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의료·학문 발전에 기독교 결정적 기여
고종·급진개혁파·상인들 기독교 근대화에 관심
지식인들 신분 차별 없는 영원한 생명복음에 매료
1. 기독교의 교육활동
기독교 선교사들이 국내에 입국하면서 시작했던 가장 중요한 활동이 교육활동이었다. 아펜젤러가 1885년에 배재학당을 세웠고 언더우드는 1886년에 언더우드 학당을 세웠다. 장로교는 1897년에 숭실학교, 1898년 재령에 명신학교, 1903년에 평양에 숭의 여학교를 세웠고 감리교가 평양에 광성학교, 숭덕학교, 정의여학교(1894), 정진학교(1896), 맹아학교(1898)를 동래에 일신여학교(1896), 서울에 공옥학교(1896), 신군학교(1897) 배화여학교(1898), 원산에 원산여학교(1903) 등을 세웠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아펜젤러 목사가 두 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1886년 6월 감리교 선교부의 공인으로 세워졌다. 언더우드는 1886년 봄에 자신의 사랑방에서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언더우드 학당으로 불리다가 1891년에 예수교학당으로, 1905년에는 경신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첫 번째 여자학교로서 이화당학은 매리 스크랜턴에 의해 1886년 5월에 세워졌고, 그 이후에 정신학교, 배화여학교 등의 미션 스쿨들이 세워졌다. 이화학당이란 이름은 학생이 7명이 되었던 1887년 명성황후가 내린 것이었다. 여성교육에 특히 앞장을 섰던 것은 북감리회였다. 북감리회는 1904년까지 24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절반에 가까운 11개교가 여자학교였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목포, 동래 등 지방에 많이 설립하였다. 물론 여학교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여성교육을 통해 봉건적인 의식을 벗어나는 근대교육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8년 10월에 미국 남감리회의 여선교사 캠벨이 종로구 고간동(현 내자동)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學堂)을 설립하였는데, 바로 배화학당의 전신이다. 배화학당은 미국의 남감리회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설립한 여학교이다. 1903년에 이르러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培花學堂)으로 개명하였다. 배화학당의 설립목적은 기독교의 복음 전파와 여성 계몽이었다.
1899년이 되어서야 한국인의 힘으로 첫 민간인 사립여학교인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순성여학교는 서울에 설립된 중등학교인데, 승동학교(承洞學校)라고도 한다. 갑오경장 이후 근대식 학교제도가 도입되면서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신식교육기관 설립되었으나, 여성교육은 여전히 부실한 상태였다. 이에 1898년 9월 여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찬양회(讚揚會)라는 부인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원이 4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부인회에는 찬성원(養成院)이라는 부가 있었는데, 회원들의 회비로 여학교의 설립운영을 전담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승동에 순성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였으며, 부인회 임원들이 직접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학교를 설립한 후에 관립화를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관리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899년부터 1909년까지 13개교가 설립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운영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미션 스쿨들은 처음에 영어교육도 실시하였으나, 점차로 영어교육보다는 성경과 함께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쳤다. 미션 스쿨들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서양식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근대교육이란 전통적인 한문 중심의 교육을 탈피하여 서양의 근대학문을 바탕으로 실시된 교육이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교육의 목표로 현대 문명에 대한 지식과 조선에 대한 지식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현대문명에 대한 지식을 위해 수학, 과학, 그리고 영어를 가르쳤고, 조선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중을 위해 교육을 위해 한글을 가르쳤다. 배재학당의 경우 1889년까지 영어, 지리, 산수, 맹자, 물리, 화학을 가르치다 1890년에 영어기초문법, 영작문, 실기교육, 음악교육, 미술교육, 특별활동 등을 첨가하였다. 이화학당은 1886년에 영어를 가르치다, 1889년에 언문읽기, 쓰기, 작문, 생리학, 1892년에 반절, 한문, 영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음악으로 확대되었고, 1893년에 체조, 1896년에 재봉과 자수가 추가되었다. 특히 여성교육기관들은 여성들의 의식변화와 함께 하란사, 이경숙 등 여성교육을 위한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2. 기독교의 의료 활동
기독교 선교사들은 국내에 들어와서 다양한 의료기관들을 세웠다. 제일 먼저 국내에 입국했던 알렌 선교사는 1884년 12월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에서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민영익을 수술을 통한 근대의술을 통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알렌은 왕실의 주치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근대식병원을 설립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알렌은 정부에 근대식 병원을 세우도록 건의하였고, 그러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정부는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였다.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정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1885년 1월 22일에 조선에 조선정부에 병원설치를 요청하였다. 병원이 설치되면 치료와 함께 의료 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자신은 무보수로 병원을 운영하고 조선정부는 병원운영의 경비를 부담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져 4월 10일에 광혜원이 개원하였다. 광혜원의 의미는 “미덕을 베푸는 개명된 집”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설치되어 운영되던 병원의 명칭은 4월 26일에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제중원이란 “백성을 널리 구제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조선정부는 당시에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근대의술을 수용하는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병원의 명칭에서는 유교적인 정치의 근본원리인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시혜정책의 의미를 가진 병원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제중원은 조선정부가 설립하였고, 알렌이 운영하였다. 제중원은 1886년 3월에 16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선교본부에 여성의료 인력 파견을 요청하여 엘러스가 1886년 내한하여 제중원 부인과가 운영되었다. 개원 후 1년 동안 진료인원이 10,460명의 외래 환자를 진료하여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으며, 1887년에 재동보다 2-5배 넓은 구리개로 이전하였다.
그 이후 제중원 운영은 선교부 내에서 병원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와 조선 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의 어려움 때문에, 1894년 9월 2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로 완전히 이관되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의 운영을 정부로부터 완전히 이관 받은 후에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좀 더 탄력적으로 병원을 운영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의료 인력을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제중원은 선교부가 운영을 했지만 규모가 작아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1900년 무렵이 되면 서울에서는 독립협회 해산과 같은 정치적인 상황과 교회들의 분립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하여 새로운 선교정책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병원 건립이 요청되었고 선교본부는 1899년 토론토로 안식년을 떠나 있던 에비슨에게 병원건립 모급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에비슨은 세브란스에게서 만불의 후원금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후원금의 사용에 대하여 평양측의 마펫과 서울측의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평양측은 자급자족의 네비우스 원칙을 주장하며 5000불을 가지고 소규모 병원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울측은 1만불을 사용하여 2명 이상의 의사가 거주하는 중앙병원을 설립하여 효과적으로 진료하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논의가 1900년 말부터 1904년까지 상당히 격렬하게 충돌했으나, 1904년에 만불을 가지고 서울에 중앙병원을 짓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과정에서 자급을 주장하며 직접전도를 강조하는 평양측과 진료가 곧 복음전파이며 기독교정신의 실천이고, 이제 한국교회도 성장했으므로 필요한 경우에는 외국의 더 많은 원조를 요청할 수 있다는 서울측이 대립했는데, 궁극적으로 서울측이 승리하였다. 이러한 서울측의 승리로 한국교회의 네비우스의 자급자족 정책이 변화되었다. 본토인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에서는 외국인의 기부를 요청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숭실학교를 비롯한 대학설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04년 11월 16일에 세브란스 병원이 개원하면서 의학교육도 허용되었고, 서울은 선교와 교육에서 평양보다 뒤졌으나 의료에서는 훨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제중원은 정부가 지원을 중단한 후에 북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다가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확장되어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