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는 목회자의 성공주의와 맞물려 ‘돈’ 많이 들어
기독교 역사에서 돈이 넘쳐 망한 교회는 많아도 돈이 모자라 망한 교회는 없다
한국교회가 돈 없이는 교인노릇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나온지 오래이다. 교회에서 교인으로서 제대로 인정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우선 교회에 공식적으로 내는 헌금의 종류만 해도 십일조로부터 주일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 장학헌금 등이 있고, 또 선교헌금이나 감사헌금의 종류도 다양하다. 여기에 또 수십종의 목적헌금이 있다. 수양관 구입헌금, 교회묘지구입헌금, 차량구입헌금, 비품구입헌금, 군선교헌금, 각종 전도회 헌신헌금 그리고 교인들의 친교조직에서도 모일 때마다 돈이 든다. 이젠 돈이 없으면 다른 사람 눈치가 보여 교회 다니기도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관절 교회 다니는데 왜 이렇게도 돈이 많이 들어야 하는가?
‘요나 교인’이 된 A집사의 사례
A집사는 대학생 때 친구의 전도로 처음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 슬하에 두명의 자녀를 두었다. 교회에서 집사로서 십일조와 주일헌금과 감사헌금 등 교인으로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월급의 약 25%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던 차 교회가 건축 계획을 세우고 전교인들로 하여금 건축헌금 약속을 받았다. A집사도 서너달 월급치 정도를 약속하고 헌금했다. 그런데도 교회건축이 시작되자 목사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며 매주 예배시간마다 건축헌금에 대한 광고를 해댔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집사들이 또다시 헌금 약속을 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 교회에 다니기가 부담스럽다고 판단하고 아무도 모르는 대형교회로 슬그머니 옮겼다. 거기에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헌금에 대한 부담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나간 교회에서 주일예배에 충실하고 봉사도 열심히 해온 A집사는 대형교회에서는 ‘요나 교인’이 되어 주일예배만 참석했다. 그러다가 보니 어떤 일로 주일예배를 빠져도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신앙이 식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A집사와 같이 교회의 과도한 헌금 요구에 걸려 교회를 떠돌다 신앙의 열심을 잃어버리고 결국 노미날리티(명목상의 기독교인)가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교세를 늘리고 교회당을 크게 짓는 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여기는 물량적 성공주의가 낳은 한국교회의 병폐 중 하나이다.
‘대목’으로 여겨지는 임직 헌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사도시대부터 교회의 직원으로 ‘장로’와 ‘집사’를 임직해 왔다. 여기에 ‘감독’ 또는 ‘목사’직이 추가되어 이 셋을 항존직(恒存職)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항상 있어야 할 직분이란 뜻이다. 기독교는 교인들이 모였다고 ‘하나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공동체에 교회의 직원으로서 조직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하나의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즉 감독 또는 목사, 장로, 집사가 임직되었을 때 하나의 교회가 이루어 찌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처럼 중요한 교회의 직원들을 임직하면서 이 직분이 교회가 마치 무슨 벼슬을 하사하는 것인양, 임직자에게 임직기념선물이라는 이름의 ‘임직 헌금’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교회의 임직식을 돈을 거두는 ‘대목’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는 교육관을 짓고 빚이 있다며 돈을 요구하고, 어떤 교회는 교회에 버스가 필요하다며 돈을 요구한다. 작은 교회는 몇 백만원에서 몇 천만원, 좀 규모가 큰 교회는 억대에 이르는 임직 헌금을 낸다.
이런 교회는 타인의 본이 될만한 믿음이 있고, 교회를 위한 봉사에 열심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장로직분도, 집사직분도 얻기 어렵다. 오로지 돈이 직분을 좌우하는 타락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명백한 성직 매매이다.
교회의 임직자는 일생을 교회를 위해 희생으로 봉사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장로나 집사를 세울 때는 그들이 앞으로 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과 헌신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임직헌금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그들에게 양복 한 벌이라도 해 주면서 고마움의 표시를 해야 옳은 일이다.
교회생활에서 헌금에 발목이 걸려서는 안된다
흔히 교인들의 신앙심의 척도를 헌금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물론 신앙심이 없이는 돈이 있다고 헌금하는 것은 아니다. 헌금은 대체로 교회를 사랑하고 신앙심이 있는 교인이 내어놓는다. 그러나 교회의 헌금에 발목이 걸려 신앙심과 열심을 잃게 만든다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의 실패이다. 교회는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헌금의 정신을 말할 때 언제나 가난한 한 과부의 두 렙돈을 말한다(막 12:41-44). 그럼에도 교회는 과부의 두 렙돈만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므로 돈을 적게 내는 가난한 과부는 교회에서 언제나 소외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현대교회가 목회자들의 성공주의와 맞물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돈이 이미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유전가사귀(有錢可使鬼)’가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전가사귀란 돈이면 귀신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물신숭배 사상에 사로집힌 인간들의 가치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으로 유지되는 교회마저 돈의 위력 앞에 맥을 추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야말로 우리사회는 ‘돈’이라는 물질의 우상숭배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돈이 넘쳐 망한 교회는 수도 없이 많아도, 돈이 모자라서 망한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 한국교회는 선교란 이름으로 돈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헌금이 발목을 잡는 것은 전도의 문을 막는 것
교회에서 헌금이 신앙생활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은 전도의 문을 막는 교회의 타락이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 11:28-30)고 하셨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러 온 교인들에게 헌금의 무거운 멍에를 메워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