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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김윤희 대표 ‘여성사역 활성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본고는 지난 4월 8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가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에서 개최한 4월 월례회에서 김윤희 대표가 발제한 ‘여성사역 활성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발췌한 것이다. 평양 대부흥회가 일어날 당시 우리나라 여성 성도들의 활약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금씩 알려진 사실들을 살펴보면 실로 대단했다. 신주단지를 성미로 바꾸고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던 풍습을 새벽기도로 토착화 시킨 것도 여성들의 자연스런 신앙의 상황화의 모습이다. 기도인도에도 탁월한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타고난 리더십이 발휘된 경우이다. ‘전도부인’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도했고, 여성 권서들로서 성경도 많이 전파했고 팔았다. 한 기록에 따르면 김서커스라는 전도부인은 2900리를 걸어 다니며 전도했고, 어떤 여인은 연간 6,730명의 여성을 방문했고, 성서를 4,491권이나 팔았다고 한다. 십일조 부인이라고 해서 1년 52주 중에 10분의 1인 5주를 하나님의 일, 전도하는 일에 서약하기도 했다. 십일조 부인들이 1년에 총 1,719명이 2,840회의 가정방문을 해서 총 5,647명을 만났으며, 830명이 교인으로 등록해서 15%의 성공률을 보였다고 한다.수십 개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사경회도 이끌고 성경도 가르치고 한글, 산술, 위생학, 혼례, 금주, 조혼의 폐해에 대한 교육, 실생활 지식도 가르치고 자급하는 길도 가르치는 등 전도부인들이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성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는데 앞장섰다. 여선교회, 여전도회 같은 여성 단체들도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경회는 여성들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 후에 여학교의 설립에도 일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여성들은 권리가 있건 없건, 여건이 되건 안되건 자신들의 역할을 훌륭히 해 냈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자수의 60% 이상이 여성이고 어떤 교회는 예배시간에 남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교회성장과 부흥의 원동력이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 될 전망이다. 또한 예장통합 전국여교역자연합회가 ‘여 교역자 실태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최종 신학학력의 경우 2001년 조사에서는 신학대학원 이상이 전체 35.4%이고 노회성서신학원이 20%나 차지한 데 반해, 2013년 조사에서는 신학대학원 이상이 전체 72.6%이고 노회성서신학원은 8.1%로 대폭 줄었다. 이러한 조사결과의 의미는 과거와 달이 신학학력에 있어서 여성 사역자들의 교육과 자격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사역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지의 몇 가지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근본적 열린 사고가 있어야 한다. 여성사역 자를 보는 시각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여자가 무슨’에서부터 ‘‘여자도 당연히’까지 그 범위가 넓다. 그 중간에 ‘왜 여자가?’라든가, 남성만 있으니까 ‘여성도 한 명 끼워주자’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제 21세기인 만큼 그 동안의 여성사역에 대한 신학적, 이론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충분히 토론했고 충분히 싸웠다고 생각한다. 학계에서 조차 여성안수라든가 여성 사역자들에 대해 100% 확실하게 성경 해석학적 결론이 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각 교단이나 개인의 신학적, 성경적 소신을 접으라는 것이 아니다. 소모적 논쟁에서 생산적 방향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 대통령까지 나온 시대이니만큼 이제는 이러한 남녀 차별적 사고에서 벗어나 진취적으로 여성사역자들과 연대하고 협력하고 소통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큰 틀에서 사역전략을 짤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둘째, 변화의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 앨빈 토플러는 속도의 충돌을 이야기했다. 기업이나 사업체는 현재 시속 100마일로 달리고 있고, 시민단체는 90마일, 가족은 60마일, 노동조합은 30마일 정부 관료조직은 25마일, 학교는 10마일(그만큼 학교는 변화에 있어 보수적이다), 국제기구는 5마일, 정치조직은 3마일, 법은 1마일(법은 그만큼 바뀌기가 어렵다)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교회는 몇 마일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특히 기업들은 돈을 벌기 위해 100마일로 질주 하고 있는데, 교회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 과연 몇 마일로 달리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야 한다. 삼성의 회장은 ‘마누라 빼고는 다 바꾸라’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교회는 변화해 가는 시대에 맞추기 위해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런 교회만이 앞으로 성장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교회는 도태할 것이다. 교회가 속도를 못 내고 있는 사이에 세상과 여성들의 삶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따라 갈 수 있을 지가 의문이 될 정도이다.셋째, Customized된 전략이 필요하다. 즉, 맞춤화된 전략이 어느 때보다도 더 시급하다. 이미 여성들을 통틀어 ‘여성’이라고 놓기에는 여성들도 너무나 세분화되어 있다. 전문직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성 CEO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골드 미스라는 새로운 그룹도 등장했고, 돌싱이라는 그룹도 등장했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세대차이가 크고 젊은 세대들과 나이든 세대의 소통도 점점 힘든 추세이다. 3D 프린터의 대중화 시대가 다가오고 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각자 개인이 원하는 것을 각자가 매뉴팩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대량생산에서 소량생산으로 가고 있다. 자기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들이 세분화 되는 정도를 넘어 이제는 한 개인 개인으로 세분화 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직도 교회가 여성들의 필요는커녕 ‘여자들’이라는 카테고리로 뒷짐지고 있다가는 뒤쳐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현대의 여성들은 과거의 충성스런 권사님 세대와는 완전 다르다. 자신들이 존중 받지 못하고, 자시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교회는 의리없이 과감히 떠날 것이다. 또한 그러한 트렌드를 쫓아오지 목사님들에 대해서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 것이 추세다.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는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거나,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거나, 장난감은 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고급-저급, 어른-아이,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취향 구분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한다. 주거공간 조차도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을 거부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기존의 성별, 나이, 직업, 학력의 연구통계학적 기준에 입각한 시장 세분화도 점점 무력해 지고 있는 트렌드를 지적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현재 어디에 와 있는가의 진단이 시급하다. 또한 이런 세분화에 발맞추어 어떤 사역들이 준비되고 있는지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현재 CCC에서 The Significant Woman이라는 여성사역을 시도하고 있다. 여성이 여성에게 사역하며 그들의 전문성과 고유성을 인정하고 개발시켜 준다. 또한 리더들과 강사들은 자신들의 교파와 교회를 초월해 다른 교회들도 섬김으로 초 교파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한 여성이 또 다른 한 여성을 세운다’는 모토 하에 모든 여성들이 자신이 가진 고유함과 달란트와 사명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성사역의 중요한 모델 중 하나라 생각한다. 현재 젊은이들만이 교회를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젊은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사역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교회가 여성들을 받아들이던 받아 들이지 않던 여성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자신들의 열정을 어디엔가 쏟아 부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열정, 헌신, 능력, 전문성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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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7
  • 학술/ 김영한 박사 ‘올바른 신학 갱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본고는 지난 4월 8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가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에서 개최한 4월 월례회에서 김영한 박사가 발제한 ‘올바른 신학 갱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발췌한 것이다. 김 영 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명예교수)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세계선교 대국이 되고 해외 유수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수준 높은 신학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신학자들 수가 아시아 전 나라의 수학자들 수보다 더 많다.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와 보수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자유주의 신학은 변두리에 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보수신학이나 복음주의 신학을 자랑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130여년 동안 짧은 기간 동안 압축 성장해 온 한국교회는 신학에 있어서도 양적 성장에 치우치지 않았나? 보다 내실적이고 건전한 신학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졌나? 겸허한 성찰을 해야 한다. I. 영성훈련을 핵심으로 하는 신학교육으로 갱신오늘날 한국신학에는 신학 지식위주의 전문성은 있으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시하는 기도와 경건의 훈련이 결여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부천소재 신학대의 해외 유학(遊學)파 신약학 교수와 목사가 자신의 딸을 학대 치사, 시신을 집 안에 수 개월 동안 방치한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나 사회에 큰 충격을 남겼다. 이는 있어도 안되며,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목회자요 신학자가 그런 일을 행했다는 것은 인간의 부패성과 더불어 오늘날 신학 교육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신학 교육이 인성과 경건을 도외시하고 지식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학생 선발 자체가 신앙과 인성보다는 지식 위주로 이루어지고, 신학교육과 학위 수여가 일반 고시생들과 다름없이 암기 위주로 지식 위주로 이루어지는 데서 빗어진 사태라고 볼 수 있다. 신학교육을 받은 신학생들이 신앙과 인성이 좋아졌다기보다는 종교와 성경지식을 많이 가진 것 외에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학 지식은 많이 공급받는데 기도와 경건이 부족하여 신학과 성경지식은 많아 졌으나 신학 입학 전보다는 경건과 헌신의 태도는 많이 저하되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가장 보수적인 신학대학들(총신대, 백석대, 감신대 등)에서도 동성애 신학생들의 모임이 있고 이들이 우리 사회의 성문화를 퇴폐로 몰아가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늘날 신학 교과과정에 들어오는 자유주의 신학요소들이 신학생들의 헌신과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2013년-15년 3년간 주요 보수교단 신대원 지원자수의 감소현상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한국사회가 교회 지도자, 목회자들에 대한 윤리회복을 걱정할 정도가 되다보니 젊은 세대들이 교회사역, 목회 비전에 관심이 떠날 수밖에 없다. 교회나 교단들이 엄청난 예산을 해외 선교, 교회 교육관이나 교회당 건축과 각종 부대시설 운영을 위하여 사용하고 신학교 운영을 위하여는 투자하지 않고 많은 학생들을 받아 신학생들을 양산하고 등록금으로 운영하는 상황도 시정되어야 한다.II. 교단신학보다는 상호존중과 연합을 중요시하는 신학 갱신: 교파 아닌 그리스도 중심신학교수들이 보편 기독교를 지향하지 않고 획일화 내지 교단화되는 교단 신학은 개혁되어야 한다. 해외에서 유학할 때는 교제가 있던 교수나 목회자들이 한국에 돌아 와서는 교단의 장벽에 막혀서 제대로 인간적 소통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기 보다는 교단으로 장벽이 만들어진 종교적인 파당 기독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진정한 개혁주의는 자기만 옳고 자기와 다른 것은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하나의 상대적인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배우고 나누고 섬기는 태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만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항구적이나 그 외 교단이나 교리들도 정확무오한 말씀에 비추어서 항상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합리적 보수와 정통신학은 근본주의와는 다르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이슬람 극단주의에서 볼 수 있는 바같이 자기들의 교리만 옳다고 하고 그 외 다른 입장들을 이단적인 것으로 정죄하는 입장이다. 이는 교회와 교단을 분리시키고 정죄함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함으로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정통주의는 칼빈주의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교리를 따르면서 서로(루터교, 개혁주의,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 성결교) 간에 존중하고 배우고자 하며 사회 개혁적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역사적 개혁주의는 열린 보수주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복음적 포용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바같이 열린 사회는 발전하나 닫힌 사회는 수구화되고 시대에 뒤떨어진다.III. 정통교리보다는 정통실천을 중요시하는 신학갱신: 일부 보수교단의 실천적 무신론 갱신오늘날 한국보수교회의 경우에서는 교리적으로 정통주의라고 처신하나 행동면에서는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을 보이는 경우가 최근 한기총-한교연 분열과정과 기독교 교단 및 연합기관의 장(長)선출과정에서 돈봉투 매수사건 그리고 어느 보수교단 총무가 행한 시정 잡배 같이 칼부림의 사건 등 각종 불법이 공개적으로 드러나 보수교회의 위선성과 율법을 폐기한 비윤리성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보수교단인 예장 간판을 단 교파들이 300개가 되는 현상도 교리로는 정통을 표방하나 실천적으로는 정통을 자신을 위장하는 간판 장치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밝혀진다.이는 최후 심판 때 주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자신은 정통이라고는 하고 교단장이나 연합기관장이라고 하나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고 계신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여기서 예수님은 정통 교리를 말씀하시기보다는 정통 실천(ortho-praxis)을 교훈하시고 계신다. 정통실천이란 바울이 가르치는 바 같이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빛의 열매로서 행하는 것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IV. 이단정죄 남발하여 이단양산하는 교단 사이비 이단 대책위원회 갱신WEA, WCC 반대운동연대 일동이 이번 서울 WEA세계지도자 대회모임(2월 29일-3월 5일)에 반대하여 일간 신문에 5개항 개최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AEA 및 한국복음주의 신학위원장으로서 다음 5개 사항을 해명하였다. I. WEA는 성경의 권위를 믿고 정통신앙을 계승하고 고백하는 세계복음주의자들의 연합체다. II. WEA가 선교 정책에서 타종교와 협력하는 것은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이중행동이 아니다. III. WEA는 "오직 예수 구원"이라는 개종 전도를 원칙으로 한다. IV. WEA는 종교혼합주의를 표방하지도 실천하지 않는다. V. WEA는 한국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우리는 WCC와 로마 천주교의 일부 교리와 선교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WCC 반대운동연대가 WCC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행동이다. 한 단체나 운동이 몇가지 흠이 있다고 하여 한 단체를 통째로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른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다. 이단 정죄는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 때 하실 일이다. 지상에는 제도적으로는 온전한 교회나 교단이 없다. 우리 모두가 칭의를 받았으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향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루터는 그리스도인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하였다. 교회나 교단은 교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어느 모임이나 단체도 허물없는 기관이 지상에서는 없다. 그러므로 허물이 있으나 서로 인정하고 배우고 교제하면서 협력하고 연합을 추구하면서 성화(聖化)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맺음말오늘날 신학 갱신은 초창기 교부들이 가졌던 경건과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수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요청된다. 지식 위주의 신학교육에서 인성과 경건, 성품 함양 위주의 영성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이 발견했던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 사상( sola scriptura)와 전 인격적 헌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사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단 신학교를 교회 장학금으로 운영하는 방향으로 신학생 선발 및 양성 정책을 바뀌어야 한다. 신학생들의 수를 질적으로 제한하고 질적 운영을 해야 한다. 무인가 신학교가 발붙이지 못하는 교계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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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5
  • 학술/ 최태영 교수 ‘온신학과 개혁교리’
    본고는 지난 3월 31일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주최의 신학 세미나 ‘바른 신학, 바른교리’에서 최태영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가 ‘온신학과 개혁교리’란 주제로 발표한 발제문을 발췌한 것이다. I. ‘온신학’이란?필자는 한국의 바른 신학으로 온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목회하는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온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기를 요청한다. 특히 온신학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가능한 한 온신학의 정신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목회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온신학(Ohn Theology)은 최근 김명용총장이 명명한 것으로써 2014년 10월 9일 온신학회가 창립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온신학의 ‘온’은 순수 한글로써 온전하다는 의미를 우선적으로 취하고 있다. 따라서 온신학은 온전한 신학이라는 의미가 된다. 지금까지의 한국신학에서 근본주의적 흐름, 민중신학적 흐름, 순복음주의적 흐름 등이 한국적 신학으로 자리매김되어 온 적이 있었는데, 온신학은 그런 흐름들을 존중하지만 온전한 신학으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온전성, 혹은 전체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온신학의 역사적 기원은 한국의 대표적 목회자로 존경받는 한경직목사의 목회신학, 한국조직신학계의 거봉으로 인정받는 이종성총장의 조직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흐름에서 김명용이 중심이 되어 함께 세워가고 있는 한국적 신학이 온신학이다. 이종성의 신학을 통전적신학으로 명명하는데, 온신학은 통전적신학을 상당부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온신학의 구체적 내용보다는 그 정신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필자가 가지고 있는 온신학의 신학정신임을 밝혀둔다. 필자는 그것을 5가지 한자어로 표현한다. 전·정·온·이·한(全·正·溫·易·韓)이 그것이다. 전(全)은 온전 혹은 전체를 의미한다. 온신학이 첫 번째로 내거는 기치라 할 수 있다. 전체성을 가지려면 보수와 진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근본주의, 순복음주의, 민중신학 등의 장점은 그대로 취하되, 부분으로 끝나지 않도록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좌와 우를 철폐하고 한데 묶어서 중(中)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좌와 우를 그대로 보존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역동적으로 온전함을 이루기를 희망하는 신학이다. 정(正)은 올바른 신학을 의미한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신학이 항상 바른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이단 사설들이 나타나 교회를 혼란시켜 온 것이 그 사실을 잘 말해 준다. 필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신학의 기준은 성경과 개신교 원리다. 온신학은 바른 신학으로서 성경적인 신학, 16세기 교회개혁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한다. 온(溫)은 따뜻한 신학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라는 뜻이다. 생명은 따뜻한 온기를 필요로 한다. 차면 죽고 따뜻하면 산다는 말이 있다. 온신학은 영혼과 육체 곧 전인적인 생명신학,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신학을 지향한다. 나아가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을 지향한다. 요즘 신학은 너무 논쟁적이고 현학적이어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느끼기가 힘들다. 생명을 살리는 신학은 생명의 따뜻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易)는 쉬운 신학을 의미한다. 신학은 모든 신자들의 신학이어야 한다. 현대의 신학은 너무 학문적이라서 평범한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목회자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결과 신학이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아탑에 갇힌 학문, 교회와 이질적인 학문이 되어서 교회와 신학교 사이의 거리를 점점 더 멀게 하고 있다. 온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추구함으로 평이성, 곧 쉬운 신학을 지향한다. 최고의 신학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쉬운 언어로 구사되었는가 하는 것이 온신학의 하나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한(韓)은 한국적 신학을 가리킨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신학이 단순히 서구신학을 수입하거나 모방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의 심성에 맞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온신학은 우리 한국인의 심성, 언어와 삶, 한국의 정신문화에서 우러나온 신학 곧 우리의 주체적 신학을 지향한다. 민중신학이 세계에 내놓는 한국적신학이 아니라 온신학이 한국적신학임을 벌써 세계 여러 곳에서 인정하고 있다. ‘온’이라는 순수 한국어는 이것이 한국적신학임을 암시하고 있다. II. ‘개혁교리’란?바른 교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16세기 교회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교회개혁운동이 다름 아니라 바른 교리를 추구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500년 전에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그 바른 교리가 현대 개신교에서 너무 많이 잊혀졌다. 그것은 로마교회(천주교)와 다른 이단들 속에 있는 비진리가 은연 중에 교회 속으로 많이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교회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키고, 나아가 이단들의 교리적 공격에서 교회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최소한 개혁자들의 기본 가르침을 잘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개혁자들의 구호 속에서 발견된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리고 ‘오직 예수’가 그것이다. 그 의미를 오늘날의 현상과 대비하여 살펴보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정경 66권 외에 다른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교리와 삶의 최고 권위로 삼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조차 성경의 권위 아래 있음을 실천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로마교회는 이 원칙을 철저히 위배하고 있다. 또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 외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다른 경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원리강론이든, 몰몬경이든, 혹은 위대한 신학자의 명저라 할지라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은혜와 믿음(sola gratia / sola fide)은 교회개혁운동의 실질적 원리였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오직 예수(solus Christus)는 오늘날 소리 높혀 외쳐야 할 개혁의 원리다.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님만이 중보자이시다. 마리아라든지 소위 로마교회의 성인들은 결코 중보자가 아니며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외에도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는 식의 종교다원주의가 신학계를 휩쓸고 있을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다른 종교의 구원 가능성, 다른 그리스도를 허용한다면 자신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단 교주들의 행태를 반박할 근거가 다 무너질 것이다. III. 이단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태도이단이란 바른 신학, 바른 교리를 배격하는 사상 및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교회를 교란시키는 이단사상을 발견하여 그 정체를 드러내고 축출함으로써 교회를 수호할 뿐 아니라 바른 신학과 교리를 형성해 왔다. 상당수의 정통교리는 이단과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사적으로 배격된 이단들의 유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지금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계시하신다는 주장. 2) 성경 외에도 다른 경전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 3) 삼위일체론에 대한 부정 및 양태론 또는 삼신론적인 해석. 4)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하여 균형을 상실한 해석. 5) 행위를 조건으로 하는 구원설 또는 예수님 외에도 구원의 다른 길이 있다는 주장. 6) 기타 시한부재림설이나 예수님 이외의 재림주에 대한 주장 등.교회사적으로 이단에 대하여 잘 대처해 왔고 앞으로도 잘 대처해야 하지만, 이단을 정죄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과오도 적지 않았다. 16세기 로마교회가 개혁자들에 대해서 취한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과도한 이단 정죄는 삼가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이단 정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입장을 보여준다. 하나는 바울의 단호한 입장이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는 이단에 대한 맹렬한 저주를 선포하였다. 거기에 등장하는 이단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명백한 이단이었다. 반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제시하셨다.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실수하여 알곡까지 뽑아내는 과오를 염려하신 것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원칙이 발견된다. 가라지, 곧 이단인지 아닌지 명백하지 않을 때는 뽑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행위구원과 같은 명백한 이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 다만 그 경우에도 용서와 사랑, 생명을 살리는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IV. 결어한국교회를 위한 바람직한 신학으로 온신학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온신학의 신학정신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전체성(全), 오직 성경에 따라 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중정성(正), 생명을 살리고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생명성(溫), 지성적 상위층만 이해할 수 있는 고난도의 신학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 하고 이해할 수 있는 평이성(易), 그리고 한국 교회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주체성(韓)으로 정리할 수 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4-06
  • 학술/ 한국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나?
    본고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지난 3월 8일 성락성결교회에서 개최한 제32차 열린대화마당 ‘한국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나?(2)’에서 김원배 목사가 발제한 원고를 일부 발췌한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눈앞에 두고 한국교회의 개혁을 꿈꾸는 일은 시의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선교역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 세기 안에 이루어낸 한국교회의 성장은 밖에서 보면 “기적”같은 일이요,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실로 한국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피나는 눈물과 기도와 헌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몇 해 동안의 한국교회 신뢰도와 호감도 조사가 말해주듯이 한국교회 전체가 위기를 겪고 있는 것 또한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신뢰도는 낮아지고 호감도가 줄어들어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며 세상을 변화시켜야할 자리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며 조롱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문턱을 넘기 위해 지나온 날들을 꼼꼼히 짚어보면서 새로운 방향설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긴급 제언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는 한국사회 안에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는 공교회를 대표하는 진보적이고 보수적인 교단들이 대표를 파송하여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여 시대와 사회의 도전에 대해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선교, 교육, 봉사 등의 과제들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가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긴급한 과제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를 명실 공히 대표할 수 있는 연합기구를 창출시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고 연합기구가 한국교회를 위해 해야 할 과제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일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불가능의 가능성으로 만들지 않으면 한국기독교의 창조적인 미래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가 죽지 않고 살기위해서는 연합기구의 창출과 연합기구를 통한 한국교회의 개혁의 작업은 우리 시대가 필연코 성취해야 할 시대적인 과제이고 지혜를 모아 풀어야할 커다란 숙제입니다. 1. 신학교 난립과 목회자 과잉배출첫째로 연합기구가 시급히 단행해야 할 개혁의 과제는 난립한 신학교들을 정리하여 목회자 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목회자가 되는 자격기준을 통일하여 부실한 목회자가 양산되는 구조를 막는 일입니다. 한국교회가 신학교의 정비를 통해서 목회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승려제도 때문에 망한 신라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르는 우려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내용중 천년왕국 신라가 망한 것은 사찰이 너무 많고 승려가 너무 많은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승려가 되면 군대에 가지를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토방위에 헌신해야할 한창나이에 사내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니 국방력이 약해지고, 세금을 내지 않으니 국가 예산이 줄어들게 되고, 노동을 하지 않으니 생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려가 너무 많으니 국력이 약해져 망국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는 것이 김부식의 견해입니다.우리나라는 매년 313개의 신학교에서 15,000명의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목회자 과잉배출에 따른 대혼란을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장로교신학대학의 원로교수이신 박창환 박사께서 장신대에서 강연을 하면서 7개 신학대학이 당분간 몇 년 동안 신입생을 받지 말자는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개교회는 신학대학교 교수들을 선교사로 생각하고 이들의 생활비를 부담하도록 하자는 대안까지 제시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바 있습니다. 오늘 한국기독교도 매년 신학교에서 양산되는 부실한 목회자의 문제를 속히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교회 앞에 다가올 재앙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그렇지만 지방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부실한 신학교 정도가 아니라 교수라는 군소교단의 목사가 평신도의 집을 찾아가 저녁시간에 신학공부를 몇 년 시키고 안수를 주는 웃지 못 할 일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장을 우리가 보더라도 그것이 타교단이고 통제할 하나 된 기구가 없다보니 누가 제제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가 창출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부실한 목회자를 양산하는 신학교의 정리와 목회자가 되는 과정의 기준을 통일하는 작업을 창조적으로 잘 감당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의 자질문제도 향상될 것이고 전문적인 사역자로서의 준비도 체계적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면 목회자의 위기에서 비롯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목회자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보다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수준은 곧 교회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자의 질적 수준으로 영성과 전문성은 어떠한지, 과연 한국교회에서는 누가, 어떤 자격을 지닌 사람을, 어떤 절차와 방법을 통해 선발하고 있는지, 어떤 면을 가장 중시하면서 목회자를 선택하는지, 또한 목회자의 교육과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잠깐 한국교회의 현실을 떠나 종교개혁의 중요한 근거지 역할을 했던 16세기 제네바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칼뱅의 제네바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541년 제네바의 교회법령에 따르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 생활이 거룩하고 순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소명을 받은 사람 중에서 교리와 생활의 외적 검증을 거친 사람만이 목회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건전한 교리뿐만 아니라 깨끗한 생활의 검증을 요구한 이유는 생활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목회자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회사역자체가 망신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성적 추문, 물질적 부정행위, 명예욕과 야망으로 인해 겪는 한국교회의 고통을 생각해 볼 때, 16세기 제네바교회에서 목회자의 자격 조건으로 거룩한 생활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눈에 띠는 대목입니다. 제네바의 목회자 선발 기준과 방식에 현재 우리의 실상을 비춰볼 때, 한국교회에서 목회자가 되는 길이 너무 쉽고,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닌지 목회자 후보생의 영성, 인성, 지성을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아예 없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2. 목회자 사례비의 평준화 실현둘째로 교회연합회가 기울여야 할 다음의 중요한 과제는 목회자가 되는 기준의 통일과 더불어 목회자들의 생활비의 평준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서 각 교회별로 천차만별로 지급되고 있는 목회자 사례비의 평준화를 통한 정의의 실현이 없이는 한국교회가 연합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독일교회에서 선교동역자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독일교회는 목회자들의 봉급 평준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독일교회는 우리처럼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주 지역총회(Landeskirche)라는 구조를 통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매월 봉급에서 지불하고 있는 종교세를 통해서 교회의 재원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를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간의 정의의 실현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넘어야할 커다란 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수도원에 부가 많이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개혁교회는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의 재산을 개방하여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기관을 만들어 정의롭고 은혜로운 구조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부가 축적된 곳은 어디입니까? 선교현장의 복음전파를 위한 것입니까? 한국과 세계의 굶주린 생명들을 위한 나눔의 현장입니까? 교회 세습 문제가 한국교회개혁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배경은 무엇입니까? 연합기구는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은혜를 정의롭게 나누고 분배할 수 있는 은혜로운 방법을 창출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결집된 힘으로 한국사회를 개혁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빵의 문제는 내 육신의 문제이고, 너의 빵의 문제는 나의 영적인 문제이다. 때문에 나의 빵보다도 너의 빵문제가 더 급하다”고 외치지는 못할지언정 나를 위한 소유와 축적의 불균형으로 양산된 한국교회의 문제를 푸는 것이 우리의 커다란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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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6-03-17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2월 월례회
    한국교회, 탈북민의 가치 인정하고 남한 정착 적극 도와야 본 원고는 지난 2월 19일 서울 역삼동 화평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2월 월례회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일꾼들로서 탈북동포들, 중국동포들, 연변조선족들의 역할은?’에서 동영진 목사가 발제한 ‘통일의 역군인 탈북민’을 소개한 글이다. 통일의 꿈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얼마 전 CNN방송에서 “김정은 정권은 3년 내 무너질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독일의 통일은 나콜라이교회에서 불같이 타오른 기도의 열기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 ‘통일 그 길을 묻다’란 주제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 뢰스엘 전 독일 녹색당 당수는 석 달 전만해도 독일이 통일된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명성교회를 위시로 많은 단체에서 통일기도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그 열기가 대단하다. 기도의 응답으로 독일처럼 순식간에 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의 효과는 약일까? 독일까?통일이 되면 문화, 사상,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 혼란에 빠지고, 엄청난 통일 비용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인사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통일을 긍정적으로 본다. 통일비용보다는 그 효과가 3배 이상 크다고 주장한다.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통일의 효과는 대단하다. 전쟁의 불안 해소로 국방비 절감, 7천7백만 인구로서 경제통합의 효과 증대, 대륙을 잇는 물류통로 확보로 경제부흥, 북한 지하자원으로 국민소득 증대(금 2,000톤, 우라늄 매장율 세계 1위 등), 국제신용등급 향상으로 외국자본유치, 이산가족 상봉으로 민족의 분단 아픔 치유 등이다.탈북민을 통일의 가교라고 한다. 올림픽위원장을 역임한 재향군인회장 고 박세직 회장을 모시고 미국을 방문했다. 박세직 회장은 교민들에게 ‘탈북민들을 홀대하면 조국 통일은 없다. 탈북민들은 통일의 가교이다’라고 가는 곳마다 역설했다. 탈북민은 하나님이 보내신 통일의 가교요, 역군으로 바라봐야 한다. 1. 탈북민을 통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공산주의는 거짓된 사탄의 사상이다. 종교학자들은 주체사상을 10대 종교에 하나로 여긴다. 신도가 2,400만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비참한 참혹상을 탈북민들은 몸소 체험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사진을 먼저 불속에서 먼저 꺼내고 부인을 참혹하게 불에 타 죽게 한 000을 인민의 영웅호칭을 주었다. 대성공사 담임목사 시절 탈북한 젊은 자매가 예배 후 엉엉 울었다. 악랄한 북한보위부요원이 남편을 남한 스파이로 몰아 부인 보는 앞에서 각목으로 머리를 쳐 두개골이 파열되어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탈북민들은 친북, 종북사상에 빠진 남한의 일부 인사들을 보고 놀라워한다. 탈북민들을 놀라게 한 대표적인 사례들은 △인산인해와 큰 빌딩 △거리에 빵을 즐비하게 내 놓고 판매 △길거리에 차를 주차 △김정일(김정은)을 찬양하는 남한 사람들이 극히 많다는 사실이 300만이 참혹하게 굶어 죽어 널 부러진 시신을 본 탈북민들이야 말로 반공사상으로 무장한 사상적 통일의 역군이다. 2. 탈북민들을 통하여 인재통일을 이룰 수 있다.한 사람의 인재가 민족을 구원한다. 골리앗을 물멧돌로 쳐서 승리한 한사람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영웅이다. 위대한 한 사람 바울을 통하여 전 세계가 복음화 되었다. 기독교인이 80% 이상인 백령도를 복음화 시킨 장본인이 당상관 출신 허득 공이다. 그는 정변으로 백령도로 귀양 온 김성진에게 복음을 듣고 크리스챤이 되었고 1898년 중화동교회를 설립하였다. 한 사람 크리스챤 인재를 통하여 전 백령도가 복음화되었다. 통일인재들이 많다. 탈북민 여성1호 박사 이애란 박사, 통일소망선교회 대표 이빌립목사, 백년한의원 석영환 원장, 통일이라는 대작을 쓴 림일작가 등이다. 특히 인재통일 역군을 양성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7명을 재정보증까지 하여 보냈다. 김소연자매는 부동산 준 재벌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영어가 능통하여 부동산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탈북민 크리스챤 인재들이 통일이 되면 도지사, 대학교수, 의사들이 되어 북한백성들을 리더하면서 복음을 전 할 것이다. 대통령 인재상을 받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생 조수아자매는 통일 여성대통령을 꿈을 꾸고 있다. 3. 복음통일이다.우리의 왕 되신 예수그리스도만이 남북한의 갈등을 해소하고 아름다운 통일을 완성한다. 탈북민들 신자 분포는 기독교 60% 불교 15% 천주교 12% 등이다. 신학생 80여명, 목사 21명이다. 탈북민 개척교회가 18곳이 있다. 북한주민의 의식구조란 박사학위 논문을 보면 탈북민 목회자들의 87%, 평신도들의 58%가 북한 고향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정보사 군종참모로 재직 할 때 대성공사 평화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첫 예배 시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탈북민들을 영성 훈련시켜 북한원주민선교사로 파송하라.”얼마 전에 평택성비전교회 담임목사인 탈북민 송신복목사와 극동방송 생방송에 출연하였다. 송 목사는 북한문이 열리면 내 고향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하여 청취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만이 남북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 저 북한에 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선교학자들은 원주민선교가 큰 복음의 열매를 맺는다고 주장한다. 같은 말씨, 같은 문화가 어려 있는 고향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탈북민들이야 말로 북한선교사의 사명을 띤 귀한 복음통일 역군들이다. 이러한 통일의 역군인 탈북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따스하게 대하고 칭찬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차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탈북민들 대부분은 “북한에서는 배가 고파서 못살겠고 중국에서는 잡혀갈까봐 무서워서 못살겠고 남한에서는 차별이 심해 서러워서 못살겠다.”고 탄식한다. 남한에서 정착하기가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다. 재정적 지원도 할 수 있는 한 해야 한다.통일의 역군이란 가치성을 인정하자. 아직까지 남한정착에 힘겨워하는 탈북민들을 돕는 것이 주님을 돕는 것이다.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가장 작은 자들을 선대한 것이 나를 선대한 것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통일의 역군인 탈북민들에게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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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6-02-26
  • 특별기고/ 시인 윤동주론(2)
    기독교인으로서의 윤동주에 대한 조명과 재평가 시급 시집 <하늘과 별과 시>민족시나 항일시라고 하면 으레 억세고 강하며 선동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에는 전혀 그런 구석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현실의 어둠과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굳은 심지가 느껴진다. 윤동주 시는 어렵지 않고 길지도 않지만 읽다 보면 마음속에서 뭔가 조용한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시를 쓸 때 자신의 허물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에 대한 고백을 늘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독립운동가나 민족 사상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서정시인이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별과 하늘과 꽃과 십자가였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잠시 죽은 것 같았던 그 죽음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다시 시로 부활하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 윤동주로 살아 오늘날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윤동주의 시 <서시>윤동주 시세계의 출발은 철저한 자아성찰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는 곧 부끄러움을 낳게 된다. 이 부끄러움은 근원적으로 시인의 심성에서 여과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삶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서시다. 널리 애송되어 온 <서시>는 그러한 시의식에서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전문‘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그가 의도한 ‘하늘’이 막연한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창조주’의 관점이라는 기독교적 양면성을 지닌다. ‘하늘을 우러러’는 것은 성경의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이란 땅을 바라보던 눈을 하늘을 향하여 우러러는 행위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맹세 하였으나 현실적 자아는 늘 부족한 것이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순결한 영혼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과 민족에 대한 경외사상으로 최고의 신앙적 고백이다.윤동주 시는 자신의 허물을 고백함으로써 부끄러움의 미학을 확립했다. 이런 시인은 드물다. 그래서 독보적이다.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차별점이다. 부끄러움의 미학이란 그의 시가 나타내는 참회의 고백은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인식하고 고백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윤동주만이 가진 시의 독창성이다.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윤동주는 자연을 사랑했고, 그의 시 가운데 많은 것은 자연을 노래하고 있지만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조국의 현실을 기초로 하고 있었으며, 별 하나 나뭇잎 하나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피가 맺혀 있었다. 그의 시 <또 다른 고향>은 밤 새워 어둠을 향해 짖는 개와 그렇게 살다 죽어간 백골이 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말하던 ‘또 다른 고향’은 그 시대를 살던 모두가 꿈꾸던 해방된 조국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아니면 영원한 천국이었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었다 /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분다/ 어둠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믐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또 다른 고향>이런 청년의 열정과 순수함이 고뇌로, 방황으로, 회의와 좌절로 겹쳐지며 그의 시는 아름다운 서정시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윤동주의 시 <십자가>그러면 윤동주 시에서 그의 신앙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윤동주에게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뇌가 탁월하게 표현된 작품으로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를 보면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의 제물이 되고자 했던 그의 내면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속죄의 희생양이 되었다면, 시적 화자는 민족을 위한 속죄의 희생양이 되고자 한다. 자신에게도 운명적인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자신의 생명의 상징인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민족의 구원을 위한 제단에 바치겠다고 결심하며 비장한 심정으로 기도의 고백을 하고 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십자가가 허락된다면’에서처럼 그는 암담한 시대를 향한 민족적 제물, 기독교적 순교의 결연한 선언을 하고 있다.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의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결국 그는 암담한 시대의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 것이다. 이렇듯 시에 사용된 십자가는 기독교적 상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은 민족의 고통을 순교자적 희생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시인의 경지를 의미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며 순교의 표식이다.윤동주의 <별 헤는 밤>, <참회록>,<십자가>,<자화상> 등 그의 시세계는 자신에 대한 평가의 잣대를 주관적인 것에 두지 않았다. ‘하늘’로 상징되는 창조주의 뜻,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 놓은 ‘그리스도’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본 것이다.윤동주의 시 <쉽게 씌여진 시>윤동주의 시는 무엇보다도 맑고 깨끗하다. 꼭 투명한 유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잡된 생각이 없는 심성을 가질 때 비로소 시가 생겨날 수 있듯이, 윤동주의 시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더욱 그의 시는 언어의 유희나 기교를 첨가하지 않았다. 마음속의 영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쉽게 씌여진 시>는 그런 점에서 그의 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라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 한줄 시를 적어볼까/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또 다른 고향>이러한 시심은 끝내 그를 현실에 굴복하여 그 안에 안주하거나 외면하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여기에 시인의 깊은 갈등과 고뇌가 있다.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 윤동주는 그 길이 험한 가시밭길임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땅히 그가 가지 않으면 안될 길을 갔고, 그래서 그의 치열한 시정신은 바로 여기서 빛을 발하게 된다.시가 무엇인가?금년 2월은 그의 서거 71주년이자 2017년이면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2013년부터 중국은 이 윤동주 생가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돈 10억을 들여 확 뜯어고쳤다. 도로에서 생가에 이르는 흙길 바닥은 대리석으로 고급화(?)했고 명동교회 건물 옆에 있던 십자가는 아예 없애버렸다. 생가 입구에는 가로 4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경계석을 세웠는데 그 경계석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넣었다. 중국인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죽은 윤동주 시인 같은 훌륭한 시인이 없으므로 윤동주 시인이 탐났던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을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서 중국에 애국한 시인’이라고 우기고 싶었을 것이라면서 생가 내부에 늘어선 시비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중국어로 씌어 있어 마치 윤동주 시인이 중국어로 시를 쓴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하고 있다. 자칫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가 중국인으로 굳혀질 것 같아 안타깝다.일제말기, 일본 후구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윤동주, 일제말기의 암흑기에 대표적 민족저항시인으로 손꼽는데는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이 전체 인구의 1%도 안되는 일본에서 이미 몇 해 전 '크리스천 윤동주'라는 제목으로 시집이 나온 것에 반해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윤동주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미비한 편이다.그래서 어두운 시대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 젊은 시인 윤동주와 해방문학사의 첫 발걸음을 더딘 시인 윤동주에 대한 조명과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2-1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핵심적인 믿음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께서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는 죄가 없으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가 있고,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의 온전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딤전 2:5-6). 만일에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셨다면 그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라서 죄인의 피가 죄인들을 깨끗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참 중보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뿌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사 7:14)라고 미리서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탄생 약 700여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부 고대 근동 언어학자들은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사용된 “처녀”라고 번역하는 “알마”(המלע)가 꼭 처녀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결혼과 상관없이 처녀이든 아니든 간에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임신 가능한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우가릿이나 아람의 동계어는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에게 사용된다. 따라서 New English Translation, New Jerusalem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1952), JPS Tanakh 등은 이를 “젊은 여자”(the young woman)라고 번역하고 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임신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에 현대의 이성주의적 정서를 고려하여 성경을 합리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알마”(המלע)라는 말은 “젊은 남자”(young man)라는 뜻을 가진 “에렘”(מלע)의 여성 형이다(삼상 17:56; 20:22). 따라서 본래 처녀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다.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일반적으로 “베투라”(הלותב)를 사용한다. 이 어휘는 결혼을 아직 안했거나 결혼하기 위하여 약혼한 여자로서 아직까지 남자와 더불어 성관계를 갖지 않는 젊은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출 22:16; 왕상 1:2; 렘 31:13).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창세기 24장에는 아직 약혼도 하지 않는 리브가라는 한 소녀에 대하여 “알마”(המלע)와 “베투라”(הלותב)를 다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24:16에서는 “그 소녀는 외모가 매우 아름다우며,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베투라’הלותב)였다.”라고 말하고, 창 24:43에서는 “제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물을 길으러 나오는 처녀(‘알마’ המלע)에게 물동이의 물을 조금 마시게 해 달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같은 용례를 통해서 볼 때, 히브리어에서는 고대로부터 “베투라” (הלותב)와 “알마”(המלע)는 큰 차이 없이 혼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베투라”(הלותב) 의 처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남자를 알지(עדי) 못하는”이라는 형용구를 첨가하고 있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전 2-3세기에 번역된 그리스어 칠십인역(LXX)에는 이사야서 7:14에 사용된 “알마”(המלע)라는 말을 “파르데노스”(παρθένος), 곧 “처녀”(virgin)로 번역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칠십인역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마 1:23).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성경 해석 전통을 따른다면 굳이 “알마”(המלע)를 “젊은 여자”로 번역하여 성도들에게 많은 혼란을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기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황 속에서, 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지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사야 7장의 배경이 되는 유다 왕 아하스 때는 국제 정치가 긴박하데 돌아가서 전운이 감도는 때였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의 팽창 정책으로 큰 위협을 느낀 시리아(아람)의 르신은 북왕국의 베가와 더불어 시리아-에브라임의 군사동맹(Syro-Ephramite Federation)을 맺고 아시리아를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방에 유다를 두고 아시리아를 대항하는 것은 작전상 불리하다고 생각되어 아람 왕 르신은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함께 아시리아를 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겁이 많은 아하스는 르신의 이러한 제안이 오히려 자기를 치기 위한 빌미를 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한다(사 7:2). 그러자 르신은 아하스를 공격하여 다윗 왕조를 멸망시키고 대신 그의 심복 다브엘을 새로운 남왕국의 왕으로, 다시 말하면 자기의 분봉왕으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아하스는 멸망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아하스가 살 길은 아시리아의 원병을 청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아하슨는 성전과 궁전에 저축해둔 은금과 보물들을 가지고 아시리아로 가서 디글랏빌레셀의 봉신이 될 것을 자청하며 군사적 도움을 청한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어 아하스에게 이 르신의 작전이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며, 하나님을 굳게 믿으라고 권한다. 믿기가 어렵거든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하스는 겸손을 가장하여 징조 구하는 것을 거절했다. 아하스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하게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삼하 7:8-16). 그러나 아하스는 이 약속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아하스는 거센 바람 앞에 당장 꺼져버릴 것 같은 자기의 왕좌를 지키기 위하여 아시리아의 디글렛빌레셋을 의지하고, 그의 돈을 믿었다. 앗시리아의 원군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약속과 도움을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직접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다.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사 7:14). 아하스는 자기의 왕위가 위협을 받자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보존하실 것인데 그 증거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왕 중의 왕이 되셔서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히 그의 왕위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당장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베가와 르신의 대 유다 연합 작전을 무력화하여 다윗의 자손 아하스의 왕좌를 지켜주실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영원한 왕위를 이을 그리스도, 처녀의 몸에서 낳을 임마누엘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신다. 아하스는 디글렛 빌레셀의 원군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오심을 기다렸어야 했 다. 따라서 당대에 이 처녀가 누구를 지칭하느냐하는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신대로 그의 후손 아하스의 왕위를 아람과 베가의 군사 동맹으로부터 지키실 것이고, 더 나아가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토록 보존하기 위하여 처녀의 몸에서 임마누엘을 낳게 하신다는 보다 구체적인 약속을 주시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와 같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감내하기 힘든 긴 기다림의 시간일지라도 하나님께는 한 순간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고 사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위기에 닥칠 때 아하스 처럼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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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
    개역 한글판 창세기 25:7-8에는 아브라함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5:7-8에는 아브라함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여기서 개역성경은 아브라함이 죽어서 “자기 열조에게 돌아갔다.”고 번역하고 있다. “열조”라는 말은 조상들이란 말인데 이 말은 분명 사람은 죽음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 아니고 사후의 세계 있음을 암시하며, 아브라함이 죽어서 가는 곳은 열조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영들이 거처하는 곳을 의미하는 말같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이것이 아브라함이 살았던 햇수의 날들로, 일백 칠십 오년이다. 아브라함은 늙어 아름다운 노년을 누리다가 마지막 숨을 쉬고 죽어, 그의 백성에게 합류하였다.” 한 사람의 마지막 생애를 기록하며, 그의 살았던 연수를 언급하고, “마지막 숨을 쉬고 죽어 그의 백성에게 합류하였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바이익바 바아야멧 바아에아셉 엘-암마이브” (וימע–לא ףסאיו תמיו עוגיו, 마지막 숨을 쉬고 죽어 그의 백성에게 합류하였다.)는 표현은 이곳 말고도 이스마엘(창 25:17), 이삭(창25:29), 그리고 야곱(창49:33) 등에 사용되고 있다. 오경에서 사람의 죽음을 기술하는 정형화된 양식의 일종인 것 같다. 문제는 이 표현 가운데 “열조”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암”(מע)이라는 말은 “백성”(people)이라는 의미이다. “백성”과 조상들을 의미하는 “열조”라는 의미는 차이가 많다. 백성이라는 말은 혈족 관계를 넘은 보다 계약적 의미를 가진 말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백성”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마지막 숨을 쉬고 죽어서 그의 백성에게로 갔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어떤 죽음의 세계라는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백성에게로 가서 그의 백성의 일원으로 합류한 것이다. 여기서 “합류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데 히브리어 “아삽”(ףסא)이라는 말은 “모으다”(to gather together)의 수동형이다. 그래서 “모아진다”(to be gathered together)라는 의미이다. 좀더 매끄러운 한국어로는 “합류하다”는 표현이 더 좋을 듯싶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죽어서 그의 백성에게 합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들판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는 데 “이 들판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것으로, 거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장사되었다.”(창 25:10). 그런데 여러 역본들은 이 경우 아브라함과 사라가 합장되었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합장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매장 습관에 따르면 한 관에 죽은 사람의 뼈를 같이 넣어 한 봉오리의 묘를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합장은 죽은 자의 시신의 살이 다 썪어서 뼈만 남을 때 적어도 3-4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옛날 풍습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굴에 여러 개의 관을 넣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 성경 표준 새번역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와 합장되었다”고 번역하는 것은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표현처럼 한국적이다. 또한 히브리어 원문이 꼭 합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거기에 아브라함이 장사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래(도)”이다. 합장을 의미하는 “함께”(with)라는 단어가 없다. 따라서 이 경우는 개역성경이나 바른성경의 번역, “거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장사되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우리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생에서 아무리 많은 부를 쌓고, 자식들을 잘 키워도 그것들을 데리고 가거나 가져갈 수는 없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 조상들은 부모가 자기를 낳아 주었기 때문에 자기 조상들에게로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자들은 “그의 백성,” 곧 여호와와 그의 백성에게로 간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한 17:21).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과 상호동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도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비한 연합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계 21:3). 우리는 이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의 장막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호동거(Mutual Indwelling)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소망은 열조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다. 다윗이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의 궁전도 궁극적으로 지상의 성전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장막이었을 것이다(시 84:10)
    • 해설/기획
    • 학술
    2016-01-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9)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of Christ)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명령이 복음서에서 조금씩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모든 민족에게”(πάντα τὰ ἔθνη 마 28:19)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도 “모든 민족에게”(πάντα τὰ ἔθνη, 눅 24:47)라고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양식과는 다르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요한 20:22-23)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위의 두 복음서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πορευθέντες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ἅπαντα κηρύξατε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πάσῃ τῇ κτίσει. 막 16:15 ) 고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of Christ)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명령이 복음서에서 조금씩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모든 민족에게”(πάντα τὰ ἔθνη 마 28:19)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도 “모든 민족에게”(πάντα τὰ ἔθνη, 눅 24:47)라고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양식과는 다르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요한 20:22-23)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위의 두 복음서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πορευθέντες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ἅπαντα κηρύξατε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πάσῃ τῇ κτίσει. 막 16:15 ) 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여기 마가복음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가야 할 곳이 “땅 끝까지”(ἕως ἐσχάτου τῆς γῆς. 행 1:8)나 “모든 민족에게”(πάντα τὰ ἔθνη)가 아니라 “온 우주”(τὸν κόσμον ἅπαντα)이다. 개역성경은 “온 천하”라고 번역하고 있고, 바른성경은 “온 세상”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어 “코스모스”(κόσμος)라는 말은 이 지구를 포함한 “우주”(universe)라는 개념으로 더 많이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가야할 곳은 단지 이 지구, 이 세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라는 것이다. 또한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파새 테 크티시스”(πάσῃ τῇ κτίσει), 즉 “모든 피조물”(all creation)이라고 했다. 모든 민족이나 죄인들이라 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라고 말한 것은 특별한 신학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은 그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까지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신 피조물을 사람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아래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피조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시 8편). 하나님-사람-피조물의 질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의 언약을 통하여 이러한 질서를 세우셨고, 이 언약을 통하여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도 하나님 앞에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언약관계란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고 충성해야 아담 자신이 복을 받고 또한 그와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도 다 행복을 누리지만, 반면에 언약에 충실하지 못할 때 아담은 물론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언약적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언약을 깨트려버렸다. 그리하여 아담 자신은 물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에(πάς ὁ κὀσμος) 언약적 저주가 내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어버렸다(롬 3:19). 따라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억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된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롬 8:19-21)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도 포함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으로 자기들도 참 자유를 얻고 창조시 부여받은 본래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이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로 이러한 구속사적인 신학이 함축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마가복음의 지상명령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번역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우리는 전도나 선교를 생각할 때에 땅끝까지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온 우주에 나갈 생각을 해야 하고,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닿게 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피조물의 구원이란 인간 이외의 하나님의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언약적 연대성을 갖고 그 언약적 대표성을 갖는 사람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을 가꾸고 보호하고 그들이 번식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돌보아야 할 사명을 가진 자이다. 말하자면 피조물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사용하며 돌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예수께서 지상명령을 실천해야 할 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위하여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이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어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선교나 전도의 개념을 온 우주적 넓혀서 생각해야 한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은 제자들의 선지자적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에 (ἐξελθόντες ἐκήρυξαν πανταχοῦ), 주께 서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을 통하여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막 16:20)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창조하신 온 우주의 회복이다. 우리는 달에 올라가 복음 전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12-3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바른적용 8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설명할 때 주로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이나 그리스도의 겸손( humiliation)을 강조하며,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데 역점을 둔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과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신학적 의미를 찾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4: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으니, 이는 율법아래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갈 4:4-5)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을 죄인들을 위한 속량과 하나님 아들로의 입양을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에게 그의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려함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19에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데 이는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와 언약적 연대성을 갖는 피조물이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기는 커녕 썩어 없어질 죄인들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세상, 곧 창조 질서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우리 죄인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문제는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이 이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아들을 삼는 일을 먼저 시작하신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식이 없을 때는 입양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니푸르에서 출토된 문헌들아나 하무라비 법전 (185, 186조)에는 입양에 관한 규정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한국 사람들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을 때, 친족들 가운데 장자를 입양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노예들 가운데 자기 마음에 맞는 자를 입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입양의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는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로 삼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며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 … 내 아들을 보내어 나를 섬기게 하라.” (출 4:22, 23)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시내산에 데리고 와서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입양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언약을 맺어 입양아를 그의 상속자로 받아들인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로 삼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어 이들을 그의 상속의 백성, 곧 유업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아들이요, 상속자가 된 것이다. 개역성경에서 “기업”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나할라”( נחלה) 는 말은 “유산” 혹은 “유업”이라는 말로 당시에는 “땅”을 의미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땅이 내것이다”(레 25:23)라고 말씀하시며, 시편 기자는 “땅과 거기에 가득한 모든 것과 세상과 그 안에 사람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다.”(24:1)라고 선언하신다. 여호와께서 모든 땅의 주인이시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이요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암 나할라” (עמ נחלה), “유산의 백성” 혹은 “유업의 백성”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아들답게 살지 못하였다.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였고, 이방신을 섬기며 옛날의 노예 생활로 돌아가버렸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고대의 풍습대로 이스라엘을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유산의 땅을 빼앗고 그곳으로부터 쫓아내버렸다. 입양을 철회한 것이다. 그런데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여자의 몸에 나게 하셨다. 예수님을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죄의 종노릇한 우리를 그의 아들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요 3:3,5).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여자로부터 낳아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지만, 우리는 위로부터 낳아야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을 통하여 될 일이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그 아들의 영”(갈 4:6)이라고 말하고,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 부른다. 이 영은 죄의 종된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며, 이 양자의 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롬 8:16, 갈 4:6).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리해볼 때,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탄절은 성육신이나 우리 같은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같은 죄의 종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마 25:34; 요일 3:1-2; 계 21:7). 크리스마스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서는 땅에서 여자에게 나신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나서 예수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날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계 21:7)
    • 해설/기획
    • 학술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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