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삶은 순간(瞬間)들의 연속이다. 그 순간은 ‘삽시간’(瞬間)으로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고 그 연속은 극히 짧은 시간이어서 지금(至今)이란 시간을 알게 하고 그 시간은 없어짐에서 나타남으로 시간을 알게 한다. 삶도 마찬가지로 있음에서 나타남으로 이어가는 시간의 삶을 알게 한다. 이 시간의 삶이 생명을 알게 한다. 이 삶은 생명의 씨앗이 싹트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치를 알게 한다. 생명의 특징은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는 것은 이를 알게 한다. 생명은 살아 있기에 보는 것만이 아니고 생명이 죽음을 전제한 삶의 나타남으로 진리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진리도 낡은 진리가 새로운 진리가 되는 것을 알게 하고 생명이나 진리가 항상 신선하고 기운차야 한다. 그리하여 보는 것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명은 그 특징이다. 우리는 지나간 부활주일을 맞이 했다. 부활주일 전에는 사순절과 고난주일을 보내고 즉시 부활을 맞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어떠했나와 누구를 위한 죽으심이었나를 보았다. 그리고 부활로 나타나심의 생명을 알게 하고 이로써 구원의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지우금(至于今)으로 ‘이제야 이르기까지’ 지금(至今)의 뜻을 알게 한다. ‘지금’으로 고린도후서6:2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 하신 말씀에 유의한다.
사람은 하룻밤 잠을 자고 나면 눈을 떠서 보이는 주변과 매스컴을 통하여 들으면서 세상을 본다. 눈을 통해 보이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시시 각각 보이는 것을 세상에서 보지만 스쳐 지나버려 보이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보는 것도 있고 관심을 가지고 통찰하여 보는 것으로도 일상생활을 한다. 사람은 지극히 눈에 보이고 귀로 듣는 것으로 껍데기의 삶을 산다. 그 사물의 내면이나 숨겨진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삶의 시간을 따라서 가는 세월을 산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모아서 보고 듣는 특성이 있는데 모아낸 화상에서 생각하고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뇌는 눈’이라고 한다. 사람이 착시 현상 그림을 보고 있으면 처음에 우리가 보았던 장면이 아닌 다른 장면을 찾게 되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인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들 들면 처음에 처녀의 얼굴이 보였다가 순간 노파의 얼굴을 보게 된다 면 뇌는 처녀와 노파의 얼굴을 구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특징만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순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이렇게 살아간다. 책을 본다 던가 그림을 보는 데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대충 보아 그 스토리텔러로 보는 것만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리하여 현대를 사는 일반 대중은 서적이나 그림 같은 대중서적들을 즉각적이고 손쉬운 만족감으로 가볍게 알려고 하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 몰이에만 연연하는 우리의 겉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의도된 작품이 창의력으로 어떤 목적을 나타내는가 하는 마음의 창으로 보는 관점에는 거리가 있다. 이것은 습성적인 관습이나 고정관념에 의하여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신, 구약 성경에서 맨 먼저 창세기로부터 시작함을 안다. 세상을 창조하신 작가인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에 삶으로 가득한 생명들을 만드시고 창작의 의도를 살려 창조된 작품이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삶을 두고 보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의 창조물들을 벽에 걸려진 그림처럼 보이는 것만으로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알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세상의 생명인 작품은 살아 움직이고 숨쉬며 창조의 의도대로 창조질서를 유기적으로 관계하며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사무엘기상은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겉에 나타난 겉과 결과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과 생각에 숨겨진 동기를 보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기가 불순하지만 결과적으로 나타난 행위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 판단으로 버젓이 세상을 산다. 그리고 이 잣대로 세상을 판단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을 유심히 보시고 하시는 말씀은 한 과부가 동전 몇 푼을 헌금함에 넣으며 심히 부족해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은 한 과부의 몇 푼의 헌금은 액수는 많지 않아도 그 중심을 보시며 지극정성의 모습을 일깨워 준 교훈은 겉에 보인 결과도 아니고 액수의 량에도 있지 않고 그의 중심 어린 생활을 드리는 헌금의 숨은 동기를 무엇보다 더 귀하게 보신 것을 곁들여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