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숭배 강화·평화와 정의 내세워 공권력 도전세력 선동
화려한 행사에도 불구 천주교의 한계 드러내… 개신교 신앙 차별화 교육 기회 삼아야
교황의 ‘성모승천대축일’과 ‘시복식’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 프린치스코가 지난 14일 한국에 와 15일에는 대전에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고, 16일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124위 시복식(諡福式)을 갖는 등 4박 5일 간 한국사회가 온통 가톨릭 사회가 된듯이 화려한 행사를 치뤘다.
교황이 이번에 복자(福者)로 시복(諡福)한 윤지충을 비롯한 124위 순교자들은 누구인가? 모두 로마 가톨릭(천주교)의 조상제사 반대로 죽은 사람들이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전래될 당시 조상제사는 사자숭배(死者崇拜)로 취급되어 금지되었다. 그때의 조선 천주교는 북경교구에 속해 있어 1790년 윤유일(尹有一)이란 천주교 신자가 북경에서 구베어 주교를 만나 위패(位牌)와 제사에 대한 교리 문답을 했다. 구베어는 교황 베네딕트 14세(1740-1758)의 교시를 들어 제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이단행위’라고 판정하고, 조선의 천주교인은 누구나 조상제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윤유일은 구베어의 이 가르침을 교리를 사수하는 진리로 믿고 조선으로 돌아와 천주교인들에게 전했다. 그 이듬해 전라도 진산의 양반집안 신자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 장례는 정성껏 치루었으나 구베어의 가르침을 따라 그 위패를 불태우고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
윤지충은 “사람이 죽어 천당에 간다는 것은 축하할 일(祝事)이지 슬퍼할 일(弔事)이 아니며, 위패란 공산의 한낱 나무 토막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윤지충의 이 주장은 성리학에 바탕한 조선사회의 가치관과 사회질서를 송두리째 흔드는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 들여져 전주성밖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그리고 그의 피는 손수건에 적셔져 멀리 북경에 있는 구베어 주교에게로 보내졌다.
1791년 신해년에 윤지충으로 시작된 천주교의 조상제사 문제는 결국 당시의 조선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3대 사옥(死獄)을 가져왔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3대 박해(迫害)라고 한다. 3대 박해는 1801년의 신유사옥, 1839년의 기해사옥, 1866년의 병인사옥이다.
조상제사 문제가 불러온 3대 사옥
신유사옥은 1800년 8월 18일, 유교(儒敎)의 가르침이 서양 오랑캐들이 퍼뜨리는 이단적 서학(西學)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천주교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오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정순황후의 수렴청정으로 노론의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벽파는 경쟁세력인 남인의 시파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많음을 알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를 박해한 것이다. 이로인해 선교사 주문모와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 정약종, 강완숙(여) 등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당했다.
기해사옥은 신유박해로 천주교의 교세가 위축되었으나 18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조선에 독립 교구가 탄생하자,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와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가 증가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1839년(헌종 5년)에 다시 박해를 가했다. 이로인해 3명의 서양인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당했다. 이후 헌종은 사학(邪學)을 배척한다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리고, 백성들이 스스로 이웃에 천주교인들이 없는지 살펴 고발토록 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해 감시했다.
병인사옥은 천주교가 외세를 끌어들이고, 제사를 거부하는 등 유학에 바탕한 봉건적 조선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여긴 대원군에 의해 1866년(고종 3년) 1월초 국내에 있던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수천명의 천주교인들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처형한 사건이다.
이 모두가 그 근원은 조상제사의 반대에 있다. 이 3대 사옥으로 약 8000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죽었다.
천주교의 조상제사 허용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8천여명의 한국 천주교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조상제사를 1936년에 이르러 갑자기 “조상제사는 시대와 풍습이 바뀜에 따라 우상숭배가 아니라 미풍양속”이라는 교황 피우스 12세의 교시 한 마다로 허용한다. 그것도 일제가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강요해온 신사참배 허용과 함께였다.
생명을 받쳐 지켜온 조상제사 반대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자 천주교인들은 자유의사로 장례와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이르러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를 거쳐 유교식 전통조상제사의 형식은 그대로 둔채 단지 ‘미사’라는 이름만 바꾸어 조상제사를 지내고 있다. 위패와 지방을 사용하되 신위(神位)라는 칭호는 쓰지 않으며 그 자리에 이름이나 세례명 혹은 생전의 벼슬만을 쓰도록 하고, 또 제주(祭主)가 위패 앞에 재배(再拜)하고 술울 세번 따르는 삼제(三祭)와 고인이 음식을 들 수 있게 밥그릇 뚜껑을 열고 숫가락을 꽂는 삽시(揷匙),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 등 유교적 민간 풍습을 그대로 습합하고 있다.
그러면 조상제사를 반대하다 죽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은 무었인가?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피흘려 죽기까지 박해 속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지키려다 죽은 자”이다.
그러면 이번에 복자로 시복된 순교자들은 무엇을 증언하다 죽었다는 말인가? 로마교회가 조상제사를 처음부터 허용했다면 죽지 않을 사람들이 로마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교황청은 한국 천주교인들에게 잘못을 빌고 난 후 조상제사를 허용해서야 옳다. 이제와서 ‘성자’니, ‘복자’니 하며, 시성식이나 시복식을 하는 것으로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나 하는 듯이 화려한 행사의 이면에 가려진 천주교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성모 몽소승천대축일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져 신도들의 기도를 중보한다는 이 교리는 195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천명된 교리이다. 그러니까 1950년 이전의 가톨릭 교인들은 몰랐던 마리아에 대한 교리가 생긴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요한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믿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에 대한 신격화의 강도를 치츰 강화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마리아에 대해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붙은 이후 마리아 숭배사상이 로마 가톨릭 안에 널리 퍼져가기 시작했다.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들이 ‘산타 마리아’(Santa Maria)에게 헌당되고, 마리아는 서서히 ‘하늘의 여신’으로 둔갑해 갔다. 이를 교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는 동정녀 마리아가 “임태한 첫 순간에... 원죄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면죄된 채로 보전되었다”는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했다.
이 무염시태 교리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한 내용이 바로 성모 ‘몽소승천’(蒙召昇天) 교리이다. 이 교리의 확정으로 마리아는 명실공히 ‘하늘황후’가 되어 그리스도와 나란히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교리이다. 이번 교황의 방한은 마리아 숭배 강화에 그 목적이 있다.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