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개혁 위한 21세기 ‘한국의 루터’가 필요
우리가 지켜야할 종교개혁의 유산
루터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적인 한계를 인식해야
한국교회가 어려운 것은 종교개혁의 원리를 지키지 못한 결과물
박 명 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지난 8월 교황의 방한으로 한국사회는 카톨릭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는 위축되었다. 물론 우리는 천주교에서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기독교가 갖고 있는 장점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기독교는 성경만을 주장하지만 천주교는 성경과 전통을 함께 강조한다. 기독교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세운 종교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했던 원래 기독교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는 다르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경이 널리 읽혀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방문화가 기독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 숭배이다. 성경 어느 곳에도 마리아를 신격화한 것은 없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성모무염시태설을 주장하고, 그 다음에는 성모가 승천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를 점점 신격화하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만 천주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 인류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비밀이다.
세 번째, 기독교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실 초대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 당시에는 오늘 날처럼 전적으로 교회일만 하는 성직자는 없었다. 사도들은 순회하는 지도자였고, 장로와 집사는 해당 공동체가 선출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다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로마에 있는 감독(혹은 주교)이 기독교의 대표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의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교회는 자신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더욱 발전해서 교황무오설로 발전되었다.
종교개혁과 오늘의 개혁 그 차이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오늘날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루터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16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루터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오늘의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세계 내에서 일어난 기독교 내부의 문제였다. 고대 로마가 붕괴한 다음에 유럽사회는 기독교적인 사회가 되었다. 기독교가 사회를 통합하는 힘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사회의 문제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힘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21세기의 한국에 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종교문제는 주변문제에 불과하다. 지금 교회 개혁의 문제는 국가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적인 문제이다. 루터시대처럼 국가의 힘을 빌어서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개혁은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되는 대중적인 운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계는 그가 봉건영주의 도움을 받아서 종교개혁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봉건영주들의 지원을 받은 루터는 교회에 대한 권한을 교황에게서 빼앗아서 바로 영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최고의 책임자는 바로 영주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개인의 자유에 속해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번역하여 좀 더 대중들에게 다가갔지만 아직 대중적인 종교로 나가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셋째,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계는 그가 강조한 칭의의 교리에 있다. 칼빈은 칭의와 함께 중생을 강조하였고, 18세기의 웨슬리는 성화를 강조하였으며, 20세기의 오순절운동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강조는 모두 루터의 칭의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공헌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넷째, 루터의 사회인식, 곧 두 왕국설에는 한계가 있다. 루터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영적으로는 교회를 세우시고, 육적으로는 국가를 세우셨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다. 과거 교회에 속해있던 문화, 교육, 복지와 같은 많은 분야들이 독립해 나갔고, 국가는 점점 더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과거 종교개혁시대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많은 학자들이 교회가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날 교회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단지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아 그들로 자신의 일을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 종교개혁시대에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의 두 정부였지만 지금은 교회는 오히려 영적인 영역에 집중하며,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다른 분야 스스로 감당하도록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1세기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지금 우리는 한가하게 과거 종교개혁을 논하고, 그 한계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만 있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 가운데 가장 빨리 성장했지만, 현재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것을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리하려고 한다.
첫째, 종교개혁의 핵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성서의 권위 위에 존재해 왔다. 하지만 고등비평의 등장으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수많은 종교문서의 하나로 전락되었다. 현재 개신교의 가장 큰 신학적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 천주교의 전철을 밟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더욱 어려운 것은 종교개혁의 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동시에 과거 천주교가 빠진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질욕, 권력욕, 성욕의 세가지 측면이 있다.
셋째,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 기독교가 직면하지 않았던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받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과거 종교개혁시대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도전이다. 이 도전은 위에서 언급했던 도전 보다 더 어렵고 근본적이다.
결론: 루터의 돌파
사실 중세 말 천주교의 타락에 관한 것은 널리 알려졌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글을 통해서 풍자적으로 비판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천주교가 강조하는 구원관 때문이다. 천주교는 카톨릭교회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천주교를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구원은 천주교와 사제가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두려움이 없어졌고, 천주교를 향해서 개혁을 외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도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성실한 성직자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깨달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개혁이 좋은 뉴스거리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개혁이란 세미나에서도, 기자회견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루터처럼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이런 개혁을 위해서 21세기 한국의 루터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