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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기사 / 성서총회, ‘4월 17일 예수 부활절’ 기념예배 드리다
    ‘부활주일’은 춘분 후 첫 만월 지난 주일로… ‘부활절’은 4월 17일로 해야 맞아 예장성서총회(총회장 김노아 목사)는 지난 4월 17일 서울 솔밭로 28 세광중앙교회에서 “예수 부활의 날 특별 대성회”를 가졌다. 이날 부할절 기념성회는 김영환 목사의 사회와 총회총무 송재량 목사의 총회약력 보고, 조영구 목사의 축사, 유재일 목사의 고난주간 메시야 행적, 모상금 목사의 유다 절기 낭독, 신승도 목사의 대표기도, 총회장 김노아 목사의 말씀선포로 진행됐다. 김 목사는 ‘예수 부활의 실상’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부활체는 곧 영광의 빛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라며, “영안이 열리지 않은 육신의 눈으로는 부활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의 무덤에 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지만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알지 못했다(요 20:9). 부활 예수가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부활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았다(요 20:14).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자 그 목소리는 알아보고 ‘랍오니’여 하고 달려들었다. 그때 부활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알리라’고 했다. 따라서 부활체는 현재의 육체의 모양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김 목사는 “병고침 받고, 떡 얻어 먹으며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만 본 자는 다 도망갔으나, 영안이 열려 부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증인이 되어 세상을 바꾸었다”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따라, 흔들리지 말고 주의 영이 향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에 굳게 서라”고 당부했다. 부활절과 부활주일의 유래초대교회는 부활절을 파스카(passcha)라고 불렀는데, 이는 구약의 유월절을 뜻하는 ‘페사흐’(passover)에서 나온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으로 우리를 위해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이 파스카 축제는 주후 4세기 경에는 부활절 일요일이란 의미를 갖게 되었고, 거룩한 절기 구속의 파스카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이 축제는 지방의 교회마다 조금씩 그 날짜와 내용이 달랐다. 소아시아 교회와 이집트 교회 그리고 로마의 어떤 교회는 니산월 14일로 지키고, 또 다른 교회들은 그 주간의 일요일에 지켰다. 그러자 부활절을 통일시키자는 제안이 제기되어 주후 325년 최초의 세계기독교공의회인 니케아회의에서 부활주일을 “춘분 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통일한 것이 오늘날 부활주일이다. 즉 어떤 특정 날짜를 기념하는 ‘부활절’은 사라지고, 주일을 중심한 ‘부활주일’로 지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춘분은 태양력으로 항상 3월 21일에 있게 되므로 부활주일은 3월 22일보다 빠를 수 없고, 4월 25일보다 늦을 수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어 부활주일은 해마다 그 날짜가 다르게 되었다.“성경을 기준하지 않는 부활주일은 비성경적이다”이에 대해 김 목사는 성경을 기준하지 않고 춘분을 기준한 부활주일은 비성경적이라며, 4월 17일을 성경적 부활절로 지킨다. 김 목사는 첫째 춘분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절기이고, 둘째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제2 탄생일과 같은 부활절을 해마다 다른 날짜에 지키는 것은 이치와 도리에 맞지 않으며, 셋째는 부활하신 날이 들어있는 주일로 부활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대부분 부활하신 날이 들어 있지 않은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게 되며, 넷째는 천하의 모든 기념일은 날짜로 지키고 있는데 부활절만 요일로 지키는 것은 모순이고, 다섯째는 쌍춘절이 돌아오는 해는 1년에 두 번 부활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된다며 춘분을 기준으로 한 부활주일 계산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성경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고(마 16:21, 20:19, 27:63, 막 8:31, 9:31, 10:34, 눅 9:22, 18:33, 요 2:19-22), 그리고 유월절에 운명하셨다(마 26:2, 막 14:1-2, 14:12-16, 눅 22:7-13, 고전 5:7). 예수님은 유월절 첫날 만찬을 하셨고(눅22:14-23), 그날 밤에 가룟 유다를 앞세운 악당들에게 붙잡히셨으며(눅 22: 47-53),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았고(눅 22:54-62), 그 다음날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심문을 받았으며(눅 66-41), 다시 빌라도의 법정을 거쳐 십자가에 운명하신 것이다(눅 23장). 그리고 예수님은 운명하신 날로부터 제삼일(사흘만)에 부활하셨다(눅 24장). 그러므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유태력 1월 14일(태양력 4월 14일) 저녁 때에 붙잡히시고, 다음날 15일에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셨으며, 사흘째 되는 17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것이다.김 목사는 “이렇듯 명백하게 예수님의 부활의 날짜가 성경에 밝히 드러나 있는데, 세계교회가 굳이 춘분을 기준으로 한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성경대로 “한국교회가 4월 17일을 부활절로 지키는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성서총회는 주후 325년 니케아회의가 결정한 춘분 후 첫 만월 다음 일요일을 ‘부활주일’로 지키는 것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이 유태력 3790년 아빕월(니산월) 16일로서 양력 4월 17일임을 확정하고 그 날을 기념하는 특별성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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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6
  • 기획 / 부활절에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설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재림과 심판이 증언되어야설교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매개설교자가 기복주의 강조해선 안돼 설교인가, 종교강화인가설교는 기독교의 복음을 증거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히 선포하는 것임으로 ‘말씀의 증언’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객관적 진리인 성경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또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들리는 말씀"이라고 하고, 청중들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에서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다.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는 성경 본문 몇 줄 읽어놓고 그 본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온갖 세상 이야기를 다 끌어다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것은 일반종교에서 신도들을 도덕적 윤리적으로 가르치려는 ‘종교강화’(宗敎講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것은 종교강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덥잖은 ‘잡담’도 많다.설교에서 말하는 객관적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과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류 앞에 밝히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설교는 결코 개인의 주관적 종교 경험을 극대화 하여 미려한 수사로 내뱉는 말이나, 현실의 정치적 동향을 설명하거나 신문이나 TV 등에서 얻은 정보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설교는 설교자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런 설교에서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영감이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감동이 전달될리 없다. 거기에는 기껏 종교적 흥분과 심리적 감동이 있을 뿐이다. 교인들은 때때로 이런 흥분과 감동을 은혜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생명을 살리는 ‘은혜’는 아니다.설교는 생명을 살리는 매개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그러므로 당연히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말씀’을 제켜놓고 그 아까운 시간을 세상의 자랑거리로 채우려 하는가. 그럴듯한 영적 언사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3).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그리고 재림과 심판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임을 알고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생명을 깨달았다. 초대교회가 무서운 박해 아래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생명있는 설교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심판이 없는 설교는 아무런 생명도 능력도 없는 울리는 괭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가짜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특히 예수를 무슨 기복신(祈福神)으로 전락시켜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만사형통만을 강조하는 설교는 기독교의 복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기복주의 설교는 복음이 아니다성경에는 ‘축복’(祝福)이 있다. 민수기 6장 22-27절과 열왕기상 8장 22-53절에는 제사장의 축복, 마태복음 5장 3-12절(산상보훈)과 6장 9-15절(주기도문), 요한복음 14장 10-14절(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예수의 축복,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는 사도의 축복이 있다. 축복은 다른 사람의 앞길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비는 것이다.그러면 설교자가 추구해서는 안되는 ‘기복’(祈福)은 무엇인가? 기복은 세속적 욕심을 종교적 방법으로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육적 기복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망이고, 영적 기복은 인간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영가천도재, 천주교의 면죄부, 무속의 무당굿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는 과연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신학을 기초로 한 참된 설교를 하고 있는가. 교인들의 저급한 감정을 이용하여 흥미본위의 세상 이야기나, 개인의 주관적 종교경험을 극대화 하여 자기 넋두리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설교자는 성경본문 한절 읽어놓고 그 본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성경이나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전혀 언급하는 일도 없이, 일상의 애매한 세상사를 중언부언 하거나 기복주의를 부추기다가 끝내고 만다. 이런 설교는 설교자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런 설교에서 어떻게 창조적 영감과 성령의 감화감동이 전달될 수 있겠는가. 참된 설교자는 일체의 불순한 조화와 타협을 배척하고 진리의 말씀 그 자체만을 신자들에게 제공할 때, 감동과 영감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신학이 가는 길을 목사가 가고, 목사가 가는 길을 교회가 가고, 교회가 가는 길을 사회가 간다는 말이 있다. 목사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 목사의 설교는 그 설교를 듣는 성도와 그 교회만이 아니라, 그 교회가 속해있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목사가 설교에 생명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사의 업무가 어찌 설교뿐이겠는가마는 그래도 설교가 목사의 본업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목사가 다른 것은 좀 서툴러도 생명을 건 설교를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존경을 받아야 할 참된 목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목회야말로 즐겁고 행복한 직업이다.선지자 아모스가 일찌기 자기 시대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고 했던 것처럼, 이 시대는 말씀이라는 설교는 많은데 감동을 일으키고 사람을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흔치 않다. 이왕에 목사가 되었다면 자신의 주관적 기복적 종교경험이 아니라, 역사적 공동체적 신앙경험에 터잡은 참된 복음적 설교를 하는 열정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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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0
  • 새해기획 / 한국교회의 도전과 응전 (2) : 한국교회가 왜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는가?
    개교회주의 관행 극복하고 성경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다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강물같이 흐르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한다. 즉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교회가 그 사회로부터 불신을 당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작금에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불신 당한다는 말을 듣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한국기독교가 복음에 대한 소명감도 없고, 열정도 없는 목회자들로 인해 수준 미달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교회당은 마을마다 골목마다 경쟁하듯이 늘어나 지금 한국교회에는 안수받은 목사가 16만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수준 미달의 목회자가 갑자기 늘어났다. 여기에는 수백 개로 갈라진 장로교단이 한몫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교단 간판 아래 늘어선 교단 신학교에서 배츨되는 목회자들의 문제도 심각하다. 이들 중에는 제대로 된 커리큘럼도 없는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개척교회 간판을 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갈갈이 찢어져 있는 현재의 한국기독교로서는 이를 통제할 기능이 어디에도 없다.둘째, 일부 목회자들의 윤리 도덕성의 상실이 전체 교회를 불신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도덕성이 사회로부터 의심받고 있다. 거기에다가 여타 세속적 종교들과 차이 없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기복신앙을 팔고, 세속적 물량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교회에서도 우대하며 중용한다. 심지어 돈을 좀 많이 가졌다고, 또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다고 하여 교회에 얼굴을 내밀자 말자 집사로, 장로로 세운다. 신앙논리에 따라야 할 교회의 직분이 돈과 팔려 좌지우지 되고 있는 것이다.셋째,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심이 지나쳐 교회 안에서조차 교회지도자들이 불신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대도시의 일부 목회자들은 그 신분을 망각하고 터무니 없는 호화생활을 한다. 그러다보니 거기에 못미치는 다른 목회자들에게 상대적 빈곤감을 안긴다. 심지어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어떤 인사들은 은퇴위로금이라는 이름으로 ‘퇴직금’을 수십억원씩 챙겨서 교회를 떠나므로 교인들을 크게 실망시킨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고스란히 세상 사람들에게도 비친다.넷째, 소위 ‘교회세습’으로 교회의 본 모습이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교회세습은 선대(先代)가 목회하던 교회를 그 자녀가 이었다고 하여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수천명 수만명씩 모이는 대형교회 중심으로 교회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체 한국교회에서 볼 때는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얼마되지 않지만 세습되는 그 교회들이 지역사회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한묶음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들 세습교회들은 “교인들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한국교회가 불신당하는 원인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 교회분열의 원인 제공이런 이유들로 인해 교회가 지닌 고유한 도덕성이 상실되어 그 권위가 불신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도 목회자의 권위나 교회의 치리를 불신하여 분쟁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도 교회의 권위를 우습게 본다. 거기에다 빈기독교 집단들이 끊임없이 교회의 이런 모습을 확대 재생산 하여 세상에 까발리며 공격한다. 여기에 일부 상업주의 언론과 ‘교회개혁’을 앞세운 교회 내의 엔티들이 마치 기독교를 부패한 집단인양 매도한다.결론적으로 한국기독교는 이같은 세속적 도전을 언제까지 방치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도전에 응전하여 교회의 본디 모습을 사회 앞에 내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첫째, 다시 강조하거니와 가장 급선무가 교회의 강단에서 기복주의적 신앙을 추방하는 일이다. 기복주의자들은 성경의 ‘축복신앙’을 왜곡하여 기복과 기독교 신앙을 혼돈케 만든다. 그리하여 목회자의 제사장적 권위를 강요하고, 교인들을 우민화 하여 신앙과 삶을 유리시킨다. 기독교 신앙은 소시민이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고,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어 그의 신앙과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도록 하는데 있다. 따라서 그의 신앙고백과 그의 삶은 하나여야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둘째, 교회에서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크고 화려한 교회당을 짓고 이름난 감투를 쓰는 것만이 목회 성공이 아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으로 복음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관을 교인들에게 바르게 주입시키는 목회자는 모두 성공자이다. 따라서 교계에서 돈있다고 우쭐거리는 목사들은 오히려 멸시하고 멀리해야 한다.셋째, 기독교의 개교회주의의 관행을 극복해야 한다. 흔히 가톨릭교회는 교황 중심이어서 하나로 결속되어 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개교회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는 교회의 고유한 원리를 허구화 시킨다. 마치 자본주의 논리마냥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먹어도 되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먹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교회를 이기주의 집단으로 전락시킨다. 교회는 ‘하나’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70%가 장로교회이다. 장로교회는 개교회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기독교 언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을까?성경은 초대 예루살렙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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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3
  • 새해기획 / 한국교회의 도전과 응전
    만사형통 하는 기복주의와 세속적 성공주의는 교회의 적이다 위기가 기회다작금의 한국교회를 향해 다들 ‘위기’라고 한다. 첫째는 교세가 줄어든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음세대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목회자들의 정신이 세속주의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에클레시아이다. 이는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라는 뜻이다. 성령의 인도로 이 공동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그래서 형제요 자매라 부르는 것이다. 초대 사도들의 교회는 생물학적 혈연관계를 넘어 모인 이들이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이” 마치 한 집안에 사는 혈연공동체처럼 유무상통했다. 그래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행 4:32-34). 그리고 이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이다.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역사와 민족과 문화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그 모습이 바뀌긴 했지만, 그 교회의 원리는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원리가 변질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이다.교회는 유기체임으로 원형이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다. 왜냐면 사회의 형태가 문화라는 이름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회 속에 있는 교회의 형태는 변화해도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교회의 정신, 즉 교회의 본디 모습은 변하지 않고 수천년의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과연 성경적 초대교회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국교회는 성경적 교회론에서 볼 때 모두가 ‘이단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면 한국 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주류를 이룬다. 개혁교회는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신학을 고쳐 성경으로 돌아간 교회이다. 개혁교회는 그 시대에 ‘개혁이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개혁하는 교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 개혁교회의 정신을 떠나 마치 중세의 로마교회처럼 교권과 재산과 명예욕에 찌들어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위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우리사회에서 숫적으로는 주류종교이지만, 그 내용적으로는 아직 메조리티(Majority)가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권을 탐하고, 재산을 늘리며, 명예욕에 심취할 때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정부는 문화정책에서 기독교를 아직도 ‘외래종교’로 분류하고 있고, 타종교는 기독교를 견제할려고 온갖 음해를 일삼으며, 사회는 서구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기독교를 전통문화의 파괴범으로 공격하고 있는 마당에 겨우 쓸만한 에배당 하나 지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고 목회자들이 엉뚱한 세속적 욕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이같은 세속주의적 도전에 새해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응전해야 할 것인가?첫째, 심각한 기복주의로 변질된 강단을 회복해야 한다.이미 한국교회의 강단은 무속적 기복주의에 점령당한 상태이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부활한 에수님을 ‘만났다’는 증언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증거하는데 있었다. 그것이 설교의 전부였다. 제대로 된 교회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런 교회는 지금도 1년 내내 교회의 의식을 부활절에 맞추어 진행한다. 설교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말씀과 기독교의 역사적 공동체가 체험해온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개인의 신앙체체험을 과도히 떠벌리는 것은 옳은 설교가 아니다. 더우기 개인의 가정사가 만사형통하고, 무병장수하며,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입신출세하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무리에게 더하시는 은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더하시는 은총에만 현혹되어 ‘말씀, 말씀’ 하면서도 진정한 말씀은 외면하고 설교에서 자신의 은사체험이나 신비체험을 앞세운다.둘째, 물량적 성공주의는 세속주의로서 교회의 적이다.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생각이다. 이는 서구의 청교도적 자본주의 훈련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자본주의는 칼빈주의자들의 근면성실과 성경의 청지기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투기나 한탕주의에서는 결코 자본주의의 정신을 배울 수 없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有錢可使鬼)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적일 뿐 아니라, 교회의 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도 돈이 있으면 예배당을 멋지게 짓고, 교육관도 크게 늘리며, 폼나게 교인들을 몰고 다니면서 하나님도 마음대로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는 말씀은 오늘에도 진리이다. 셋째, 개교회주의는 비성경적 교회론이다.한국 기독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할 것없이 개교회주의가 심각하다. 개교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라는 지체의식이 없어진다. 개교회주의는 교회와 교회간에, 목회자와 목회자간에 상대적 빈곤감을 부추기게 하고 동료의식을 약화시킨다. 마치 타락한 천민자본주의 시장처럼 교인을 많이 모운 교회는 많이 먹고, 자기네 교인이 한 사람이라도 이웃 교회로 옮겨가면 그 교회를 가차 없이 ‘이단’으로 몰아붙인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 형제를 정죄하는 무서운 죄악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런 일을 예사로 저지른다. 이런 것은 한국교회를 사도성의 계승권을 가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기보다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의 친목단체쯤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강춘오 목사>
    • 해설/기획
    • 기획
    2018-01-22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7- 목사와 신도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교권적 권위주의
    한국 기독교는 지금 물밀듯이 밀려오는 세속주의적 도전으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역사 현실 앞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특히 목사의 교권적 권위주의가 신도들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극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기복주의적 권위주의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500년전 미신화된 로마교회에서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회복한 교회개혁은 만인제사설에 바탕하고 있다. 부름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목사와 신도간의 차별이 없다. 성경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라고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직책상의 차별이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보여주는 기복주의적 권위주의는 마치 목사가 신도들과는 다른 존재들인양 행세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인양 '축복권' 운운하며 권위주의를 드러낸다. 이는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서는 우민화(寓民化)하고, 목사에게는 절대권위를 강요하여 영적 무장으로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유리시킨다.목사에게 교권적 권위주의가 존재해선 안된다목사에겐 오로지 지도자로서 신도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영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만이 인정되어야 한다. 단지 목사라는 직책만을 앞세워 신도들에게 군림하려는 것은 교회에 분쟁만 야기하게 된다. 지금 전국에서 분쟁하는 교회는 대부분 목사의 어줍잖은 교권적 권위주의 때문에 생긴 것들이다. 더우기 교권적 권위주의는 개교회의 목회현장을 넘어 노회나 지방회 또는 총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패거리'를 만들어 동료를 억압하고 교단에 분쟁을 야기한다.특히 개교회선 목사와 장로간에 누가 교회의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를 놓고 다투고, 교인들에겐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절대순종을 강요한다. 그리스도인이 절대순종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세속의 온갖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맛보려고 교회를 찾아온 지성인들은 그런 꼴 보기 싫어 교회를 떠나 노미날리티가 된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사회를 향한 봉사나 섬김이라는 화두는 찾아볼 수 없다.오늘날 한국교회는 목사와 장로간에 분쟁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목사도, 장로도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것이 그 사명이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 다만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이다. 목사와 장로간의 불신에서 비롯된 자존심 싸움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누가 손해고 누가 이익이고를 따질 필요가 없다.목사의 교권적 권위주의는 교회에 세속화와 인본주의를 부추긴다한국교회는 이미 지성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다른 종교와 차이 없이 기복신앙을 팔고 있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우대한다. 심지어 그 사람의 신심이나 도덕성과는 상관 없이 돈이 좀 있다고,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여 교회에 얼굴을 내밀자 말자 집사도 세우고 장로도 세워 중직을 맡긴다. 교회에 수십년 충성하고 봉사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단지 가진 것이 별것 없고, 사회적으로 내세울 만한 신분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한다. 신앙논리에 따라야 할 교회의 중직이 돈에 팔려 좌자우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그 교회 역사에 고스란히 축적되고 한국교회 전체에 파급된다.이런 이유들로 인해 교회가 지닌 고유한 도덕성이 상실되어 교회의 권위가 떨어진다. 교인도, 사회도 교회의 권위를 우습게 본다. 거기에다가 세속 상업언론들조차 한국교회를 얕잡아보고 언론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내세워 기독교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거기에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기독교 주변의 특정매체들이 '교회개혁'을 앞세워 한국교회를 부패한 집단인양 매도하는데 한 몫을 더하고 있다. 과연 어떤 목사가 성공한 목회자이고 어떤 목사가 그렇지 못한 목회자인가? 물량적으로 크고 화려한 목회만이 성공은 아니다. 복음을 잘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가치관에 서 있는 목사는 모두 성공한 목회자이다. 성공한 목회와 교권적 권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해설/기획
    • 기획
    2017-09-22
  • ‘95개조 반박문’에 녹아있는 루터의 분노
    1500년 넘게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가톨릭의 심장에 개혁의 깃발이 꽂은 마르틴 루터. 그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를 넘어 사회, 경제, 문화, 인권, 교육 전반에 걸쳐 이 세상을 뒤집었다. 종교가 곧 법이자, 삶의 전부였던 시대. 그런 종교를 무기로 삼아 자신의 탐욕을 채우던 이들에게 던져진 루터의 반박문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시대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종교의 중심에 들어 온 평범한 민중이었다. 사제들만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류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무엇보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됐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교회 역시 학술행사와 기념식, 기념메달 발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중세 가톨릭의 타락과 루터의 신학을 재조명하며, 한국교회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틴 루터의 신학과 종교개혁을 접하며, 한 가지 사실을 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로 민중을 사랑하고 아꼈던,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인간 루터이다. 마르틴 루터의 분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한 장의 대자보가 붙는다. 바로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발해 쓴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자, 우리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건으로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을 미끼로 돈을 받고 판매한 문서다. 세상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심지어 죽은 자신의 조상들마저도 돈을 내고 면죄부만 산다면, 그 모든 죄는 사해지며,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완전한 방어권이다. 그리고 이 면죄부는 발매와 동시에 유럽 전역을 휩쓸 듯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다. 면죄부에 따른 구원의 진위에 대한 의심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신의 사제들이 행하는 일을 의심한다는 것은 신을 의심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당시 교황청으로 판권을 얻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독일 전역에 면죄부 판매인을 보내, 돈을 거둬들이는데 열을 올린다. 그 판매인은 바로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인 요한 테첼, 그는 가는 곳마다 민중들을 향해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면죄부만 있으면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다” “헌금함에 넣은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조상들이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말하는 등 엄청난 상술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하지만 단 한 곳, 마르틴 루터가 신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던 비텐베르크만은 들어오지 못했다. 엘베 강이 가로지르는 비텐베르크는 당시 면죄부 판매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 날 요한 테첼은 비텐베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근 마을에 자리를 펴고 면죄부를 판매하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비텐베르크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날 밤 비텐베르크 민중들은 면죄부를 사고자 감시를 피해 몰래 얼어붙은 엘베 강을 건넌다. 하지만 제대로 얼지 않았던 얼음판은 곳곳이 깨져 나갔고, 수백명의 민중들이 얼어붙은 강에 갇혀 죽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루터는 엄청난 슬픔과 함께 극한 분노를 토해낸다. 시민들을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그 길로 성 교회로 가 면죄부 판매를 맹비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인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95개조 반박문’은 단 2주만에 각종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루터, 만인을 말하다 오늘날 종교개혁을 있게 한 ‘95개조 반박문’의 실제적 발단은 면죄부에 눈 먼 민중의 떼죽음을 목도한 루터의 분노였다. 수많은 신학적 이유와 중세 가톨릭의 타락이 있었지만, 루터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 만든 결정적 매개는 바로 민중들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당시 종교는 삶의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 사제들은 이를 민중들에게 직접 허락하지 않았다. 신의 대리를 맡은 자신들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이들이 이러한 종교 관습을 일반화 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한정된 교육이었다. 당시 최고의 교육이었던 ‘신학’은 위에서 언급했듯 오직 사제들에게만 허락됐으며, 일반인은 결코 접할 수가 없었다. 성경은 감히 읽는 것조차 허락되지도 않았지만, 배우기 어려운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는 자연스레 민중의 우민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우매한 민중들은 다루기 상당히 편했다. 신의 이름만 앞세운다면, 그 어떤 일도 용납 됐으며, 심지어 죽음조차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면죄부 판매는 바로 민중의 우민화를 이용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구원을 빌미로 한 저급한 협박이었지만, 우매한 민중들이 이를 의심할 리 만무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성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순수한 민중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탐욕에 대한 분노 가득한 일갈이었다. 그 후 루터는 성직과 세속직에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영적 직분을 갖고 있다는 만인제사장설을 외친다. 그리고 이는 모두를 위한, 만인을 위한 교육으로 이어진다. 한국교회 제2의 종교개혁 핵심은 ‘이웃’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루터를 포함해 얀 후스, 존 위클리프 등 종교개혁의 선진들이 목숨까지 내걸고 성경을 번역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위기에 빠진 바탕에는 스스로의 권위를 너무도 높여버린 까닭이 크다. 모두에 평등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겸손히 사회와 국민을 섬겨야 할 교회가 그들과 맞서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의 각 직분은 새로운 형태의 계급이 되어, 교회 조직을 철저히 상하 관계로 계급화 하고 있다. 교회는 국민들과 맞서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대변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제2의 종교개혁을 말하며, 교회 회복을 부르짖지만, 무엇보다 국민을 위한, 소외된 이웃을 위한 교회로 먼저 거듭남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수많은 주제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교회는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500년 전 루터가 민중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듯 오늘날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과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또한 교회 내 계급을 타파하고, 성도들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통해 성도들 개개인의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 더 이상 목회자 말에 무조건 ‘아멘’만을 외치는 성도가 좋은 성도라고 가르칠 게 아니라, 지식과 경험에 바탕한 현명한 판단으로 교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있는 성도를 길러내야 한다. ‘95개조 반박문’을 있게 한 루터의 분노는 그 내용만큼이나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해설/기획
    • 기획
    2017-09-21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6- 기독교의 보편성을 위협하는 개교회주의
    개교회주의는 교회론의 일탈이다기독교에는 개교회주의가 있을 수 없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하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찬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여기에는 개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기독교가 있을 뿐이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개교회주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보는 시각과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로 교파가 생길 수는 있다. 장로교 헌법정치 원리의 '교회의 자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집단의 신학적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교단이 갈라질 수도 있지만 그 믿음의 원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 또는 개교회주의는 교회론의 정통성을 일탈하는 것이 된다.모든 교회는 그 교구 안에 속해 있었다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생긴 이래 모든 교회는 사도들의 지도 아래 하나로 있었다. 교회가 늘어남에 따라 처음에 교구가 나뉘었다. 전 로마 안에는 5대 교구가 있었다. 예루살렘 교구, 안디옥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로마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그것이다. 또 신학이 나뉘어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성론(兩性論)과 단성론(單性論)으로 나뉘었다. 그 다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로 나뉘었다. 그럴지라도 모든 교회는 그 지역의 나뉘어진 교구 안에 속했다.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교구 안에, 그리스교회는 정교회 교구 안에, 동방교회는 동방 교회의 교구 안에, 단성론파는 단성론파 교구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개교회’나 ‘독립교회’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도 ‘개인주의’는 용납되지 않았다.중세 종교개혁 시대에도 각기 신학을 달리하는 교파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그 때도 신학과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교회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루터주의는 루터교 안에, 칼빈주의는 개혁파 안에, 환원주의는 침례파 조직 안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조직을 떠난 독자적인 개교회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장로교의 경우에는 ‘노회’라는 지역 단위의 조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개교회를 돌보는 목사는 노회가 양육하고, 그 목사가 돌보는 교회는 노회의 지교회가 된다. 따라서 노회에 속하지 않은 장로교회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장로교회의 간판 아래 장로교 정치체제를 가진 교회도, 감리교 간판을 단 교회도, 침례교회도, 오순절 교회도 ‘독립교회’라는 개교회주의가 판을 친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교회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역사적 교회론에서 볼 때 ‘이단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개교회주의는 세속화의 한 단면이같은 교회론의 개교회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사도성의 계승권을 가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기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친목단체쯤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개교회주의는 교회간 지체의식이 사라지고, 목회자 간에 동료의식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수준미달의 종교로 변질 시킨다.작금에 회자되고 있는 목회자들의 신앙윤리와 도덕성 상실은 개교회주의가 낳은 세속화의 한 단면이다. 개교회주의는 어디로부터도 감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교회가 지닌 고유한 도덕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다.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지금 세속주의적 도전으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역사 현실 속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 중 하나가 개교회주의의 관행을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회가 67%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는 장로교회의 조직원리마저도 허구화(虛構化) 시킨다. <강>
    • 해설/기획
    • 기획
    2017-08-25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5 민족복음화라는 이름의 상업주의
    이단감별사들의 ‘기적종료론’ 성령의 능력목회 기(氣) 꺽어지금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란 이름의 상업주의로 내몰리고 있다한국교회는 1980년대 들어 민족복음화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민족복음화’를 내건 대형집회도 여럿 치뤘다. 그 결과 교회의 숫적 성장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를 상대로 하는 온갖 세속적 장시치들이 기독교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00선교회’니, ‘××선교회’니, ‘△△선교회’니 하는 간판들이 저들 장사꾼들의 이름으로 수백 수천개가 내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 같이 선교와는 관계 없는 장사치들의 간판일 뿐이다.그래도 그런 간판은 그런대로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문제는 장사치들이 아예 기도원이나 교회의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한다는 점이다. 이름하여 민족복음화라는 상업주의가 본격화 된 것이다. 개척교회를 사고 파는 것은 약과이고, 교회 자체를 상업적으로 운영하는 집단들도 생겨났다. ‘민족복음화’가 기복적 상품화 된 것이다. 이는 70-80년대 급성장 과정에서 교회 안으로 유입된 유아기적 형태인 기복주의, 신비주의, 은사주의, 열광주의, 맹신주의가 낳은 신앙의 상품화에서 온 것이다. 이런 상업주의는 한국 기독교를 많이 변질시키고 있다. 교회가 세속적 이익집단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대교회는 헌금 거두어 선교와 봉사와 교육에 투자하기 보다, 교육관이니, 수양관이니 하는 부동산 투기와 돈 될만한 세속적 사업에 투자하고, 그 돈으로 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네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웃 교회 교인들을 유혹해 간다. 이는 기독교인만을 공략하는 여호와의증인이나, 신천지 이단과 크게 차이가 없다. 이런 교회는 그 간판이 무엇이라 했던 상관없이 세상에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은 아니다. 이는 결국 교회라는 간판아래 모이는 ‘상업적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우리는 언제까지 장사꾼들 호객하듯이 교인 서로 뺏기 경쟁을 하며 목회성공의 허세를 부릴 것인가. 부자 교회로 불리는 대형교회들은 교인도 예산도 넘쳐서 오히려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가난한 나사로 교회로 불리는 소규모 교회들은 몇 안되는 교인들을 그나마 조금 키워서 교인노릇 할만 하면 대형교회로 속속 빠져 나가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할지 모른다. 그 목회자의 능력이 그것 밖에 안되는 때문이라고. 아니다. 이건 절대로 정상적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기독교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두가 ‘하나’이다.21세기 한국교회가 민족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500년, 1000년 구원의 방주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기복주의, 신비주의, 은사주의, 개교회 이기주의 등 상업주의를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 건강한 신앙을 지켜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소명자로서 한국교회 지도자인 목회자들의 몫이다. 성령의 능력을 상품화 한다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70-80년대의 폭발적 부흥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70~80년대의 폭발적 부흥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부흥이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이유로 한국교회 목회현장에서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이 활동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바꾸는 상품화 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로 인해 목회현장이 성령의 능력을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다.첫째는, 성령운동은 민족복음화란 이름의 상업주의로 변하여 성령의 능력은 곧 돈으로 바뀌어 교회를 부요케 했다. 이때부터 교회는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하나님 다음에 돈이 중요하다’며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땅을 사고, 예배당을 크게 늘리고, 선교지를 확대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돈이 넘쳐 망한 교회는 많아도, 돈이 없어 망한 교회는 없다. 돈이 판을 치니 성령이 활동할 공간이 없게 된 것이다.둘째는, 70~80년대 불같이 일어나던 성령의 능력목회는 모두 이단으로 몰렸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신앙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얼치기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들 이단감별사들은 모두 오늘날 성령의 기적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즉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님의 기적은 없다는 ‘기적종료론’을 믿는 이성주의자들이다. 총회는 이들의 직업적 농간에 놀아나 무고한 목회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기를 꺾었다. 그로인해 약삭빠른 젊은 신학생들은 ‘우리 총회가 그런 신앙운동은 이단으로 본다’며 창의적이고 다이나믹한 성령목회를 외면했다.그리하여 작금 한국교회 젊은 목회자들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재능에 의지해 목회를 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매말라 분쟁과 갈등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노회와 총회는 교권주의자들의 패거리 정치 집단화 하고 있다. 여차하면 교인들이 담임목사를 고소하고, 노회나 총회에서 동료 간의 사소한 분쟁도 사법당국으로 끌고 간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니 한국교회에서 성령이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선교비’도 돈이 되는 일에만 투자한다교인들의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펴는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받치는 것이다. 그것이 주일헌금이건, 감사헌금이건, 선교헌금이건, 건축헌금이건 모두가 같은 것이다. 따라서 헌금은 오로지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를 위해 사용되어야지, 세속적 이익을 위한 상업적 목적에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부자가 더 부자되려는 이익에 관심 갖는다. 이것은 어떤 물건을 팔지 않더라도 결국 상업주의이다. 성경은 “네 식물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고 말한다. 복음을 위한 선교비는 이와 다르지 않다.교회가 복음을 위한 선교비는 당장의 이익을 따지지 말고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인이 많다보니 예사로 여긴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한 영혼이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만큼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영혼을 얻기 위해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이다. 선교가 상업주의화 하면 기독교인의 가치관과 교회의 본질이 훼손된다. 더 이상 교회운영이 자본주의적 논리에 매몰되어 상업주의화 해서는 안된다. <강춘오 목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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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9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④ 돈이 하나님 다음 중요하다는 ‘물신주의’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타락”“하나님 다음 돈이 중요하다”(?)“유전가사귀(有錢可事鬼)”라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배금주의 또는 물신주의(物神主義, Mammonism)를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어떤 목사는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 다음에 돈이 중요하다’고 설교한다. 이 또한 물신주의의 대표적 표현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신주의가 한국교회를 점령한 것은 80년대 이후이다. 교회가 급성정 하는 과정에서 돈만 있으면 소위 ‘하나님의 일을 무엇이든 폼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저급한 성공주의 가치관이 목회자들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기복주의 설교와 맞아떨어져 강단에 또아리를 틀었다. 그리하여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송구영신예배에서는 전교인들의 특별헌금 봉투를 강대상 위에 올려놓고 목사와 장로들이 둘러서서, 목사가 “강단에는 축복권이 있은즉 오늘 안수받은 장로님들과 주의 종이 헌금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면, 교인들은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심은 대로 거두고’ ‘목사의 축복권에 따라 새해의 명암이 갈라진다’는 점만 강조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의 은혜나, 그간 인도하신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 또는 지난 한 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대해 어떤 봉사적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회개나 반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구약성경에는 제시장의 축복도 있고, 신약성경에는 지도자들의 축복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축복권이지, 제사장이나 목회자만의 독점적 축복권이 아니다. 더우기 예수님은 ‘강단의 축복권’을 어디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강단의 축복권을 말하는 것은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도 신앙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극복하고자 했던 제사장 종교의 폐단이 부활하는 것이다. 굳이 강단의 축복권을 말한다면, 그것은 강단에서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다.기독교의 가치관은 세상 것과 다르다한때 인류의 유토피아였던 유물론 공산주의는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를 모두 부정하고, 현상세계에서 쟁취할 수 있는 물질을 숭상하는 물질주의의 대표적 사상이다. 그와함께 지금도 세계를 움직이는 유신론 자본주의 역시 물질적 생산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상이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둘 다 물질의 생산을 최상에 두는 물신주의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오로지 인간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지상의 목표요, 최고의 가치이다. 기독교는 이들의 목표나 가치와 전혀 별개의 가치관을 가진다. 성경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 10:31)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의 최고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는 정의는 기독교의 가치관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는 물질의 생산도, 극대화 한 경제적 이윤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하나님 다음에 돈이 중요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하나님 뿐이지, 하나님 다음에 둘 수 있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교회는 자본주의 아닌 신본주의이다근대 기독교는 유물론 공산주의에 맞서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를 친구로 여기고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비판없이 수용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도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앉아 돈 있는 사람이 인정받고, 돈이 있어야 교인노릇도 할 수 있다는 자조(自嘲)도 만들어 내고 있다. 부자가 한사람 교회에 들어오면 목회자나 교인들이 그에게 아부하듯이 대하는 태도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요, 교인 간의 계층을 만들어 불신을 조장케 하는 비기독교적 태도이다. 교회는 믿음의 사회요, 오로지 신앙에 의해 통일된 평등사회이다. 모든 표준은 믿음에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16). 그러므로 교회의 최상의 덕목은 믿음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맡겨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교회에서 직분이나 대우가 돈이나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좌우되고, 또 중직이 맡겨진다면 이는 이미 교회의 근본을 이탈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의 분쟁이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개교회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단이나 연합단체에서도 돈을 가진 사람이 발언권이 서고, 대표자리를 차지하며, 인정을 받는다. 그런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진리의 터’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 물신주의에 터 잡고 있는 것이다. 돈이면 다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은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타락된 세상이다. 거기에는 도덕성과 건전한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 돈을 벌어 어디에 쓰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이 돈의 노예가 되는 물신주의에 빠지지 않고 돈을 부리는 청지기 정신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돈이라고 다같은 돈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들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18) 라고 했다.<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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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02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3 -구원의 메시지를 세속적 물화物化하는 ‘설교’
    설교자의 사회적 종교적 경험을 늘어놓는 것은 설교 아니다 세 종류의 말씀기독교는 세 가지 종류의 ‘말씀’이 있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으로써 ‘성경’이고, 둘째는 보이는 말씀으로써 ‘성례전’이 있으며, 셋째는 들리는 말씀으로써 ‘설교’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설교를 종교강화나 성경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말씀은 곧 계시인 것이다. 기록된 말씀은 율법과 예언으로서 계시이고, 보이는 말씀은 성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특별계시이며, 들리는 말씀은 오늘 우리 삶속에서 선포되는 계시이다. 이 셋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기독교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메시지인 설교를 인간이 세속적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 할 필요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성경구절 몇 절 읽어놓고 기복(祈福)을 부추기는 설교는 구원의 메시지를 물화(物化)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물신숭배(物神崇拜)이다. 흔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가장 영적인 것이어야 할 종교가 가장 세속적인 것과 만나는 것이 기복이다. 기복은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충죽시키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식 낳기 위해 빌고, 출세하기 위해 빌고, 병 낫기 위해 빌고, 돈 잘 벌기 위해 빌고... 소시민들은 세상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에게 빈다. 따라서 인간 삶의 세속적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기복주의(祈福主義)이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도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비는 것이 곧 기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도 기도임에는 틀림 없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복주의적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그 기도가 현세적이고 이기적이 된다는 점이다. 복음서가 말하는 기도는 이 세상살이의 세속적 삶에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요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구원(久遠)의 이상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만 봐도 알 수 있다. 산상보훈은 이렇게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이런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장).그런데 설교가 이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외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현세적 ‘축복’만 받으려는 이기적 욕심만 부추긴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는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구원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이다. 그런데 작금 한국교회의 설교는 사랑과 구원보다 ‘축복’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 목회자는 우리사회의 다른 기복주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교인들에게 축복을 팔고, 교인들은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복을 한다. 기복이 심화되면 이웃에 대한 경쟁심만 늘어날뿐 사랑과 구원은 멀어진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설교는 대체로 구약의 제사장적 축복에 맞추어져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유일하게 한 군데 기복적인 의미가 담긴 발언을 한 일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해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29, 30)고 한 말씀이다. 누가복음은 이를 ‘하나님 나라’로 강조하고 있다(눅 18:29). 예수님의 복음에는 결코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쏟아지는 ‘축복’같은 기복을 말한 예는 어디에도 없었다.교회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선교하고, 봉사한다 해도 말씀이 없으면 모두가 헛것이다. 이 말씀은 예배를 통해 선포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예배의 성공이다. 설교자가 말씀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경험을 늘어놓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보편적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성경이 보급된 교회이다. 교인들의 집집마다 몇 권씩의 성경이 쌓여 있다. 교인들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고자 갈급하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곳에는 어디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목회자의 설교는 천편일률적이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신흥집단들을 찾는다. 그런데 그들 신흥집단들의 설교나 성경강해는 대체로 그 집단의 섹트화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이단시비가 생긴다. 왜 한국교회는 예배를 반드시 한 시간에 끝내야 하는가.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 임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씀을 전하는 풍토도 조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영감있는 설교이다.설교에 모든 답이 있다우주도, 생명도 ‘말씀’으로 태어났다. 이 말씀이 구약에서는 ‘지혜’로 나타나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설교만이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하 박해 아래서도 목회자의 설교가 진지했다. 또 해방 후 60-70년대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성장을 이룰 때인 80년대 들어서면서 설교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사경회가 부흥회로 바뀌었다가 다시 심령부흥회로 바뀐 시기였는데, 이 때부터 소위 ‘딴따라’ 설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교자의 깊은 기도에서 우러나는 영성적 설교는 약화되고, 만담조의 온갖 세속적 성공담(?)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름으로 강단을 장식해 갔다. 그리하여 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설교는 기복주의화 되고, 세속주의화 되어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테크닉만 늘어간 것이다. 설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 그 예언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과 다시오심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내용을 담지 않은 기독교적 윤리나 도덕적 가르침은 종교강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개혁은 말씀으로 회복된 설교에서 찾아야 한다.<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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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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