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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언론포럼/ 김대성 박사(사)휴먼니커버리 대표)
- 서론사람의 몸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당장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재림시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한다는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상당히 무리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받은 영혼들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데, 그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 어떻게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과 설명이 매우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어떤 면에서는 설명 자체가 매우 무리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사상과는 조화가 되지 않는 이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이 어떻게 기독교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떤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영혼불멸 사상은 왜 부활의 신앙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1.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가?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에서 발행(1994년)한 교리교육 지침서 352, 359페이지에는 영혼 불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우리는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의 물음에 직면한다. 육체의 생명과 함께 영혼도 끝나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등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관하여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속함을 주장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 불멸이라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날을 기다린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저져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탄다고 생각한다. 일평생 죄를 지어 보아야 100년 이내의 기간 동안 지은 죄 때문에 그 영혼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타고 있다면, 그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왜 어떻게 유래되어 기독교의 교리가 되었는지 그 근원을 우선 살펴 보려고 한다. 동시에 영혼 불멸 사상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경에 맞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 혹은 철학적 추측에 불과한 것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중요한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2. 인간의 본질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이다. 인간의 창조 과정에서 영혼은 어디에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 과정에 대하여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인간은 ‘땅 표면의 먼지(아파르 민 하아다마)’ 속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형성된 ‘생명체(네페쉬 하야)’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분명하게 규정되고 정의내려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 사상은 영혼을 육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거나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이분법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 성서의 구원사적(救援史的) 문맥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고, 영혼은 육체보다 가치 있는 ‘신과 유사한 영적인 것(호모이오시스)’이며, 죽을 때 그 둘은 비로소 분리되어 육체는 썩어지고 영혼은 불멸을 누린다는 희랍적 사고는 창세기 2장 7절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사멸적인 육체 속에 불멸적인 영혼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유형의 논조는 여기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귀속되었다는 그 귀속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 이상을 도출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7>.3. 영혼 불멸설의 유래와 역사(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들이 거하는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따먹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그 과일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유혹할 때에 그 과일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말 중의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과일을 먹었고 결국 그들은 죽었다. 사탄의 말이 거짓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게 되었다. 몸은 죽었지만 ‘혼’은 죽지 않았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한 매개자들이 성경에 나온다.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을 하는 자, 무당 등(신 18:10)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울 왕이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사무엘을 불렀고 사무엘이 나왔다(삼상 28장). 그가 과연 사무엘의 영혼인가? 사무엘이 무당에게 불려다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몸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인간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사탄의 속임수임에 틀림없다.(2) 이집트의 영혼 불멸 사상과 헬라 철학이와 같은 사탄의 거대한 속임수로 인해 영혼의 불멸 사상은 인간 사회와 인류 역사에 매우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 불멸 사상을 대단히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리된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무수한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으나 지금까지 떠나간 영혼이 되돌아와 다시 살아난 미이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영혼 불멸에 기초하여 윤회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였다. 기원전 5세기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집트를 방문하며 영혼 불멸 사상을 더욱 깊이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보았다”(그리스도교 대사전, 대한 기독교 서회, 1118면). 죽음 직전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침착성은 영혼 불멸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 불멸 사상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論集)인 ‘파에돈’은 영혼 불멸 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나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서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짓는다”(상동).(3) 영혼 불멸 사상이 교리로 만들어지기까지① 플라톤(Plato, 427˜347 BC) - 영혼 불멸 사상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해 놓았다. 최대의 헬라 문화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대 이집트 종교를 흡수한 플라톤의 철학에 동양의 신비 사상을 혼합한 신플라톤 철학(Neoplatonism)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② 필론(Philo, 20 BC~AD 47) -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로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플라톤의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유대교에 끌어들이는 데 앞장 섰다. 1세기 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③ 오리게네스(Origen, c.185~254) -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3세기 초의 천재적인 교사로서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리스도교계에 소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자처하였다. ④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m, c.160~240) - 플라톤과 같은 영혼 불멸을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의 영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고 하는 영원지옥(永遠地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 - 북아프리카 히포 출신으로 당대의 최대 신학 교부였다. 그의 가르침은 중세 가톨릭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플라톤의 철학 개념을 빌려 연옥설을 만들어 냈으며, 대교황 그레고리는 서기 528년 그것을 교리로 인정하여 드디어 성경에도 없는 연옥 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확인된 영혼불멸 사상과 영원지옥, 그리고 연옥의 신앙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중세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집대성 되었다. ⑦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영혼 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을 민속신앙으로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이 이교 철학 사상으로 전해지던 영혼 불멸 신앙이 그리스도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자,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어떤 사람들이 이성적인 영혼의 속성에 관하여 그것이 죽음과 더블어 죽게 된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공회의 동의로써, 영혼은…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종규에 따라, 지성적인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이와 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을 멀리 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 1937, 483,487).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 위와 같은 배경과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영혼 불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성서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4) 칼빈의 「혼수론」과 개신교의 영혼 불멸 사상이렇게 이교적인 영혼 불멸 사상이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된지(1513년) 얼마 되지 않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1517년).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자 칼뱅이 1532년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개종한 지 2년만인 1534년, 25세의 나이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히 비평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최초의 신학 논문인 「혼수론」(魂睡論)을 써서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의 영혼 불멸 신앙을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칼뱅에 앞서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 틴덜, 독일의 루터 등이 이미 중세교회의 영혼 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4.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영혼 불멸 신앙이란 이렇게도 비성서적인 이교의 철학 사상에서 시작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어 굳어진 교리이지만 성경을 보면 마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성경절들이 도처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인 문제는 히브리 사상을 헬라 사상으로 변형하려고 많은 시도를 한 「70인역」(희랍어 역본) 성경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다시 한신대 김이곤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하나님의 ‘모양’(데무트)을 단순히 동의적 평행법으로 반복 병렬시키면서 그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역본은 오히려 ‘에이콘’(형상)과 ‘호모이오이스’(모양) 사이의 엄격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희랍어 역본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호모이오시스’ 즉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과 ‘비슷한 것’(호모이오시스)은 소실되고, 단지 인간적인 것, 즉 ‘에이콘’만 남게 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 이후에 나오는 ‘호모이오시스’(모습)라는 표현은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 대신 ‘에이콘’(창 5:1) 또는 ‘이데아’(창 5:3)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역본은 구약성서가 인간을 플라톤주의적으로(플라톤의 파에돈처럼) 이해하여 인간이 죽을 때는 마치 영혼과 육체가 나누이는 것처럼, 또는 영혼은 육체보다 더 우수한 신적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으로 오도(誤導)하였던 것입니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6, 157).히브리적 인간 개념을 헬라적 인간 개념으로 변형시켜 번역된 「인역」 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각종 번역본에서 ‘영혼’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 하야’(살아있는 영, 생령)로 되어 있지 않고 ‘네페쉬 하야’(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Living being)로 되어 있으나 우리말 번역에는 ‘생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김이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본다. “문제는, 희랍적 영향 때문인지(?), 이 ‘네페쉬’라는 말이 우리말 성서(개역)를 포함하여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성서에서, 희랍역도 그렇게 하지 않은(‘프쉬케’라고 번역하고 ‘프뉴마’로 번역치 아니한) 번역인 ‘영혼(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시적 은유로 사용한 것이나 출애굽기 23장 9절, 욥기 19장 2절 등의 어떤 특수 문맥 이외에서 ‘영혼’이라는 말로 ‘네페쉬’를 번역한 것은 명백한-혹은 의도적(?)-오역(誤譯)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상동, 158).이와 같은 오역으로 인해, 많은 성경 독자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천당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성경절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표적인 몇 성경절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헬라어로 ‘푸쉬케’이다. ‘푸쉬케’라는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 마음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상 가장 적절한 낱말을 선택하려면 문장의 전후 문맥을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들이다. 전도하면서 당할 여러 가지 시련과 핍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하여 사람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하는 핍박은 최악의 경우 몸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 선교하는 정신은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푸쉬케’라는 말은 다른 여러 경우(행 15:24; 엡 6:6; 골 3:23 등)에서처럼 ‘마음’으로 번역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이나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생물” “마음”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솨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영혼”이라는 말은 마음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마치 강도가 그날 당장 낙원에 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위 성경절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부사는 원래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라고 했어야 할 부분인데,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본래의 헬라어 원문에는 있지도 않는 쉼표( , )를 ‘오늘’ 앞에 찍어 넣음으로 문장을 이해하는 데 혼란이 온 것이다.우선 강도의 요청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공동번역 성경은 이 성경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강도의 요청은 당장 영혼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구원을 그날 바로 약속하신 것이지 그날 그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다. 강도의 실제적인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다음의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면, 강도가 그 날 그 영혼이 분리되어 하늘에 갔다는 것은 도무지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이 분명하다.(3)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로 생각한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실화로 생각할 경우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실상을 살펴보자.① 아브라함의 품 - 구원받은 의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고통받는 악인들이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해야 하는가?② 눈, 손가락, 혀 - 영혼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탈 것이 없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도 없다. 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나 손가락이나 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혼이 지옥에서 탄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매우 허망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 - 그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줄수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라면 부모나 배우자나 형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에 불과할 것이다.④ 실화가 아닌 비유 - 이것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파피루스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음이 밝혀져 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잃은 양, 잃은 은전, 탕자,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등의 여러 가지 비유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 - 설화나 우화 속에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흥부와 놀부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에 소설이 실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눅 16:1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당시 부자들의 고정관념, 즉 부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의 결과이므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한 것이다. 5. 지옥과 꺼지지 않는 불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라고 하는 말은 12회 나타난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 48).여기에 기록된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엔나’이다. 히브리어로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되어 ‘게힌놈’이라고 쓰고 있으며,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힌놈의 골짜기”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을까? 이스라엘의 배도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몰렉신에게 자식들을 불살라 제사드리며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였다(대하 28:1-3; 33:1-6; 왕하 23:10).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골짜기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그 쓰레기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당할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을 묘사할 때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있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불타는 시간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7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불이라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곳에 지금도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17:27).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멸망했다. 그 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가?장차 악인을 멸망시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란, 불타는 시간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끌 수 없는 하나님의 불,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의 영원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것이다. 6. 부활 -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영혼불멸을 인정할 경우, 예수 재림시 천지 사방에서 일어나게 될 부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에 있던 구원받은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에 모두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각기 무덤 속으로 들어가 육체와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에는 의인에게 일어날 ‘생명의 부활’과 함께 악인에게도 있게 될 ‘심판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그렇다면 지옥에서 불타고 있던 악인들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성경의 내용 중에는 ‘영혼불멸’ 사상을 대입할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모순을 가리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교묘하게 해 놓은 부분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절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선 이 표현은 어법상 맞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죽은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처럼 되어 있다. “데려오다” 혹은 “데려가다”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원문(아고, αγω)을, 영혼불멸 사상에 맞추기 위해 “데려오다”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문장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해 놓았다. 이 주석의 내용을 보면,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구원을 받아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셔서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죽은 성도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어 번역 성경에는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살전 4:14).다음의 성경절들을 살펴보면 성경에 기록된 부활 사상은 그 상태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5-18).이 성경절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재림시 살아있던 자들이 죽은 자들 보다 먼저 하늘에 가지 않는다. (2)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의인들이 부활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 (3) 재림시 살아있던 의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올리워져서 공중에서 예수를 영접한다. (4) 그 후 천국으로 올라가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영혼불멸을 믿게 되면,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구원의 과정에 매우 혼란스러운 모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나 유수한 성경학자들은 영혼불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론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로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후에 순교당한 틴덜(W. Tyndale, 1490˜1536)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결합시켜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할 수가 없다. … 내게 다시 말해 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이와 같이 부활 신앙과는 모순되는 영혼불멸설과 연계되어 있는 영원 지옥설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시작된지는 이미 오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3년 11월 15일자 타임(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불타는 영원 지옥설을 부정하였다. 영국 성공회도 그간의 지옥 개념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징벌의 불구덩이’로 묘사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지옥은 다만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총체적 부정과 무(無)의 상태’이다. … ‘가학적으로 표현된’ 전통적 지옥관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상흔을 남겼으며, 신을 학대를 즐기는 괴물로 만들었다”(동아일보, 1996. 1.13).현대 신학계의 가장 유명한 신약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랑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1958년에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영혼불멸설을 설명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설의 가르침은 부활의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비성서적인 관념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당시 신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논문이었으며, 논문 발표 후, 그를 향한 비난과 공격은 참으로 맹렬한 것이었다(오스카 쿨만, 전경연 편, 복음주의 신학총서 제5권, 7,8쪽 참조).[공격들] ① “그 논문은 생명의 양식의 주림을 채우려고 죽도록 갈구하는 불란서 사람에게 비록 뱀은 아닐지라도 떡 대신 돌을 주었다.” ② 오스카 쿨만에게, 당신은 “영적 번민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괴물”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③ 어떤 사람은 그 논문에 대하여 “놀라움과 슬픔과 그리고 깊은 번민의 원인”이 되었다고 실토했다. [쿨만의 반응] “어떤 비판자도 본문 주석으로 나를 반론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다.…나의 글에 대하여 가하는 공격들이 주석학적인 논의에 근거되었더라면 이 공격들은 내게 더 큰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는 철학적인, 심리학적인,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막연한 이유로 공격받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혼불멸 사상은 성경에 근거한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철학적 가설과 추측이 종교암흑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영혼불멸설을 인정하고 믿게 될 경우, 사탄이 미혹하는 현대 강신술에 넘어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미 죽었던 자들이 나타나서 천국에 다녀온 이야기, 지옥에 다녀온 이야기, 혹은 성경의 교리를 왜곡시켜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온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깊이 음미하면서 정통적 기독교 성서관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인간의 가르침이나 사상, 혹은 교회의 전통보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따라갈 때에 우리는 안전하게 하늘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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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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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언론포럼/ 김대성 박사(사)휴먼니커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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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언론포럼/ 나용화 박사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 들어가는 말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 불멸하는가? 아니면, 멸절하여 없어져 버리는가? 인간의 몸은 사후에 부활하는가? 아니면, 전혀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잠자는가?사후에 인간이 가는 천국이나 지옥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사후에 받을 상급이나형벌은 있는가? 아니면 죽음으로 끝나고 아무것도 없는가? 사후의 세계나 상태에 대한 교리가 인간의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Ⅰ. 영혼멸절설과 영혼수면설1. 영혼멸절설성경적 근거 : 사66:24; 계19:20; 20:9-10, 14-15; 21:8; 막9:48-49; 딤전6:15-16핵심적 주장 : 사후 최후 심판후에 회개하지 않은 모든 인간의 영혼들이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면 완전히 불타 버리기 때문에 멸절되어 없어진다. 하나님만이 영원불멸하고(딤전6:16), 영혼의 영원불멸은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요 선물이다(요10:28).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다.반론 : 사후에도 불신자들은 유황불에 타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어 심판을 받으며(계20:12-13), 지옥에서 밤낮 고통을 당한다(마25:41; 눅16:23-24; 계14:11; 20:10).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육체, 곧 몸이 부활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마27:57; 고전15:44).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한 것이다(눅20:37,38).반면에, 신자들은 살아서 새 하늘 새 땅에서(계21:1-2)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계22:3) 위로를 받고(눅16:25; 계21:4) 그와 함께 다스린다(계20:6; 22:5).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의인들과 악인들이 사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참고,마25:31-46). 영혼이 멸절된다는 것은 각종의 고통과 불행이 끝나는 것으로서 지옥 형벌이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영혼의 멸절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멸절설은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2. 영혼수면설성경적 근거 : 왕상2:10; 11:43; 14:20,31; 왕하8:24; 대하9:31; 33:20; 시6:5; 115:17;146:3,4; 전9:5,6,10; 단12:2; 요11:11; 살전4:13,14핵심적 주장 : 사후에 영혼들은 편히 쉬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잠을 잔다. 반론 : 불신자들은 사후에 활동하지 않거나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막9:48-49; 눅16:24; 유1:7), 성도들은 사후에 한 강도의 경우처럼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며(눅23:43)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며(계7:9-12; 14:37; 19:1-2; 6-8)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계20:6; 22:5). 예수님께서 변화하시던 때 육체적으로는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였다(마17:1-8). (참조. 인간의 뇌는 수면상태에서 오히려 맑게 활동하는 까닭에, 하나님은 인간이 잠든 중에 환상을 보여주고 계시하시기도 한다. 창15:12-16; 28:10-22; 31:24; 마1:18-25; 2:13-15, 19-23). Ⅱ. 영혼불멸과 육체부활 교리1. 구약 성경의 근거 에녹(창5:24; 히11:5) ; 아브라함(창22:5; 히11:8-19) ; 욥(욥19:25-27) ; 엘리야(왕하2:11).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3:6; 마22:32). 죽은 자들의 죽음에 대한 표현 : “자기 열조(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 (또는. “자기 백성에게 합류했다.”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창25:8; 35:29; 49:33; 민20:24) ; “그 열조(조상들)와 함께 누워 잤다.” (왕상2:10; 11:43; 14:20,31) ;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었다.”(왕하9:28 ; 12:21).2. 신약 성경의 근거 악한 자들의 영혼도 사후에 남아있어 심판을 받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11:21-24; 12:41; 참고, 고후5:10) ; 영혼은 죽을 수 없고 사후 낙원에 있게 된다고 하신 예수님이 말씀(마10:28; 눅23:43; 요11:25-26; 14:3) ;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마22:23-33) ; 미래 천국에서의 상급과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들(열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 마25:1-46) ;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19-31) ;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눅20:35-36; 요5:28-29; 11:25-26); 최후의 심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롬2:5-11) ;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영생 불사와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행24:15; 고전 15:20-23, 42-44, 50-57; 고후5:1) ;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어한 바울의 소원(빌1:21-23; 고후5:6,8) ; 주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살전4:13-17) ; 여자들의 부활신앙(히11:35) ; 하늘의 예루살렘의 성도들(히12:22-24) ; 부활에 대한 계시록의 진술들(계7:9-17; 14:1-5; 19:1-8; 20:4-10, 13-15; 21:5-8; 22:1-5). 3. 핵심적 주장인간의 육체는 사후에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되나(행13:36; 창3:19), 영혼은 결코 멸절되거나 잠들지 않고 불멸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나(빌1:23), 사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어져 고통을 당하고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다린다(벧후2:9). (참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32장 1항)Ⅲ. 육체부활 교리의 중요성1. 사후에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 - 부활을 수없이 증거하고 있는 성경이 거짓된 책이요,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고전15:13-16). 또한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가 아니다. (참고, 고전15:23)-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 (고전15:14,17). - 죄사함이 없다(고전15:17).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참고, 고전15:54-57), 죄와 사망을 없애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참고, 히9:26; 요일3:8),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다 망했을 것이다(고전15:18).- 우리의 일생이 금생으로 끝나게 되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살아온 성도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고전15:19).- 성도들의 본향인 천국이 없다(참고, 히12:13-16).2. 육체부활 신앙의 유익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는 소망을 가지고(히6:19-20), 담대함과 확신에 찬 믿음으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히10:19-22).3. 육체 부활의 열매 :사후에 육체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도들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시116:15).성도들은 영생의 부활(계20:4; 21:3-4; 22:1-5)을 얻게 되나, 불신자들은 영벌의 부활(계20:1, 12-15; 21:8)을 얻는다(참고, 마25:41,46; 요5:28,29; 행24:15). <참고도서>1.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 나용화 외 3인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2. 벌코프. 「조직신학」하. 권수경 이상원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3. 뵈트너. 「불멸의 생명」. 김선운 역. 개혁주의신행협회, 1974.4. 후크마. 「개혁주의종말론」. 류호준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5. 나용화. 「성경에서 교회와 종말을 배운다」. 에페코북스, 2014.6. 박형룡. 「교의신학」(내세론). 은성문화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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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언론포럼/ 나용화 박사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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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5월 월례회, 이 시대 젊은이를 향한 교회의 메시지
- 본고는 지난 5월 10일 충무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5월 월례회 ‘헬조선을 외치며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줄 것인가?’에서 방선기 목사가 발제한 ‘이 시대 젊은이들을 향한 메시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지금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기성세대와 젊은이들과의 세대 차이는 이전 시대나 다른 사회에서의 세대 차이와는 다르다. 현재 기성세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학력이 높고 부모보다 더 잘 살게 된 세대이다. 대부분이 자라날 때 고생을 했지만 부모들보다는 여러 면에서 나은 환경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정반대이다. 자랄 때는 별 고생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자신이 사회에 나가려고 하는데 부모세대보다 훨씬 못하다는 발견하게 된 것이다. 미국 같은 부자 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자녀세대가 부모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았는데 최근 들어 반대현상이 일어나서 청년들이 당황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역전 현상이 단 한 세대만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경험하면서 절망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그리고 기성세대는 성인이 되어서 인터넷이나 SNS를 접했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SNS 속에서 태어나서 그 속에서 자란 세대이다. 이로 인한 세대 차이는 이전의 세대 차이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 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현재 기성세대는 믿지 않은 가정에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교회성장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믿는 가정에서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믿음을 버리는 자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 역시 서구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인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세대 만에 이런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현실이다.둘째로는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에 변화를 주었던 메시지를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교회를 찾는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교회 안에 있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청년 문화가 감상적이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젊은이들의 문화에 적응한다고 교회음악을 세속적인 음악을 수용했지만 그것이 젊은이들을 붙잡는데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 변화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대처하는 방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자기들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급한 나머지 주님께 헌신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 하나님 말씀의 회복이다. 역사를 통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회복의 시작은 말씀의 회복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경을 기독교인을 위한 책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삶에서 멀어진 성경의 위상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의 성육신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들이 접하기 좋은 말씀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모국어로 변역했다. 이런 작업은 지금도 지속되어야 한다. 성경을 지금 세대 사람들이 익숙한 말로 번역하고 그렇게 번역된 성경을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이 시대에 맞게 번역하는 것은 물론 성경책의 형태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변신을 할 필요가 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종교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성경을 현실에 적응하는 인류 최고의 고전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많이 팔리고 많이 번역된 책인 것을 안다면 그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시대에는 인문학 책 중의 책으로 성경을 소개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강요하기보다 말씀의 권위를 설득해서 성경에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육신의 원리는 성경을 가르치는데도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가르칠 때 핵심부분은 먼저 가르쳐야 하지만, 적용부분은 먼저 질문하도록 하고 그것에 답을 해준다. 성경에서 추상적인 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으로 시작하고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또 질문에 대해 성경으로 대답할 때 흑백으로 가르칠 것도 있지만 스펙트럼으로 대답해주는 것이 유익하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바른 방법이며 동시에 다양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잘 맞는 방법이기도 하다. 성경읽기나 공부를 크리스쳔의 의무로 요구하기보다 재미(fun)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성경의 재미를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들이 관심이 있는 것을 공부하게 한다. 그리고 나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과 가까워져서 의무적으로 읽고 공부하게 될 것이다. (2) 일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의 회복이다.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업의 문제다. 실업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이지만 과도한 고등교육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 문제는 정부나 기업이 해결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책이 없다. 그러니 교회는 더더욱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세속의 정부나 기업이 할 수 없는 것을 공급할 수 있다. 바른 직업관과 직업을 택하는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는 말씀은 젊은이에게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다.세속적인 가치관은 돈이나 안정을 보장하는 직업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실패감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서 맡긴다는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열정과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해서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 일이 좀 힘들고 귀찮으면 그런 일을 쉽게 포기한다. 일하는 지역이 외진 곳이면 가려고 하지 않는다. 소명의식이 회복되면 이런 일들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고 그런 일에 대해서 의미를 찾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치 선교지에 가는 마음으로 그 일에 임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세계선교를 위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것보다 그들 앞에 주어진 일을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3) 헌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희망을 갖기보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이전에 만들어 놓은 빚이란 담과 앞으로 만들어야 할 집이란 담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아예 하지 않고 또 결혼을 하고도 자녀들을 낳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사회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쳔 젊은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삶을 대하는 자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비난이나 책망을 하기보다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주면서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비롯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믿음으로 살아내야 함을 가르치고 그 일에 헌신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지금까지 젊은이들에게 요구한 헌신은 주로 전도와 선교에만 적용되었다. 지금도 헌신을 요구하는 영역은 목회나 선교를 비롯한 특정한 사역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런 헌신을 향한 도전을 수용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신학교 지원자나 선교사 지원자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헌신은 세속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성경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일상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현 사회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느끼는 문제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면서, 세상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경건하게 살라고 권면하면서 술 담배를 금하도록 하거나 성적인 면에서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소극적인 방법일 뿐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오늘 세속의 풍조를 거스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통적으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평범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세속의 풍조를 거스르는 것으로 젊은이들이 믿음으로 헌신해야 할 영역이 되었다. 어찌 보면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것 이상으로 헌신이 필요한 영역이다. 믿음이 있는 젊은 크리스쳔들이 믿음으로 결혼하고 믿음으로 자녀를 낳는다면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일반 사회에 믿음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세속과 다른 삶을 사는 일에 헌신하도록 도전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긴급한 사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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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5월 월례회, 이 시대 젊은이를 향한 교회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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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고난과 부활절의 의미 되새기기
- 본고는 지난 4월 12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진행한 4월 월례회에서 한국정교회 임종훈 신부가 발제한 ‘정교회의 고난절(대 사순절)과 부활절 의미 되새기기’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예배를 통해 찾게 되는 대 사순절의 의미1) 뜨리오디온 기간‘뜨리오디온’은 두 가지 사항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는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의 3주간을 포함하면서 대 사순절 기간과 성 대주간까지도 포함하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랜 기간을 통틀어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책의 이름인 『뜨리오디온』입니다. 이 책은 평상시에는 매일 예배에서 아홉 개의 오디를 읽어나가지만 이 기간에는 세 개의 오디를 읽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이 책은 이 기간에만 읽혀지게 됩니다.세리와 바리사이파 주일: 이 날 루가복음 18장 10절부터 14절까지에 있는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에 대한 복음말씀이 교회에서 봉독됩니다. 부활절을 향하여 신자들은 이제 영적인 순례길을 떠납니다. 이 영적 순례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익숙한 항구를 떠나 새로운 종착지를 찾아 떠나는 항해를 시작할 때에, 많은 준비물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순례에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말로는 겸손이지만 그리스말로는 ‘따삐노시’이고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탕자 주일: 탕자에 대한 비유말씀인 루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가 봉독됩니다. 우리는 다시 한 가지 더 영적인 준비물을 챙기게 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가르치시고 명하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함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죄에 대한 절망감과 두려움에서 구해내고 덕과 선행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적들이 펼치는 간계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입니다.금육 주일(최후의 심판 주일): 이제 우리는 점점 더 대 사순절의 치열한 영적 투쟁의 기간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대 사순절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금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날부터 신자들은 육류로 조리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 사순절의 엄격한 금식이 시작되기 전이므로 이 날부터 일 주일간은 우유로 만든 식품은 먹을 수 있는 제한적인 금식을 행하는 유식주간(우유는 먹는 주간)이 됩니다.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 최후의 심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게 됩니까? 복음말씀에서 주신 답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나 인류와 같은 추상적인 집합체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짓고 악에 빠진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격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용서 주일: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 6장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죄짓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금식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금식은 위선이나 과시가 아닌 오직 하느님께만 은밀히 알려지는 금식으로서, 우리의 타락한 욕구와 본성에 무릎 꿇지 않고 이겨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승리하여 이 세상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분열, 갈등, 증오를 없애고 이겨내어 일치, 연대, 사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즉 인간관계가 훼손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맡겨 적과 나 사이에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적과 내가 서로를 용서할 때만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2) 대 사순절 기간대 사순절 기간의 세 번째 주일인 십자가 경배 주일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 욕구와 정념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하고, 십자가 경배 주일부터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에 집중하도록 신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전례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사순절 첫 번째 주일(정교 주일): 첫 번째 주일을 정교 주일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이 날 교회는 제7차 세계공의회(AD 787)에서 최종적으로 선언한 이콘반대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이콘(성화상) 공경의 회복을 기념하며, 정교 신앙의 승리를 외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 시노디콘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 예언자들이 본 대로,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가 이어받은 대로, 교부들이 가르친 교리대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합의한 대로, 은총으로 밝혀진 대로, 진리가 확인한 대로, 거짓이 쫓겨난 대로, 지혜가 떳떳하게 전파한 대로, 그리스도가 치하한 대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생각하며, 말하며, 전파한다. 그의 성인들을 말로, 저서로, 명상으로, 성제로, 성당에서 성화로 공경한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흠숭하며 경배한다. 그의 성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사자들로서 연관적으로 공경한다. 이것이 사도들의 믿음이다. 이것이 교부들의 믿음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온 세상에 굳건하게 섰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주일): 두 번째 주일에는 14세기에 교회가 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AD 1359)의 적들을 정죄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공인한 것을 정교 신앙의 두 번째 승리로 기념합니다. 성인은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영예를 다 버리고 아토스 성산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은둔의 삶을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했고 엄격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여 자신의 감각을 완전히 억제하고 자신의 영을 하느님께 끌어 올리며, 모든 순간을 끊임없는 기도와 거룩한 묵상에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마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강물처럼 많은 눈물과 밤새워 올린 기도로 자신의 영을 정화하여 성령의 은사를 담은 그릇이 되었습니다.하지만 이 두 번의 기념 주일은 대 사순절의 흐름과는 다소 유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대 사순절은 예비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그들에게 이 기간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아직은 예언되고 약속되었을 뿐인 새로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아직은 만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순절 세 번째주일(십자가 경배 주일): 이 날은 대 사순절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를 경배하는 축일로 지냅니다. 사십일 기간 동안 우리는 참담한 통회와 힘든 금식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기를 되찾도록 해주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여 우리를 격려합니다. 힘든 여정의 중간에 교회의 교부들께서는 생명의 십자가를 세워놓고 우리를 쉬게 하고 새로운 활력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사순절 네 번째 주일(성 요한 클리막스 주일): 이제 대 사순절의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더 이상 참회와 노력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취된 사건들에 집중하게 됩니다.요한 끌리막스 성인(†AD 603)은 ‘사다리’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끌리막스』라는 정교회 최고의 영성 서적을 쓰신 분이고 영적인 상승의 단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이집트의 성 마리아 주일):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르코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사십일 기간 동안 나 자신을 영적으로 정화하던 모습에서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에 실제로 참여하게 되도록 초점을 옮깁니다.창녀였던 이집트의 성 마리아(†AD 378)의 삶을 기념하며 죄에 깊이 물든 사람도 회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성지 주일): 이 날 이전의 6일간은 성지 주간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 동안의 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친구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 베다니아와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함께 하도록 합니다.3) 성 대 주간성 대 월요일: 이 날은 신랑의식에서 마태오복음 21장 18절부터 22절까지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영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간들을 경계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그 잎으로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가렸을 뿐, 그 죄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성령의 열매와는 거리가 먼 영혼을 비유합니다. 주님께서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셨습니다.성 대 화요일: 이 날의 신랑의식은 마태오복음 25장 1절부터 13절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봉독함으로써 언제 올지 모르는 우리의 죽음과 주님의 재림을 늘 깨어있는 가운데 준비해야 함을 배웁니다.성 대 수요일: 이 날은 마태오복음 26장 6절부터 16절까지 창녀였던 여인이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말씀 속에서 회개의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성 대 목요일: 이 날의 예배는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입니다. 마태오복음 26장 2절부터 27장 2절까지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최후의 만찬에서 신비의 감사의 성사를 제정하시고,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시고, 유다에게 배반 당하셨습니다. 이 날 이 네 가지 사건을 기념하며 성찬예배를 드립니다.성 대 금요일: 이 날은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난 예식에서 12개로 나뉜 복음 본문이 봉독되고, 대시과에서도 복음이 봉독되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뿐만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면서 구원 받은 오른편 강도를 기억합니다.성 대 토요일: 이 날은 주님의 장례 예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무덤에 모셔져 장사 지내고, 주님은 캄캄한 지하세계에 내려가 주님 이전에 안식한 모든 영혼을 해방하십니다.(베드로 전서 3:18-19) 부활절의 의미“그리스도의 부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믿음과 거룩한 예배와 기풍과 문화의 핵심입니다. 모든 차원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적셔지고 양육되는 정교 신자들의 삶은, 매일 매일이 부활절(빠스카)입니다. 이 부활 경험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는 쇄신의 경험이고, 만물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입니다.특별히, ‘지극히 거룩한 날’인 주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사의 성찬예배에서, 정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을, 하느님 통치의 복된 현실들을 미리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참여함을 장엄하게 경축합니다. 신성한 감사의 성찬예배에 빠스카와 기쁨의 의미가 풍부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감사의 상찬예배는 언제나 기쁨과 환희의 분위기 안에서 거행되고, 그리하여 모든 존재의 최종적인 쇄신, 충만한 기쁨, 생명의 충만, 장차 흘러넘칠 사랑과 지식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종적 종말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역동적 여정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세상이 얻게 되는 구원의 종말론적 특징을 현재와 결합시켜주는 밀접하고 지울 수 없는 관계와 관련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지니는 이 종말론적 특징은, 교회의 삶에 하나의 독특한 역동성을 새겨넣어주고,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훌륭한 증언자가 되도록 자극합니다. 정교 신자는 사회적인 악에 맞서서 투쟁해야할 분명하고도 고유한 이유와 강력한 동기를 가집니다. 그는 최종적인 목적들과 매우 강고해 보이는 역사적 현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대조와 긴장을 아주 강렬하게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로 나타난 사랑(루가 10:30-37 참조)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웃이라 여기고, 가서 기꺼이 그를 도와주라.’(펠루시오스의 이시도로스)고 말씀하신 교부의 가르침처럼, 정교회는 사랑의 디아코니아, 사랑의 봉사,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정교회의 감사의 성찬예배 정신을 확장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현재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의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핵심임을 굳게 믿습니다.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또한 정교회의 전례적 삶이 ‘함께 누리는 구원’ 경험, ‘함께 누리는 자유’와 ‘함께 누리는 왕국’의 은총 또한, ‘함께 누리는 부활’에 대한 기다림으로 떨리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중시되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생명의 공동체’이고, ‘나눔과 더불어 존재함’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희생적이고 영광스러운 사랑과 일치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부활 이콘, 이 빛나는 이콘의 놀라운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은 땅 속 깊은 곳에 내려가셔서, 지옥문들을 깨뜨리시고, 단지 승리의 깃발만 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를, 또한 그들 안에서 온 인류와 온 피조세계를 붙잡아 올리시고, 손수 보호하시고 강하게 하시면서, 영광스럽고도 빛나는 모습으로, 무덤에서 나오십니다. ‘축제 중의 축제’, 죽음의 권세를 멸하는 전능하신 사랑인 부활의 선포는 사회적 불의, 인간성의 변질과 타락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 수천 수만의 피난민과 무죄한 어린이들에게 마치 골고타와 같은 이 세상 안에서, 오늘도 울려 퍼집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활은 선포합니다. 부활은 시련, 고통, 십자가, 골고타가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은 그들의 비극적 희생자들에게서 결코 승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정교회에서 십자가는 신앙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삶이 향하고 있는 최종적 궁극적 현실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완성인 부활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이야말로 십자가가 가진 참된 의미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 정교신자들은 외칩니다. ‘십자가를 통해 온 세상에 기쁨이 왔다’고 말입니다. 정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예식이 슬프기만 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이 뒤섞여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수난은 ‘우리의 고통을 없애는’ 부활을 통해 접근되고 경험됩니다. 정교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이 변할 수 없는 결합은, 일반적으로 역사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시련에는 무관심한 모든 신비주의 혹은 자기만족적 경건주의와 결코 화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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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고난과 부활절의 의미 되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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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3.1절과 한국교회의 과제
-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3월 8일 상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3월 월례회 중 민경배 교수가 발제한 ‘3.1운동과 한국기독교회’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민 경 배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교수)3.1독립운동과 한국교회 참여 정도3.1독립운동 당시 한국인은 총 1,700만명인데 기독교인 수는 26만명, 전체의 1.5%정도였다. 2016년 통계청에 의하면 현재는 기독교인구가 30%이다. 한데 당시 총독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시위 참여인원이 2백만명, 사상자가 23만4천명, 피살자 7천5백명, 불탄 교회 47동 민가 715채였다. 기소자는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25%, 입감자는 기독교인이 1,967명 곧 전체의 15%인데 그중 여자가 176명으로 9%에 이르고 있었다. 기독교입감자 중 여자가 10/1에 이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여자 입감자가 3%에 이르고 있었다.지난 2019.02.21 [조선일보]에 따르면 국내외에 참가자 103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최다 93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가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 사망자 최소 725~최다 934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기존 자료에 기록된 시위 참여자 58만명, 사망자 553명보다 최고 1.7배 높은 수치다.3.1독립운동의 기독교성3.1독립운동 당시 전국에 격문이나 붙었다. <매일 3시 기도하고 주일엔 금식하고 한주 내내 성경을 계속 읽으라.> 그런데 성경은 월요일–토요일 매일 성경 어디를 읽으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가령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아 12장이었다. 이 위대한 성경적 신앙이 3.1독립운동의 근원적 생명이요 그 동력이었다. 3.1독립선언서 작성자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씌워진 것이라고 천명한 바가 있다. <군국주의 통제>에 대한 대결로서의 민주주의적 이념은 복음과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가치였다. 더구나 일제는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이 <거의 종교적 열광으로 필사적 태도로 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순교적 열광을 연상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은 기독교 역사로 체계화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일제 진압자들은 어디가나 교회와 기독교인을 중점적으로 검거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있었다.가령 <미야꼬신문> 3월 8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다. 곧 불량 선인의 소굴이라 일컬어지는 평안남도에서 1일 오후 1시부터 평양 기독교, 교회당과 학교에 약 2천명이 집합하여 손에 구 한국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부르짖고, 진남포 안주에서도 수백의 기독교도 집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살포.> 대개 이런 기사다. 기독교가 3.1독립운동 중심에 서 있었다.3.1 운동의 세계사적 의미3.1독립운동은 세계 역사의 조류에 올라 선 거대 운동이었다. 세계 제1차대전의 회생으로 전취한 민주주의, 자유, 인권, 민족국가, 이런 가치들이 일제의 프러시아 군국주의에 의해 한국에서 다시 소생되고 있다는 의식이 한국이나 세계에 편만하고 있었다. 참담하였다.<독립선언서>의 핵심 주창도 세계사적이었다. 곧 정의, 인도, 인류적 양심의 발로, 세계개조의 대기운, 시대의 대세, 전인류 공존공생권, 인류 통성과 시대양심, 세계평화, 인류행복, 인류역사, 세계기운 이런 말들로 빽빽하다.한국기독교인의 세계의식한국교회는 그 태생기부터 세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1892년 <찬송가>에는 만왕, 만국, <끄릴난 어름산과 인도 산호섬과 아프릭 더운 내에 금모래 깔린 곳 강과 산과 넓은 들>, 이런 글들이 쌓여 있었다. 1906년 존 무어 선교사는 한국이 구원의 횃불을 드는 날 세계문제가 해결되되 제대로 해결되고 만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었다. 1907년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그 해가 정미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었는데도 만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3.1독립운동과 도덕적 개혁일제는 합병 하자마자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를 체계적으로 해체할 악덕한 시책을 펴고 있었다. 한국 인종의 멸절정책이다. 그래서 주초(酒草)를 장려하여 주초세 수입이 전체 조세 수입의 48%까지 육박하던 때가 있었을 형편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주초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가 주초법에 걸려 징역을 산 적이 있다. 공창 유곽(遊廓)은 합병직후 부터 50만불의 국비로 건설하고 있었으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던 선천에도 유곽이 들어서고 있섰다. 아편은 총독부가 예산 투입하여 재배하고 국가기관 전매청에서 팔고 있었다. 행상인도 팔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담임 중 한국인 두 분이 다 아편 중독자였다.3.1독립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또(齊藤實) 총독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불러 독립운동 이후의 한국선정 방향을 물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개혁을 요구한 것이 도덕적 패악이었다. 역사의 미래에 대한 계시록조선총독부와 미국 NCC의 묘한 공통 인식이 하나 있었다. <지금 한국에 그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아니한 유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인들이다.> 만주의 포조 신한촌의 <독립선언서> 에도 그런 희망이 비취고 있었다. <지금 혹 힘들어도 우리의 자손들은 독립을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희망의 가락은 역사의 미래에 대한 눈부신 불길 그 봉화대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는 구나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1920년 남궁억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란 찬송가를 부른다. 한데 그는 <기러기>란 노래를 짓는다. 짝 잃고 멀리 벽공(碧空)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나라 잃은 우리 같았다. 한데 3절은 희망의 북소리 요란하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분 계서 네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치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엔 난풍(暖風)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당시 새문안 교회의 홍난파와 김형준이 <봉선화>를 지어 온 겨레가 소리 높이 목쉬도록 불렀다. 가울 바람에 처량하게 시든 봉선화 같은 우리지만 그러나 3절에는 화산이 터지는 듯하다. <엄동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3.1독립운동에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삼천리강산 도처에 활화산처럼 미래 희망과 약속이 하늘가에 무지개치고 있었다. 교회가 민족 그 미래의 계시록이었다.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의 갑작스런 발전과 부흥이었다. 기독교 학교 학생수는 전년 비 90%가 증원하고 있었으며 교회교인은 3배가 늘어난 곳이 있었다. 3.1운동 역사 보존의 역학 출애굽기 10:2에는 역사를 보아야 우리가 여호와의 증거를 볼 수 있다는 글이 나온다. 모세 고별사에 <옛날을 기억하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란 글이 새벽이슬 같이 맑게 빛나고 있다. 기록은 신앙이다. 일본 안의 언론도 통제를 받아 3.1독립운동에 관하여 3월 7일에 가서야 보도를 시작한다. 한국 안에는 일간지 자체가 없었고, 주간지는 선교사들 것까지도 일언반구 보도가 없었다. 박은식, 김병조, 신흥우, 정한경 등이 있었으나 좀 이후의 일이고 또 비분감개로 조리가 흩으려져 있다. 한데 가장 신뢰할 만한 대담한 보고가 문서화 한 곳이 있다. 1919년과 1920년 10월 소집된 장로교제 8회와 9회 총회록, 그리고 거기 부록으로 실린 노화상황보고서들이다. 더구나 1919.10.4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록은 골리앗 앞에 나선 다윗 같았다. <장로교총회는 개회벽두에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가 본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본회로 보낸 편지를 서기가 낭독함에 회중이 슬픈 마음으로 받고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일>을 인쇄한다. 이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3.1독립운동 사건을 공문화한 문서로 기념되어야할 자료이다. 그러고 나서 각 노회 상황보고인데 예언자적 품위와 용기가 거기 불 타 빛나고 있다. 전국 12개 노회가 전부 <조선독립만세사건>에 대한 피해 상황 통계를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독립>이란 말을 못 쓰게 되어 있었는데도 교회는 오히려 보란 듯 그 말을 반복 단연 쓰고 있었다. 당시 3.1운동에 대한 보도나 피해상황에 대해 이처럼 대대적으로 공개한 곳은 교회가 유일하였다. 정의 진리의 봉화대가 여기 있었다. 그런 것이 세계사의 실록이 된 것이다.3.1독립운동에서의 한국교회 역할3.1독립운동은 한국교회와 떨어져 이해할 수 없는 교회 주도의 전 민족 궐기의 운동이었다. 전국적 조직이 있었기 때문인데 교회는 이런 사회적 역할에서 주도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네트워크때문에 세계사의 흐름과 세계와의 결속이 가능하여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동력 동원이 가능하였고 그런 의미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나 사회에서의 도덕성은 아주 긴요한 중추적 가치이다. 한데 일제는 한국에서 주초나 유곽 아편을 국가가 운영 판매하고 있었다. 도덕적 범죄를 총독부가 나셔서 자행하는 무도패륜의 길을 짐짓 걸어갔다.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이런 국가적 차원의 부패 배륜정책을 고발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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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3.1절과 한국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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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2)
- 본고는 지난 2월 7일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2월 월례회에서 이상원 교수가 발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신학적 관점에서’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지난 호에 이어 2회차이다. -편집자 주 I. 윤리적 배경: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동성애자들은 성정체성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지만 동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세 영역에서 연구를 수행 또는 위탁한 후에 결과물을 가지고 동성애는 유전자, 뇌의 구조, 호르몬에 의하여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진 과학적 연구들은 모두 재현에 실패했든지, 통계조작임이 드러났든지, 아니면 해석을 잘못 했음이 다 드러나서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일 유전자에 동성애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 한 쪽이 동성애자이면 다른 쪽도 100% 동성애자라야 하는데, 실제 일치율은 20% 이내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를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 X28은 실제로는 동성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전자임이 밝혀졌습니다. 동성애자의 뇌의 시상하부와 이성애자의 뇌의 시상하부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 동성애의 선천성의 근거로 제시되었으나 시상하부는 동성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에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고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에 남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으나 호르몬은 성정체성의 결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동성애자들은 또한 동성애가 죄라는 비판을 피해 가기 위하여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아전인수격으로 재해석하여 성경은 동성애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거나 동성애를 용인한다는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레위기18장22절을 신약시대에는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의식법에 속한 규정이라고 해석하거나 일반적인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이방신숭배절차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의식법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는 도덕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의식법을 범한 경우에는 며칠 동안 격리하는 정도의 처벌을 받았으나 도덕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받았던 반면에 동성애를 범한 죄는 사형의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로마서1장26절과 27절에 있는 순리와 역리는 특정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인류 보편의 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로마서1장에서 3장의 문맥에서는 순리는 이성애를, 역리는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본문인 고린도전서6장9절에 있는 “남색하는 자”를 남성창부로, “탐색하는 자”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로 해석하고 있으나, 전자는 남성 동성애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 후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성정체성을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에 따라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응하여 교회는 성정체성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인간을 남자 아니면 여자로 결정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이 질서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이 창조질서에 근거하여 성관계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그리고 결혼관계 안에서만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함과 동시에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거스르는 심각한 죄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명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동성애는 공동체의 존망을 결정하는 죄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동성애가 편만한 나라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고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특히 동성애를 어정쩡하게 허용하는 교회는 해체된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II. 신학적 배경: 퀴어 신학 퀴어 신학은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시작된 자유주의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신학의 한 분파가 퀴어 신학입니다. 퀴어 신학은 어떤 점에서 자유주의신학의 방법론을 채용했는가? 칸트의 비판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말하는 초월적인 주제들 – 영생, 하나님, 심판, 부활, 내세 –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난감한 청중을 맞이한 19세기 말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 길 앞에 서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의 길은 초월적인 주제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청중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여 초월적 주제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방법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고 낡은 방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현대인의 논리와 감성에 맞추어 전통적인 교리들과 성경의 내용들을 재해석하고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초월”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은 결국 전통적 교리들과 성경의 내용들로부터 초월적인 것들을 모두 삭제하든지 세계내재적인 주제들도 다 바꾸어 버림으로써 현대인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신학자들은 첫 번째 길을 버리고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서 자유롭게 교리와 성경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물꼬를 튼 이후에 슐라이에르마허를 포함하여 스트라우스, 리츨, 트로엘취 등의 구자유주의자들,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등의 신정통주의자들, 본회퍼, 로빈슨, 하비 콕스, 몰트만,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의 신자유주의, 오그덴 등의 과정신학과 같은 다양한 학파들은 서로서로 특징의 차이는 있지만 슐라이에르마허가 채택한 방법론을 따른 학파들입니다. 퀴어 신학도 이 방법론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퀴어 신학은 신마르크스주의와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성윤리를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사조에 아부하면서 이들의 기호를 신학적으로 맞추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퀴어라는 말은 낯설다는 뜻입니다. 퀴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이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예컨대 성관계도 갖지 않았는데, 아기가 태어난다든지(동정녀 탄생), 여호수아가 명령하자 해가 중천에 머무른다든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죽은 몸이 부활한다든지 – 하는 등등의 교리들이 모두 평범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의 눈에는 낯설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자들의 눈에 낯설게 보이는 동성애도 “낯설음”이라는 공통된 특징이 있으므로 정통신학의 당당한 주제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퀴어 신학에 대하여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퀴어 신학은 교회가 용인할 수 있는 다양한 신학 분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퀴어 신학은 성경과 교리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이단보다도 더 파괴적인 해석을 자행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외설적으로 왜곡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실상 성령 훼방죄를 범하는 신성모독적인 신학입니다. 교회는 퀴어 신학을 단호하게 비판해야 하며, 이에 대응하여 정통신학을 선명하게 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적적인 작용에 의하여 성관계를 가진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남자아기를 출산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상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는 죽음의 증거일 뿐, 여성의 성기가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는 새 몸이지만 성정체성이 반대의 성으로 변하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세례 – 성령세례 - 를 받을 때 속사람이 거듭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성정체성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성찬 시에 성정체성이 유동적인 된 예수님의 몸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영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 운동은 특히 복음주의 전통의 교회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 운동은 자라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세뇌시키기 시작함으로써 전도와 바른 윤리교육에 심각한 장애가 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 운동이 성공하는 경우 교회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를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며, 동성애자를 목사로 임직시키거나 직분자로 임명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미 한국 대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는 동성애비판을 사실상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 그것으로 이 운동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운동은 바로 타종교혐오금지법으로 연결되어 교회의 전도와 선교를 법으로 금지시키는 단계로 옮겨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단계에서 교회들이 연합하여 사력을 다하여 동성애 합법화 저지 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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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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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1)
- 본고는 지난 2월 7일 서울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2월 월례회에서 이상원 교수가 발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신학적 관점에서’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I.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실태지금 정치권은 동성애와 동성혼의 합법화를 시도하는 차별금지법안 제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정권 당시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서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는데,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법안은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름없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적 지향으로 정의한 후에 동성애를 왜곡된 성행위로 비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동성애자에 대한 고용상의 차별을 금지시킨 다음에 이와 같은 규정들을 어길 경우에는 법적 처벌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 법안은 기독교계의 거센 비판 때문에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차별금지법 제정시도가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2011년 12월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고, 2012년 11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고, 2013년 2월에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천명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여의치 않자 아예 전통적인 성(sex) 평등 사회를 젠더(gender) 평등 사회로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선거공약에 담아 발표하였고, 동성애와 동성혼을 헌법 차원에서 합법화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바로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하여 이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운동은 중단되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기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 만료된 국가인권계획(National Action Plan)을 대체하여 향후 5년간 국가의 정책을 지도할 새로운 국가인권계획안을 2018년 8월에 통과시켰습니다. 이 국가인권계획안에는 동성애와 동성혼과 관련하여 차별금지법에 담겨 있는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권고사항으로 담겨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의 모든 정책을 추진할 때 이 권고안을 반영해야 합니다. 또한 현 정부 산하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속적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 나가고 있고 현재 전국의 지방자체단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했는데,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사실상 차별금지법안이 발효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는 매우 교활한 조례안입니다. 제가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학생인권조례안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이 조례안은 조례안의 시(市)인권위원회를 두고 시인권위원회가 조례안을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권위원회는 설립 되자마자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하기관이 되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둘째로, 시인권위원회는 시의 감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되어 있으며 시인권위원회에서 논의한 모든 내용들은 대외비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권위원회가 논의하고 결정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제외하고는 어떤 시차원의 기관도 알 수도 없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셋째로, 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 한다”고만 되어 있을 뿐,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조례안이 차별금지법이 되는가? 문제는 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라고만 되어 있을 뿐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대해서는 다른 규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기관의 도움을 받는가? 여기서 시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하 기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조례안이 명시하지 않은 규정은 상위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현장은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중학교에서는 세 가지 성교육 교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 성교육표준안입니다. 이 표준안의 내용은 전통적인 성교육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준안에 대하여 줄기차게 비판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양성평등 기본법입니다. 이 기본법의 이름은 남녀평등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젠더 평등이 상당 부분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인지적 성교육입니다. 성인지 성교육은 100% 젠더 평등 교육안으로서 동성애와 이성애를 동등한 차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에서 동성애 합법화교육이 실행되고 있으며, 이 교육을 받으면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동성애가 잘못된 성애라는 말이 낯설고 이상하게 인식되도록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성인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II. 철학적 배경: 신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소수의 부르조아 계급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로 분석한 후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의식적인 혁명을 통하여 부르조아 계급을 축출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처음부터 실패로 끝날 운명을 안고 탄생한 유토피아였습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다하여 일하면 가능한 한 많은 보상을 얻으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을 다하여 일하고 나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이라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정도로 이타적일 수가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가지지 않은 능력 위에 사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타적인 아닌 인간으로 하여금 능력만큼 일하게 한 다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게 하기 위해서는 전무후무한 국가의 독재적인 강제력이 동원되어야 했고, 강제력이 동원되자 사람들은 능력만큼 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창의성은 죽었고 생산성은 하락하여 경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은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1992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을 전후하여 실패로 끝났습니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변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의 추동력은 성적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적 충동은 윤리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한 프로이드의 성 심리학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조아 계급에 이성애자들을 대입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동성애자들을 대입한 후에 현존하는 사회의 문제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는 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동성애자들이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이 신마르크스주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규범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의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며,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식기관과 배설기관의 만남이라는 생물학적 상식에 반하며, 의료 보건적으로 볼 때 각종 성기와 장기와 관련된 심각한 감염을 피해 갈 수 없는 위험한 성적 관행입니다. 동성애를 하면서 건설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는 없습니다. 이처럼 적어도 서구사회 안에서 신마르크스주의적인 성해방운동이 하나의 시대사조로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성해방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강박증이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집요한 동성애 합법화운동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의 정서가 반대하는 대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 헌법에 동성애와 동성혼 허용조항을 집어넣으려는 시도, 인권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격상시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위에 두려는 비상식적인 시도,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법화, 초중고등학교의 젠더교육, 동성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차단하는 보도지침,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가인권위원장을 모두 동성애친화적 인사로 의도적으로 배치한 조치 등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운동은 그 전략과 방법론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해방운동이며, 일종의 강박증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에 대한 이성애적 규범이 철폐된 유토피아적인 사회을 꿈꾸는 것은 진정한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잠재된 욕망의 병적인 표현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병적인 욕구의 분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교회는 이성애적 규범이 철폐된 사회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분석하여 비판하면서 참된 이상사회는 성경이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가장 강력하고 근원적인 대응책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활동을 시작한 본거지가 영국이었고, 당시 영국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사회로서 사실상 마르크스 혁명이 터질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존 웨슬리가 등장하여 성령의 힘과 강력한 복음을 들고 탄광과 노동자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 복음의 소망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끌어 들이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영국이 폭력혁명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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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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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2019년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소명
- 본고는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목사)이 지난 1월 4일 양재 온누리교회 화평홀에서 개최한 제73회 월례포럼에서 정일웅 교수가 발제한 ‘신년, 한국사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소명’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첫째 소명은,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언론은 우리사회가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풍자한다. 실천신학적으로는 복음의 사회적인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이며,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망각하고, 오히려 어두움과 모래알이 뒤덮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한국교회의 모든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대형교회의 목회세습, 목회자의 비윤리성)들은 깊이 생각하면, 한국교회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숙고하여, 해결해야 할 한국교회의 지극히 내적인 문제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본 강연자는 솔직히 지금까지 잘못 설정된 목회자들의 이기적이며, 경쟁지향의 목회철학(신학)과 실천방법론(교회성장론)을 포기하라고 일러주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먼저 이러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실수와 과오(죄)의 책임을 누군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한국교회 지도자 된 우리 모두가 이러한 죄(실수)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한국교회의 허물과 실수들을 우리 하나님께 고백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교회를 향하여 던져지는 모든 허물(죄)과 실수에 대한 비난을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들이 “내 탓이오”(고 김수환추기경)란 심정으로, 우리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죄책고백의 회개기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마18:15-20). 그 일들이 남의 일, 타 교단, 타 교회, 타 목사의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개신교회 전체의 실수와 과오임을 시인하고, 우리 하나님께 엎드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죄책고백의 회개기도운동”이 신년 새해에 시작되기를 바란다(요20:23,시23:5,시51,단9:5,요한1서1:9). 우리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물질과 세상 권력을 더 의지하였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우리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실수와 오류에 빠지지 않겠다는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죄책 고백문으로 우리 국민들 앞에 나타내 보였으면 한다.두 번째 소명은, 한국교회는 모든 교단과 교파들이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인정하고, 연합하여 흔들리는 교회공동체를 결속하며,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의식을 새롭게 일깨울 뿐 아니라,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한 교회연합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신년에 감당해야 할 우리사회를 향한 두 번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현재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두 개의 연합기관들이 자기 사명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로 통일된 새롭고 참신한 한국교회연합기관이 새로 탄생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래전부터 본 강연자는 하나로 연합된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표기구의 필요성과 한목소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의 필요성을 수차례 강조해 왔었다(독일교회를 통하여 배우는 통일노력).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필요성을 깨닫고 있는 것 같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새로운 연합기구인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 결성되어 곧 활동한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한국교회의 통일된 하나의 협의기구의 탄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라기로는 지난 80년대 이후에 분파된 “대한예수교장로회”란 간판을 가진 100여개 이상의 그룹들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원래 속했던 기존의 대한예수교장로회로 통합하기를 바라며, 신앙역사와 전통이 다른 교단들은 서로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며, 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더 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협력관계를 견지해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로 연합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협의기구는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한국교회전체를 대표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방책을 논의하며 간구하고, 지원하는 노력을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당면한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특히 복음의 사회적인 역할에 언제나 한목소리로 한국교회의 입장을 사회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려면, 먼저 기독교정체성과 관련하여 진보와 보수는 하나님나라의 신학에서 신학적인 사고의 통일성을 견지해야 하며, 나아가 대한민국의 전 문화영역(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교육)에서 어떻게 그 나라가 실현되도록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적인 가치실현을 힘써야 할 것이다. 방법적으로 각 전문영역에 속한 전문학자들을 동원하여 그 일에 협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각 교단에 속한 신학교들에서 섬기는 유능한 신학자들은 필수적으로 참여시켜야 하며, 한국교회의 사회윤리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사회, 대국가, 대북한, 대 국제관계에서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통일된 대사회적인 입장들을 한목소리로 대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가장 권위 있는 선포행위와 연관된 일이며, 그것이 한국사회의 안정에 크게 기여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의 위상을 사회적으로 달라질 것이며, 그간 상실된 한국교회의 신뢰가 거기서 회복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교회 내적으로는 공동체의 일체감과 결속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교단, 교파 간의 역사와 전통과 교리적인 신앙차이를 극복하는 많은 신학적인 대화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면한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서, 자립교회(20%)가 미자립교회(80%)를 지원하고 도우는 재정적인 선교협력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흔들린 복음의 동역자의식을 회복시키며, 한국교회의 공동체가 하나로 결속되도록 하는 비결이라 생각한다. 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때도, 이미 지역의 자립된 교회가 힘을 모아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여 교회의 분립개척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며, 목회자 개인의 재정을 쏟아부어 사업처럼 벌리는 개척교회는 중단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년 쏟아져 나오는 신학교들의 목사양성계획도 교단 간의 목회자양성계획을 세우고, 그 수가 조정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도,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우리사회의 어려운자들을 도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돕는 섬김과 봉사를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섬김과 봉사기관). 특히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위하여, 국가정책에 따라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협력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요구되는 중요한 일은 기독교신앙의 가르침의 통일성을 찾기 위하여, 끊임없는 교단 간의 대화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보수와 진보의 사이의 신앙고백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간 우리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지금까지 서로가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해왔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소문으로만 자유주의라고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하여 확인하는 대화의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진보적인 교회들도 보수교회의 신앙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였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본 강연자는 소문만 듣고, 그렇게 믿고 있는 선입관들을 자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반대로 서로 유사하며, 공유하며, 공통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하며, 인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인격적인 대화와 교제를 통하여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거기서 서로를 새롭게 이해하는 노력을 깊이 있게 기울이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요망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개 교회와 개교파와 개교단을 뛰어넘어, 진보와 보수 사이에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이러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며, 상실된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길이며, 거기서 한국사회도 한국교회를 새로운 신뢰로 다가올 수 있는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무쪼록 신년 새해는 죄책고백운동과 한국교회의 새로운 연합운동으로, 흔들리고 상실된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이 회복되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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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2019년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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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한국교회 처음 사랑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 본고는 지난 1월 11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1월 월례회에서 이덕주 교수가 발제한 ‘“허물어라, 세우리라”-한국교회 개혁의 과제와 전망’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성장이 멈추고, 젊은이들이 떠나가는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잇단 실수와 추문으로 목회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은 있는가?”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나의 고민과 관심은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과연 한국교회는 오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이런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이 요즘 나의 학문적 관심과 주제가 되었다. 종교개혁 전야한국교회사를 공부하다보니 주변으로부터, 특히 외국 신학자들로부터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부흥의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결과로서 부작용과 문제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나는 “압축 고도성장의 결과요 그 후유증이다.”라고 대답한다. 근현대 한국사회가 ‘압축 고도성장’(compressive rapid growth)의 경제부흥을 이룩하였듯, 한국교회도 한 세기 조금 넘는 짧은 역사에 서구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압축 경험하였다. 사도시대 기독교회가 수난과 박해의 역사로 시작되었듯이 한국교회는 복음 선교가 시작되면서부터 극심한 수난과 박해를 체험하였고 일제강점기와 전쟁 시기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박해를 견뎌낸 서방교회가 부흥과 성장, 선교의 역사를 일궈냈듯이 한국교회도 ‘선교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오늘날 인구대비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선교국가가 되었다. 그 외에 종교 재판과 교회 분열, 정통과 이단의 역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 건축, 수도원과 사회구제, 십자군 같은 공세적 전도활동과 해외선교,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과 타협 등등..... 서구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건들을 한국교회는 120년만에 체험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종교개혁’(reformation)이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뿌리 채 뒤집혀’ 체질적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 물론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에 대한 설교나 강연, 책이나 논문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았다. 문제는 말과 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주장이 아닌 실천으로, 형식적 집회가 아니라 영적 체험으로 전개되는 종교개혁 체험이 아직 없었다. 번영의 신학에서 십자가 신학으로그렇다고 무너지는 교회의 혼돈 상황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실망만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무너지는 교회에 대하여 분노하고 질책하면서 동시에 세워질 교회에 대한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러했고 신약의 사도와 제자들이 그러했으며 기독교와 인류 역사에서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나 나타난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십자가 은총’이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우면서 내걸었던 ‘하나님의 도성’ 신학이 어거스틴의 ‘십자가 은총’에서 출발하였음은 물론이고 중세 클루니수도원 개혁운동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버나드와 안셀무스, 프란체스코의 신학과 수도생활도 십자가의 은총과 겸비, 그 실천이었다. 그리고 중세를 끝장 낸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신학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재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이처럼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다 ‘십자가’가 재등장하였다. 교회의 근거이자 존재 이유인 ‘십자가’를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는 다시 세워지는 역사를 반복하였다. 부자와 권력자를 위해 물질적 풍요와 성공을 빌어주는 ‘번영의 신학’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라면 자발적 청빈과 순결, 고난과 희생을 실천하는 ‘십자가 신학’은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느 신학에 집중하고 있는가? 가진 자에게 편안한 교회인가? 가난한 자에게 희망을, 갇히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는 그런 교회인가? 한 세기 전, 처음 기독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말 그대로 ‘복음’(glad tiding)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바뀌었다. 강단의 메시지도 바뀌었다. 십자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이 차지했다. 결국 오늘 붕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것은 십자가 신앙에서 출발해야 한다. 쳐다보는 십자가, 걸고 다니는 십자가 말고 지고 가는 십자가를 체험하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은총에 근거하여 무너지는 교회에 대해 경고하고 세워지는 교회를 기대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시작해야 한다.한국교회의 개혁 징조독일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요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비텐베르크와 보름스를 다녀온 후 한국교회 현실을 다시 살펴보았다. 누가 뭐라 해도 내 눈에는 ‘종교개혁 전야’의 무너지는 교회 모습이자 현상이었다. 특히 내가 속한 감리교단이 5년 넘게 감독회장 선거 문제로 내홍을 빚으며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부끄럽고 암담할 뿐이다. 그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무너지는 교회 저 편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국교회 1백년 역사 속에 적지 않은 ‘개혁의 촛불’들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교리와 제도를 앞세우며 진리와 진실을 외면하였던 한국교회에 대하여 “아니오.” 외치다가 기득권, 교권주의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고 제도권교회 밖으로 쫓겨났다. 바로 한국교회의 후스였고 사보나롤라였으며 위클리프였고 발도였다.한국교회 희망의 근거그러했다. 한국교회 종교개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 후스도 있었고 위클리프도 있었다. 사보나롤라도 있었고 발도도 있었다. 이제 루터만 나오면 된다. 작은 촛불들이 모여 거대한 횃불을 만들 때다. 골방에서 드리던 은밀한 기도가 교회의 비리와 부정을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성전 문에 붙이는 망치소리로 바뀔 때다. 무너지는 교회의 굉음 대신 세워지는 교회의 망치소리가 들릴 때다. 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습관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아니오.” 할 수 있는 ‘작은 루터’들이 나올 때다. 나는 이 글을 “오늘 한국교회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질문과 고민을 안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읽고 한국교회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희망은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5백년 주기로 반복되는 ‘무너지는 교회’와 ‘세워지는 교회’의 교차 패턴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함께 무너지면서 세워지는 교회의 과도기를 맞고 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무너지는 교회를 보고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세워지는 교회에 희망을 품고 기대할 것이다. 언뜻 보면 눈앞에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과 물질적 세속화로 무너지는 교회의 실망스런 모습이 판을 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노인들만 남은 시골 작은 교회에서, 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에서, 견디기 힘든 열악한 목회와 선교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예수 진리’만 붙잡고 매일매일 공급되는 하늘의 만나로 얻은 감동과 감격으로 사역하고 있는 ‘작은 예수’ 목회자들이 있기에 그들로 인해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처음 세워질 때부터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교회였다. 가끔 사람(목회자와 교인)이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는 영원하다. 그러하기에 설혹 사람의 실수와 잘못으로 교회가 훼손되고 오염될지라도 아주 멸망시키기보다 심판하신(무너뜨린) 후 구원하시는(세우시는) 은총의 하나님인 것을 믿는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믿기에 무너지는 교회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 몫이라면 세우는 것은 주님 몫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혼돈과 공허, 무질서와 절망에 사로잡힌 오늘 한국교회의 허상을 철저하게 허물고 신령과 진정의 새로운 교회로 다시 세우시는 창조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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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한국교회 처음 사랑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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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총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
- 본고는 지난 11월 22일 한국복음단체총연합회가 개최한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 김명구 교수가 발제한 ‘초기 한미관계와 기독교’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미국정부의 한국포기와 그 이유1880년대 한국을 방문한 대개의 미국인들은 외교관과 선교사들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한국을 찾은 미국 사업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선교사들과 달리 외교관들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7년가량 체류했다.이들은 조선을 면밀히 관찰했고, 조미수호조약이 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에 대 해 소극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이 미국의 이익에 이바지 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었다. 미국의 대(對) 조선과의 수교 목적은 미국의 국가이익이었다. 안전한 항로의 보장과 경제적 이익 을 위해71) 적극적으로 조선의 개항을 실현하고 공사관을 개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약한 의존 관계(a poor reliance)”를 확인했고, 따라서 무관심과 소극적 정책으로 후퇴한 것이다.72) 이들의 외교적 판단은 미국의 대(對) 조선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미국을 통해 일본과 같은, 강력한 근대국가를 꿈꾸었지만 미국은 조선을 지원해주어서 얻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을 계기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해 9월 러시아와 포츠머쓰 (Treaty of Portsmouth)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 치”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79)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은 어떠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00년,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이미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시베리아, 북만주를 차지한 러시아와 대치시키자면 일본이 한국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80) 고종 황제는 “미국만이 한국의 우방이며, 미국 국민이야말로 한국이 장차 난경(難境)에 처할 때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조언과 충고할 국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미수호 조약 당시의 원조나 거중조정 조항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19세기 당시, 한 국가가 주권을 인정받으려면,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국가들에 의해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국가의지(state will)의 존재, 곧 적대적인 세계에 대해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한국과 중국은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그 지위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비문명국가인 대한제국을 보호한다 는 명분으로 침탈했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미국정부와 미국사회의 변화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은 한국교회 비정치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한국을 버리고 떠난 미국을 다시 돌아오게 해 일본과 대립하게 했다. 미국교회를 자극했고 미국정부의 대한(對韓) 인식을 교정하게 했다.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일본 우선의 정책에 교정을 하게 한 것이다. 나는 올해 한국을 방문한 많은 유명인사들 중 한 사람에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어 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평양에서, 5-6천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한 주일을 보냈는데, 그는 “원더풀? 원더풀!”이라고 대답했다. 목사들과 선교회 총무들뿐만 아니라 여러 신문 특파원들과 사업가들도 그 사실에 동의를 하 며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놀라운 결과에 경이를 표하고 있다. 그들은 비기독교인들이나 한국인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무어(John Z. Moore)는 1907년 영적대각성의 결실을 확인하고 싶어 적지 않은 인물들이 한 국을 찾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언론계와 경제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의 말대로 세계 거대신문의 특파원들이 한국을 찾았고, 세계 명사들의 방문도 넘쳤다. 이들은 영적대각성 운동의 결과와 선교의 결실, 곧 복음의 강력한 힘을 확인하 고 싶어 국권이 상실된 나라를 찾은 것이다.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사도적(使徒的) 기독교가 되살아났다며 흥분했고 한국이 아시아의 “지배 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소박한 예배당에서, 수천 명씩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들에게 한국은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였 다. 국제정치적 이득을 위해 한국을 버린, 미국정부와 다른 생각이었다.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던 시대였고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간극을 뚜렷이 구분하던 시대요, 사회 진화론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대 속에서, 식민지에서의 불합리한 일들이란 흔한 일이었다. 한국의 문제가 주목을 끌 수 없었고, 기독교에 관한 일 지라도 다른 기독교 국가 정부의 관심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은 서구 세계로부터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일본의 식민지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도 일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가혹한 현실을 보려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일본의 처신에 대해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 랫 박사 부부가 이토오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한국에 두어 달 머물며 “교육과 윤리”를 주제로 강연했을 때도, 일본인들이 한국 땅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1912년에 이르러, 미국 정부의 입장이 변하고 있었다. 미국 뉴욕의 월간지 아웃룩( The Outlook )은 1912년 12월 4일자 기사는 한국 땅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동양 각국에서 중대한 범죄 사건으로 인해서 재판 처벌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일본 도쿄나 중국 베이징에서는 각기 자기 국민들을 감금하거나 징역에 처하기도 하고, 혹 교형이나 참형에 처한다.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관계만 없으면 서양 각국들은 전혀 상관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한국인 123명의 재판 사건으로 인해 동서양 각 국이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통상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소극적이고 수세적이었던 미국교회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한국문제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미국사회를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한 국문제가, 미국교회를 통해, 미국사회와 미국정계의 이슈가 되었다. 1907년 운동의 결실만큼 뛰어난 선교 결과를 가져온 예가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교회의 업적과 자랑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어떻게 한국교회가 평가되고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세계의 모든 교회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특별히 택해 서, 동양 처음으로 기독교 나라를 만들어서 아시아 주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사명을 맡기려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때에 한국교회를 돕는 것이 장차 일본과 중국을 문명화시키는 기초가 된다고 하여 각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 월보, 잡지에 한국교회 의 소식이 그칠 때가 없으며 교회 순례자들의 연설이나 보고에 한국교회에 대해 칭찬 하지 않는 것이 드물 정도이다.이승만의 말대로 미국의 신문과 잡지는 한국교회의 성과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그는 1907년 이후에 변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하고 있다. 국제 정치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졌고 잊히고 있던 존재였지만, 한국교회 선교의 결실을 보고 싶어 적지 않은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대개 이들은 재한 선교사들의 집에 머물며 통역과 안내를 받으며 한국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한국 교인들의 집을 방문을 했다. 이들이 알고싶어 했던 것은 오직 한국교회 부흥 이유였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 상황도 알게 되었고, 한국의 정세와 여러 상황도 함께 분석하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의 분석대로 한국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 것을 서구 기독교 세계로 알리게 되어 있었고, 일본으로서는 이것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위선이 적나라하게 서구 기독교 사회로 전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07년의 선교사들은 비정치를 선언했지만, 한국기독교의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고, 한국의 실정을 미국사회에 곧 바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따라 서 일본은 가혹한 정치와 자신들의 추악한 단면을 전달하는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파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이를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과 미국교회와 연결시킬 줄 알았고, 미국정계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1907년을 시작으로 재한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학대하는 정황도 비밀리 에 미국교회에 전했다. 미국교회는 한국의 정황을 미국정계와 사회로 알렸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상당수의 미국교회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 했다. 1940년대까지의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되었다. 1902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조선을 포기했고 일방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그러나 재한선교사들에 의해 양국간의 관계는 이어졌고, 오히려 한국독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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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총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