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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6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뜻 깊은 사건이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요,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허무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영생의 문을 여는 사건이요, 이 세상에서 악이 결코 승리할 수 없고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 바닷가로 가셔서 그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시고, 아침을 먹이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고향에 돌아와 고기잡이 어부가 되어 있는 베드로가 대답하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이 무슨 뜻인지 분간이 어려운 두 가지 점이 있다.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들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버리고 온 배나 어구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이들”이라고 번역하는 헬라어 “투톤”이 중성 복수 지시대명사이기 때문에 물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가 21:3에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선동을 한 셈이니까 아마 그렇게 해석을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의 사도직을 버리고 옛 생활로 완전히 돌아가 버렸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8:10). 또한 가능성은 여기서 “이들”(투톤)을 다른 제자들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너의 이 동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베드로가 그의 동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궁금한 일이지만 여기서 예수께서는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을 맞대어 베드로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묻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처럼 생각되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의도와는 이 상황에서 거리가 먼 것 같다. 또 다른 대답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일찍이 베드로는 예수께 목숨을 내놓고라도 주께서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요 13:36-38). 예수님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느 제자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강한 사랑과 열정과 충성심을 보인 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셨을 것이며,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그의 사랑과 충성심이 아직도 변함이 없는지 물으시는 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그의 양떼와 교회를 맡기시고자 하시는 것이다.둘째로 예수께서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사랑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각각 다르게 사용하시니 여기에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요 21:15-17 사이에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 가운데 사용된 “사랑하다”는 동사는 “아가파오”(α’γαπα、ω) 와 “필레오”(φιλε、ω)이다. 15절에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이들보다 나를 더 “아가파오”(α’γαπα、ω)하느냐? 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ε、ω) 하시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16절에 다시 예수께서는 “아가파오”(α’γαπα、ω)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필레오”(φιλε、ω)로 대답하신다. 17절에서는 예수께서 말을 바꾸어 “필레오”(φιλε、ω)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φιλε、ω)로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어휘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본문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리겐을 제외한 크리스소스톰, 시릴, 어거스틴 등은 물론 종교개혁 시대의 에라스무스 같은 학자도 이 어휘 사이의 의미있는 상이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트렌취, 웨스트캇, 프럼머 등이 이 어휘의 차이점을 주장하고 이를 이어 스피크, 렌스키, 헨드릭슨 등이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 버나드, 모펫, 불트만, 바르렛, 브라운, 모리스, 비스리-머레이 등은 두 어휘의 차이점을 부정한다.만일에 예수께서 “아가파오”(α’γαπα、ω)와 “필레오”(φιλε、ω)의 두 어휘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면 예수께서 “아가파오”(α’γαπα、ω)라고 물으시니 베드로도 “아가파오”(α’γαπα、ω)로 대답을 해야 옳다. 그러나 베드로는 꾸준하게 세 번 모두 “필레오”(φιλε、ω)로 대답한다. 세 번째는 오히려 예수께서 “필레오”(φιλε、ω)로 물으신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아가파오”(α’γαπα、ω)라는 어휘의 특별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물으셨다면 세 번째 질문도 역시 “아가파오”(α’γαπα、ω)로 물으셔야 했고, 이때야 말로 베드로는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에는 예수께서 다행히 “필레오”(φιλε、ω)로 물으셨으니 베드로는 안도의 숨을 쉬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근심이 되어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두 어휘 사이의 어떤 의미상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나눈 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예수께서 의미하는 다른 대답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의 양을 치라는 목자의 사명을 부여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곳이 아니더라도 “아가파오”(α’γαπα、ω)와 “필레오”(φιλε、ω)를 교환 사용하는 예가 많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요한 3:16, 16:27),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3:35, 5:20),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8:42, 16:27) 등이 그 예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아하브”라는 어휘는 “아가파오”(α’γαπα、ω)와 “필레오”(φιλε、ω)를 구별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쓸 때, 연인 사이, 부모 사이, 친구 사이에 물론 의미는 다를 수 있을지라도 “사랑하다”라는 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도 “아하브”라는 한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서 “아가페”(α’γα、πη)와 “필레오”(φι、λοs) 를 구분하여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다. 이 두 어휘는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를 갖고 서로 교환사용이 가능한 어휘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양을 치는 목자로 위임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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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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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5
-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 (마 27:51-5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 돌아가셨다. 그러자 두 가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첫째는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마 27:51). 둘째는 땅이 흔들리고 바윗돌이 갈라졌다.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읍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마 27:52-53).이 기사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사건은 우리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잘 받아들이고,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죄인과 하나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대부분 찬동하고 잘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지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는 기록에 대하여는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오늘날의 신학자들도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제기하며, 이상하고 신비로운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전설 (A.B. Bruce), 전설이 담긴 전통(A. Plummer), 신화적인 전설(W. Grundmann)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정상적인 경험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유일한 사건인 만큼 객관적인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R.T. France), 혹은 신학적 문제(L. Morris, C. Blomberg)라고 말한다.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않을 수 없다. 54절에 보면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두려워했으며 이 일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고백을 한다.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은 그 날에 있었던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의 휘장은 확실히 찢겨졌고, 지진은 분명 있었던 일이고, 무덤에서 잠자던 몸들이 일어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들은 이 날에 일어났던 일을 예수님과 연관시키고 하나님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인 만큼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도 능히 일으키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확실한 것은 마태 자신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학적인 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역사적인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었다면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관심을 갖는 신학은 어떤 것인가?마태는 휘장이 갈라진 사건과 무덤에서 잠자는 성도들이 일어난 사건을 함께 취급하고 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이 세 사건은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의 증인과 같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찢김으로 이 두 방을 나누는 장벽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담이 예수님의 속죄적인 제물로 자신을 십자가에서 바침으로 무너지고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히 9:1-28; 10:19-20). 셋째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동시에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의 죽음”을 가져와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성도들을 무덤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세력이 무너짐으로 성도들은 이제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셨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고전 15:54-57).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은 유대인들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인가? “거룩한 성읍”은 어디인가? 무덤에서 잠자다 일어난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몸이었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적인 몸이었을까? 아니면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처럼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받은 육의 몸이었을까(고전 15:42-49)? 또한 무덤에서 일어난 자들은 33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읍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들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사흘 동안 무덤에 있었단 말인가? 등의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고 명쾌한 해석이 필요하다.마태는 그의 복음서 곳곳에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에스겔서 37:12-14; 이사야서 26:19; 다니엘서 12:2에는 주님의 죽은 자들의 시체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데 마태는 바로 이 사건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20-23; 골 1:18; 계 1:5등에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살아나신 분”, “죽은 자 가운데 처음 나신 분”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분께 속한 자들이 함께 살아난다고 했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잠자던 성도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복음과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어긋나는 불일치점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성경 자체 안의 불일치 점에 대하여 우리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그리스원어신약” 비잔틴 본문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Byzantine Text Form, 1995)을 비롯하여 서양의 여러 역본들은 이러한 성경상의 불일치점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52절에 “또한 무덤이 열렸다.”에서 문장을 끊는다. 이어서 52하반절과 53절은 “그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읍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라고 읽는다. 무덤이 열린 것과 성도들의 몸이 일어난 것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처럼 읽고 있다. 말하 자면 무덤에서 몸이 일어난 시간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게 번역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NIV(1998), 개역 한글판, 한글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바른성경 등은 모두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고 읽으므로 구문상 무덤이 열린 것과 성도들의 몸이 일어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판 NIV는 “무덤이 열렸다.”에서 문장을 끊음으로 그 이전의 NIV 역본들을 수정하여 신학적인 불일치점을 조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 한글 성경도 이 같은 점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적절하다.마태 27:51, 마침 그때에 성전의 휘장이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마태 27:52, 무덤들이 열렸다. 그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마태 27:53,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읍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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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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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4
- 본문은 예수께서 그에게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힐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애게 자신이 금식을 하지 않는 아유를 세가지 비유를 들어 답변하시는 내용이다. 첫째는 결혼잔치에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같이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고, 세번째는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여 주셨다. 이 세 비유의 핵심은 각각 그 비유의 쌍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함께 붙이거나 같이 사용할 때는 둘 다 버리거나 쓸모 없이 된다는 점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예수님 자신의 경건 생활은 같이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변증하시는 말씀이다. 금식은 우리 육신에 속한 인간들이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를 나누고자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가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시는데 있어서 세 가지 유사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우리가 이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비유들 간의 유사성을 찾아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 이상으로 각각의 비유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강조점이나 독특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첫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결혼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예수님은 단순한 신랑이 아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요,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내심으로 사실상 신랑 노릇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신랑이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를 내는 것이 오랜 풍습이고, 심지어 하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법전에서는 결혼식에서 신랑이 잔치를 베풀지 않으면 그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가나 혼인잔치에 소개되는 예수님은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요, 포도주를 내신 보이지 않는 숨은 신랑이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내신 후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식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예식이었다(렘 31:31-34).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랑,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선포한 사건이 바로 가나 혼인잔치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혼인잔치가 열린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 신랑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임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경건생활은 마치 신랑과 신부가 나누는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먹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둘째 비유에서 헌 옷에 새 베 조각을 붙이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새 베옷 조각에, 그리고 유대인들의 금식을 헌 옷에 비유하신다. 만일에 생베 조각을 헛 옷에 붙일 경우 둘 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그래서 옷이 낡으면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옷에는 교복, 군복, 운동복, 그룹의 단복 등 여러 종류의 옷이 있는데, 사람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소속과 위치를 알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과 더불어 아담의 가죽 옷을 입고 아담과의 연대성 가운데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담이 입었던 낡은 가죽 옷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가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새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갈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존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낡은 옷에 생베를 붙이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아예 낡은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려고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새 옷을 입은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롤 옷 입고 사는 사람이다. 결코 헌 누더기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헌 옷에 새 베 조각을 붙이거나 새 옷에 헌 배 조각을 여기 저기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유대의 율법주의자들과는 구별된 존재들이다.셋째 비유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포도주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은 새포도주이고, 유대인들의 금식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아서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포도주의 화학작용이 오래된 포도주 보다 활발하고 신축성이나 팽창력이 강하여 그것을 담는 그릇이 신축성이 없으면 터질 수 밖에 없고, 결국은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버리기 때문이다. 금식은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고자하는 경건을 위한 한 방법으 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경건생활이 금식하는 유대인들의 경건생활과는 맞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라고 가르치셨다(요한 6:55-56).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야 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정한 교제, 그리고 그 교제를 지속하기 위한 경건은 금식이 아니라 도리어 먹는 것이다. 여기서 살과 피는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것으로 말씀을 먹고 마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경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경건, 말하자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원다면 금식 대신에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 말씀을 먹고 말씀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결론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금식하는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하며 나누는 거룩하고 인격적인 사귐의 삶이 더 경건한 생활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아담의 가죽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생베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낡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잔치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경건 생활은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말씀을 먹고 마시며, 말씀대로 사는 삶이 생명을 주는 진정한 경건 생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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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사람은 죄인을 용서하는 가운데 그의 의가 들어나는 것이며, 사회는 용서하는 가운데 평화가 긷든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죄값을 치러야 하며, 용서를 받아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항상 죄에 따르는 심판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죄지은 자만 그렇게 불안한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죄는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 원리는 죄의 용서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하여 우리의 죄 값을 그의 몸으로 치러주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명하신다(눅 24:46-47)..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신다.마태복음 18:15-35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이 죄를 용서하려면 일정한 절차를 밟도록 가르치신다. 먼저 둘이만 있을 때 타이르고, 그래고 듣지 않는 경우 둘째는 두세 사람의 증인들 앞에서 그의 죄를 확인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셋째는 교회에 공고하여 치리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사람의 죄를 광고하거나 소송을 벌릴 일이 아니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능하면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말씀의 취지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져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땅의 일이 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땅의 일은 땅에서 풀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땅의 일은 땅에서 끝나야 한다. 사람은 언제 이 땅을 떠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용서와 화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머뭇거리고 미뤄서도 안된다. 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땅에서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그들에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서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우리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일곱번 까지가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까지 해주어라”(22)고 대답하신다. 헬라어 성경의 “알라 헤오스 헵도매콘타키스 헵타”(마 18:22) 에 대하여 역본상 차이가발견된다. 한글 개역에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이며, 새번역은 “일흔번을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로, 개역개정판은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할지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영역본에서는 “Until seventy times seven”(일흔번씩 일곱 번까지, KJV, NAS, RSV), “Until seventy times seven and seven”(일흔번의 일곱 번 씩 그리고 일곱 번, ETH), “but seventy-seven times”(일흔 일곱 번을 하라, ESV, NIV, NRS) 등이다. 그러나 주로 최신 역본들은 일흔 일곱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이는 창세기 4:24 의 라멕의 말, “가인을 위한 복수가 칠배라면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칠배이다”라고 한 말의 헬라어 역본, 칠십인역에서는 “알라 헤오스 헵도매콘타키스 헵타”라고 읽고 있어서, 마태 18:22과 그 문장이 같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번역도 창세기와 맞춰서 칠십칠배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고대 근동세계의 시가서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숫자병행(Number Parallelism, n x 11의 형식)이다. 여기서 7이라는 숫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숫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칠일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2:2; 출 20:11). 따라서 7이라는 숫자는 가장 완전하고 (completeness), 전체적인 (totality)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제사장은 온전한 속죄를 위하여 짐승의 피를 일곱 번 뿌린다(레 16:14, 19). 스가랴 4:10은 일곱은 온 땅을 살피는 여호와 눈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계시록 5:6에서는 어린 양, 곧 그리스도의 형상은 일곱의 뿔, 온 땅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 일곱 영, 곧 일곱의 눈으로 기술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책망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논하며, 구약성경 구절을 7번 인용하고 있다(히 1:5-14). 요한 복음에서는 7개의 기적을 기술하고, “나는 ... 이다”(생명의 떡, 진리, 선한 목자, 포도나무, 등등), 소위 “I Am Saying” 도 일곱이고,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도 일곱마디였다(가상칠언). 칠이라는 숫자가 완벽함을 나타낸다면 칠십칠은 더욱 완전하고 충만하고 많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용서를 끝없이, 헤아릴 수 없이, 완벽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안 한다. 특히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이 더 용서를 못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용서하지 못하는 용서받지 못할 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왕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종이 그의 친구가 빌려간 돈을 값지 않는다고 학대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비유 속의 왕은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긍휼히 여겼어야 하지 않느냐?” 고 말하며, 그를 다시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넣으라고 명한다.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끝을 맺으신다. “너희가 너희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실 것이다.”(35).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신자들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자기가 용서하지 않으며, 용서하는 자 마저 원수로 몰아 증오한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을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울도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여라.”(엡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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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손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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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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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22
-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시까지 이 땅에 머물면서 하신 일은 주로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해주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들과 함께 걸으시며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자신에 관한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눅 24:27).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자신에 관하여 예언된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설명해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같이 저녁 식사를 먹으려고 할 때 예수께서 축복기도하시고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예수께서 그 자리를 뜨고 계시지 않았다. 이때 그들은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주실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안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는가?”(32)라고 말한다. 여기서 개역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라고 번역하고 있다. “풀어 주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디아노이고”를 번역한 것이다. “디아노이고”라는 말은 “열다”(open) 혹은 “설명하다”(to explain) “해석하다”(interprete)라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는 “디아노이고”라는 말이 세 번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기록하며 이 어휘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첫째는 3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스승의 죽음으로 실망과 좌절을 안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을 찾아가신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자신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2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기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눈먼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고, 성경을 가르치시고, 함께 잡수시고, 함께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어 그들의 육신의 눈을 열어 그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셨다. “디아노이고”(διανοι’γω)는 눈을 열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둘째는 성경을 열어주셨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눅 2:23에는 “디아노이고”(διανοι’γω) 가 “자궁을 연 모든 남자”(every male that openes the womb), 곧 "모든 첫 아들" (every first-born male)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성경을 해석해주시다” 혹은 “성경을 열어 주시다”는 두 가지의 번역 가능성이 있다. 예수께서 성경을 해석해주셨다고 번역한다면 설명이 쉽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을 찾아가며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며 영광에 들어가야만 할 당위성에 대하여 설명하시고(26), 나아가서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에 있는 자신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경을 열어주셨다”고 번역할 경우에는 설명이 달라진다. 이 번역에 의하면 지금까지는 성경이 닫혀있었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비로소 성경을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감긴 눈만을 뜨게 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감겨있었다고 한다면 성경은 예전부터 열려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문제는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성경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을 열어주셨다. 이 번역을 따르는 성경은 ASV, ESV, KJV, NIV, RSV 등이다. 그리고 “설명하다”(explaining)로 번역한 성경은 NAS, NET 등이다. 대다수의 역본이 예수께서 성경을 열어주신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일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뿐만 아니라 성경도 열어주셨다. 지금까지 닫혀 있던 성경을 열어주셔서 비로소 우리는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에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황금으로 가득찬 지하 동굴이 발견되어 비로소 그 동굴의 문이 열린 것과 같다. 그리하여 황금 보석이 가득찬 그 찬란한 동굴 내부가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 세계에 공개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성경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았다. 우리는 아무리 구약 성경을 읽어도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셔서 친히 감추어졌던 비밀의 문을 여시고, 자신이 바로 그 보화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동안 비밀에 싸여 있던 성경 안의 모든 비밀을 활짝 열어 재치고 찬란하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열쇠가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눈먼 제자들을 열린 성경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셋째로 45절을 보면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도록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마음을 열었다는 말에도 “디아노이고” (διανοι’γω)를 사용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 가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영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말씀하시며,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예수께서는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드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오경, 선지서, 시편을 열어가며 자신에 대하여 언급한 곳을 찾아 보여주시며 설명해주셨다. 그때에 비로소 제자들은 마음을 열어 말씀을 받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육신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어 부활을 믿게 하시고, 자신을 믿게 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성경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가르쳐 제자들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때까지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이 성경 가르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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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손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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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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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1
- 이사야 58장 6절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하는 말씀이다. 일부의 설교자나 성경 선생들은 경건 생활이나 병 고침을 위하여 금식을 권하며,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식 기도원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인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한국처럼 금식 기도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 금식을 기뻐하시는 것일까? 본문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주 일상적으로 하는 종교 활동의 일부였다. 금식을 함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보다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건의 방법으로 금식을 한 것이다. 히브리어 “촘” 혹은 “춤”이라는 말은 사람이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람이 금식할 때는 보통 삼베 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얹고, 울거나 애곡을 한다(더 4:16).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했다.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을 압제하며,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경건성을 과시하려는 위선적인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일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금식을 책망하신다.“보아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친다.오늘날 너희가 하는 금식은 너희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들리게 하지 못할 것이다.이것이 내가 선택하는 (개역: 기뻐하는) 그런 금식이냐?사람이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냐?사람이 갈대처럼 자기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를 펴고 재를 뿌리는 것을 네게 금식이라 부르겠으며,여호와가 가뻐 받을 만한 날이라 하겠느냐?“ (사 58:4-5)금식을 한답시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앉아 있으면서 다투고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행위는 위선이며, 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여호와께서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하나님께서 원하는 금식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신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 생활은 금식보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사회에서 압제 당하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체, 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식보다 사회 정의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 문맥의 전후를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금식을 장려하거나 금식을 격려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하는 말씀이다.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기뻐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모든 영역본은 “the fast that I choose”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 ESV. NIV. NASB. RSV. JPS 등 거의 모든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TNK 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 성경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금식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개역 성경 오역의 한 구절이 한국 성도들의 신학과 신앙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 성경 번역자들에게까지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경건 생활은 압제 받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금식한답시고 금식 기도원에서 즐비하게 누워서 금식 날자 계산하며 누가 더 오래 금식하고 있는지 그의 인내심과 체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많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금식을 통한 경건 생활과 치유를 강조하고, 또한 성도들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 구절을 암송하고, 입에 오르다 보니 금식은 어느 덧 한국의 경건한 성도들에게 일상의 생활로 정착해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분명 오역이며, 잘 못된 해석이다. 적어도 본문에서 하나님은 금식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께서도 그의 복음 사역 중에 금식을 하시지 않으므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의 비난을 받으셨다(막 2:18-22). 성경에서는 금식을 근본적으로 금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건강상 할 수도 있고 또한 경건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경건은 은밀한 가운데 그의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는 금식을 하되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라”(마 6:18)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앞에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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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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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0
-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그의 아내와 동침한 후 두 아들을 낳았다. 가인과 아벨이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다. 세월이 흘러 가인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왔고, 그의 동생 아벨은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답변이 궁금하다.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제사가 아담에게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제사법에 어긋난 것이라서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벨은 그의 양의 첫 새끼로 피의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설득력이 빈약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가인이 바친 제물이나 아벨이 바친 제물이나 다같이 히브리어 “민하”를 쓰고 있다. “민하”라는 말은 “선물”(gift, present)라는 의미도 있지만 “제물”(offering) 혹은 “희생”(sacrifice)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따라서 가인이나 아벨이 바친 제물에 대하여 다같이 “민하”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친 제물에 대하여 특별히 구별하신 것 같지 않다. 굳이 제물을 두고 말한다면 가인이 바친 땅의 열매에 대하여는 “미프리 하아다마”라는 단수를 쓰고 있는 반면, 아벨이 바친 제물, 양의 첫새끼들에 대하여 “밉브코롯 초노"라고 복수, 그리고 기름에 대하여도 “우메헤르베헨”으로 복수형으로 씌여있다. 즉 ”그의 양의 첫 새끼들과 그 기름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 한 마리만 바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첫 새끼들과 그의 기름들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벨은 분명 하나님께 아낌없이 풍성한 예물을 바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 주셨다는 믿음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점에서 아벨의 제사를 가인의 제사보다 더 선호하셨을 것이다. 히브리서 11:4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점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지 않았겠나 생각된다(레 1:3; 22:20-22; 삼하 24:24 등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본문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 뿐만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아벨에 대하여도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이라는 사람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물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벨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이다. 히브리어 본문은 동사, “받으시다”(regard, looke with favor)라고 번역하는 “샤아”는 사람과 제물의 두 개의 목적어를 동시에 취하고 있는 데, 이 목적어들은 “브”라는 접속사로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5절의 문장을 살펴보면 가인, 가인의 제물, 부정사, 그리고 주어를 포함한 동사의 순서로 나열된 것을 보면 가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은 제일 먼저 가인이고, 다음이 가인의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벨의 경우는 정상적인 순서로 동사, 주어(하나님), 목적어로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정상적인 순서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질이나 양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인이나 아벨이라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 것을 볼 수 있다.가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었는가? 그가 제물을 바치기 전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제물을 바친 후의 하나님께나 그의 아우 아벨에게 한 행둥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그는 매우 화를 내고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고 했다. “얼굴을 떨어뜨렸다”하는 히브리어는 화를 내거나 낙심되고, 좌절되었을 때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다(욥 29:24). 이와 반대는 민 6:26에서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백성들에게 은혜 베푸시고 평강을 주시라는 축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매우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는 자이다. 하나님께 반역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을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절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였으면 왜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을 유추해보면 가인은 이미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죄를 다스리라고 타이르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살해한다. 한글 개역판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마소라 사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BHS는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를 첨가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이 제안에 따라 현대의 역본들은 BHS의 제안을 따라 번역하여 문맥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고, 그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함께 나가자는 제안을 하고 결국 그를 쳐주였다는 것이다. 가인이 아주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살인을 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인은 본성이 악한 죄인이다. 이러한 사람이 아무리 양질의 다량의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바치는 예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됨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자식들은 형제 사이에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것도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예배 의식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형제 간에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이진 것이다. 앞으로 아담의 후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무섭고 비참한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서 폭력과 살인을 금하는 한계선은 무너져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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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손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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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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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9
- 예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간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 이는 그 분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4:1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렇다면 “보혜사”는 누구인가? 그는 물론 예수님 자신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타락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는 것이다(사 11:9).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종말적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찾아오시어 말씀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뜻을 계속 이어갈 제자들을 선택하여 가르치고 이들에게 말씀 사역을 위임하신다. 이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 혹은 “보혜사”를 약속하신다. 이 “다른 보혜사”를 가리켜 예수께서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고, 그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하실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을까? 보헤사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크레토스”를 번역한 것으로 “돕는자”(helper), “상담자”(counselor), 혹은 “옹호자”(advocator)의 뜻을 가진 말이다.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떠나시면 이들을 돕고, 상담해주고, 옹호해줄 자가 필요했다. 특히 옹호자가 필요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의 종, 곧 선지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유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는 지 그 권세의 출처를 물었다. 따라서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경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 곧 말씀의 대언자라는 것을 인정받은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사장들은 제자장의 가문에 태어나면 세습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다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The Spokesman of God)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신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였다. 그리하여 선지자를 가리켜 “여호와의 입”이라고 했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자”(대하 36:12; 렘 9:12; 23:16)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를 부르심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준비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대개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 선지자의 사명을 주신다. 이때 바로 권위가 문제 된다. 만일 그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가 사람들 앞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고 할망정 아무도 그를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자기 자신도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가 되려면 먼저 그가 하나님을 대면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그에게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도록 하신다. 품안에 넣은 손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든지, 던진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게 하든지 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보통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와 대면하게 하시고,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런 후 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고 말씀을 주어 가서 백성들 앞에 나가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는 자신의 연약한 인간 조건을 핑계 삼아 부르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달래서 결국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주시며 보내신다. 이제 그 선지자는 백성들 앞에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 경우 그가 선포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든지 아니면 자기도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해야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종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의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제자들은 바로 이 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데 보혜사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꾼으로 파송하는 장면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 백성들에게 내보시는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제자들에게 이제 당당하게 밝히신다. 그리도 하나님으로서 제자들을 세워놓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동안 그가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파송하는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 내 보내시는 사건과 그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 사건은 신약의 선지자를 세우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선지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야 하고 또한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아야 한다. 보헤사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만나서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약속한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을 재확인하시며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으라고 명하신다.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은 약속대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성령받는 모습이 주목되는 점이다. 첫째로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으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같은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꼭 그것이 바람이 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눈으로 볼수 있는 현상으로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나타났다. 제자들은 개역성경이나 유사한 한국의 성경들이 번역해놓은 것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 아니라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함을 따라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그들 위에 임하자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입이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들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려면 여호와의 혀가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혀들이 그들 위에 임함으로 그들은 각각 동시에 다른 방언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이 말하지 아니한 다른 말을 함으로 자기들의 능력을 초월한 능력을 체험했을 것이고, 이를 통하여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선지자로서의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그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임을 고백한다. 그는 마음이 부정하다거나 몸이 부정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지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화저를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댄다. 이것은 그의 입술을 지진 것도 아니고 그냥 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설명대로 이사야를 정화하는 의식 (purifying cere- mon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로서의 인치심의 의식 (sealing ceremon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는 분명 이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사 6:8)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대언자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의 발성기관과 관련된 지체에 어떤 자극을 주거나 접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그의 종으로 쓰실 사람이라는 인증을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의 제자들 위에 임한 혀가 각각 다른 방언을 하게 한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오순절 성령세례는 개인의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다는 말씀을 통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세례 시에는 ‘혀처럼 갈라진 불’이 임한 것이 아니라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임한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 3장 11절이나 누가복음 3장 16절에는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들이 꼭 오순절 성령세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주실 것이 성령 세례와 불세례로 이해한다면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주실 구원을, 불세례는 예수께서 가져오실 정화와 심판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세례시에 마치 불세례를 받은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앞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서의 제자들에게 신적 권위를 인치고 능력을 부여하신 사건이다. 이 일은 단회적이고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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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손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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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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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8
- 하나님의 종말적인 회복의 비전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이다(사 11:9). 이사야 2:1-4은 이 비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말일에 높은 산 위에 여호와의 전이 서고, 많은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그곳 시온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다.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온 세상은 전쟁을 그치고, 전쟁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세상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없는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새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 오시어 말씀 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선발하여 말씀을 전하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는 훈련을 시켜 말씀의 종, 새언약의 선지자로 기르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 말씀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주셨다. 우리는 그가 주신 이 마지막 명령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of Christ)이라고 지칭한다.그런데 이 명령이 복음서에서 조금씩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모든 민족에게(마 28:19)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도 “모든 민족에게”(눅 24:47)라고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양식과는 다르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요한 20:22-23)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위의 두 복음서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여기 마가복음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가야 할 곳이 “땅 끝까지”(행 1:8)나 “모든 민족에게”가 아니라 “온 우주”이다. 개역성경은 “온 천하”라고 번역하고 있고, 바른성경은 “온 세상”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어 “코스모스”(κ′οσμοV)라는 말은 이 지구를 포함한 “우주”(universe)라는 개념으로 더 많이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가야할 곳은 단지 이 지구, 이 세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라는 것이다. 장차에는 우주선을 타고 달이나 화성, 금성에도 복음을 전하러 가는 날이 와야 할 것 같다.또한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파새 하 크티시스”, 즉 “모든 피조물”(all creation)이라고 했다. 모든 민족이나 죄인들이라 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라고 말한 것은 신학적인 의미가 많이 내포된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은 그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까지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신 피조물을 사람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아래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피조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시 8편). 하나님-사람-피조물의 질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의 언약을 통하여 이러한 질서를 세우셨고, 이 언약을 통하여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도 하나님 앞에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언약관계란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고 충성해야 아담 자신이 복을 받고 또한 그와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도 다 행복을 누리지만, 반면에 언약에 충실하지 못할 때 아담은 물론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언약적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언약을 깨트려버렸다. 그리하여 아담 자신은 물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에(π′αs ‘ο κ′οσμοs ) 언약적 저주가 내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어버렸다(롬 3:19). 따라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억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적고 있다.“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된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롬 8:19-21)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도 포함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으로 자기들도 참 자유를 얻고 창조시 부여받은 본래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이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로 이러한 구속사적인 신학이 함축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마가복음의 지상명령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번역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우리는 전도나 선교를 생각할 때에 땅끝까지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온 우주에 나갈 생각을 해야 하고,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닿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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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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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7
-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조상이라고 가르치며(롬 4:12),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이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죽인 것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살리는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은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출발과 중심은 항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맞추어 져야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번제 준비를 하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으로 향하여 갔다. 그리고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그는 그의 하인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창 22:5)고 말한다. 히브리어 사본은 “우리가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하는 “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혼자 돌아오지 않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것을 하인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지라도 그는 분명 살아있는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시리라고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삭의 부활을 믿은 자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신앙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했을 때, 그는 근심이 가득하였고, 괴로워했다고 했다(창 11,12). 이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대로 그들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며, “이삭을 통해서 태어나야 네 자손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창 21:12)라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꼭 믿은 것 같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 이삭이 죽어 없어진다면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데도 근심하고 괴로워했던 그는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살려 도로 자기에게 주실 것을 믿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삭에게서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대범하고 주저 없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서 그의 하인들에게 번제를 드리고 “우리가” 돌아온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사람이다. 그는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의 이름까지 이삭으로 지으라고 일러 주셨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는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고, 그의 아내도 90세가 된 상황이어서 “내가 늙었는데 참으로 아이를 낳겠느냐?”고 속으로 말하여 웃었다고 했다 (창 18:13). 이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와께 불가능한 것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그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100세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았다. 도저히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목에서 꽃이 핀 역사를 아브라함은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고목과 같은 자기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들 이삭을 그분께 번제로 드린다 한들 어찌 다시 살리실 수 없겠는가 하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를 담대하고 용감하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결국 그를 우리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게 한 것이다. 2016년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부활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의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천지창조의 권능을 믿었기에 그의 아들을 주저함 없이 번제로 바칠 수 있었다.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용기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헌신도, 다 부활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살리신 이에게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왜 두려운가? 왜 우리는 “아니요”라는 말을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피붙이와 우리의 소유에 대하여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집착하는가?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 속으로 부활을 믿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훈련을 받지 못하고, 연습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빌 3:10-1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그는 분명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대한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고난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부활절을 맞는 우리도 이러한 인생 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부활신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삭을 살리시고,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나도 살리시고, 우리도 살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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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손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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