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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6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 가셔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라고 부르신다. 혹자는 이것이 당대의 풍습으로는 존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께서 이 상황에서 그의 육신의 어머니를 굳이 존칭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여자”라고 부르신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 혼인 잔치 집에서 자신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신랑이 그의 결혼 잔치를 베풀고 축하객들에게 포도주를 접대하는 고대 근동 사회의 풍습에서와 같이 포도주를 내심으로 신랑의 역할을 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능력을 가진 신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내는 신랑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랑이요 자기들이 그의 신부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신적-신랑 (Divine Bridegroom)이 예수님 자기 자신임을 이 혼인 잔치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보통 육신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타락하게 한 뱀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며, ”그(여자)의 씨“라는 말을 언급하신다. 히브리어 성경은 “그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보다는 “그 (여자)의 씨“자르아카()”라고 쓰고 있다. 거의 모든 영역본에서는 “자식”이나 “후손”이라는 의미의 offspring을 쓰고 있으나 KJV 이나 NAS에서는 “씨”(seed)라고 번역하고 있다. 의미상으로 씨라고 이해해야 옳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를 때는 바로 창세기에서 그 “씨”를 잉태한 그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위로는 하나님-사람-만물의 위계 질서가 있는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어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시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러한 질서 체계는 계약 혹은 언약을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왕과 백성 사이에는 대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갖는다. 왕의 대왕에 대한 충성심 여하에 따라 신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아담이 대왕이신 하나님께 충성하며 순종하면 왕 자신을 물론 그의 수하에 있는 모든 신민들이 평안을 누리지만, 반역을 하거나 불순종할 때는 왕은 반역의 형벌을 받게 되며, 왕과 언약적 연대성 하에 있는 모든 신민들은 왕과 함께 진멸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 한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아담은 물론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하에 있는 모는 인간들과 자연 만물이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어 아담과 함께 분순종의 반역에 대한 형벌, 곧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바로 원죄이다. 인간의 원죄는 우리 각 사람이 다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어서 아담과 함께 죄를 짓고 아담과 함께 형벌을 초래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 어 왔으며, 그리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지었기 때문이다.”(롬 5:12)그러나 만물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시며, 안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쁨의 대상이 되었던 그의 창조물을 모두 진멸시키기에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구원계획을 세우신다. 그것은 “새 아담”을 창조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새 아담 한 사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에게도 사망이 다스렸으니,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었다.”(롬 5:14) 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담은 모형(type)이고, 오실 분 곧 그리스도는 실형 (antitype)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형이라는 말은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또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연대성의 원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새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여자의 씨(후손)”여야 한다.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 낳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새 아담은 신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야 할 것이다. 뱀은 단순한 들짐승이 아니다. 사단의 사주를 받아 여자를 유혹한 영적 존재이다. 육을 가진 인간이 영적 존재를 대항할 수 없다. 따라서 새 아담은 사단 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더 능력 있고, 권세가 있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셋째로 그는 아담의 죄를 대속하여 죽고 부활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반역자, 아담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가죽으로 만든 수의를 입히셨다.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사형 언도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이들을 사면하고 살리기 위해서는 죄 값을 치러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창 2:16-17; 3:19; 롬 6:23).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담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담의 연대성 아래에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남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 따라서 새 아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아담의 죄를 지고 대신 죽고, 하나님께서 그의 속죄를 만족하게 여기신다면 그는 이제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났기 때문에 살아나야 한다. 따라서 새 아담의 속죄에 따른 부활은 곧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새 아담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은 모든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에 있는 피조물을 살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새 아담은 신인적인 존재(Divine-Human Being)로서 아담의 죄 값을 치르고 부활해야 하는 자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적 지혜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아들을 처녀의 몸을 빌려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사 7:14). 그렇다면 그는 우리 인간들과 전혀 다른 보통생육법으로 낳은 자가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낳은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새 아담은 신-인적인 존재(Divine -Human Being)이아야 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이 비밀을 알리시고 갈릴리 나사렛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계획을 실행하신다.“천사가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거룩한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눅 1:35)바울도 이 하나님의 비밀을 “때가 찾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셨으니 이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고 가르친다(갈 4:5-6). 요한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한다.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incarnation). 이어서 선지자 세례 요한은 그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곧 자신을 세상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바칠 것이라고 가르친다(요한 1:29). 새 아담은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고 성자께서 성령으로 처녀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새 아담”, 곧 “마귀의 머리를 짓밟을 여자의 씨” 임을 염두에 두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성경에서 언급한 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씨를 잉태할 분으로 지칭하여, “여자여!”라고 불렀을 것이다.바울은 아담과 새 아담의 모형(type)과 실형(antitype)의 원리를 말하며,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스렸다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롬 5:17-18). 한 사람의 범죄와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이 우리의 죽음과 생명을 갈라놓았다. 우리 인간은 항상 아담의 범죄만 탓하고 하나님의 불공평하신 처사만 불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정죄하신 똑같은 원리로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는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 한 사람 때문에 우리를 죄와 죽음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값없이 사면되고, 저 죽음의 감옥에서 석방된 것이다. 이것을 은혜요 의의 선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면 우리는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하는 신앙고백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 아담의 연대성 안으로 받아주시는 것이다.우리는 성탄절을 맞으며, 내가 왜 죄인인가? 예수께서 누구이시며,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성육신(Incanation)과 낮아지심(Humiliation)의 의미를 알고 되새겨 보야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아담 안에서 아니라, 새 아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으로서 살아야 한다.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이 말씀이야 말로 깊고 깊은 하나님의 지혜요 섭리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예수께서는 이 모형의 비밀을 우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자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신비는 닫혀있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새 아담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인 여자의 씨이다. 그는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새 아담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2-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5
    작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온 교회가 떠들썩하더니 올해는 501주년이라고 또 곳곳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행사가 다양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개신교회의 개혁이 요구되는 때는 없었다. 17세기 (1674) 네델란드의 개혁파 교회의 목사 Jodocus van Londenstein 이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이 된다”(el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는 데, 오늘 날의 개혁주의자들에게 Semper Reformanda는 개혁주의의 가장 핵심적이고 귀중한 원리가 되고 있다.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성경의 바리새인들처럼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 언젠가는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쓸모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념행사로 끝날 일도 아니고, 거창한 학술대회도 이제는 할 만큼 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간과하고, 비교적 소흘히 다뤄졌던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온전한 종교 개혁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믿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가톨릭 사제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며 중보자 노릇을 했기 때문에 생긴 주장이다. 그들은 죄인들의 죄의 고백을 받고, 속죄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사죄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이 땅에서 오직 사제들을 통해서 죄인들이 사죄의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반대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며(딤전 2:5), 신자들은 직접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으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사제들이나 목사처럼 성례를 집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제사장직은 모든 신자가 다 전문적인 사제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을 삶 속에서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가 설교자요, 사제라는 의미이다. 목회자들은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신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노회나 총회로부터 안수식이나 위임식을 통해서 목회자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신자로서 자기 생업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며, 제사장으로서 전도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와 심방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에게는 삼중의 직분을 주셨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세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모든 만물 위에 앉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며, 돌보는 왕,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그의 피조물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는 선지자, 그리고 피조물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피조물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가졌다. 이 세 직분은 어느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같이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제사장직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학에 대항하여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모든 신자의 제사장”됨을 특별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신자가 선지자라는 만인 선지자라는 점에 대한 강조는 빈약했다. 이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만인 선지자”론을 옳다고 하면서도 기울어져 가는 교세를 한탄하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항상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는 선지자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지자로서의 개혁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의 종말적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종교개혁자들은 루터나 칼빈이나 츠빙글리나 다 같이 성경을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통하여 개혁의 원리와 사상을 이끌어내고 가르친 위대한 성경선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예배 시간에 말씀을 강론하는 일을 주로 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평신도 성경선생을 양성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성경에 관심있는 자를 따로 모이게 하여 직접 성경을 가르친 사람은 츠빙글리였다. 그는 1519년 1월 1일에 스위스 취리히 대성당 시민 사제직에 취임한 후 주일예배에 마태복음 1장부터 강해를 시작했다. 이것이 성경의 연속 강해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공적으로 연속 강해를 했지만 이 연속 강해 방법을 취리히 종교개혁에 정착시키기 위해 1520년 여름부터는 사적으로 목회자나 성경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바로 이 모임의 명칭이 “예언연구회”였다. 고전 14:1,“사랑을 추구하여라.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여라”는 말씀에서 따른 명칭이었다. 우리 한국말로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예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한다. 이 취리히의 예언 운동은 점차 그 세력이 확장되어 네델란드, 영국 국교도나 청교도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모임이 기초가 되어 여러 신학교가 생겨났고, 또한 이러한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된 사람들을 통하여 취리히 성경이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평신도들의 말씀공부를 통하여 계속 성장해 갔다. 그러나 이 중요한 예언운동이 서구의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에 떠밀려 점점 사라져 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운동을 뒷받침하고 대항할 신학적 기초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가르치며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중에서 사랑이 제일 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권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더 예언하기를 더욱 더 원한다.”(고전 14:3)고 말하고, 39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마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예언이라는 말은 바로 선지자로서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예언하기를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종말대한 비전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향힌 계획을 이해해야 답이 나올 것 같다.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은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땅에 전파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여 서로의 적대감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사야 11:9의 말씀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여,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태생적인 적대감을 버리고 함께 평화롭게 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을 말씀을 알게 하는 일을 해야 했다. 선지자는 그래서 여호와의 입이라고 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려 하는 것이다”(창 18-19).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최초로 “선지자”라고 부르신다 (창 20:7). 민수기 11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울면서 모세를 대항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세는 이 백성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성령을 주어 예언하게 함으로 그들을 모세의 조력자로 세우신다. 이런 가운데 70명의 명단에는 들어 있으나 회막에 참석하지 않았으면서도 예언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여호수와는 모세에게 이들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청한다. 바로 이때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민 11:29). 모세의 소원은 여기 70명의 장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어 그들이 예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요엘 2:28-29). 모든 사람을 선지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때가 차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로서의 복음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 사역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고 부활하셨다. 이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가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성령으로 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이 일은 오순절에 일어났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 언약의 선지자로 인치신 사건이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나가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족속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선지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신자들은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세례는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임명을 받는 거룩한 예식인 것이다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CLC, 2016).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칠 제자를 양성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다. “너는 많은 증인 앞에게 네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라.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딤후 2:2). 우리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그 구원받은 신자들을 선지자로 훈련시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4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유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부터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병 고치는 일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예수님을 박해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예수께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17). 하나님은 잠을 자거나 쉬고 계신 분이 아니다. 항상 깨어서 그가 만든 세상과 피조물을 살피고 관리하고 제어하시는 분이시다. 이 세상을 support 하시고 maintain 하시는 섭리자이시다.둘째는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그대로 하신다는 것이다(19).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시다. 그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 불가능이 없다. 천지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전지전능성을 이어 받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신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2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아들이나 다 같이 그 하시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죽어가는 자를 회생시키고,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일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생명을 살려서 온전하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살리는 일을 하사는가?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에게 그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상처받고 병들고 훼손되고, 아예 그 생명이 끊어진 인생들을 말씀으로 고치고 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의 말씀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생명이 아들이 전하는 말씀 안에 있게 하셨다(26). 그래서 하나님 아들, 곧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는 것이다(25).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24). 여기서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은 바로 우리 인간은 모두가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이다. 사람은 다 죄와 죽음 가운데 있다. 사람은 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아담과 더불어 죄인이 되고, 아담과 더불어 죽은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다. 그 음성을 듣고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듣지도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죄와 죽음 가운데 그대로 있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주이시시기 때문에 아들도 심판의 주로서 권세와 능력을 가지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안 들으면 심판을 받고 죽는 것이다. 심지어 무덤 속에 있는 자들도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에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29).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고, 하나님과 자신이 마치 동등한 권세와 능력을 가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불경이고, 모독이었다.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하나님과 동등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로 될 일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증거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권능을 이들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바로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살리신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능력을 가진 자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베데스다 못가에는 가끔 주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고 물이 움직임을 그칠 때 제일 먼저 못 안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 물이 움직일지 정말 물에 뛰어들면 병이 낫게 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자기가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요행과 기적을 바라고 찾아 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천사”가 가끔 물을 움직이게 했다고 했는데, 과연 이 일이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이 고대 주요 사본에는 없고 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첨가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여 서양의 현대 역본 NIV나 ESV는 3절 후반부와 4절을 아예 본문에서 삭제하고 난외주에 삽입하고 있다. 바른 성경은 이것을 [ ] 안에 넣고 각주에 고대 사본에 이 구절이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하드라도 여기 못가에 있는 사람들이란 어쩌면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죄와 죽음의 권세에 묶여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나 롯도 복권을 사 쥐고 그것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 한 장의 그림과 같다.예수께서 이곳에 찾아오시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 병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병이 나을 소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장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 그곳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고, 병자는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났다.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안식일이라는 율법의 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없는 또 다른 병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처럼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심에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이 유대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만일에 안식일에 물이 동했다면, 그래서 정말 병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들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행을 바라고, 주저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나라에 요행이란 없다. 오로지 생명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이 베데스다 연못을 탈출할 수 있다. 우리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야 한다. 물이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을 살리신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2-0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3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는 “갑질”이나 “미투”라는 말이 널리 쓰여지고 있다. 가진 자, 높은 자리에 앉은 자, 강한 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부와 힘을 이용하여 못 가진 자, 낮은 자리에 있는 자, 약한 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수탈하고, 상처주고, 죽이기까지 하는 자들을 규탄하고 부조리한 사회 제도를 개혁하자고 외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서라도 있었던 일이고,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힌 현상이라 이를 고치는 일은 하루 이틀 사이에, 한 두 사람의 힘을 통하여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근본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성경에서 찾아보았으면 한다. 갑질은 성경에도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브라함은 흉년을 피하여 이집트에 내려갔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부자가 되었다. 바로왕이 많은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에게는 상속자가 없었다. 그의 하인 엘리에셀을 입양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그의 몸에서 날 자가가 그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과 가나안의 넓고 넓은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를 보증하는 “횃불언약”을 맺으셨다. 아브라함이 쪼갠 짐승들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담보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지킬 것을 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져 버렸다. 당대의 메소포타미아나 가나안 땅의 풍습을 따라 아내 사라가 씨받이로 정해준 이집트 출신 몸종 하갈과 동침하였다. 하갈은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그의 여주인 사래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꼴을 두고 볼 수 없던 사래는 우선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불평했다. 아브라함은 “보시오 당신의 여종은 당신 손 안에 있으니 당신 눈에 좋을 대로 그 여자에게 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무런 책임도 관계도 없는 것처럼, 남의 일을 말하듯이 이 문제에서 물러 선 것이다. 그래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였고, 하갈은 학대를 참을 수 없어 집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를 해매고 다니게 된 것이다. 성경에 사래가 하갈을 어떻게 학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견디기가 힘든 고통과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여자가 집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갈의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이었음에 틀림없다. 왕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허물에 대한 변상으로 재물을 챙겨 주었을 때에 아마도 가축들과 함께 묻혀와 아브라함의 가속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여자는 부모들을 떠나 멀리 이방에 끌려와서 아브라함의 종노릇을 하고 살다가 아브라함의 씨받이가 된 것이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반항할 여지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요사이 말로 인권이니 자유이니 선택이니 하며 자기주장을 할 틈이 없다. 동물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피붙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자기에게는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마저 날려버린 것이다. 이제는 살기 위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한편, 사래의 갑질성 학대는 다분이 보복성이 있고, 가정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대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아주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자기가 안고 자고, 자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인데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아내에게 알아서 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시류를 따라 상속자를 얻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검은 풍파가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사실상 상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허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으시고 그의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이는 분명 횃불 언약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주는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 때에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고, 그의 천사를 대신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경우와 유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저버린 아브라함 부부를 보시고 그의 마음이 편하실 리가 없다. 그래서 그 대신 그의 천사를 보내신 이유가 될 것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하갈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신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여자의 손아래에 복종하여라.”(16:9)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는 안보고 회피하고 도망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미해결로 남는 것이다. 하갈에게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그가 앞으로 아들을 낳을 것을 예고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부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마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God hears)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셨기에 그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짓밟히고 신음하고 죽어가는 인생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앞날에 대해서 그가 들나귀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어미 하갈은 비록 노예로 자유 없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의 아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하신 것이다. 아마도 어느 누구에게 구속되지 않는 들나귀와 같은 자유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동장치가 없는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고, 별로 좋은 관계를 맺고 살지는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 모자를 아브라함 부부의 갑질로부터 구출하시고 살리는 분이시다.하갈은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이 감사했다. 세상에서 자기의 가련한 신세를 보고 계신 하나님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를 살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을 “엘로이”이시다 라고 말한다. “엘로이” 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의 천사를 만났던 그 우물에 이름을 붙였는데, “브엘 라하이 엘로이”(Beer-lahai-El-roi), 즉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The well of the living one who sees me)이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들으시고, 보시고 살리는 분이었다.하갈은 세상에서 가장 짓밟히고 핍박당하고 상처받은 비참한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살 길을 열어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심지어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의 아내도 누이라고 속이고, 자기의 자식을 임신한 여자를 자기 입장이 난처하니까 모른 체하는 비굴한 사람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에게 계속 그의 약속의 아들, 이삭에 이어 대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옆구리의 가시가 되었다. 사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늙어가는 아내로서 당시의 풍습을 따라 씨받이를 통해서라도 남편의 대를 잇게 해주려다가 결국은 하갈을 학대하고 갑질하는 여인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세상의 풍속을 따라 자식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이 가정은 어떻게 보면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천사가 찾아오시어 이 문제를 수습하신다. 하나님은 하갈을 구출하시고, 15장에 이어 17장에서 할레를 통하여 피를 흘리게 하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종결 완성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한 많은 인생살이를 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엘로이 하나님은 이 고난 받고, 핍박당하고, 도망가는 것만 보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들의 모든 불의와 고난을 살펴보시는 분이시다. 요셉은 자신을 유혹하는 주인의 처 보디발의 유혹을 물리치며 “내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한다. 그의 주인, 보디발에게 득죄하리이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성년자에 대한 세도가의 아내가 부리는 성폭력 갑질 시도를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의 믿음과 정신으로 이겨낸다. 하나님께서 “엘로이”이시니 우리 인생들은 요셉처럼 “코람 데오”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1-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2
    요한복음 4장은 1-42절은 사마리아 여자와 수가 동네 사람들의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한 개종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43-54절은 죽어가는 왕의 신하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이후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양식이 요한이 쓰고 있는 매 장의 전반부는 Narrative, 그리고 후반부는 Narratve에 대한 Discourse 의 구조와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사건을 분리해서 설교한다. 본문이 길고, 별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사건을 무리하게 붙여서 설교의 초점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간단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고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45). 이후 그는 고향 갈릴리 지방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4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 존경 받지 못할 상황을 미리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일부의 주석가들의 주장처럼 문맥에 맞지 않게 갑자기 튀어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삽입된 구절인지 좀 읽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다음 절은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떼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다(45).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꼭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거나 무시당하는 것 같지는 않은 데 예수께서 마치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하신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 후에 가버나움에서 온 왕의 신하가 자기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께 내려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는 아마도 헤롯 왕의 신하였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당시의 국경 주변 도시였기 때문에 여러 국경 사무 관리들이 그곳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상당히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너희들은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신하는 다시 똑같은 간청을 한다.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50)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 예수님이 대답이었다. 그때 그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이적이나 놀라운 일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들었고, 그래서 예수께 오셔서 그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는데, 예수께서는 표적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사 말씀하신다. 아마도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앞에서 언급한대로 선지자의 고향 사람들일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보았다. 2:23-25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맡긴다”(entrust)는 말은 흔히 쓰이는 “믿는다”(believe)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대로 번역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들에 대하여 자신을 믿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역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았다”(But Jesus on his part did not entrust himself to them. ESV, NET, NAS)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그들이 그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았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표적을 보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아셨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본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 영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등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게 환영받지도 못했고, 존경받지도 못했다. 본문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는 데 왜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 왕의 신하와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의 근본적인 다름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이적을 보고 영접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길고 긴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자신들의 영혼에 대한 말씀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역사적으로 기다려온 메시야시오, 세상의 구주라는 결론을 내리고 믿고 고백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증언한 여자의 말 때문에 ... 예수님을믿었다.”(39), “그 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41),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42)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본적이 없다. 다만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들은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온 우주 만물의 구주로 알고 믿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도 예수께서 직접 자기 집에 “내려 오시라”고 말한다. 나사렛이나 가나는 산동네요 그가 사는 가버나움은 바닷가이기 때문에 내려오시라고 청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지 않으셨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다. 그때 아들이 살아났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도 말씀을 믿은 것이다.그러나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그를 선지자나 메시야로 믿고 받아들였다는 말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듣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들으려고 청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 고향 사람으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럽고, 그래서 영접하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용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고향 사람으로 영접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크게 다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씀을 받아야 할 고향 사람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다. 기적을 원했다. 기적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하고, 구원의 방법,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에 대한 지식, 영적 성장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는다. 기적은 기적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는 기적은 단순한 도로의 표지판에 불과한 것이다. 도로 표지판은 나그네가 가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안내할 수 있지만, 그 성읍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일회성의 사건일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해주지 않는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기적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계속 기적을 바란다. 마치 어린 아이가 선물을 사다주는 부모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게속 선물을 기다린다. 성장도 없고, 잘 못된 길로 가기 쉽다. 유치한 믿음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인정하시지 않은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1-0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1
    요한 3장에서는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니고데모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요한복음 4장 본문의 이야기는 니고데모와는 아주 대조되는 인물과 예수님과의 긴 대화이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 종교, 정치, 학문에 있어서 지도자이며, 돈도 많은 이스라엘 상류 사회의 일원인 니고데모와는 달리 남편을 다섯을 가졌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소외된 듯한 무명의 여자, 밤에 스스로 예수님을 만나로 나온 니고데모와는 달리대낮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는데 예수께서 먼저 그에게 물을 청하며 대화를 하게 된 여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상당이 신학적이고 신앙적이며 현실적인 면이 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예배에 대한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말하고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는 것을 깨닫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요한 4장은 영혼에 대한 목마름-남편-예배의 대상으로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예수께서 이 낯선 여자에게 물을 청했을 때, 이 사마리아 여자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인에게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오히려 물을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물이란 말이 값없이 주는 물건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 예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생수는 값없는 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들의 대화는 야곱의 우물과 예수님의 우물로 비화하여, 야곱이 주는 말과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물을 비교한다. 야곱의 우물 물은 마셔도 마셔도 계속 목마른 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 물은 사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뱃속에 영생수의 샘을 무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그 물을 예수께 청하는 데, 그물을 자기에게 주어서 목마르지도 않고, 이곳에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고 창한다. 목마른 여자, 물 길으러 다니기에 지친 여자의 말 같다.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이 여자는 물을 길으러 다니는 것이 싫지만, 목말라 살기 위해서라면 이 뜨거운 대낮이라도 이 우물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고대 근동의 광야에는 우물이 생명줄이나 다름없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야곱이 물려준 이 우물물은 이 여자에게 해갈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에 귀가 번쩍 열린 것 같다. 그래서 그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예상 밖에 이 여자에게 자기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도대체 목마른 여자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하신 예수께서는 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는가? 생수와 남편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남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구출해 내서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어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결혼은 계약이고 언약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것을 여호와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호와는 그들의 남편이고, 자기들은 여호와의 아내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이들을 보호하고, 의식주를 공급하는 것을 비롯하여 남편으로서의 대의를 지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 남편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믿고, 이웃 강대국을 의지하여 바람을 피운 것이다. 간음하고 행음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래 야곱의 후예였지만 솔로몬 이후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어 나라를 쪼개 북왕국을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며, 그의 백성이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여호와께 예배하는 것을 저지했다. 아합 왕 때는 바알 신을 섬기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아람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하다가 망하게 되었으며, 아시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리아 땅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라야 사람들을 북왕국의 땅에서 살게 하였다. 결국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잃고 혼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이후 그들은 아시리아에 이어 바빌로니아, 헬라,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그들과 그들의 신을 섬겼다. 나라가 망하고 통치자가 바뀌면 그들이 믿는 신도 바뀌었다. 지금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 금송아지, 바알, 바빌로니아, 헬라 등 다섯을 섬기고, 지금은 로마를 섬기고, 종노릇하고 있는 중이다. 남왕국 유대인들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로 동족이요 형제이었지만 혼혈족이 되어 이방신을 섬기는 북쪽의 사마마리아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고 상종하지 않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들이 섬겼던 신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그가 섬기고 예배하는 신이 누구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의 육신적인 남편을 통하여 그가 믿고 예배하는 신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 여자에게 자기의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현재의 남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여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아보고 즉시 예배의 장소(20-21), 때(21, 23), 대상(23), 방법(24) 등 예배에 관한 질문을 쏟아낸다. 이 대화 속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아주 핵심을 찔러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대하는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이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말씀하신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음을 외치고 다녔으며, 동네 사람들은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참으로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었다(4). 예수님의 말씀대로 야곱의 우물 물은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그 속에 영혼을 두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영적 교재를 하며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영적 교제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잃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는 본성적으로 본향에 대한 향수와 목마름이 있다(히 11:13-16).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넣어주고(창 2:7),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그들 속에 두셨기 때문이다(전 3:11).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어느 것도 채워질 수 없는 오로지 무(empty)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그들이 예배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자들이다(22). 자기 들이 만든 알지 못하는 신이 인생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수 없으며, 야곱의 우물 물이 인생들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사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뱃속에 샘을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 곧 예배를 통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야곱의 샘물을 마시고 사는 자들에게, 인간들의 목마름을 영원토록 채워주는 영원한 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사마리아의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스도”이시오, “세상의 참 구주”이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0-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0
    요한복음은 그 구성이 독특하다. 예수님의 행적 (Narrative)과 그 행적에 대한 해석 및 설교 (Discourse)가 이어지는 곳들이 많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대개의 경우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한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설교자의 자유이겠지만 자칫 저자가 다루고자하는 핵심을 비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요한복음 3장의 경우도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Narrative에 이은 Discourse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두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따라서 Discourse를 충분히 이해하고 Narrative를 그에 병행하는 예화로 다루는 것도 본장을 이해하는 데 좋은 방법일 수있다.요한 3:18은 보통 사람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분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했다(19). 어둠에 싸여 있는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고(16), 영원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움에 싸여 있다.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둠을 사랑한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어둠의 땅, 바로 그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족해 하시고 기뻐하셨는데 왜 이렇게 어둠과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인가?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그에게 왕관을 씌우시고, 그가 창조하신 온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하는 언약을 맺으셨다. 아담은 그의 언약의 종주이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함으로 창조의 질서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선약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하나님을 떠났다. 스스로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세계에는 어둠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그러나 이어둠의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을 비추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적 저주를 받고 죄와 죽음에 갇혀 있는 어둠의 자식들을 구출하기 위한 그의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 것이다. 아담을 대신할 새아담을 보내신 것이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제 새아담의 “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살려 빛과 생명 가운데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담은 새 아담의 모형이라고 했다(롬 5:14). 창조 언약의 대표자 아담 한사람의 불순종이 온 세상 만물에게 어둠과 죽음을 초래했듯이, 구속 언약, 곧 새언약의 대표자 새아담 한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새아담은 여자의 몸에서 낳지만,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만큼 권위와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여야 했으며, 그는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만이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고, 그는 아담의 죄값을 치렀다는 분명한 증거로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즉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과 마찬가지로 새 아담은 새언약의 대표자로 왕관을 쓴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권세아래 있던 옛아담의 백성들은 이제 새롭게 등극한 이 새 왕을 환영함으로 새로운 왕의 새나라의 새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빛과 생명이 역사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새아담으로 은근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16)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전제한 말씀이다. 새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옛아담의 연대성 안에 머물러 있고 죄와 죽음의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훨씬 본문의 의미를 쉽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니고데모는 당대 아스라엘의 유수한 학자요, 정치가요, 종교지도자요,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사람이다.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께 찾아 나온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본 후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자마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물과 성령, 곧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3), 처음 남과 거듭남, 아래로부터 남과 위로부터 남(3), 육으로 남과 영으로 남(6), 하늘의 일과 땅의 일(12), 빛에 대한 사랑과 어둠에 대한 사랑(19), 사랑과 미움(19),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하늘로 올라간 자(13), 세상에 대한 심판과 세상에 대한 구원(16, 17),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18) 등의 말을 서로 대조하여 사용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나라와 새 아담의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선을 그어 서로 왕래할 수도 없고, 서로 융합될 수도 없는 서로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그 소속과 본질이 다르다.죄와 죽음으로 뒤덮힌 아담의 어둠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빛과 생명과 사랑과 영의 나라이다. 어둠과 죽음과 미움과 육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로지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난 사람만 그가 세우신 새아담의 나라, 곧 새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그때 그는 새아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우신 새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살지만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씨가 싹트고 자라는 새로운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와 도리에 밝은 니고데모는 이러한 언약적 구원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그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위로 메달아 놓고 그것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살리신 사건을 예로 들며, 예수님 자신도 메달려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새아담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언하신 것이다. 하나님 날의 새생명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그 싹이 트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0-1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9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자신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예배했던 여호와 하나님이자 신랑이심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셨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셔서 성전 청소를 하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는 역사적으로 솔로몬 왕이 건축한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돌아와서 새로 지은 제2성전 그리고 로마시대에는 헤롯 대왕이 새로 중축한 헤롯 성전이 있었다. 이것을 건축하는 데 46년이 걸렸다. 물론 이 성전도 주후 70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다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그 성전 터에 무슬림 교도들이 자기들의 성지라고 주장하며 그 지붕을 돔 양식으로 짓고 황금을 입힌 “Dome of Rock”라고 하는 성전이 서 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셨고, 후에 이 성전이 무너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마태 24:1-2),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 사람들이 그렇게 파괴 해버렸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치 이후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셔서, 왜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까?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때,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인간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세속주의와 편의주의가 성전을 가축시장으로 바꾸어 놓고, 환전상들로 가득차 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는 너무나 부정하고 불결한 곳이 되어 있었다. 제사장들이 묵인하지 않는 한 이러한 일이 성전에서 일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보시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청소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외치셨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시편 69:9, “주님의 집을 위한 열심히 나를 삼킬 것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하였다고 했다. 여호와의 집을 모욕하고, 멸시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불같이 타올라 자신을 다 삼켜버릴 것 같다고 쓴 다윗의 시 구절을 기억하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사랑하는 자가 멸시 당하고 무시당하기 때문에 이를 보고 있는 자의 분노가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치솟아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급박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사람들도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예수께 대들며 그가 무슨 권세로 자기들의 영업을 방해하는지 되물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사흘 만에 이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하셨다. 이들은 46년 동안 지었던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무명의 젊은이가 당돌하게 나타나 자기들의 하는 일을 방해하는 이 짓을 참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단순한 성전 청소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깊은 신학적이며 예언적인 의미가 있었다. 가나 혼인집에서 하나님이시오 신랑으로 자기의 정체를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주님께서 이제 채찍을 들고 휘두르시기 때문에 그 의미가 깊은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첫째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새로운 성전의 약속이다. 에스겔서에는 하나님께서 우상과 우상 숭배가 넘쳐나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신다 (겔 8-10장). 그리고 실제로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성전은 완전히 진멸되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하나님의 거처는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성전은 바벨론으로부터 유대인들이 돌아 왔을 때 재건되었다. 그 후 헤롯이 확장하여 재건한 것이 현재의 성전이다. 이 성전은 에스겔 때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는 시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 성전의 기능이 끝난 것이다. 이러한 성전은 파괴해버려야 할 것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결코 남아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 그리고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둘째로 예수께서 성전 파괴를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성전을 약속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흘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선포하신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것이 성전인 자기 몸에 관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 말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죽음을 성전의 파괴로 비유하시고, 새로운 성전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전은 성막의 전신이다. 성막은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함께 거하기 위하여 짓도록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하는 가운데는 성막에 거하셨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임하셔서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때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떠올라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을 때솔로몬은 웅장하고 견고한 성전을 건축했다.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사, 말씀, 기도, 찬송, 교제 등 모든 것이 성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했다.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라는 것이다. 21절에 그가 성전을 허물으라고 말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성전인 자신의 몸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돌로 세운 성전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몸으로 세울 성전이었다. 그래서 메시야는 성전의 실형이요, 예루살렘의 성전 산에 세워진 성전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었다. 성막과 성전의 첫 번쩨 기능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셨다. 따라서 성전뿐만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제사, 제사장, 제단, 제물, 그리고 성전에 부수되는 모든 물건과 사람, 제도 등, 곧 예수님의 모형은 이제는 사라져야 할 것들이었다. 예수님의 오심, 죽음과 부활이 새로운 성전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돌로 지은 성전은 사라졌다. 그래서 성전제사, 제사장, 제물 등이 없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성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에게 예배하고, 그에게 예물을 바치고, 그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제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심으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신랑이요 하나님의 아들, 메사야이심을 암시적으로 나타내셨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후, 시내 산에 데려와 이스라엘을 그의 신부로 삼는 언약을 맺으시고, 이들과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마찬가지로 가나 혼인집에서 자신이 신랑임을 보여주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가 그의 신부와 거할 성전으로 가셨다. 그러나 그곳은 강도의 소굴이요 가축시장이 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신부들과 거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신 것이다. 이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성전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는 생활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의 신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성전으로 믿지 않고 있다. 구약성경의 제사제도를 따라 모형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마치 뜬 구름이나 그림자를 붙들고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성전과 제사장과 제물이 아직도 유효하다. 구약의 유대인들을 흉내 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성전에서 제사드리지 않는다. 회당에서 성경 말씀 읽고 기도한다. 유대인들도 안하는 짓을 기독교인들이 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성전임을 믿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는 그 성전이다”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성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성전이라는 것이다. 성전은 예수께서 신랑으로 거하는 곳이다. 예수께서 신랑으로 그의 거처를 우리 가운데 정하시고 만드셨다. 우리 몸이 예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거처를 우리 안에 건축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성령으로 거하신다. 그래서 로마서 8:11에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없는 부정하고, 불결한 죄인들이다. 우리의 내면은 마치 고대의 이스라엘의 성전과 같이 시장 바닥이 되어 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거룩하지 못하다. 온갖 편의주의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의 이 부정한 육체를 그의 성령으로 씻으시고, 그의 성전으로 택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깨끗케 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 신랑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시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한때 예수님의 모형으로 쓰여졌던, 성전, 제물, 제사장 등이 더 이상 이제 유효하지 않다. 이것들을 붙들고 있는 한 그는 예수님을 중심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제 성전은 예수님이시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과 예수님을 예배하는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들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0-0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8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며, “내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메시야이다.”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자신을 감추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를 들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신적 존재,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고,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지낸 요한의 제자 안드레는 그의 형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메시야”라고 말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들은 것은 아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신랑-하나님”으로 희미하게나마 암시하신다.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많은 설교자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결혼잔치와 같이 흥겨운 종교, 결혼식장에서 물처럼 무색, 무미, 무취, 무용한 자들을 포도주와 같이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고, 맛이 있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아주 유용한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종교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 아주 적절한 본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다. 또한 신학자들에게는 그곳에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따라 놓여 있는 돌항아리에 물을 채웠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신자들의 구원과 연관이 있는 새로운 율법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처음 일으키신 기적이기 때문에 기독교란 것이 어떤 종교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아주 적절한 서론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이 주제를 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정체를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독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찾으려고 해야 하고, 설교자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믿도록 해야 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본문에 나타난 대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분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가히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혼인집에 온 사람들은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물 떠온 하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인들도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과정을 안 것은 아니고 결과적으로 물이 포도주 맛이 났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순간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적은 오로지 창조두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범인들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적 존재, 곧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마치 신랑의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이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결혼이란 계약이었다. 그래서 결혼하는 당사자는 반드시 계약서를 썼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는 데 있어서 신랑은 이웃 친지를 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포도주를 내놓아야 했다. 이 두 가지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 에쉬눈나 법 27, 28조, 함무라비 법전 128조를 보면 계약서를 쓰고, 잔치를 베풀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아마도 잔치를 베풀고 신랑은 여러 축하객들 앞에서 신부를 옆에 세워놓고 “오늘부터 이 여자는 나의 아내이고, 나는 이 여자의 남편이다”라고 결혼 선언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두 젊은이는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부부로 인정받고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포조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예수께서 포도주를 공급해주고 계신다. 예수께서 신랑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적 능력을 가지시며, 신랑역할을 하는 예수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구약성경으로 잠간 돌아가야 할 것 같다.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그의 신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시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시내 산 이르러 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고자 계약을 맺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예식을 올리고,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 장로들과 결혼 잔치를 가졌다(렘 31:31-34).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짓게 하여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의 거처로 주어 살게 하셨다. 마치 신랑이 그의 신부의 거처를 마련해주는 것과 같다. 이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남편으로 맞아 아내의 도리를 지켜, 순종하며 살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남편,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섬겼다. 영적인 간음과 행음을 행한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들과 이혼하셨다. 이들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시라아, 이집트, 바빌론으로 내쫓아 버리고 결국 망하게 내버려 두었다(렘 3:8). 따라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행음한 백성, 간음한 백성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애하신 분이시기에 언젠가 다시 이혼한 그의 아내를 다시 데려와 재혼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선지서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이혼한 아내를 다시 불러 아내로 불러들이는 것이다.그런데 가나 혼인잔치 집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그 예수님은 보통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아자 신랑이다.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다(요 1:34).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오신 예수님은 바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불렀는데 이는 비록 마리아가 그의 육신의 어머니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자 관계가 아니라, 창세기 3:15에 나오는 뱀의 머리를 짓밟을 후손을 낳을 여자를 암시하는 말이다. 마치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듯이, 아담의 아내 하와, 뱀의 머리를 짓밟을 후손을 낳을 여자, 그는 마리아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는 바로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가 신랑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내 안에 거하라”(요 15:4)고 말씀하시고, 성경에서는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의 신부로 부르고 있다.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 사건 가운데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계신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많은 이때에 예수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수께서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자신의 정체를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놓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때는 죽고 부할하신 후에야 온전히 드러난다. 참 신랑이시지만 자신의 신랑 됨을 감추신 메시야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두의 신랑이시다. 요한문서의 시작은 가나 동네의 혼인 잔치집에서 감추인 신랑으로 나타나시지만, 그 마지막은 요한계시록 19 장에서 어린 양과 그의 성도와의 장엄하고 찬란한 결혼식으로 끝나고 있다. 그때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어린 양, 예수님의 신부들이 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9-2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7
    요한복음의 서론에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장엄한 팡파례가 울리는 데 이어 이를 증언하는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 안드레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그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신 계시의 말씀과 말씀대로 성령이 예수님위에 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그의 제자 안드레는 스승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 그의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물세례를 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설명을 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풀을 뜯는 양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면 이 경우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양이라는 의미가 가능하겠지만 사람을 가리켜 양이라고 말한다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양이란 식용이나 성전에서 제사용으로 사용되는 동물이다. 양은 사람들의 부를 가늠하는 척도도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빈부를 가늠하는 상황도 아니다. 세례 요한은 이 양에 한 마디 부가 설명하는 말이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죄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사용하는 속죄양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위한 속죄물로 봤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생각이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제물로 신에게 바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시고 금하는 일이다. 여기서 세상 죄라는 말은 어느 한 개인의 죄를 위한 속죄물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양이라는 표현은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아무에게나 사람을 가리켜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세상 죄를 지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는 세상사람 모두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세상사람 모두가 죄인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지고 가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을 어떻게 보고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점들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곧 왕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대왕께 불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물론 그의 통치권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담은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초래한 자였다. 결국 아담과의 그의 통치권 아래 있어서 어담과 연대성을 형성한 모든 만물은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심판 아래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아담이 망쳐놓은 세상의 모습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함께 다 쓸어버려야 존재들이다. 이 세상을 살리려면 누군가 아담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값을 지불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의 언약적 통치권 아래 있는 어떤 피조물도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대표자로서 죄 값을 치를 자격이 없다. 죄인이 자기 죄 값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새아담으로 세워 그를 통한 대속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죄인들에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로부터 교육을 시작하신 것이다. 어린 양을 잡아 대속의 의미를 보여주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 때 까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워 새아담의 정체와 새아담을 통한 대속 방법을 교육하기 위하여 제사제도를 만들어 모형 훈련을 실시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대속 사역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이 바로 새아담, 새언약의 대표자로서 자기 몸을 옛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아래 있는 세상의 모든 죄, 모든 죄인들을 살라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죄 값으로 바칠 제물이라는 의미로 쓴 표현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의 죄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새아담의 속죄자 역할을 머리에 두고,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한다(1:34).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물 많은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던 선지자였다.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 길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왕의 행렬이 지나가기를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는 지나가는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의 하나가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에수님을 만난 후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이다.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히브리어이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며, “기름부음을 받은자”(the one who has been anointed)라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대제사장이 새로운 왕이나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손으로 머리에 안수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 인정하셨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같은 왕(메시야)을 보내시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 하룻밤을 그와 함께 머물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감히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는 그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을까? 안드레와 그의 친구는 그의 선생,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 오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랍비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알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거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라. 그러면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하룻밤 동안 그의 거처에서 머물렀다. 우리는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안드레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거처를 물었고,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처를 물었지만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자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과의 하룻밤이 안드레가 메시야임을 깨닫게 한 것이다. 하룻밤 동안의 예수님과 함께 함, 예수님과의 동거, 예수님과의 교제,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안드레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난히 관계 문제를 많이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주제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이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며 시작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자 인간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밤을 보내셨다. 그분께서 머물고 계신 곳에 이 두 사람이 머물렀다고 했다. 여기서 “머물다”는 말은 헬라어 “메노”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하신 예수께서 최후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신 말씀이 “내 안에 있어라”라는 말이다. 한글은 “내 안에 있어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내 안에 머물러라”이다 (15:1-8). 똑같이 “메노”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한 최후 기도를 하실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계속 그 안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17:21).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이 “머물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하시기까지 “머물다”라는 말로 끝났으며, 복음서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머문 기록이다. 물론 이 말은 예수께서 성도들 안에 성령으로 “메노”, “거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그와 함께 머물렀다”는 말은 새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안드레가 만난 예수님은 “왕”이었다. 엣 아담이 왕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자였듯이, 새 아담도 새로운 왕으로 오셔서 아담을 대신한 새통치자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새로 모으시려는 것이었다. 옛 아담에 안에 있던 자들은 이제 새 아담에게 와서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새 아담을 그의 왕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그는 옛 아담과의 연대성으로부터 풀려 나와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들어와 새 왕과 연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 아담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내 안에 있어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좋은 일, 희생 봉사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은 항상 예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지, 새언약의 연대성이라는 관계성을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안드레에게 단순하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시고 그 밤을 함께 보내셨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 새언약의 연대성 안에서의 우두머리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자기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왔다. 그리고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삼년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안드레에게 들었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같은 대답을 하고 이에 더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데, 이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안드레의 선생,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의 3년을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가진 후 내린 예수님에 대한 결론이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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