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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6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성도들의 “징계”에 대한 말씀은 항상 우리 신자들이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쩐지 부담스럽고,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징계”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이고, 시류를 따라 살다 보면 유혹에 넘어가 실수하고, 그래서 자책하고 좌절하고, 그때마다 징계를 받는다 생각하면 징계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담감이 없지 않다. “징계”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 혹은 “부정이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함”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나무라며, 경계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본장에 8번이나 사용되고 있다.그러나 헬라어 “파이듀오”(παιδευ’ω)라는 말은 사전에서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인도하고, 지도하고, 훈련하고, 교육하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bringing up(기르다), instruct(지시하다), train(훈련하다), educate (교육하다) 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훈련하다”(discipline)로 번역하고 있다. 반대로 한글 역본에서는 “징계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훈련을 마치 무엇을 잘 못하여 처벌을 받는 것처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파이듀오”라는 말은 “교정하다”(to correct), 혹은 “죄인에 대한 법적 처벌”(legal punishment of transgressor)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어휘의 제1차적 의미는 “훈련하다”이며, “징계”나 “교정”의 의미는 그 사용빈도가 낮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전후 문맥은 “징계”라는 의미보다는 “훈련’ 혹은 “교육”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훈련하듯이 그 사랑하는 자를 하신다고 하는 훈련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짓고 매를 맞는 처벌을 받드라도 “징계’라는 말보다는 “훈련”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정한 본문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징계라는 말은 번역상 합당하지 않다.모든 생물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로부터 생존을 위한 각종 훈련을 받아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훈련, 조직 사회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한 훈련, 각종의 특별한 전문적인 분야에서 지도자나 책임자가 되기 위한 전문인으로서의 훈련 등등 다양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별히 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아들같이 대우하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대우하시는 징표가 바로 훈련이다. 따라서 훈련이 없는 자는 참 아들아 아니고 사생자라고 선언하셨다(8). 사생자란 헬라어로 “노도스”(νοθο、V, illegitimate child), 곧 불법적인 자식, 아비가 없는 자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훈련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훈련을 징계라고 한다면 그의 백성을 아들로 여기시고 그의 자녀답게 살도록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어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이들과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고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왕이 되셨다. 그리고 시작하신 일이 바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아들을 훈련시키신 것이다. 400년이나 노예생활을 해왔던 이 백성이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산다고 가정해보면 이들이 과연 살아남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뼛속까지 베인 노예의 근성을 씻어내고 뽑아내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훈련은 먹는것과 쉬는 것이었다. 먹고 쉬는 일은 어린 아이 때에 부모들이 가정에서 제일 먼서 가르치는 일이다. 노예들은 먹고 쉬는 것이 항상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량의 만나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일손을 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이 40년 동안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가르쳐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여호와의 도”를 가르쳤다(창 18:19). 선별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훈련을 시키셨다. 이러한 훈련은 분명 감당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웃어가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심적으로 낙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3). 그래서 11절에 보면 “모든 훈련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이렇게 하나님의 훈련이 힘든 것이기 때문에 “징계”라는 말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럴수록 하나님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참고, 복종하라고 권면한다(5,7,9). 그러면서 하나님의 훈련과 육신의 부모의 훈련을 비교한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잠깐 동안 훈련하지만 영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훈련하신다고 했다(10). 육신의 아버지는 자식을 훈련을 시키지만 훈련의 목표나 훈련 프로그램이 없다. 자식을 위하기 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이고 강압적으로 훈련을 한다. 다분히 징계성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훈련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훈련하신다. 하나님의 훈련의 목표는 분명하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온갖 죄에 오염되고, 시류를 따라 자기 살길 찾기 위해 눈치만 예민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먹는 훈련, 쉬는 훈련, 그리고 말씀 훈련으로 그의 백성답게 살도록 훈련을 시키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시류를 따라 살지 않고 여호와의 도를 따라 성별되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말씀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이다.“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의 목표이고 이것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3년동안 제자들과 합숙하시며 훈련시키셨다. 말씀으로 말씀의 지도자가 되도록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요 15:4)고 명하시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성별된 생활을 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거룩하게 될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4). 궁극적으로 우리의 훈련은 죄와 싸우기 위하여 힘을 기르는 것이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죄와 더불어 싸우셨는지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훈련하여 성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먹을 것 가려 먹고, 때를 구별하여 적절하게 쉬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는 훈련이 우리 성도들을 성별된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9-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5
    우리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의 순서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천주교도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순서는 다르다. 우리 개신교도들은 구약성경을 흔히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라고 말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타나크”는 창세기부터 역대하라고 말한다. 말라기서가 구약성경의 마지막책이 아니다. 말라기는 성경의 어느 부분에도 언급된 이름이 아니고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도 아니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나의 사자”(my messenger)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말라기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그 의미가 “여호와는 나의 사자이시다” 혹은 “나의 사자”라고 알려져 왔으며, 그의 저작 연대도 에스라나 느헤미야 이전의 주전 475년에서 450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말라기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논쟁으로 구성된 특이한 양식의 책이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 하십니까?” 혹은 “어찌하여 너희가 ... 하느냐?” 라는 여호와의 문책성 질문과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 하였습니까?” 라는 이스라엘의 대응 질문과 각각 그들의 대답이 핵심을 이루는 책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지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에서가 형이지만 그의 동생,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사랑하며 공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멸시한 백성이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한 것이다. 율법을 무시한 것은 바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무시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5).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것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의 도리이다.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배반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혼 문제이다.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혼을 생각 없이 하면서, 이 역겨운 일을 하는 이들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여호와를 향하여 “무엇 때문입니까?”(2:14)하고 대들지만 실상 이들은 결혼의 의미를 깊이 모르는 것 같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결혼했으므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인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는 너와 네가 젊어서 얻은 네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네가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이며 짝인데 너는 그 여자를 배신하였다”(14)고 말씀하신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부터 결혼 예식을 마치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전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결혼이란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당사자는 반드시 계약서를 쓰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그 관계는 결혼으로 인정되지도 않았으며 법적 구속력도 없었다 (하무라비 법전 128조, 에수눈나 법전 27조). 성경에서도 이혼을 할 때 이혼증서를 써주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1-4; 참조 마 19:7, 막 10:4).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결혼 예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렘 31:32). 말하자면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결혼 관계를 맺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주신 계명은 일종의 결혼 계약서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말라기서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혼의 문제는 남녀부부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모독이고 배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젊어서 얻은 아내를 배신하지 마라”(15)고 명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나는 이혼하는 것과 자기 옷으로 포악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한다.”(16)고 말씀하신다. 한글 개역개정은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한다” 고 번역하고, 한글 새번역은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나는 미워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바른 성경이나 개역개정은 다같이 옷으로 포악이나 학대를 은닉하고 감춘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으며, 새번역은 아예 “옷”이라는 말을 빼버렸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의 문자적인 번역은 “그가 그의 옷위에 폭력을 덮었다”이다. ESV, JPS, NAS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covers his garment with violence”로 번역하고 있으나 NET “and the one who is guilty of violence”(그라고 폭력의 범죄가 있는 사람)으로, NIV는 “does the violence to the one he should protect”(보호해야 할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라고 번역한다. KJV은 한글 성경처럼 “one covers violence with his garment”으로 번역한다. 이들을 살펴보면 KJV이나 바른성경, 개역개정 등은 분명 오역이라고 해야 할 것 같고, NET, NIV는 해석적인 번역이다. 그렇다면 이혼과 관련하여 “옷 위에 폭력을 덮었다.” 혹은 “옷을 폭력으로 덮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고대 근동의 아라비아나 이스라엘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할 때에 자기 옷을 여자에게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손석태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 46). 성경에서 “옷을 덮는다” (룻 3:9; 겔 16:8)는 말은 결혼을 청하는 말에, “옷을 벗긴다”(렘 13:25-27; 겔 16:37, 39; 23:10, 26; 호 2:3)는 말은 이혼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레위기 18장에서 다루고 있는 성범죄에 대한 말로 “하체를 범하다”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다같이 “벌거벗음을 드러내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옷이란 결혼과 이혼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은유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옷을 던져 청혼을 했으면, 언약하고 가정을 꾸미고 그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며 사랑해할 터인데, 이혼을 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혼은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는 폭력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부부 당사자들의 언약 관계를 깨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역겨운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2:11). 젊은 사람들의 이혼율의 증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날에 결혼하여 함께 고생하며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기른 부부들의 황혼 이혼이 증가하는 이 시대에, 이혼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역겨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진심으로 자기 심령을 지켜서 너희가 젊어서 얻은 아내를 배신하지 마라”(2:15)는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9-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4
    히브리어와 우리 한국어는 서로 언어의 계통이 달라서 그것을 발음하거나 음역하는 데 상당한 고충이 따른다. 히브리어에 있는 자모음이 한국어에 없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히브리어 “알렙”이나 “아인”은 음가가 없다. 발음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한글로는 이 글자를 바꾸어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알렙”은 [a]로 “아인”은 [u]로 쓰고 있다. 비록 음가가 없어서 발음은 안 되지만 이를 기호로 정하여 글자의 유무를 알 수 있게 했다. 가령 “빛”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올”이라는 단어는 [’or]로 음역한다. 그러나 우리 한글로 “일”을 히브리어 음역하면 ([’or] 빛)인지, (‛or) 피부)인지, 혹은 ([‛ol] 멍에) 인지 알 수 없다.특히 “S”를 주축으로 하는 히브리어 글자는 “삼멕”(s), “싸대”, “신” , “쉰”, 등이 있다. 이들을 음역할 경우 “삼멕”(s, samekh)은 “s”, “싸대”(,.sadhe)는 “”, “신”(, sin)은 “s、”, 그리고 “쉰”(, shin)은 “sˇ”으로 쓰고 있다. 여기서 한국의 학자들은 (sadhe)의 한글 음역을 “싸대”가 아니라 “차대”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정확한 음가를 한국어로는 표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 네 글자를 모두 [ㅅ]음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란을 가져온다. 가령 선지자 이사야는 “아모츠”의 아들이다(사 1:1).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는 “아모스”이다. 전혀 다른 이름인데 개역 성경은 다같이 “아모스”로 표기하고 있다. 바른성경은 이를 구별하여 이사야를 “아모츠”의 아들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도 “”(s)과 “쉰”을 구별하여 발음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사기 12장에 보면 입다가 사사로 있을 때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 나루를 점령하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인지 에브라임 사람인지 신원을 확인하며 “쉽볼렛”을 발음해 보라고 해서 “쉽볼렛”이라고 하면 살리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죽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이“쉰”발음을 하지 못하고 “신”으로 발음한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도 “살”과 “쌀”을 구별하여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개역성경에는 이를 구별하기는 했지만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음역하고 있다. 음가 “s”의 “삼멕”을 “ㅆ”으로 표기하고 있는 데 이는 너무 거리가 멀다.이뿐 아니라 성경에는 신 광야와 친 광야가 나온다. 영어 음역으로는 sin 과 zin으로 음역하고 있다. 신 광야는 출 16:1에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흔히 만나 이야기(Manna Narrative)라고 불리우는 출애굽기 16장은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자 이집트에서의 풍족했던 생활을 그리워하며 여호와를 원망하자,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다. 바로 이곳이 신 광야이다. 이집트 나와서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다. 출 17:1에 보면 신 광야를 떠나 이스라엘은 르비딤에 이른다(민 33:11, 12). 그러나 “친” 광야는 신 광야의 동북쪽 네게브 밑에 있다. 홍해를 건너 신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여호와의 도움으로 르비딤에서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언약을 맺는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여 바란 광야에 도착하게 되는 데 모세는 이곳에서 각 지파별로 한 명씩 12명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한다. 이때 이스라엘의 12지파 지도자들이 가나안 정탐을 위해 출발한 곳이 바란 광야이며, 그들의 첫 기착지가 바로 “친”광야이다(민 13:21; 20:1; 27:14; 33:36; 34:3, 4; 신 32:51; 수 15:1, 3.). 따라서 신광야와 친 광야는 지명 뿐만 아니라 실제 지역도 전혀 다른 곳이다. 그러나 개역성경, 표준 새번역, 그리고 개혁개정판 모두 신광야와 친광야를 “신광야”로 표기함으로 마치 신 광야와 친 광야가 같은 곳으로 오해를 갖게 한다. 영어에서는 “wilderness of [Sin]” 과 “wilderness of Zin”으로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8-2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3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이야기의 중심 주인공을 누구로 설정하 느냐에 따라 성경의 이해와 해석과 적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성경 이야기의 감독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성경 이야기 가운데 등장하 는 인물이나 주인공은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거나 대리인, 혹은 행위자 (Agent)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주인공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감 독자나 제작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누가복음 5장은 사람 낚는 어부, 예수께서 고기 낚는 어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감독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셨을 때, 즉석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 달라는 청을 한다. 흔히 이 경우 우리들 가운데는 베드로가 예수께 불손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불손한 태도에 대한 용서를 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꽤 많다. 베드로는 나름대로 갈릴리 바다의 물길과 물고기들의 생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 같다. 예수께서 그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눅 5:5)라고 대답했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은근히 “어부인 우리가 밤새도록 노력하였어도 고기를 못 잡았는데 목수인 당신이 어업에 대해서 뭐 알아요. 그러나 선생님 말씀이니 한번 해보지요.”하고 마지못해 그물을 내려 그의 체면이나 세워 주겠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을 때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보다 훨씬 물고기를 잘 잡은 위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책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고, 떠나주실 것을 구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편의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를 도와 준 베드로에게 감사의 표시로 물고기를 잡아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을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계셨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일찍부터 고기잡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그물을 씻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배 두 척을 눈여겨 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어 육지에서 떼어주기를 청하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에 있는 두 척의 배 가운데 베드로의 배를 지목하시고, 베드로의 배에 올라 그의 도움을 청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그의 배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심으로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 말하자면 신적인 존재,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성경을 잘 해석하고 가르치는 선생, 병든 자기의 장모를 치료해 준 의사,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중적인 인기와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 그리고 넓고 깊은 호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 그래서 자기와는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초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출애굽 후 여호와 하나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하여 간청하는 가운데 여 호와께 그의 영광(“카보드” )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출 33:18). 여호와께서는 이 말을 모 세가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나를 보고서는 살 사람이 없으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20)라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칠십인역(LXX)은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여주소서”를 “주님 자신을 보여주소서”라고 읽고 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바위틈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그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셔서 모세는 여호와의 뒷모습만 볼 수 있게 해주신다. 모세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산에서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은 여호와의 영광을 반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조차도 힘들어 모세는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려야 했다(출 34:29-35).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베드로는 지금 “선생”이 아닌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한 말은 자기의 불손한 행동에 대한 죄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말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 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그의 신적 권능을 과시하여 베드로가 현재 하나님을 직접 대면 하고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에 당당하게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고, 베드로도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했었기 때문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 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를 떠나라고 말씀하였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이제부터 너는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분명 물고기를 낚는 베드로에게 앞으로는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뜻일 것이다. 물고기를 낚는 일은 베드로의 생업이다. 물고기를 낚아서 그와 그 가족들이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할 것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낚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 일은 먹고 사는 일과 같을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바다에 빠진 무리로 간주하시고, 낚시꾼이 물고기를 낚시로 낚아 올리듯이, 베드로를 사람을 낚아 올리는 어부로 비유하는 것이다. 이 일은 생업과 달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생업은 사람이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는 일이겠지만 사람을 낚아 살리는 일은 분명 사명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처럼 이른 아침에 바닷가에 나와야 고기를 낚든, 사람을 낚든, 낚시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택하시고, 베드로에게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계시하시고, 그에게 사람을 살리는 사명인으로 살도록 인생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인생길의 전기를 마련해 주신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 낚는 법을 배우고,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명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실상 이날 아침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베드로라는 대어를 낚으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8-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2
    “멜기섹덱”이라는 말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살렘 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창 14:18). 전통적으로 “살렘”은 여부스 족속의 요새, “예루살렘”으로 알려졌다. 소돔에 살던 롯이 가나안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사병을 동원하여 단까지 추격하여 그의 조카 롯은 물론 그와 함께 사로잡힌 모든 자를 구출하여 귀향한다. 이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개선하는 아브라함에게 마중 나온다. 창세기의 본문은 멜기세덱을 가리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한다. “가장 높으신 하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엘 엘리온”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엘 오람”(영원하신 하나님), “엘 사다이”(전능자 하나님), “엘 엘로헤이 이스라엘”(엘, 이스라엘의 하나님) 등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이 예배하고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는 고대 근동 세계의 왕들처럼 백성을 통치하는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가 전쟁에서 개선하는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예물을 드리고 축복한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이시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너의 원수를 너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송축하라.”(창 14:19-20)그러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모든 것 중에서 십일조를 드린다.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물을 받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그는 누구인가?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흔히들 “나의 왕”이라는 히브리어 “멜키”라는 말과 “의롭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체덱”의 합성어라고 말한다. 따라서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첫째, 나의 왕은 의롭다. 둘째, 나의 왕은 체덱이다. 셋째, 밀쿠(milku)는 의롭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세덱”이나 “멜기”는 신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 히브리서 7:1-3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한 자이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고, 다음으로 살렘 왕, 즉 평강의 왕이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 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1-3)그는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분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7장에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반차”는 반열, 품계, 신분, 등급의 차례란 뜻을 가진 한자어이다. 헬라어 “탁시스”라는 말은 히브리어 “디브라”를 번역한 것으로 “순서”(order), “계열,” 혹은 “배열”(arrangement)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시편 110:4에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분명 메시야의 제사장적 신분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 제사장직은 심지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드릴만큼 높고 위대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따른 아론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론의 육신적인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 아니며,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멜기세덱의 계열에 따른 제사장인 것이다. 아론의 계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구별된 제사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불순종하고, 타락한 아담 부부를 찾아오시어 언약적 저주를 퍼부으시며, 그들에게 사망을 선고하고 벌거벗을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히셨다. 일종의 사형수에게 입히는 수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한 사망 선고를 내리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기뻐하신던 세상이 하루 아침에 그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고 심판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대신한 새아담을 세워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고 그가 만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려는 구원 계획을 세우신다. 여자의 후손으로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뱀의 머리를 짓밟게 하고,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겠다는 원복음을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 여자의 후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완성될 것이다. 그러면 이 여자의 후손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첫째, 그는 여자에게서 낳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뱀을 짓밟고 승리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뱀은 사람을 유혹하고 범죄하도록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의 앞잡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은 사실상 사단과 대적하여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여자에게서 낳은 영적존재, 그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여야 한다. 둘째,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루어야 할 자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그의 속죄가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었다면 다시는 죄와 죽음이 세상을 주관하지 못하여야 하고 새아담을 통한 새로운 언약관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새아담은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 넷째, 이러한 대속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여자의 후손은 이 세상의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피조물 중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다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고 모두가 다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새 아담을 창조하시거나 하나님 자신이 새아담이 되는 수 밖에 없다. 다섯째,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도 없고, 또한 죄인들이 당장 이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고, 또한 제사제도를 주셔서 대속적 죽음과 죄로부터의 해방을 실감하고, 소망하도록 하셨다. 제사에는 성전, 제사장, 제물이 잇어야 했다. 제사제도, 즉 성전과 제사장과 제물은 다같이 새아담에 대한 모형이다. 따라서 제사장인 새아담은 여자의 후손으로 신적 존재여야 한다. 새 아담은 바로 멜기세덱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멜기세덱은 옛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는 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정체는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과 같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어야 한다. 그는 우리 인간 역사를 초월한 존재, 바로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오신 제사장인 것이다. 그에게는 족보나 반열이나 계열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아브라함의 경배와 십일조를 받으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분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7-2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61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을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든 왕이었다. 그가 이룬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는 분명 고대 근동 세계에서 보기드문 웅장한 성전을 건축했다는 점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지칭한다. 그가 가진 지혜에 대한 명성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심지어 시바의 여왕이 그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올 정도였기 때문이다(왕상 4:34). 그러나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했던 것은 사람들의 고충을 “들을 수 있는 마음” 혹은 “들을 수 있는 심장”이었다.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했다고 했다(왕상 3:3). 아직 성전이 없었던 때라 그는 기브온에 있는 큰 산당에 가서 그 제단에 일천의 번제물, 곧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물을 드렸다고 했다(4). 밤에 여호와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구해라”고 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왕에게 그의 구하는 바를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배려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의 부친 다윗에게 베푸신 인애를 감사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이제 주께서 주님의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세우셨으나 저는 아직 어린 아이라 출입할 줄을 모릅니다. 주님의 종은 주께서 택하신 큰 백성 가운데 있으며, 그들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고 헤아려 볼 수도 없으니, 여호와께서 주인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누가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왕상 3:7-9). 여기서 “나는 아이라 출입할 줄 모릅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관용구로 “나는 지도자로서의 기량이 부족한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의 백성을 주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의미보다는 주의 백성을 돌보는 주의 종이라고 낮추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주의 많은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라고 청한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레브 소매아”의 문자적인 번역은 “듣는 마음” 혹은 “들을 수 있는 마음”이다. 바른성경과 새번역은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개역개정은 “듣는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요 영역본은 “이해심” (understanding heart, KJV, ESV, JPS, NAS,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해야 할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주고 재판하는 일로 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레브 소매아”(들을 수 있는 마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하여 솔로몬이 구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마음이었으며, 마음 중에서도 듣는 마음을 구했다. 솔로몬은 재판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해박한 지식이나 다양한 경험으로 축적된 삶의 지혜가 아니었다. “듣는 마음”이었다. 백성들의 억울함과 고충을 들어 줄 수 있는 마음이었다. 솔로몬은 백성들의 고충과 억울함을 마음으로 듣고, 선과 악을 분별하여 재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한 것을 부귀나 장수나 원수 갚는 것이 아니고, “옳은 것(혹은 정의)을 들을 수 있는 이해 (혹은 분별력)”(understanding [or discerning] to listen what is right) 이라고 말씀하시고, 12절에는 그에게 “지혜롭고 이해하는 (혹은 분별하는) 마음” (wise and understan ding [or discerning] heart)을 주시겠다고 응답하신다. 한글 역본들은 11절을 “정의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 (바른성경),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개역개정),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 (새번역) 이라고 번역하고, 12절은 모두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 (바른성경, 개역개정, 새번역)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들은 솔로몬이 구한 것이나 하나님께서 솔로몬애게 주신 것이 다 지혜라는 말로 두리뭉실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좀 더 정교하게 말하고 있다. 솔로몬은 많은 백성들을 재판해야 하는 왕으로서 백성들의 고충을 들을 수 있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분별력을 구한 것이다. 아무리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놓고, 백성들의 고통소리를 듣는다할지라도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날카롭지 못하면 정의로운 재판을 하기 힘들 것이다.성숙하지 못한 왕이나 지도자는 백성들의 말을 듣기 보다는 백성들에게 자기 말을 많이 하고 자기의 주장을 듣도록 강요한다. 남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자이다. 유치한 자이다. 솔로몬이 자기를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참다운 지혜는 남의 말을 잘 듣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왕기상 3: 16-28에 나오는 솔로몬 왕이 어린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는 재판 이야기도 아기 엄마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명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다. 하갈은 그를 학대하는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사경을 헤매는 중에 그를 찾아오신 여호와의 천사가 “보아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라. 여호와께서 네 고퉁을 들으셨기 때문이다.”(창 16:11)라고 말씀을 듣는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라는 뜻이다. 사람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시고, 남모르는 고통을 들을 줄 아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재판장이시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백성을 재판하는 자로서 들으시는 여호와의 마음을 구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참 지혜로운 지도자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7-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60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에서 400년동안이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으시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노예가 여호와의 백성답게 살도록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자 금송아지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낸 신으로 생각하고 그것에게 절하고, 그것에게 재물을 바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진노하시고 레위인들을 시켜서 삼천명을 진멸하시고, 더 이상 이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 진노를 달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간구하며,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 주시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모세에게 그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그의 앞서 보내어 그의 길을 인도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과 함께 가는 중에 목이 곧은 이 백성을 멸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가지 못하겠다는 것이다(출 33:1-3). 이 참담한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은 모두 진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장막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모세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회막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금방 이들을 용서하고 받아 주실 것 같지 않다.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시며 그와 함께 갈 자를 알려주시지 않았음을 불평하며, 그가 여호와 앞에서 은총을 받았다면, 주님의 길을 보여주시고, 주님을 알려주시며, 그가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자 임을 사람들이 알게 해주시고, 그의 백성을 기억해 주시라고 간청한다(출 33:12-13). 모세의 간청을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내가 친히 가겠으며, 너를 편안하게 해 주겠다.”(14)고 응답하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편안하게 해주겠다”고 주신 말씀은 분명 모세를 달래는 말씀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친히 가겠다”는 말씀은 다음에 이어지는 모세의 응답을 보면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달래는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런가?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이 갈 것이다.”(파나이 에레쿠)라고 말씀하신다. 더욱이 “함께”라는 말은 있지도 않다. 단순히 얼굴이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영역본들은 거의 “나의 현현이 너와 함께 갈 것이다” (My Presence will go with you.)라고 번역하고 있다. “얼굴이 가다”라는 의미는 얼굴을 보여준다는 말로 하나님의 존재나 나타나심을 감지할 수 있는 천사의 출현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현상, 혹은 그 장소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그림자, 발자국, 혹은 현대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명함이나 사진과 같은 의미라고 추측된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간헐적으로 하나님의 그림자나 자취를 보여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신 것을 알 수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청한다(18). 여기서 주님의 영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나를 보고는 살 사람이 없으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20)라고 대답하신다. 앞에서 언급했던 똑같은 말로 “얼굴”이라는 말을 쓰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시니 그 뜻은 “현현”(Presence)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 같다.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보드”를 번역한 것으로 “무게가 나간다” “빛나고 장엄하다” “영예롭다” 등의 의미를 가진 어휘이다. 얼굴보다는 더 크고 온전하며 장엄하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달라는 의미인 것 같다. 따라서 칠십인역(LXX)에서는 “주님 자신을 내게 보여주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여전히 모세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원하는 대로 모든 선한 것을 다 보여주시겠다고 대답하시지만, “나를 보고서는 살 사람이 없으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33:20)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틈에 숨겨 두시고, 모세 앞을 지나가심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등만을 볼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깨뜨린 돌 판을 대신하여 새로운 돌 판을 깎아 오라고 명하신다. 그가 새 돌판을 깎아 가지고 시내 산에 올라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모세의 앞을 지나가셨다. “여호와이다. 여호와이다. 긍휼히 여기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애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며 수천 대까지 인애를 베풀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만 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버지의 죄를 자손 삼 사대까지 벌하는 하나님이다.”(34:6-7)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악을 자손 삼 사대까지 벌하시겠다고 하시니 모세는 다시 엎드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구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본문은 계속해서 성막 만드는 사건으로 40장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다 만들었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길을 가는 동안에 구름이 성막 위에 떠 오를 때에는 앞으로 나아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른 날 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모세가 그토록 간절하게 구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에 임하시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보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는 데,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하신 분의 영광이었으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하였다(요 1:14). 여기서 “계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케노센”을 쓰고 있는 데 이는 “장막을 폈다”(tabernacled) 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성막으로 임하신 것이며,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인애와 진실이 충만하다고 하셨는 데 그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께 충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께 보여달라고 간청했던 그 영광이 결국은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는 죄를 짓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갈 수 없게 되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히 그들과 동행해주시기를 구하며, 그들에게 보여주시라고 했던 참 하나님은 이제 성막에 임하셨으며, 결국은 예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그의 성막을 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 영원한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모세가 구했던 그 영광은 바로 우리 안에 와 계시는 것이다.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보다는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는 약속의 땅을 원했다. 하나님이 없는 축복보다는 하나님 그 자체를 더 원하는 지도자였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7-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9
    개신교에서는 2017년 6월 4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정하고 성령 강림의 의미를 특별히 되새기며,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사명을 새롭게 하는 특별한 행사를 한다. 필자는 이미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는 책을 통하여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본문 사도행전 2:3의 번역상 오류 문제와 이에 수반되는 여러 신학적 잇슈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들을 제안해 놓았다. 이 지면을 통해서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사도행전 2장 3절은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임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을 하자, 세계 각 곳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자기의 모국어로 사도들의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첫째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한 것이 강하고 세찬 바람이 분 것이 아니라 강하고 세찬 바람 소리가 났다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 불이 아니라 마치 불처럼 보이는 갈라진 혀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람 소리는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출현을 알리는 팡파래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혀가 임하고, 제자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위에 임한 혀와 제자들 사이에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추측케 해준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를 가리켜 “여호와의 입”이라고 불렀으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실 때에 이들의 입술에 손을 대시므로 마치 “너는 내 입이다”라고 도장을 찍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렘 1:9; 사 6:6-8). 부활 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대선지자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신 모든 말씀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쳐야 할 제자들에게는 (마 28:16-20)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인증하는 권위와 능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갈라진 혀들이 임하고 성령이 충만한 제자들이 다른 나라 말들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입술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직접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너희는 입이다”라고 성령으로 인을 치고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새언약의 선지자로 이들을 세우는 위임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방언했다”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그롯사”라는 말은 보통 한글로 “방언”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언어”(language)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날에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 본국 말로 들었다고 했고(6), 11절에도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우리 자신들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분명 사람들이 통역 없이 알아듣고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방언이라고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다른 언어로 한 말은 분명 고린도 성도들의 방언과는 다른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은사”, 헬라어로 “카리스마”를 쓰고 있는 데 “선물”(Gifts)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이지만 성령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그냥 “은사” 혹은 “은사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의 선물”이라고 할 때는 “도레아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라는 말을 쓴다. 이 때 선물은 중생이나 성화와 같은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행 2:38).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보통 은사라고 할 때는 “카리스마”,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은 “도레아”를 사용한다. 따라서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언어인 반면, 고린도 성도들이 했던 방언은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오순절 성령세례가 제자들을 선지자로 세우는 위임식이라면 첫째는 이것은 의식이기 때문에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둘째는 성령세례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말할 수 없고, 셋째는 성령세례가 방언을 동반한다거나 방언을 함으로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표지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중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시는 제2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넷째로 오순절 성령세례가 교회의 시작이라거나 혹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열리는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게 신학적 의미를 과장하는 것이다.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새 언약의 선지자를 세우는 위임식인 만큼 성령세례를 받을 때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의식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때 다른 언어로 말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들을 새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 조롱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이고,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기들이 요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보내신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요엘서에 약속된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변증했다(행 2장). 오순절의 방언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는 사건이며, 제자들 자신도 다른 언어로 말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신자들 가운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세례가 영광스럽고 의미있는 의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은 언제 성령세례를 받는가?우리 신자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가 되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는 교회의 지체가 된다. 이때 성령은 우리 모든 신자들을 그의 지체로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고, 띠띠어 묶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몸에 여러 지체들이 핏줄과 신경으로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듯이 성령이 지체된 우리를 띠띠어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세례 때 성령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물세례 때 제자들을 선지자로 위임하는 일도 한다.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며, 메시야로서의 추임식을 하셨다. 그리고 대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제자들도 사도행전의 말씀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선지자로서의 인증식을 가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지자적 사명을 주시며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그가 가르치신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세례와 선지자적 사명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6; 소요리문답 제 91문),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고, 선지자적 직분과 사명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제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민 11:29; 욜 2:28-29; 행 2:17-18).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동안 신자들에게 물세례를 베풀면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또한 물세례를 베풀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며, 선지자적 직분과 사명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신자들이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내며, 성만찬에 참예하고 공동회의 선거권을 갖는다는 것 정도를 알고 행하는 것 외에는 세례받은 신자로서의 하는 일이 없다. 예수께서 온 세상에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주고 가르치라는 선지자적 사명은 오로지 해외에 선교사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생각해왔다. 우리 성도들은 물세례를 받으며, 성령세례를 함께 받는 것이며, 아울러 선지자로서의 직분과 사명을 받는 것이다. 선지자란 입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이다. 개신교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세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짐과 동시에 선지자적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다시 부흥과 성장의 역사가 이루어 질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6-2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8
    본문은 그 양식이 구약 성경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기사의 양식과 비슷하다. 본문은 대선지자로 오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새 언약의 선지지자로 임명하시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참조)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그 천지창조의 권세를 가진 주께서 주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제자 삼아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Disciple Maker가 되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아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다. 제자를 양성하는 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복종해야 할 명령이다. 이 명령은 믿음이 좋은 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지만 그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16). “모든 민족”이라고 번역하는 헬라어 “에드노스”라는 말은 “민족”(nat ion)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람”(people)이라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따라서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가서 그들을 제자 삼아라고 번역한다면 우리가 제자 삼을 대상이 더 분명해진다. 모든 혈연이나 지연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제자를 삼을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이나 족속이라고 번역하면 사람들을 집단적인 단위로 생각하게 되어, 제자 삼을 대상이 물 건너 멀리 있는 대륙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너희는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막 16:15)라고 명하고 있다. 여기서 “온 세상에 ”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코스모스”라는 말은 Uni verse우주라는 말이다. 우주도 그냥 우주가 아니라 “온 우주” 즉 “코스모스 합판타”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가까운 이웃 집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지구상 아프리카 오지는 물론 더 나아가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 화성, 금성, 더 나아가 이 태양계를 벗어나 가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곳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일을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바울의 이 회복 사상은 서로 맥이 통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이 땅에 속한 피조물 만이 아니다. 저 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이 그 대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우선 내 이웃 사람에게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제자는 어떻게 삼는 것인가? 본문의 주 동사는 물론 제자 삼으라는 “마데튜오”의 부정과거 명령형인 “마데튜사테” 이다. 그리고 이를 수식하는 단어로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치라”는 3개의 분사형이 따르고 있다. 말하자면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침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가르치라는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사가 부가되고 있다. 개역성경에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그보다는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첫째는 가라는 말씀인데 이는 향방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라는 말씀은 아니다. 오다 가다 만난 사람 붙들고 제자 삼겠다고 덤벼들라는 말씀은 아니다. 헬라어 “포류오마이”라는 말은 어떤 사명이나 목적을 가지고 간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마 2:20; 8:9).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불러 세우셨다고 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먼저 우리는 마음에 두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를 마음에 두고 만 있어서는 제자가 될 리 없고, 발걸음을 떼서 찾아 가서 만나라는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확실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둘째는 세례를 주라는 것이다. 세례란 예식이다. 물을 머리에 뿌리거나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의식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아무에게나 허용된 것이 아니고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를 주와 그리스도 받아 들이고 모시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 믿고,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결단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고, 예수께서 머리가 되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가 된다. 마치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이 근육과 혈관과 신경과 경락이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룬 것 같이, 우리는 성령으로 서로 연결된 지체들인 것이다. 교회는 이 점에 대해서 힘주어 가르치지 않고 다만 세례를 주면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내도록 지도한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일단 세례 받고 나면 세례 받기 전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 세례의 의미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 믿고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왜 받는가? 성령세례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말씀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증하는 권위와 능력을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중생도 아니고, 중생한 자가 부가해서 받는 제2의 특별한 영적 축복(Second Blessing)도 아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신자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새언약의 선지자됨을 하나님께서 인증하는 예식이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세례와 선지자의 직분을 연계해서 가르치지를 않았다 (손석태 저, 성령 세례 다시 해석한다 참조).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교인이 반드시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례 줄 때 그가 예수님의 제자, 곧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선지자의 직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주지시키고, 세례 받은 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셋째는 예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개역성경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지키도록” 이라는 말은 목적도 되지만 보다 교육의 책임성과 신실성과 완벽성을 요구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자들에게 제자 삼아라른 사명을 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보혜사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전할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위로하고 도와 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본문을 선교사로 지원하는 사람들에게나 해외 선교사업을 후원하기 위한 설교 본문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예수믿고 세례받은 모든 사랑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 각 개인은 물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례세례를 받아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선지자답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새로운 제자를 양성하는 사명를 감당 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6-0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57
    요한복음 1장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으로 찾아 오시어 그의 장막을 펴셨다고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예수께서 그의 첫 기적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첫번째의 기적인 만큼 우리는 그 기적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마다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기적이기 때문에 마치 높은 공직을 맡은 사람이 그의 취임식에서 그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정책이나 사업을 발표하듯이 예수께서도 이 첫 기적을 통하여 앞으로 하고자 하는 그의 복음 사역의 성격을 예시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건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 사건은 첫째로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결혼 잔치 집에서 물이란 무색, 무미, 무취, 무용한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는 색깔이 있고, 맛이 있고, 냄새가 있고, 없어서는 안될 유용한 것이며, 마신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고 즐겁게 해주는 힘(dynamic force)이 있다.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 변화시키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분으로 물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포도주처럼 유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는 혼인 잔치와 같은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혼인 잔치 집에는 사랑이 있고, 축복이 있고,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넘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축복의 종교요, 즐거움과 기쁨의 종교라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넘친다. 셋째로 기독교의 정결예법은 유대교의 정결예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돌 항아리에 담은 물로 매일 몸을 씻는 의식을 행함으로 자신들이 죄로부터 깨끗해지고 하나님 앞에 정결해진다고 믿지만, 예수님의 정결의식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내면의 변화를 통한 정결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마리아의 주인의식, 하인들의 적극적인 순종, 연회장의 역할 등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의 특징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이상과 같은 해석이 다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과연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설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복음서의 해석이 그렇듯이 요한이라는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본문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첫째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이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행하고 계신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들과는 구별된 신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예수님은 이 혼인잔치 집에서 사실상 신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남녀가 결혼할 때에는 반드시 결혼 계약서를 써야 하고, 신랑은 결혼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1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이 잔치 집에서 정작 포도주를 내고 있는 사람은 신랑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신랑 역할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적 신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대 근동세계에서 잔치에는 포도주가 필수품이었다.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값 (bridal price)을 지불하고, 결혼계약서를 쓰고,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결혼 잔치를 베푼다. 이때 신랑은 이웃 친지들 앞에서 “이제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이고, 나는 이 여자의 남편이다.”라는 결혼 선언을 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신 후에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는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언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그날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니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굳게 잡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던 때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으나 그들은 내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여호와의 말이다.”(렘 31:31-32).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시내 산 언약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결혼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성경 곳곳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기술하고 묘사하고 있다(호 1-3장; 겔 16, 23장; 렘 3:8 등).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남편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부이다. 이러한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하나님은 이제 가나의 혼인 잔치 집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믿고 따르던 그들의 신랑,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소개하고,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 신부로 그의 제자들, 성도들을 신부로 비유하고 있다.예수께서는 살아 생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 15:4)라고 말씀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가 하나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 17:21)라고 기도하신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상호동거라는 신비한 관계를 갖기를 가르치시고, 기도하신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마치 결혼한 부부와 같은 인격적이고, 밀접하고, 거룩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성장해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다. 예수님의 가나 혼인 잔치의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 기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손석태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서울:도서출판 솔로몬, 1997), 52 n8. 「목회를 위한 구약신학」(서울: CLC, 2006), 272, 287n66.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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