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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한복협 5월 월례회 ‘내가 사랑하고 돌보는 어린이들’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5월 월례회 ‘내가 사랑하고 돌보는 어린이들’ 중 양승헌 목사의 발제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1972년 1월 2일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을 받은 후 45년 5개월이 지났다. 어린이 사역이 핵심은 “스토리 잇기”이다. 우리의 복된 믿음의 대물림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그 소명의 본질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신신당부하였다.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스토리를 다음세대에게 물려주는 일에 실패하였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2:10) 다른 사람 이야기만이 아니고, 모세 자신의 가문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다.스토리가 끊어진 일이 뭐 그리 심각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 스토리가 끊어지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백성이 믿음의 스토리를 잃어버릴 때, 그 자신, 그 가문, 그 민족 전체가 어둡고 슬픈 역사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 직접적인 증거다. 강돈욱장로, 그의 딸 강반석, 그의 사위 김형직이 그들 앞에 자라는 김일성 속에 조국의 미래가 들어있다는 조그만 시각만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스토리를 확실히 심어주기만 했어도 우리 민족사는 아주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김정은이 이끄는 북한 공산 세력을 보며 어린이 사역자가 얼마나 무서운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어린이 사역45년은 내게 긍지나 보람의 세월이라기보다는 좌절감과 답답함이 더 많은 세월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린이 사역이 즉각 열매를 볼 수 없는 양묘(양묘)사역이거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대 뒤 사역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소중한 소명에 대한 부담감, 한 아이가 세상과 역사에 미칠 끝이 보이지 않는 영향력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나 자신이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미달감이 내 의식의 뿌리를 누르고 있다. 게다가 눈으로 보는 현실 속에서 내 사역이 정말 의미는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회의도 날 괴롭혀왔다. 유럽의 그 좋은 교회들이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스토리 대물림에 실패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는 마음이 거북하다. 그 선대의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증거물인 예배당은 술집과 나이트클럽, 심지어 이방 종교의 신전으로 팔려나가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일들은 더 이상 바다건너 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순교로 세우고 지켜온 교회는 지금 세속화의 쓰나미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거리고 있다. 주일학생 4명 중에 1명은 결석을 하고, 2명 중에 1명은 지각을 한다. 시험기간만 되면 중학생의 절반이, 고등학생의 삼분의 일이 교회를 제쳐두고 학원으로 간다. 마음으로 몸으로 교회를 등지고 떠나는 한국교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더욱 염려가 생긴다. 한국교회 통계가 드러내듯이 이미 한국교회 절반은 주일학교가 없어진 상태다. 흰개미(termite)가 파먹은 목조주택이 어느 날 푹 주저앉듯 우리 교회가 주저앉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그렇다고 해서 그런 고뇌와 갈등의 세월이 어린이 사역자로서 내 삶과 사역의 열정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긴 사역기간 나는 전문가로 자랐다. 뭘 잘한다거나 안다는 전문성이라기보다는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많이 경험했다는 점에서의 전문성이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스토리를 제대로 이어주기 위해, 아니 쪽풀에서 나왔지만 쪽풀보다 푸르다는 청출어람의 믿음의 세대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가 이제 조금 정리되는 듯 싶다. 1. 어린이 사역은 아이 교육(pedagogy)이 아닌 어른 교육(andragogy)이 그 초점이어야 한다. 정말 어린이들이 좋은 믿음의 세대로 세워지길 원한다면, 부모가 바른 믿음, 삶의 바른 원리, 바른 삶의 모본을 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숙한 양질의 주일학교 교사를 세우고 관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앙공동체의 다음세대에 대한 바른 시각이 세워져야 한다. 2. 어린이 사역이 벌어지는 참 현장은 교회가 아닌 가정이 되어야 한다. 신구약을 통해 자녀에 대한 신앙훈련의 책임의 1번지는 가정과 부모다. 그러나 모든 가정 모든 부모에게 그런 역량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교회는 제2의 가정, 주일학교 교사는 제2의 부모로서의 소중한 책임을 갖는다. 가정을 도외시하거나, 교회를 떠나서 참 신앙의 대물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진리라는 노란색 에너지와 가정의 사랑이라는 빨간색 에너지가 합쳐진 오렌지 에너지를 창출될 때 어린이 사역은 그 열매를 확실하게 거둘 수 있다. 3. 어린이 사역은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사역이 아니라, 성경으로 어린이의 신앙 인격적 나무꼴을 잡아주는 사역이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 책이다. 주의 말씀으로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함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바로 그 사람(imago Dei)를 회복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딤후3:16). 우리 사역의 목표는 지식 축적이 아니라 “작은 예수”로서의 인격의 변화이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삶의 정확 무오하고 유일한 표준이다. 성경을 데이터만이 아닌 필터, 표준으로 삼아야만 전인격적인 삶의 통합이 발생된다. 4. 어린이 사역은 학교가 아닌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일어난다. 주일학교는 예수님이 만든 기관이 아니다. 1780년 영국의 로버트레이크스(Robert Raikes)가 산업혁명의 후유증으로 인해 버려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사회적 기관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교회 확장의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교회 안에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고, 그래서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우리에게까지 이른 기관이다. 교회의 교육을 위해 교회가 입양한 기관이다. 문제는 교회가 왜 학교가 되어야 하는데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500년부터 학교는 지중해 지역의 대표적 교육기관으로 꽃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효율적인 기관을 세우시지도 활용하지도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람이 지식과 정보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가 아님을 아셨다. 사람은 사람의 만남과 교통 속에서 변화된다. 교회를 학교로 만들지 말고, 하늘 가족 공동체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교회에서 평생의 멘토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도록 해주어야 한다.5. 어린이 사역은 전 생애라는 발달과정의 틀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각 부서의 전도사들이 자신의 소신에 옳은 대로 사역을 수행함으로 마치 그 부서를 졸업하면 소천할 사람을 키우듯 위 아래 부서 사이의 긴밀하고 유기적인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학교틀(schooling)의 영향으로 생긴 부작용이다. 가정에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자식을 키우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의 전 생애라는 과정의 맥락안에서 자녀를 키운다. 교회의 효과적인 어린이 사역을 위해 전임 교회교육 디렉터(Director of Christian Education)가 세워져야 한다.6. 어린이 사역이 정말 스토리를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하는 사역으로 꽃피려면, 교육-목회, 다음세대-장년, 교회-가정의 분리의 틀을 깨고, 통합의 틀로 틀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어린이들은 주일학교에서 교회 공동체의 영광과 다이나믹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고 있다. 아이들은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들은 예배의 다이나믹도 모른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끈끈한 사랑의 공동체인지를 맛볼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들은 교회의 2등급 교인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다른 종류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일 뿐이다. 주일학교 한 부서를 마치고 올라갈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능한 많이 아이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책임을 경험하도록 포함시켜야 한다.인구 1억 이집트에는 1천만의 크리스천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콥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지난 1600년 동안 혹독한 이슬람교도들의 핍박 아래서도 그들은 믿음의 대물림을 확실하게 해오고 있다. 나는 이들로부터 어린이 사역의 좋은 모델을 찾았다. 첫째는 3세기경에 그들 말로 번역된 성경을 갖게 되었다는 점. 아이들이 그들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이 정확하고 적실하게 가르쳐져야 한다. 둘째는 부모들이 그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 아이가 태어나면 먼저 기독교식 이름을 지어주고 오른 쪽 팔 목 안쪽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넣는다. 그 이름과 그 문신이 그 아이의 생애 내내 얼마나 큰 핍박과 멸시와 고난을 초래할 것인지를 잘 알면서도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한다. 셋째는 공동체가 함께 영적인 공동 육아 공동체가 되어 준다는 점. 아이들이 태어나면 공동체는 그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베푼다. 그 아기가 공동체의 일원이며, 함께 고난과 영광을 나누게 될 삶을 가르치고 격려하게 될 울타리가 되어준다. 이들 공동체가 갖고 있는 믿음의 대물림의 열정을 우리가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국교회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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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01
  • 학술/ 원로목회자를 위한 교회와 성도의 역할
    본고는 4월 28일 한국기독교원로목회자재단이 서울 종로5가 목자카페에서 개최한 ‘원로 목회자 복지증진을 위한 좌담회’에서 한은수 감독이 발제한 ‘원로목회자를 위한 교회와 성도의 역할’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아프리카의 민속학자이자 소설가인 ‘아마두 헴파테 바’는 “아프리카에서 한 노인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에 있어서 원로목회자의 역할은 아직까지도 중요하다.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데에 기여한 그분들의 헌신적인 영성과 희생은 물론, 풍성한 말씀과 신앙적인 지혜의 보고는 도서관 하나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가 보석과도 같은 그분들의 귀한 영성과 지혜를 이어가지 못한다면, 경제가 발전하고 세속화가 진행될수록 한국 교회의 앞날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원로목회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현재의 짐을 교회와 성도들이 인식하고, 조금이라도 거들어 주어야 할 때가 왔다. 미시적 관점-원로목회자 회관건립과 육체적인 복지 증진현실적으로 원로목회자를 위한 원로회관의 건립이 시급하며, 이것을 위해서라도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원로목회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기독교 복지를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곳을 중심으로 기독교 복지에 대한 실질적인 장이 펼쳐질 수가 있고, 원로목회자의 복지향상을 위한 연구와 실행방안을 내놓는 본부의 역할을 담당할 수가 있을 것이다. 원로목회자 회관 건립의 필요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시적으로는 원로목회자들의 복지를 위해 필요하고, 거시적으로는 노인목회활성화라는 한국교회의 현실적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자는 주로 원로목회자들의 육체적인 복지에 대한 측면이고, 후자는 정신적, 영적인 복지에 대한 측면과 연결되기에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먼저 원로목회자들의 복지를 위한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현재 원로목회자들의 모임이 있는 교단들도 여럿 있지만, 은퇴 연금을 지급하는 교단은 장로교 통합측과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은퇴목회자들이 교단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자신이 알아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실정이다. 더욱이 자녀가 써포트를 해 주는 은퇴목회자들은 적고,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먹고 입고 자고 생활을 꾸려가는 것조차 버거운 분들이 너무나 많음에도, 교회와 성도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예로, 많은 원로목회자들이 한 끼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교회의 식당에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와서 배고픔을 달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소위 쪽방촌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에서 많은 은퇴목회자들이 기거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노인들이 모이는 시민 공원 등에 가 보면 은퇴 이후 할 일이 없어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은퇴목회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러한 원로목회자들의 열악한 생활고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하다 은퇴한 원로목회자들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드려야 할 몫은 분명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원로목회자의 처우개선과 예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인식조차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퇴하신 원로목회자들이 모이실 수 있는 따듯한 공간, 밥 한 끼라도 정성껏 대접해드릴 수 있는 공간, 함께 모여 예배드리며 기도하며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 원로목회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공간, 원로목회자들이 은퇴 이후에도 사역할 수 있는 현장을 연결하여 지역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네트워킹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미시적인 측면에서는 원로목회자들의 현실적인 복지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원로목회자 회관건립의 첫 번째 당위성이 있다고 하겠다. 거시적 관점-원로목회자 회관건립과 노인목회 활성화거시적으로 볼 때에도, 원로목회자 회관건립은 노인목회활성화라는 한국교회의 현실적 과제에 실제적인 기여를 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도 점차 노인목회에 대한 요구가 커져가고 있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수는 1년에 17만 여명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매년 신생아수의 약 40%에 해당하는 인원만큼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늘어나는 노령화사회로 들어섰으며, 2026년에는 노인 인구 1000만명,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를 맞게 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교회에서는 노인을 위한 목회를 활성화할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정부 또한 민간부문 특히 교회가 노인복지 문제에 간여하길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사회의 필요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도 노인목회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노인 관련 프로그램은 미흡하여, 양로원 방문, 경로잔치, 경로당 지원 등에 그치고 있다. 또한 대부분 유아부에서 장년부까지는 교회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나 노인들을 위해 노년부를 운영하며, 노인 교육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노인을 위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노인들이 프로그램의 주체가 되는 ‘노인에 의한’ ‘노인에 관한’ 프로그램을 분명한 목적을 갖고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노인에 의한, 노인에 관한 프로그램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지도력 개발이 급선무인데, 이것은 은퇴한 원로목회자들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목회자로서 지도력을 갖춘 상태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을 사모하며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영적인 필요까지도 이분들이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퇴한 이후에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역이 주어지지 않아 사역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는 많은 은퇴목회자들에게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역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의 원로목회자들과 네크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원로목회자재단이 추진하는 원로목회자 회관건립이 시급한 현실적 과제이다. 원로목회자 회관을 중심으로 이러한 노인목회지도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과 전문가 과정을 지원하고, 노인목회사역의 필요가 있는 현장을 이어주는 중간기지역할을 감당한다면 지역 교회에도 유익을 주고 원로목회자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윈윈사역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노인목회 활성화와 관련한 교회와 성도들의 다양한 관심한국교회가 정체내지는 침체기에 있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노인 목회의 활성화가 교회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노인 목회가 활성화되면 노인들이 속한 전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회는 더불어 성장하는 새로운 시장을 의미하는 ‘블루오션’이 될 것이다”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교회에 노년부를 조직하면,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유익함도 적지 않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노인과 가족 들간의 문제를 해소하여 화합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고, 노년부 안에서 친교하는 것과 함께, 노인들이 힘을 합해 교회 봉사에도 협력할 수 있다. 또한 끊임없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믿음의 진보를 보여줌으로서, 교회의 젊은 식구들에게 훌륭한 신앙 유산을 물려 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교회는 이제 노인들을 우대하는 섬김의 사역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노령화 추세가 가속화됨에 따라 노인 목회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계 전문가들은 한국 교회의 성장이 정체돼 있는 상황에서 노인 목회는 새로운 ‘블루오션(Blue Ocean)’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는 이에 대한 준비가 미흡한 상황이다. 현재 6만여 한국교회 중 300여 교회가 노인대학을 운영하는 등 여러 형태의 노인을 위한 사역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다. 한 교회에서는 실버타운을 마련, 노인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연 1회 건강검진을 받게 하며, 병원치료와 수술시 할인혜택을 받도록 돕고 있다고 한다. 지역 노인들에게 이동 목욕봉사를 벌이는 곳도 있고, 평생대학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15주의 노인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시립노인전문병원을 설립하여 무료로 운영하는데, 이 시설에 들어오려고 기다리는 노인이 2000여명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가정사역 단체들이 준비하는 노인 프로그램도 늘고 있어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성수련 프로그램,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 독거노인과 젊은 세대를 연결하는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에 참여하며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면, 노인목회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원로목회자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 그분들의 정신적, 영적인 복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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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8
  • 특별기고/ 동성애는 죄악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교훈이번 대선에서 동성애 문제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신앙적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동성애 문제(Issue of Homosexuality)는 인류의 시조가 범죄 타락한 이후 특히 노아 시대와 롯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세 5경에서도 동성애 문제를 분명히 교훈하였다.첫째, 동성애는 창조 원리에 역행한다.하나님은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도록 축복하셨다(창 1:27-28, 2:18-24; 롬 1:26).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여섯째 되는 날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최종적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고 만물의 영장으로, 남자(male)와 여자(female)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다. 육체적·성적 결합, 정신적·심적 결합, 영적 결합으로 일평생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부부생활을 하도록 축복하셨다. 부부의 행복한 생활로 얻는 사랑의 열매인 자녀들의 복도 축복하셨다.짐승들은 수컷 수컷끼리, 암컷 암컷끼리 교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로부터 범죄 타락하여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과 지능적 형상은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 결과 나타나는 죄악된 징조들 중 하나가 동성애이다.둘째, 동성애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말씀에 정면 위배된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다. 그러나 동성애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남자와 남자끼리, 여자와 여자끼리는 자녀를 낳을 수 없다. 동성애는 가문(家門)의 혈통을 끊게 하는, 가문과 사회와 국가에 반역죄이다. 또한 동성애는 유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의 축복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재촉하는 것이다.셋째, 동성애 성행위는 가증하고 추잡한 죄이다.신명기 23:17-18,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 “미동”은 남자 창기(male prostitute)를 말한다. “가증한 것"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가장 혐오스럽고 증오한다는 의미이다.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과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성경은 결혼 밖의 부도덕한 성관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으로 가르쳤다.넷째, 동성애는 순리를 역리로 사용하는 것이다.로마서 1:26-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penalty, 형벌)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순리(natural relations)는 자연적 관계 곧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남자와 남녀 부부간의 성관계를 말한다. 반면에 역리(unnatural relations)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끼리 부도덕한 성관계를 말한다. 이 같은 동성애는 수치스런 일, 가증한 일, 혐오하는 일이다.다섯째, 구약시대 동성애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레위기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반드시 죽일지니”란 성행위를 한 죄인을 구덩이에 넣고 가까운 사람(친족)들부터 돌을 던져서 죄인을 때려죽이는 무서운 형벌을 말한다.신명기 27:21, “무릇 짐승들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계명은 신약시대에 폐지된 것이 아니다. 이 계명은 의식적 율법(ceremonial law)이 아니라 도덕적 율법(moral law)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율법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음욕을 품은 자는 정신적으로 이미 간음한 자요(마 5:28), 마음으로는 이미 도둑질한 자가 된 것이다. 도덕적 율법은 영구불변한 진리이다. 그러나 세상은 정반대로 달음질치고 있다.여섯째, 노아시대 멸망 원인 중 하나도 동성애 때문이었다.마태복음 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눅 17:26-30). “먹고”는 먹다의 미완료과거 시상이다. 미완료과거 시상은 과거의 계속적 행동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먹고”라는 말씀은 대홍수 심판 날까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먹고 또 먹었다는 뜻이다. 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계속해서 사고팔고 사고팔았음을 강조한다. 저들은 땅의 일들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라.사람의 부패되고 악한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된 행위들은 어느 시대에도 있어 왔다. 그런데 말세지말이 되면 그와 같은 죄악된 행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더욱 보편적으로, 복합적으로, 더 극악한 현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참으로 이 시대는 모든 시대들의 마지막 시대, 악하고 패역하고 죄악이 관영한 시대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일곱째, 소돔과 고모라를 위시한 여러 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하나도 동성애를 위시한 음행죄로 말미암음이었다(창 19:23-25).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로 멸망하였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스라엘의 사해 남서쪽에 위치한 인근 도시들이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패역하고 음란하여 최후에는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셨다. 그리하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베드로후서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유다서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색(음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소도마잇(Sodomites) 은 동성애자들을 가리킨다. 지금까지도 영어권 세계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소도마잇이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도 로마, 폼페이 등 로마제국이 정복한 지중해 방대한 나라들의 음행과 동성애자들(homosexuals) 때문이었다. 말세지말에도 동성애는 멸망의 한 중요한 요인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타락한 후 아들 가인은 살인죄를 범했고(창 4장), 음란(창 9장), 간음(창 16장), 동성애(homo), 음행(창 34장), 매춘(창 38장) 등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말세가 되면 소돔·고모라 때와 노아 홍수 때같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 응해진 지 벌써 오래되었다. 마땅히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로마서 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결론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도덕·윤리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성직인 목사, 장로, 집사 직분자로 세우고 있으니 이것이 말세의 현상이요, 멸망받을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교회 안에 패역한 범죄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말씀에 영예를 더럽힐 수 있다. 그런데도 교회가 그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방임하는 경우에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 전체에 임할까 우려된다.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은 전국 16개 시·도 교육감이 학생인권 조례를 만들고, 동성애의 합법뿐 아니라 동성애가 나쁘다고 하면 벌금 또는 실형을 언도받도록 하는 악법이다. 개정 발의는 국회의원 10명 이상이면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나서서 동성애의 죄악성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5-04
  • 학술/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
    본고는 4월 14일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4월 월례회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에서 손봉호 교수가 발제한 ‘오직 성경으로만..’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1.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으로만”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 권위의 회복이었다.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등 다른 원칙들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천주교가 성경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경을 무시하고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 문제는 당시 천주교가 “성경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 외에 교황, 신부, 전통 등 다른 것들이 믿음과 생활의 지침을 주는 권위로 같이 인정되었다. 세례와 성찬 외에도 견진(堅振), 고해(告解), 혼인(婚姻), 신품(神品), 종부(終傅) 등을 성례(sacrament)로 인정한 것이나 교황 무오설, 화체설, 마리아 숭배, 연옥, 성직자 독신제도 같은 것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다. 성경은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으므로 평신도는 오직 신부들의 입을 통해서만 성경을 알 수 있었고 따라서 신부들의 권위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잡다한 것들을 다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 믿음과 삶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한 것은 그 때 상황으로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이었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1522년에 5000부가 인쇄되었는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3개월 만에 매진되었으며 1534년에 출판된 독일어 성경전서는 루터가 사망할 때까지 12년 동안 10만 권이 팔렸다 한다. 성경 외에도 종교개혁 초기 10년 간 약 6백만에서 7백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소책자가 인쇄되었고, 그 가운데 1/4이 루터의 저작이었다 한다. 그 시대의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실로 놀라운 매체사건이라 할 수 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 (Ohne Buchdruck keine Reformation)이란 말이 있지만, ”종교개혁이 아니었다면 그런 매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Ohne Reformation kein Medienereignis)이다. 그리고 루터와 칼뱅은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성경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시 통치자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권고함으로 오늘날 일반화 된 보편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오직 성경으로만..”원칙은 성경 해석에도 적용되었다. 성경해석의 기준은 철학이론, 교황의 칙령, 공회의 결정, 신학자의 의견이 아니라 오직 성경 그 자체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성경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하자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당시 천주교에서 유행했던 우의적 (allegorical) 해석을 비판하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해석자의 생각이 개입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나 신학자들이 제시한 해석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승으로 그의 사상에 심취했고 칼뱅도 그의 기독교강요에 아우구스티누스를 많이 인용하였다. 참조하는 것과 그것을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최근 독일에 <독일, 곧 루터의 나라> (Christine Eichel, Deutschland, Lutherland)란 책이 발간되어 독일은 주로 루터에 의해서 이뤄진 나라라는 인상을 준다 한다. 독일 뿐 아니다. 전 세계가 종교개혁의 덕을 보고 있다. 종교개혁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도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기본인권, 사회복지, 보편교육, 자연과학 등 현대 사회의 긍정적인 요소들 대부분도 이뤄졌다. 그것은 곧 성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전 세계 개신교인의 87%가 선진국 혹은 중진국에 살고 있다 한다. 개신교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주의가 성숙해 있고 경제적으로 단단하다. 성경의 위대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천주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어야 하는 것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자 크게 걱정했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제 마음대로 해석할 것이므로 교회가 사분오열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가 우려했던 바는 실제로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에라스무스처럼 헬라어 성경만 편집하고 성직자들만 성경을 읽었다면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났을 것이다. 2. 한국교회와 “오직 성경만으로”(1) 한국 교회는 거의 대부분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적이고, 그 덕으로 서양의 많은 교회들과 달리 아직도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는 어떤 교회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이 중요한 전통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은 한국 교회에서는 오직 고백으로만, 관념적으로만 존중될 뿐 구체적인 삶에는 그렇게 존중되지 않고 있다. “말과 행동,”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그 간격이 지나치게 커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목회자 독제, 목회 세습, 단체장 선거부정 등 성경의 가르침으로 전혀 정당화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많은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그런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성경 불감증에 걸려 있다. (3) 설교와 성경해석에도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 비록 중세 시대 천주교의에서만큼 우의적 성경해석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에는 그와 못지않게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 설교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심이어 성경 주석을 전혀 무시해버리는 설교자도 없지 않다. 2000여 년의 기독교 지성사를 무시하는 오만이며 어리석음이다.물론 문자적 해석이라 하여 성경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은 19세기 슐라이어마하(A. Schleiermacher)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고 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 circle) 같은 방법론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은 어차피 우리의 성경 해석은 상대적이며 불확실하기 때문에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나쁘지 않거나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100%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는 어려더라도 2000여 년간 이뤄진 성경해석을 참고하고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구원과 순종을 위해서 필요한 가르침은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스스로 고백하듯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만으로..”의 정신에 좀 더 신실하게 충실하면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상당수가 해결될 것이다. 윤리적 실패도 극복할 수 있고 분열의 문제도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최대 종교로서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감당해야 할 임무도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의 존경을 회복해서 복음전파와 선교에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올바로 기념하는 길은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4-20
  • 학술/ 이슬람에 대한 바른 선교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3월 10일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서 개최한 3월 월례회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대처와 선교’ 중 공요셉 소장이 발제한 ‘이슬람에 대한 바른 선교’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1. “이싸”에 머무르지 말고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국내 이주민에 대한 올바른 선교는 아랍어로 된 꾸란을 사용하기 보다는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들 국가에서는 성경의 예수를 “이싸”라고 대부분 사용하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 온 무슬림들에게 “이싸”를 사용하되 제자훈련에서는 이싸에 머무르지 말고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꾸란의 이싸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고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이슬람 전승에는 이싸가 재림한다고 하지만 그가 십자가를 부수고 이슬람을 선포하는 일을 한다고 하므로 성경의 예수와 크게 다르다. 따라서 첫 번째 무슬림 선교 방안은 꾸란의 이싸가 아닌 성경의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2.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하라오늘날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고 혼자 해석하지 못한다. 모스크에 기서 이맘이 해석해 준 말을 맹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무슬림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자는 이맘이다. 아랍 이슬람 세계는 극단적인 사상과 타크피르(상대를 무함마드의 종교와 이슬람의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단정함) 사상이 휩쓸고 있는데 그런 극단적인 사상의 원인들 중에는 무자격자가 꾸란과 하디스의 텍스트 해석을 잘못하여 올바른 이해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극단적인 무슬림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지난 2-4세기 동안 이슬람 국가에서 이슬람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이주민의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이슬람 종교를 실생활에서 실천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무조건 꾸란을 외우라고 하여 아무 뜻도 모르고 외운 무슬림들이 이성적인 사고에서 멀어져 갔기 때문에 모스크나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이슬람에서 “사고”는 종교적인 의무라고 한다. 꾸란은 인간에게 사고하는 능력을 사용하라고 한다. 이런 요구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말이 된다. 무슬림들에게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3. 무슬림들의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부터비엠비(무슬림 배경의 신자)가 새롭게 받아들이는 기독교를 이해를 하려면 그가 이미 갖고 있는 기존의 이해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옛것과 새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면 새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 무슬림들이 처한 환경에서 그들이 어떻게 개념들을 이해하고 있는지 특히 성경의 개념과 그들의 정부나 이슬람 종교 기관이 새로 정의한 개념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우리가 현장 연구를 해 보아야 한다. 가령 아랍어 ‘칼라스’(khal&#257;S)는 성경에서는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고려한 ‘구원’이란 의미이지만 무슬림들은 이 어휘를 ‘어떤 곤경에서 벗어났음, 혹은 어떤 일이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이븐 알라(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에서는 아랍어 ‘이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육체적 관계를 통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단어대로의 의미 이외에 아랍인들이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그 나라나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을 ‘이븐 알발라드’(Ibn al-balad)라고 한다는 것도 언급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세 번째 선교 방안은 무슬림의 개념과 우리의 개념에서 서로 다른 것이 있을 경우 그런 개념에 유의하여 복음을 전한다. 따라서 무슬림 사역자는 이슬람 용어와 성경 용어가 의미와 개념에서 서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연구해야 한다. 4. 영적 변화로 그리고 영적 공동체로 꾸란에는 성령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 무슬림들은 ‘성령’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무슬림에게 선교하는 다섯 번째 방안은 무슬림에게 영적인 변혁이 일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회심한 무슬림에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성령께 순종할 때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영적 변화는 기독교 공동체에 동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애쓰는 지역교회를 통하여 일어난다. 따라서 영적으로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를 개종한 무슬림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영적 변화transformation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성령과 함께 걸어갈 때 생기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랑하고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갈 때 변화한다. 영성 형성은 사회적인 문제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변화해야 한다. 영성 형성에서 혼(soul)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함께 하실 때만 우리의 영혼이 평안을 갖는다. 성령이 중심이 된 공동체가 개종자에게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와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공동체가 있는데 새로 개종한 무슬림들은 이런 영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5. 두 개의 정체성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무슬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는 이전의 정체성과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새로 시작되면서 개종자는 이 두 가지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는다. 물론 둘 중 하나의 정체성을 그가 빨리 받아들이면 좋은데 그 결정권은 개종자 자신에게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섯 번째 선교 방안은 개종자에게 다른 비엠비(무슬림 배경의 신자)들과 친교할 수 있는 공동체 또는 교제 그룹이 필요하다.비엠비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가족과 공동체가 갖는 사회적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복음 전도자는 무슬림이 개종한 후에도 그가 가족과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을 도와야 한다. 그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비엠비가 새로 거듭난 것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 한 게 아니라 그가 두 개의 정체성(옛것과 새것)jdentity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비엠비에게 실질적으로 심리적으로 지혜롭게 상담해준다. 실질적으로는 비엠비가 가족과 공동체에 남아있게 하고 가족의 반대에 인내를 가지고 대하도록 한다. 어려움이 닥칠 경우 그들이 가족을 떠나야 하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가족과의 접촉을 다시 갖도록 한다. 한국에서 생명에 대한 위협은 없다. 그러나 그가 고국(이슬람 국가)으로 돌아가서 그가 개종했다는 사실이 발각될 경우, 심리적으로 비엠비가 가족에게 거부를 당할 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그리고 가족을 떠나면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할지를 리더들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비앰비가 핍박이 나쁜 게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그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하나님의 안목perspective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6. 갈등 해결과 ‘밖으로 나오기’ 누구나 살다보면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무슬림 사회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슬람 사회에는 갈등을 해결하는 ‘나쁜 3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복수라는 문화가 되살아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갈등을 회피하고 세 번째는 종교계 등 권력계층을 이용하는 것이다. 많은 무슬림들은 수치 명예 문화에 산다. 그들이 옳고 그르냐는 그가 지역과 국가에서 어떤 사회적 지위가 있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복수를 한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복수가 가문의 문제이므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이슬람 공동체적 수준에서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처음 들어온 비엠비는 그 순간을 매우 기뻐하지만 자주 갈등을 겪거나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갈등을 파괴적인 방식이 아닌 건설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도록 돕는다.일부 비엠비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하는데 그런 경우 그들의 증거와 영적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 비엠비가 좋지 않는 상황에서 나쁜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있다. 경험 있는 비엠비 리더들은 비엠비가 새로운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공개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이 아닌 이슬람 국가에 살 경우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언제 그가 ‘밖으로 나올지come out’그 시기가 달라 지게 된다. 많은 비엠비들은 그들이 신뢰할만한 몇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지 않는다. 신앙을 밝히는 것은 점진적으로 비엠비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런데 가끔은 비엠비들이 그들의 신앙을 가족이 갑자기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비엠비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기도와 지혜가 그들에게 필요하다.국내 무슬림 이주민들은 종교 및 문화적 갈등, 자녀 교육 문제 등에서 무슬림 부모가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무슬림 이주민이나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는 교회 밖에서 이주민을 위한 보육 시설, 청소년을 위한 방과후 교실, 그리고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는 무슬림 이주민 자녀들을 위한 대안학교들이 필요할 수 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4-01
  • 학술/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대처와 선교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3월 10일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서 개최한 3월 월례회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대처와 선교’ 중 김영한 목사가 발제한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 알라는 하나님이 아니다’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인가? 예일 대학교의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가 쓴 책 “Allah: A Christian Response”가 『알라』(IVP)로 번역되고 지난해 2016년 1월 22일 은혜와선물교회(송용원 목사)에서 출판 기념 좌담회까지 열려서 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동일한 신이라고 보는데서 혼동이 야기되고 있다. 볼프의 주장에 의하면 ‘존재론적 일치 대상을 인식론적 신 이해의 차이로 보아, 두 종교가 믿는 두 신(神)은 결국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필자는 볼프의 주장을 단호히 거절한다. 필자는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는 사실을 다음같이 성경적 관점에서 제시하고자한다.I. 알라 신의 유래: 알라는 메카의 카바 만신전의 석신(石神)오늘날 13억 아랍인들이 순례하고 있는 메카의 카바(Kaaba) 신전은 본래는 360여개의 수호신 및 자연 신(神)을 섬기는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었다. 카바 신전에는 검은 돌이 있다. 이것은 석신으로서의 알라(Allah)를 상징하고 있다. 알라는 무함마드 이전에 있었던 카바의 석신으로 당시 아라비아의 주신(主神)이었다. 알라는 아랍의 토속종교의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었다. 무함마드는 알라가 쿠라이쉬(Quraish) 부족의 안전을 지켜주고 그들을 굶주림과 공포로부터 구원하신 신이라고 소개하고(Sura 106:1-5),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알라를 지고의 신으로 높혔다. 따라서 알라는 카바의 신이며 석신(石神)(god of stone)으로서 아랍토속의 다른 신들보다 높은 신일 뿐이다. 알라는 유대민족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등 믿은의 열조를 인도하시고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자기 이름을 계시하신 야웨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다. II. 성령의 신성 부정 - 이슬람의 영(jinn) 1. 무함마드가 받은 진(jinn)은 성령이 아니라 토속신(두려움의 영)이다. 무함마드는 40세가 되던 610년 라마단 시기에 당시의 종교적 유행에 따라 메카(Mecca)에서 5km 떨어진 광야에 있는 히라산 동굴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그때 그는 동굴 안에서 시끄러운 종소리와 같은 굉음의 환청(幻聽)을 경험하고 한 영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술취한 사람처럼 바닥에 쓰러져 진땀을 흘리고 낙타새끼 같이 부르짖었다(Sura 96).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이 방문자를 신령(神靈, Jinn)으로 생각했다. 그 영은 “여러가지 형상으로 변모해서 사생활을 해롭게 간섭하는 정신상태에 사로 잡히게 했다.”무함마드에게 내린 신령이란 당시 유행했고 아랍인들이 이미 토속적으로 섬겨왔던 강신술(spiritism)이나 주물숭배(fetishism)의 영이었다. 무함마드의 초기 계시에 있어서는 계시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다만 “무명(無名)의 영”(Jinn)이라 칭하고 있다(Sura 97:1-5). 무함마드는 622년 하지라 이후에 이 무명의 영을 가브리엘과 동일시하고 있다(Sura 2: 97-98, 그리고 66:4). 2. 꾸란은 성령을 피조물로 격하꾸란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다. 알라의 영은 “우리의 영”, “나의 영”, “거룩한 자의 영”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이슬람의 영은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알라의 명령 하에 그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알라의 노예이다(Sura 26:193). 이슬람의 영은 이슬람 교도들이 알지 못하는 영이지만 그들에게 높게 존경받고 있다.III. 단일신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다.이슬람이 말하는 알라 개념은 “단일인격적 유일신”인 반면에 기독교의 하나님의 개념은 “삼인격적 유일신”이란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슬람의 알라는 아들도 성령도 없는 신이다. 이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공격한다: “성경의 백성들이여,...알라와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론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Sura 4:171).1. 단일 신과 삼위일체 하나님무함마드는 삼위일체 신, 하나님의 세 위격의 통일을 다음같이 부정한다: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말을 그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 좋을 것이다”(Sura 4:171). 2. 알라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아내나 아들을 가지지 않는다며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강하게 부정한다: “...실로 알라는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노라...”(Sura 4:171). 그러나 요한복음은 성육신 하신 예수를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인 동시에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라고 증언한다.IV. 이슬람은 성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부정꾸란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처녀 탄생은 인정한다:"... 그녀는 순결을 지켰으니 알라는 그녀(필자 주:마리아)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그녀와 그녀의 아들로 하여금 온 백성을 위한 예증으로 하였노라”(Sura 21:91; 66:12). 그러나 꾸란은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거부한다. 예수가 알라로부터 낳아졌거나 출생되지 않았고 ”흙으로 빚어“ 지었다고 주장한다: “알라께서 아담에게 그랬듯이 이사에게도 다를 바가 없도다. 알라가 흙으로 그를 빚어 그에게 말씀하셨다. ‘있어라, 그리하여 그가 있었느니라’ ”(Sura 3: 59). 2. 이슬람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꾸란은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말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Sura 5:17). “알라가 마리아 아들을 메시아라 말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Sura 5:7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실로 알라는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노라...”(Sura 4:171). 예수의 하나님 제2위 되심도 더불어 부정한다: “알라가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라...”(5:73). “알라는 한 분이시고...성자와 성부도 두지 않으셨으며...”(Sura 112:1,3). 3.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구원자 되심을 부인한다. 꾸란은 유대인들이 예수가 살해되지도 않았고 예수는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다고 한다: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 라고 그들이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 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노라”(Sura 4:157).V. 지하드의 알라는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다1. 샤리아(이슬람법)의 알라는 아가페(무조건적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다.볼프와 달리 가톨릭 추기경이자 보수파 수장인 미국인 레이몬드 버크 (Raymond L. Burke) 사제는 2016년 8월 자신의 신간과 관련된 8월 원격 화상회의에서 “일부 사람들은 크리스천과 무슬림들이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천명한 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로마 가톨릭 추기경의 선언으로 주목할만하다. 버크는 “이슬람의 신은 통치자이기 때문에 알라와 하나님은 다르다”면서 “알라로부터 나온 샤리아 법(이슬람법)은 그 신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2. 알라는 지하드(Jihad, 聖戰)를 명령한다. 꾸란은 박해가 없어지고 종교가 단지 알라를 위한 것이 될 때까지 성전(聖戰)을 치루라고 한다(Sura 8:39; 22:78; 8:12; 47:4; 9:29; 4:89; 61:11,12). 알라는 성전(聖戰)으로 인한 죽음을 사랑하고(Sura 61:1) 이것을 위대한 승리로 여긴다(Sura 61:11, 12). 3. 성경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아들을 피흘려 죽게해 인류의 대속자가 되게하셨다. 예수의 메시아상은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전쟁의 메시야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대속자였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마 20:18-19; 눅 18:33-34).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면서 예수는 자기를 처형하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맺는말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는 그 종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와 예수의 차이다. 무함마드는 원수를 증오하고 보복하고 살해하라고 가르치나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보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슬람의 윤리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윤리의 우월성을 발견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3-23
  • 학술/ 종교인 과세 시행에 대한 교회의 과제 및 대처
    흐르는 물이 소리를 내거나 물결이 거칠어지고 흐름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위에 부딪치거나, 꺾이는 구간이 격하거나, 절벽으로 내리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라는 실존의 주변 여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흐를 인간적 측면의 이유와 근거가 있을 것이다. 무너질 이유가 있으니 무너뜨려 다시 세우시려는 것이든, 더 격렬한 싸움을 싸워야 하니 무너짐과 일어남 속에서 더 강한 전투력을 배양시키시려는 것이든, 이유는 있을 것이다.지금 한국교회는 분명히 하강곡선을 타고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지금이 바닥은 아니고 훨씬 더 깊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거세게 다가오는 주변 상황과 그에 대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무기력함을 보며, 더 깊고 축축한 바닥을 향해 내려갈 우리의 예견된 모습에 가슴 답답함을 느낀다.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다시 세워, 영광을 선포하실 때까지 우리 교회들은 그래도 나름으로 반듯한 노력과 다시 일어설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또 우리는 힘이 들수록 더욱 사회 설득의 노력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루어내야 한다.언젠가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까지, 끈기 있게 살아남아 있어 단숨에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바르게 존속함으로 등불로서 빛을 유지해야 한다.1. 납세에 훈련되지 않은 종교인의 미숙함교회 지도자인 목사는 법을 공부한 적도, 회계학을 공부한 적도, 행정을 공부한 적도 없고, 더욱이 세무관련 업무는 지극히 일천하다. 오직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 주변 학문을 공부했을 뿐이다. 대부분이 기도하며 소위 말하는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 믿고 그것을 위해 힘을 쏟았다.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교역자는 납세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납세관련 지식도, 경험도, 감각도 없다.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나는 면세점(免稅點) 이하니까” 하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분명하지 못한 개념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지(無知)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이제까지 사회적으로 미발달된 영적 구도집단인 교회에서, 납세와 관련하여 사회화된 체험을 전혀 하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던 교회와 목회자는, 어떤 것이 세금을 내야 할 항목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부터가 어렵다.작은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인이나 여러 교회로부터 받은 선교지원비나 목회지원비가 생활비로 쓰여지는 부분이 많다. 그것을 납세적 관점에서 본다면 면세점 이하라는 이해는 전혀 다른 의견이 생길 것이다.선교사도 예외는 아니다. 선교비중 선교사 생활비로 지출되는 부분은 급여인 납세자료를 제출할 부분인가, 아니면 선교의 부분인가. 그렇다면 일반 목회자와의 균형은 무엇인가.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닌데, 한국교회와 교단 각 연합기관은, 어떤 당국과의 교섭 및 교육계획과 지도자료를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종교인 과세라는 복잡한 내용을 당국의 발표대로 받아들인 것이 전부가 아닌지 우려된다.교역자의 무지로 수없이 많이 발생될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누군가가 의도를 품고 납세자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다면 어떤 일들이 나타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는가.다만 아무런 구체적 지침과 준비 없이 1년여 후 다가올 혼란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과 같은 영적 하강기는 더욱 가속 페달을 밟을 것이며, 종교인 납세는 교회의 사회 친화적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미숙함으로 인해 더 큰 비난을 받게 될까 마음이 불편하다.2. 우려되는 3년과, 그 동안 혼란의 수렁에 빠질 위기의 교회교회가 개인 납세에 익숙해지는 적응기간은 적어도 3년 이상으로 본다. 더 많은 교회와 목회자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기간을 짧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응기간이 짧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무참하게도 쑥대밭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얼마나 많은 판단과 비판, 그리고 갈등이 일어날 것인가. 이제 교회 대표기관들은 당국과의 교류 속에서, 이 사회를 위한 종교의 유효적 고유기능을 설득시켜 종교인들을 순기능적인 면에서 보호할 납세제도를 확립하도록 해야 한다.3. 납세문제를 통해 가속화될 교회 혼란종교인 납세가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그 시행 시점이 한국교회의 가장 안 좋은 하강곡선이 본격화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종교인 과세’가 교회를 보호하고 목회자를 보호할 좋은 분위기에서 준비되어지는 사항이 아니라, 반대로 교회와 목회자의 단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앞세워 교회가 혼란케 될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혹시라도 미숙한 교역자가 복잡한 납세의 결점을 생산했을 때, 그것은 폄하(貶下)하여 문제를 확대시킬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뜩이나 발화할 기회를 찾고 있으며, 파국을 준비하는 갈등의 교회에는 혼란을 가속화하는 또 다른 빌미가 될 수 있다.4. 종교의 고유성과 사회적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미숙한 잣대종교의 고유성과 사회적 기여 기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미숙한 잣대의 적용은 예상치 못한 많은 어려움을 유발할 것이다. 편향된 여론이 어떤 결정을 주도한다면 그것은 ‘포퓰리즘’이다. 지금 종교인 과세는 종교의 고유목적을 고려치 않은 형식논리에 치우치고 있음을 우려한다.과연 이 사회에서 종교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 역시 종교를 통해 이룰 최고의 역할과 사회적 순기능과 기여를 유도함으로써, 이 사회를 보다 원활하게 하고 기쁨으로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자진납세가 아닌 의무납세, 강제납세는 자칫 잘못하면 범법자를 양산할 수 있고, 납세자의 수세자에 대한 종속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종교인들의 추락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으로 인해 얻는 사회적 유익은 무엇이 있겠는가.5. 종교 논리와, 납세로 인한 시장경제 논리의 혼합 속에서, 비틀릴 현실의 가능성이제 교회와 세상은 각각의 위치에서 종교논리와 납세로 인한 시장경제논리가 혼재되어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의도한 자의 의도일 수도 있고, 의도와는 전혀 다른 어떤 모습일 수도 있다.어떤 장면이건 깊게 사고하고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시행은 큰 부작용을 발생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종교인의 지나친 사회참여와 정치참여,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에 의해 진행되던 교회의 정책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교회도, 국가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누가 이 장면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인가.6. 납세의 범위와 한정에 대한 분명한 노력종교적 특성을 인정하고, 역기능 양산으로 인한 혼란이 아니라 순기능의 발휘를 이룰, 종교의 사회기여와 특성을 인정한 합당한 법제를 위해 남은 기간을 활용해야 한다.기독교의 입장에선, 일부 대표성이 없는 왜곡된 비선이 아닌 기독교의 공식 대표진과,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인식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정부 당국자간의 바른 인식의 합치가 이루어져야한다. 진지하고 진정된 협의와 일치된 결론으로, 종교의 의미 있는 사회기여와 공헌 달성을 위한 종교인 과세 관련 합법의 범위와 한정을 설정해야 한다.교단이나 교계 대표기관은 당국과 합의되어 이루어진 분명한 내용들을 항목을 설정해서, 모든 대상자들이 오류가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계도와 교육을 해야 한다. 처음 시행되는 종교인 과세의 문제를 한 순간의 공포로서 시행착오 없이 이루리라는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7. 우리의 영적 준비와 대처천하만물이 다 때와 기한이 있다. 지금은 복음의 본질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원초적 복음의 뜨거움과 구원과 회복과 영적 대각성의 때를 간구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 땅에 부흥의 때를 주시면, 우리는 그 순간을 통해 다시 불타오를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지금 성장과 부흥을 위해 우리의 힘을 다하는 것만이 아니라, 흠결 없는 교회를 위해서, 약점 없는 교회를 위해서 우리의 목회적 힘을 나누어 사용해야 한다.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깨지지 않은 견고함을 확보해야 할 때이다. 지축이 흔들리고 사방이 혼란스러울 때 살아남은 자는, 그 풍랑과 폭풍 뒤에 노아의 방주 안의 생물처럼 새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3-16
  • 학술/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
    본고는 지난 2월 16일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가 마련한 발표회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바라직한 관계’에서 김승호 교수(영남신대)가 발표한 기조 발제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한국교회는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사이의 갈등이 보다 첨예한 이슈로 부각되어 왔다. 원로목사가 은퇴 후에도 후임목사의 목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려 할 경우 후임목사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후임목사가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원로목사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배척하거나 단절하려 할 경우 역시 갈등의 소지로 작용한다. 기실 담임목사 리더십이 교체되고 정착되는 과정은 상당한 과도기 상태라 할 수 있다. 리더십을 이양하는 원로목사와 리더십을 이어받는 후임목사, 그리고 이전의 리더십과 결별하고 새로운 리더십에 적응해야 하는 교우들은 모두 리더십 이양 과정에서 보다 신중하고 진지한 협력과 기도가 필요하다. 리더십 이양 과정에서 갈등의 소지는 언제든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바람직한 관계 유지를 위한 과제1. 원로목사가 숙고해야 할 사항1) 원로목사는 후임목사에게 리더십을 이양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 정서상 교회의 중직들이 원로목사를 찾아가 교회 일을 상의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교우들이 교회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원로목사를 찾아가는 것은 (비록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여러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원로목사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재확인하는 기회일 수 있지만, 후임목사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고,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사이에 갈등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으며, 교회 전체 차원에서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로목사는 목회에 관한 한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후임목사에게 이양했다는 사실을 수용할 필요가 있고 교우들에게도 이 사실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2) 원로목사는 은퇴한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에 출석할 필요가 있다. 원로목사가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에 그대로 출석하는 것은 후임목사에게 목회적 부담을 줄 수 있고 교우들의 권리를 침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원로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오랜 세월동안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 교우들과의 모든 인간적인 관계, 개인적인 관계를 단절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로목사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비인간적인 요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목사는 후임목사와 교우들을 위해 목회하던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에 출석할 필요가 있다.3) 목사는 은퇴 이후에 직면할 복잡한 심리적 감정에 대해 예상하고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가 은퇴를 하면 오랜 세월동안 한 몸에 교우들의 주목을 받던 환경에서 자신을 향한 모든 관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다. 이러한 환경변화를 미리 인지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예상외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과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은퇴 후에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나름의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시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4) 교회는 은퇴를 앞둔 목사가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은퇴 이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음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거나, 소일거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 놓여 있는 원로(은퇴)목사는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의 문제에 다시금 관여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런 관여는 후임목사와의 갈등이나 교회분쟁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은퇴 예정인 목사는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며, 교회는 이런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2. 후임목사가 숙고해야 할 사항1) 후임목사는 원로목사에 대한 교우들의 향수를 인식하고 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로목사에 대한 교우들의 향수는 후임목사에 대한 교우들의 거부나 무시가 아니라 원로목사가 훌륭한 목회를 했다는 증거이자 동시에 교회의 좋은 전통과 유산이다. 그런데 후임목사가 이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일 경우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후임목사는 교인들의 원로목사에 대한 향수를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후임목사는 원로목사에 대해 여러 방법으로 존경을 표현하며 그 분의 사역의 장점을 계승하려는 마음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자세와 노력은 자연스럽게 원로목사와의 바람직한 관계 형성에 기여할 뿐 아니라 후임목사에 대한 교우들의 신뢰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2) 기본적으로 교우들은 후임목사에게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차별성 있는 목회를 기대한다. 교회 내에서는 후임목사에게 원로목사의 목회를 계승하는 차원에 대한 기대와 원로목사의 목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목회적 차원에 대한 기대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후임목사는 교회 내에서 요구되는 교우들의 이러한 두 가지 기대를 잘 인식하고, 교회의 맥락과 교우들의 기대 및 자신의 목회철학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러한 두 가지 기대를 어느 정도로 어떤 방법으로 반영하여 목회사역을 감당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후임목사의 이런 노력은 결국 원로목사와의 건전한 관계 형성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교회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3) 후임목사가 부임한 이후 교회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날 경우 자연스럽게 후임목사의 리더십이 확고히 서 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과정이 급격하게 나타날 경우, 후임목사와 원로목사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후임목사는 자신의 목회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원로목사가 평생 동안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온 터 위에서 자신의 목회가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교우들에게도 이를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4) 후임목사가 빠른 기간 내에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급격한 변화를 시도할 경우에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임목사는 자신의 목회철학 뿐 아니라 일반교우들과 중직들의 욕구, 원로목사와 함께 해 온 교회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 등을 잘 고려하여 목회에 있어서의 변화 방향과 속도를 잘 조절하여 추진해 나가야 한다. 맥락을 무시한 채 급격한 변화만을 추구하는 모습은 후임목사가 교우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의 과도함 때문으로 여겨진다. 교회의 중직자들 역시 후임목사에게 교회의 변화에 대한 과도한 압력을 가할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로서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하고 은혜롭게 목회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필요가 있다. 이런 노력은 원로목사와 후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에도 기여할 수 있다.5) 후임목사는 교회의 특별행사나 명절 등에 원로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나 축도를 할 기회를 제공해 드릴 필요가 있다. 이렇게 원로목사의 공로를 인정해 드리는 모습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 교우들에게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높일 수 있고, 교회 전체에 화합과 평화 그리고 섬김의 자세를 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특히 원로목사가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우들과의 교제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후임목사가 배려한다면, 후임목사와 원로목사의 긍정적인 관계 형성에도 기여할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3. 교우들이 숙고해야 할 사항1) 교우들은 원로목사와 후임목사의 심리적 정서적 감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의 중직들은 원로목사의 고독감과 후임목사의 목회적 부담감을 이해하고 이에 대해 배려할 필요가 있다. 많은 교회들의 경우, 리더십이 교체되고 새 리더십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행하는 중직들의 잘못된 언행과 태도가 원로목사/후임목사 사이의 관계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2) 교우들은 목사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 수년간 은퇴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목회자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해 교육을 받을 기회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은퇴를 앞둔 목회자가 은퇴 이후의 삶을 보다 활기차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는 교우들의 원로목사-의존적 태도 및 교회분쟁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예상할 수 있다.3) 원로(은퇴)목사 부부에 대한 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 원로(은퇴)목사와 후임목사 사이의 갈등 중에는 원로(은퇴)목사에 대한 교회의 경제적 예우 문제가 원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우들 사이에 원로(은퇴)목사의 예우에 대한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연령별 직업별로 은퇴와 관련한 교우들의 인식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정규모가 작은 교회일수록 목회자 연금에 가입하여 은퇴 후에도 정상적인 경제생활이 가능하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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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7-03-03
  • 학술/ 21세기 사회변화와 교회의 과제
    본고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임성빈 박사가 2016년 9월 8일 「한국장로교육원」에서 “21세기 사회변화와 교회의 과제”를 주제로 강의한 내용의 주요 부분을 간추인 것이다. -편집자 주 교회성장에 대한 신학적 반성70년대에는 교회성장론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충격과 신선한 도전으로 부상하였다. 가속화 되어가는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인 교회와 종교의 역할은 축소된다는, 이른바 세속화 이론이 대세인 당시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신학계에서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논쟁이 너무 치열하여 교계를 양분화 시키고 있었다. 세속화의 도전 앞에 교회의 정체와 쇠락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와 교회성장에는 무기력해 보이는 신학계의 논쟁에 실망한 목회자들에게 교회성장론은 신선한 도전으로 다가 왔다. 이제 교회는 선교적 열정과 헌신, 그리고 신학뿐만 아니라 인류학과 경영학 등의 방법론을 총동원하여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던 이들의 경험과 이론에 힘입어 본국에서의 교회부흥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구체적 도움을 준 도구 중 하나가 교회성장론이었다. 교회성장론에 크게 힘입은 이른바 대형교회의 등장은 교회부흥과 성장에 대하여 체념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교회들에게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되었다.이러한 경항은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창업자적 정신으로 구비된 지도자들에 의하여 더욱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교회는 전통적 복음주의 교회의 메시지를 그대로 보존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방식을 전달하려는 목표를 가진다. 전략은 기업세계에서 빌려왔다. 핵심 개념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팔 시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장을 향하여 이들은 마케팅 기법과 다양한 오락의 형식을 활용하여 나아갔다.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교회론은 극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한다는 단점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또한 형식이 내용을 수정한다는 점도 문제점이다. 이와함께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문제점은 성경지식의 감소현상이다. 성경지식의 감소는 오늘날 기독교 도덕의 붕괴 현상을 가져온 주요 요인임에 틀림없다. 강해설교가 인기를 잃고, 매일 기도하고 성경 읽는 습관이 사라짐에 따라 성경지식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유형의 목회를 조장하는 교회들은 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종교저인 것은 반대한다. 즉 자기들이 스스로 동의하지 않은 교리를 믿는다거나, 스스로 설정하지 않은 규범을 따른다거나, 더욱 넓은 의미에서의 에큐메니칼 공동체적 관행을 쫓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다.물론 이러한 유형의 교회들이 전통적 교회의 정체상태에 우려를 표명한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예전의 개신교 자유주의자들도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20세기 후반이후 북미와 유럽의 주류 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고려할 때, 교회를 문화에 적응시키려는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의 적용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마케팅 이론을 토대로 목회방안을 모색하는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종교시장에 몸담고 있고, 종교적 고객들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제공된 목회적 대안들은 교회를 교회답지 못한 방향으로 끌어갔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교회가 대중문화의 공연장과 혼동되고, 목회자가 유명 연예인이나 기업의 CEO와 동일시되고, 당회가 기업의 이사회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는 현상은 결코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교제’로서의 교회를 제시하는 성경적 교회론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21세기 교회 개혁을 위한 목회 전략 전환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라는 기본 사명에 충실한지를 물으며 지속적 개혁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의 보편적인 거룩한 사도적 교회라는 건강한 교회의 푯대를 향하여 다음과 같은 반성과 목회전략적 방향전환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1) 매력적인 교회보다는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매력적 교회란 교회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자원들이 구심점 성향을 가지는 교회를 말한다. 반면에 선교적 교회란 교회 밖으로 사람들과 자원들이 투입되는 원심적 성향을 가지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앉아서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내는 곳, 즉 사도적 전승을 가진 곳이다.(2) 고비용 구조로부터의 전환요즈음 대부분의 교회들은 구성원들이 더욱 능력을 갖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더욱 성장의 동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능력과 아름다움을 갖춘 이들이 하나님의 사역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제는 오늘의 문화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는 거리가 먼 전제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들보다는 약한 자들 안에서 자신을 나타낸다고 하신다.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교회가 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요구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대단히 많다. 매력적인 교회로 보이기 위하여 수많은 비용을 들여 연속된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교회, 특별히 대형교회들은 과연 교회를 매력적으로 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을 신자다운 신자되게 함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물론 교회가 매력적이 된다는 것은 신자들을 신자답게 함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교회는 매우 중요하지만 구조나 건물이나 행사로서의 교회보다는 사람으로서의 교회의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3) 교인들을 진정으로 구비시키는 교회로의 전환건강한 교회의 가장 큰 장점이자 목표는 평범한 신앙인들을 하나님의 나라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비케 함에 있다. 이것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훈련된 전임 사역자들 중심의 사역행태와는 구별되는 목회유형이다. 우리의 일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소명의 장이다. 건강한 교회 사역자들의 우선 임무는 다양한 교회 사역과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구비케 함에 있다(마 28:2). 우리 교회가 담당할 다양한 사역지에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그런 교회가 많지 않은 이유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오히려 교인들을 즐겁게 하려고만 애쓰고 있는 오늘의 교회 행사와 사역은 아닐까?교인들을 만족시킴으로써 교회성장을 추구하는 교회의 문제점은 결국 새로운 신앙인들이 장성한 신앙에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다.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회 :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미치기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는 우리 가운데 예수께서 계심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와 복음의 능력에 의하여 삶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혁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더욱 기울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교회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하여 영적 가족으로 부름받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임재”라는 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교회들은 예수님을 위한(for Jesus) 목회를 해왔는지는 모르나 예수님에 의한(by Jesus) 목회를 해 왔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교회를 출석인원수나 건물에 의하여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님의 임재가 얼마나 인식될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교회 밖의 영역에 미치는가에 의하여 평가함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성공에 대하여 새로운 기준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숫자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을 발견하고 양육함에 있다. 단순히 몇개의 교리들을 공유하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변화된 삶이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제도적인 관점보다는 영향력의 관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초기에는 사람들의 숫자의 증가가 주목되었지만(행 2:41, 5:41) 후에는 주의 말씀이 온 땅에 퍼져 나가는 영향력이 강조됨(행 2:41, 19:20)을 주목할 필요가 이다. 교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근본적이며 궁극적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지향하는 교회다. 이러한 교회의 개혁은 결국 사회개혁을 인도하고 촉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그 나라로의 참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2-23
  • 특별기고 / 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3
    유럽 가톨릭 개혁 500주년에서 진정한 지구촌 종교개혁의 원년으로신학은 다양한 학문분과가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교계가 세계의 학문계를 풍미하며, 축적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이름으로 세계 문명의 중심축을 이루던 지중해와 대서양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지구촌의 종교가 합류하여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역사시대에 첫 세대로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불교 등의 세계종교는 물론, 분절된 인류이성이 만든 다양한 현대의 분과학문 등의 지성의 산물이 이제 닫힌 창문을 열고 대화하(려)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종교문화의 역사라는 관점에 시야를 한정해 보더라도 축 시대에 발아되고 형성된 종교문화는 한정된 지역의 시대적 문제의식을 안고 형성된 종교문화이다.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학은 유럽과 미국 등의 지역적 사고의 산물이며, 불교 등의 동아시아 전통은 인도, 아시아의 문제를 담지한 종교문화이며, 이는 유교도 그 예외가 아니다. 즉 모든 경전해석의 패러다임과 축적된 제도화된 종교의례는 개별 시대의 종교고고학의 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개신교에서 기념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는 여전히 서구와 그리스도교 중심적 사고가 내포된 개념이다. 만약 종교개혁 500주년이 한국의 입장에서 명실상부한 종교적 언어로 인정한다면, 개신교계는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이후 한국에 존재하는 유교, 불교, 무교,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과 어떠한 호응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진지한 종교적 성찰을 해 보는 것도 중요한 종교사업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종교개혁 500주년은 말 그대로 개신교 발단의 원년이었지 세계의 다양한 종교개혁의 원년은 아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관습적 용어의 대표적인 것은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란 학문분과이다. 신학(神學, theology)의 어원은 신(theos)에 관한 말(logia)이다. 그리스어로 ‘θεολογια(데오로기아)’는 신학, ‘θεοV(데오스)’는 신, ‘λογια(로기아)’는 말, 즉 하나님에 대한 논술 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만을 표준으로 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를 묻는 ‘오만’이 담긴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이 배타주의이든 포괄주의이든 다원주의이든 이미 그리스도교만이 구원의 유일(성)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전개되는 신학적 담론이다. 개념은 해석에 선행한다. 보라 그리스도교는 Christianity이며, 불교는 Buddhism, 유교는 Confucianism, 도교는 Taoism, 무교는 Shamanism으로 일반적으로 표기한다. 그리스도교와 종교들이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깊이 논증하지 않더라도 종교신학이란 용어는 큰 범주인 ‘종교’를 ‘신학’이라는 작은 범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필자는 그리스도교계에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 대해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신학을 하려면 정말 다른 종교에 대한 폭넓은 견식을 가지고 신학을 해 달라는 하나의 당부이다. 물론 한국의 일부 신학자들은 어려운 신학적 환경에도 이런 학문적 작업을 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실상부하여야 한다. 한국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종교신학’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일원적인 종교적 색채에서 형성된 서구교리와 구원의 체계는 유·불·도 등의 다른 종교적 전통에 훈습된 한국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서구 신학자의 신학적 문제제기와는 다른 종교적 환경에서 우리 신학자는 고민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별만이 필요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교리하면, 우리의 신학적 작업은 그리스도교 이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질문이며, 이에 대한 것은 우리만이 가지는 신학적 문제인 것이다. 주체적 신학과 주체적 신앙은 그래서 필요하다. 세계의 다양한 국가 가운데 한국만큼 세계적인 종교적 사유가 합류하여 종교 간의 세력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2016년 12월 19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 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에 의하면 무종교인 2,750만명(56%), 종교인 2,150만명(44%), 이 가운데 개신교 967만 명(19.7%)와 가톨릭 389만 명(7.9%)을 합하여 그리스도교 1,456만 명(27.6%), 불교 761명(15.5%) 등이다. 이에 유교문화와 한국의 기층적 신앙이라는 무교와 풍류도, 한국 신종교 등을 포함하면 다양한 세계적 종교지형의 압축판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위대한 사상은 늘 주변부에서 발생한다. 이스라엘의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 세계를 통해 유럽 중세를 풍미하였으며, 개신교의 일군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팍스 아메리카의 초석을 다져 현대에 풍미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본 인류의 약사라면, 앞으로는 진정한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런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 500주년은 ‘가톨릭 개혁’을 통한 유럽 중세의 사회개혁의 큰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교라는 일원적 종교세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며, 계몽주의, 종교개혁, 산업혁명, 제국시대 등은 세계 대전을 거쳐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양대 축이었던 헬레니즘에 의한 헤브라이즘의 해석적 전통은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류는 아직까지 축 시대의 사유 전통을 뛰어넘지 못하였다고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일색의 일원적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이 아니라, 종교와 종교, 종교와 과학, 지구와 우주, 물질과 생명이 거대한 합류의 시대에 모든 종파경전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낡은 문명과 새 문명이 부딪치고 있고 한국의 역사적 환경은 새 문명의 알짬을 만들 수 있는 역사적 고민을 하는 현장이다. 낡은 문명의 위험과 새 문명의 기회가 공존하는 한국은 그야말로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낡은 자본주의와 낡은 공산주의가 대결하는 극단의 역사적 대결이 맥아더의 말처럼 신학전쟁이라면 통일한국의 새로운 생활패러다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찾아내어야 한다. 역사를 떠난 신학, 민족을 떠난 신학, 현대 학문을 떠난 신학은 생각할 수 없다. 다 경전적 전통에 익숙한 한국은 분열과 상극의 낡은 문명을 상생과 조화의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하는 역사적 현장에서, 다종교적 전통의 종교문화에서 한국은 옛날 이스라엘과 영국이 했던 새로운 문명의 틀을 통일한국의 새로운 문명의 생활체계로 만들어내어야 하는 것이 세계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한국 신학자와 목회자의 역사적 사명이 아닌가!말 그대로 지구촌의 진정한 ‘종교개혁’은 한국 그리스도계의 숙제이자 역사적 사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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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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