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뻔한 것 아닙니까?

모처럼 새 신자가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중국 교포이며 이웃중국 교포를 섬기는 교회에서 교포 외에 한두 사람이 교회를 섬기던 중 매주 성가도 독점해서 부르고 교포 수  발도 했는데 소문을 듣고 우리 교회를 나왔다고 한다. 그 후  두 분을 전도를 해서 전도가 잘 되지를 않아 고심하며  기도하던 중에 교회 의 활력 이 솟는 듯하다  그렇게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던 중 몇 주일째 예배에 보이지 않는다. 들려오는 말이 “목사님의 말씀 뻔한 것 아닙니까?” 신앙에 정로에서 멀리가 있는 것 같더란다.
평생 이 교회를 떠나지 않겠어요! 자신 있게 말하던 분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을까?   배신감 같은 기분에  ‘뻔한 것 아닙니까?’ 라는 말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과연 나 자신을 관통하는 천래의 음 성으로 들려온다. 자신의 편의와, 세속의 성공, 출세, 희망과 소원에 십자가를 오용하고 있으며 자신의 그릇된 안목이 진리인양, 성도를 리더하고 바리새인적인 교만과 독선으로 주님의 피를 말리고 살을 에우는 자신의 모습을 한 성도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인 듯하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가치들, 사랑과 공의를 배반하고 하나의 우상을 위해 전 군상(君上)들이 결집되어 사회 정의를 부식 시켜 버리는 현대인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십자가상의 주님의 고난과 고통을 나의 욕심이나 나의 배고픔과 나의 갈증만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참 신앙이며 주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말 을 듣고 화가 목에까지 차오르던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게 된다.
현대인들은 존재의 의미, 또는 건전한 사고, 이성이나 판단을 상실해 버렸거나 그러한 사 실조차도 감지하지도 못한채 차츰 차츰 무감각속으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잘 되어가고 있다고 자부 하나 “네 곤고한 것과 눈먼 것과 헐벗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계3:17)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하면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까 해서 가능한 다독을 하고 지식 을 쌓아가려고 노력을 하지만 오히려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신중 하여 결단 을 내리지 못하고  더욱이 행동 하는 데는 더 느린 것은 아닌가? 생각 하니 식자(識者) 우환(憂患)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또한 이러한  병폐와 부조리한 사회, 이 마비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병폐와 부조리와 동참하면서 맹목적으로 세례 요한에게로 맥없이 몰려다니는 군중의 집합을 이루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치는 군중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우리는 흔히 가롯 유다를 비난하고 구약 성서의 아간이나, 발람선지자를 욕하고 비난하나 우리는 더 싸구려로 나의 이권 앞에 양심을 저당 잡혀 놓은 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의 신앙을 내팽개쳐 버린 채 그 순간을 무마 하려고 권속들과 합세한 자신들의 모습은 아닌지를 반성해 보게 된다.
그들보다도 더 싸구려로 팔고 사는 덤핑 예수 장사 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 우리 주위에서 매일 같이 귀창을 소란하게 하는 장사꾼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아닐까?  매일 같은소리로 “오늘만 싸게 팝니다.” 오늘도 예외 없이 들려온다.
나의 직장, 주위, 조그만 이권을 위한 도구가 예수님을 위한 채찍이란 것을 왜 느끼지 못 하는가?  
현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곧 또한 과거와 미래의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었음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결코 우리는 ‘나만이, 지금만이, 여기만이, 이대로가 좋사오니’라는 베드로의 오산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 
넒은 세계와 무한한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가 그 넓은 곳에 들어가는 현명함을 가지고 결코 무한하신 그 분을 인간의  제한된 우상 속으로 끌어 들이려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 아야 하겠다는 상념에 빠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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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이선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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