 확인되어 풀었다. 그런데 이단으로 지목된 산해원부활의교회를 방문했다는 이유로 제명한 류광수목사는 그대로 묶어두었다. 이건 또 어느 쪽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가?
    • 연지골
    • 기자수첩
    2015-03-06
  •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들-이 광 호 목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들 세상이 참 어지럽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조차 하기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버렸다. 현재의 형편은 어른으로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은 대개 어른들을 통해 삶을 배우고 답습한다. 어른들은 곧 자라나는 세대의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은 어른들로부터 과연 무엇을 배워 익히고 있을지 심히 염려스럽다. 이런 말을 하면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세상 어디나 대동소이할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른들이 본이 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도 이 세상의 여러 나라와 많은 지역에서는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아이들에게 본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른들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음 세대를 위한 소망의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통탄스런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이는 기독교계나 국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는 교회의 지도자라 칭하는 자들이 세상의 욕망에 더욱 집착하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마치 교회 위에 군림하는 권세라도 지닌 듯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교권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나아가 유명한 목사들의 간음, 사기와 횡령, 폭행, 심지어는 수십억대의 거액 도박 사건에 연루된 사건소식을 듣기도 한다. 그런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자들도 설교시간에는 다양한 미사여구를 섞어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교회에 충성하라고 열변을 토할 것이다. 저들은 마치 성공한 목사인 양 어린 교인들 앞에서 거들먹거릴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자들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지만 실상은 세상의 것들을 더욱 탐하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핑계 대며 이기적인 집단을 형성하거나 교권을 행사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교권에 맛을 들인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저항하는 행위라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요구한다는 것은 가증스런 위선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권세를 가진 자들은 온갖 더러운 부패로 얼룩져 있다. 청문회를 통해 저들의 모든 부정과 비리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들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 가운데 기독교인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부패한 자들이 자라나는 어린 세대를 향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요구한다면 코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아무리 더러운 부정을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일단 성공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묻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다음 세대를 짊어지게 될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부패한 삶과 성공한 삶을 예의 주시하며 자기의 인생을 저울질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우려가 따른다. 그렇게 되면 남에게 해를 끼치더라도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면 개의치 않는다. 이는 인간들이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경향성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제부터라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지도자들에게 더욱 높은 도덕성과 윤리적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국정에 참여하는 정치가들이나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자들을 용납하고 저들이 활보하는 세상이 지속되는 한 장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성숙한 어른들이라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자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에 처해 있다. 우리는, 지도자들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의가 사라지고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기독교계와 정계 지도자들에게 한마디 남긴다.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여, 이기적인 욕망에 눈먼 당신들이 다음 세대를 망가뜨리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3-06
  • 7개교단 이단대책 연합전선을 보고
    7개교단 이단대책 연합전선을 보고한국교회 주요교단들이 그동안 독자적으로 대처해 오던 이단대책에서 연합전선을 펴기로 했다. 예장 합동, 통합, 고신, 합신, 기감, 기성, 기침 등 7개 교단은 이대위 위원장들은 지난달 23일 합동측 총회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이단사이비에 공동대처할 것을 천명했다.주요교단 이대위 위원장들이 ‘한국교회 7개교단 이단대책위원장 모임’이라는 공식기구를 결성하고 이같은 공동대책을 천명한 데는 최근 이단들의 기성교회에 대한 물리적 행사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이들은 7개교단이 협력 단결하여 이단사이비 대책사역을 효과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동으로 이단경계주간을 준수하고, 법률문제 및 행정을 위하여 법률자문기구 등을 구성키로 했다.한국교회는 이단 문제가 심각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에 대한 대처는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이 친소 관계에 의해 멋대로 이단대책이란 이름으로 ‘이단대책비’를 거두어 사용해 왔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얼마가 어떻게 거두어졌는지, 또는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가 밝혀진 일이 없다. 매달 수천만원에 이르는 이단대책비가 어디에도 보고없이 이단감별사들끼리 나누어 먹었다.이제 교단차원의 공식적인 기구가 연합전선을 구성하였으므로 각 교단차원이나 개교회의 이단대책 지원비 등이 공개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운영된다면 훨씬 믿고 효과적으로 대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각 교단들이 한국교회 이단 문제 취급을 보면 명확한 ‘진짜 이단’과 이단으로 보기 어려운 ‘가짜 이단’을 뒤섞어 놓고 이들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이처럼 지금 교계에는 ‘진짜 이단’과 ‘가짜 이단’이 뒤섞여 있다. 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단감별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특정인에 대해 이단 시비를 제게했다고 하여 다 이단이 아니다. 교주우상주의와 교리적 이단 등 ‘진짜 이단’에 대해서는 과감히 대처하고, 특정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가짜 이단’들에 대해서는 교단의 결의만을 맹목적으로 내세우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함이 옳다. 여기에는 재검증 등의 조치도 필요하다.
    • 연지골
    • 사설
    2015-03-06
  • 교회의 권위
    교회의 권위 ◇한국교회의 미래를 놓고 비관론자와 낙관론자가 보는 견해는 전혀 다르다. 비관론자들은 한국교회의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한국 기독교가 곧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어떤 미래학자는 30여년 후에는 기독교인이 채 200만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내어놓는다. 그 근거로 6만개가 넘는 전국교회의 약 50% 교회에 주일학교와 중고등부가 없어 ‘다음세대’로 이어질 수 없고, 주요교단 교세가 매년 0.3-0.5% 정도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한편 낙관론자들은 세속주의화에 깊이 침전된 한국교회가 침체하여 '위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곧 망할 것이라는 추측은 섣부른 짓이라고 반론한다. 왜냐면 그 근거로 성령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망하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내세운다.◇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셨다. 태풍이 불고 큰 물난리가 나면, 나무가 쓰러지고 바위가 굴러가고 산등성이를 활켜가도 ‘반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다. 이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반석 위에 있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도전은 할지언정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해하지는 못한다. 성령님이 지키시기 때문이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이고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칼을 두려워 하여 ‘나만 남았는데 이제 나까지 죽여 여호와의 신앙을 멸하려 한다’고 한탄할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을 남겨두었다고 했다(왕상 19:18).◇그런데도 역사 속에서 어떤 국가나 지역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때 왕성했다가 소멸한 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교회의 세속화로 인한 내부의 부패이고, 다른 하나는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적 박해이다. 북아프리카와 시리아와 터키를 비롯한 근동 지역과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많은 교회가 소멸된 것은 이슬람의 정치적 박해에 그 원인이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는 허울일뿐, 사실은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도 교회는 어떤 모양으로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교회가 다시 부흥될 것이라 믿는다.◇교회는 최후의 승리자이다(계 22장).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위에 존재한다.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 따위는 마지막 때에 모두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만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1-22).고 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권위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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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6
  • 한기총의 딜레마, ‘재검증’ 몇 번 더해야 끝나나
    한기총의 딜레마, ‘재검증’ 몇 번 더해야 끝나나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이단 문제 대처에 일관성을 잃고 있다. 한기총은 지난 27일 임원회를 열고 1월 27일 정기총회에서 임원회에 맡겨진 이단 문제 재검증을 다시 조사키로 결정했다. 한기총엔 더 이상 이단이 없다는 것이 그간의 한기총 이대위의 입장이었는데, 또다시 이단 문제를 재론하는 것은 한기총이 이단 문제에 발목이 잡힌 채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명분은 한기총에서 갈라져 나간 한교연과의 통합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그런데 한교연이 갈라진 것은 한기총의 이단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기총이 류광수목사의 전도총회와 박윤식목사의 평강제일교회를 받은 것은 한교연 세력이 한기총을 떠난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한교연이 진심으로 한기총과 통합할 의사가 있다면 소위 이단 문제와 상관없이 통합부터 논의함이 옳다.그런데도 한교연은 그동안 한기총이 먼저 이단 문제를 해결하면 통합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러므로 한교연은 사실상 한기총과 통합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한기총의 이단 문제 재검증은 한교연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최소한 한기총은 몇 사람의 임원이 바뀐다고 그 이전의 결정이나 정책이 바뀌는 사조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갖는 기구이다. 그런데도 홍재철 대표회장 시절의 결정은 믿을 수 없다고 새로운 대표회장 체제에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할 필요가 있는 일인가? 이왕에 한기총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이영훈 대표회장이 다시 재검증을 한다하더라도 한기총이 류광수와 박윤식을 이단이라고 선언하지 않는 한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려면 이단의 재검증은 어디까지나 ‘결자해지’(結者解之)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단을 묶은 쪽에서 풀 마음이 없는데, 한기총이 류광수와 박윤식은 이단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해도 그것을 인정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이단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을 묶은 쪽에서는 자신들의 교권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풀 맘이 전혀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이단 시비의 오류이다. 그러므로 그냥 한기총의 입장을 천명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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