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운 판결을 명령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학대’라는 단어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
탈북여성들의 열악한 상황, 원망과 분노에 휩싸일 위험성 커
남해 박사(총신대)
1. 갈등
1) 갈등의 불씨
하갈이 사래와 갈등을 갖게 된 것은 사래가 여종인 하갈을 대리모로 하여 자식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갈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인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여종은 부유한 여인이 결혼할 때 지참하는 여주인의 소유물 혹은 재산 가치로 여겼다. 그래서 사래도 마치 물건을 넘기듯이 하갈을 취하여 남편에게 주었다(16:3) 이 장면을 보면 사래와 하갈은 결코 대등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래가 시종일관 주도권을 가진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반면에 하갈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성(sexuality)에 대하여도 아무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그저 주인공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갈이 인격적인 권리를 갖지 못하고 사래의 도구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트리블의 비난처럼 하갈은 물건처럼 다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물건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을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생명의 가치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 당시에 여종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물건처럼 다루는 것이 보편화되어있었다고 해도 사래가 하갈을 물건처럼 다루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2) 갈등의 본격화
하갈은 여주인에게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순종하였으나 임신하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변했다. 피해자의 입장에 있던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는 가해자의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렇다면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는 사건에서부터 사래가 여종을 학대하기까지의 단락에서 각 절마다 ‘~눈으로(~눈에)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여주인을 멸시한 하갈의 시각을 두번이나 지적하고 있다(16:4-6). 한글 성경(개정 개역판)은 이 단어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고 있다.
세 구절에서 반복되는 이 단어는 하갈과 사래 간에 벌어진 갈등 상황에서 성경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를 가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데 관심이 있다. 즉 이들의 시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갈이 여주인을 보는 시각도 잘못되었고, 사래가 여종을 보는 시각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해결방법
1) 시각의 전환 요구
하갈은 여주인의 학대를 견딜 수가 없어서 광야로 도망친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 광야는 결코 안전한 도피처가 아니었다. 하갈은 자신 뿐 아니라 잉태한 생명까지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사래가 한 생명(하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하갈도 뱃속의 생명을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수르 광야에 있는 샘물 곁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찾아오셨다(16:7). 마치 생수를 마시게 해 주실 것을 암시라도 하듯이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과 하갈이 같은 광야에서 만났지만 서로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은 정반대였다. 시각은 죽음을 향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시각은 반대로 생명을 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갈이 생명의 길로 돌아서려면 죽음을 향하고 있던 자신의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2) 하나님의 질문
하나님은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셨다(16:8a). 여종과 하갈의 이름을 겸하여 부르심으로 여종이라는 신분에 있지만 책임과 의무를 가진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참된 인격체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신분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행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갈을 다시 속박시키거나 비하시키려는 의도에서 ‘여종’이라고 부르셨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서 하갈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셨다. 하갈은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갈은 여주인의 학대를 피하여 도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상황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학대받은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끔찍해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갈은 자신을 학대한 여주인을 고발하고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종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함으로써 여주인 앞에서 도망하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3) 하나님의 명령
곧 이어 하나님은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셨다(16:9). 이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학대의 현장이며 자신을 학대한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은 매우 잔인하게 들린다. 더구나 신명기 23:15에는 학대를 당해서 도망한 종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명령은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가출한 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귀환 명령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라”는 의미 있는 표현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돌아갈 ‘곳’(장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여주인(사래)’을 지칭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시며 ‘학대하다’라는 단어의 어근을 사용하셨다. 학대를 당했던 끔찍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학대라는 단어를 과감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4) 하나님의 위로
갑자기 하나님은 하갈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언급하시며,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세 수 없게 하리라,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 그가 들나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16:10-12).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셨다. 하갈은 뱃속의 아이를 죽은 자로 여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셨다. 지금까지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아이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지 않았다. 아무런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 하갈은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광야로 뛰쳐들어와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을 날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갈이 임신한 아이에게 약속을 해주심으로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게 하시고 모성애를 이끌어내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갈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던 ‘학대’라는 단어를 연거푸 사용하셔서 ‘학대’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어 주셨다(16:9, 11). 과거에는 이 단어가 하갈을 절망케 하였으나 이제는 공동체의 위계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사명과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떠올리게 하고 희망을 주는 단어가 되었다.
4. 하갈의 깨달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시각을 깨달은 하갈은 이제 더 이상 죄성에 근거한 잘못된 시각에 붙잡혀 살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을 의식하며 살아갈 것이다. 광야로 자신을 찾아오셨듯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시각은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여주인인 사래가 자신을 학대하는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해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갈은 드디어 생명(이스마엘)을 낳았다(16:15). 하갈의 임신을 주선한 이는 사래였지만 출산하기까지 책임져 주지 못했다. 하갈이 무사히 자식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되었고 자신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하갈이 여종이라는 신분상의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주인이 여종을 괴롭힐 수 있는 부당한 권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지만, 여종이라는 약자의 신분에 있어도 얼마든지 여주인을 악하게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여주인이 되었던, 여종이 되었던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남을 괴롭히려는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탈북여성들이 처해있는 열악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칫하면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서 원망과 분노에 휩싸일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갈등의 상황이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