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선에 서양 음악 및 스포츠 소개, 교육과 애국운동
을미사변 이후 선교사들은 고종임금을 지키는 일에 적극 나서
‘105인’ 사건은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조작
1. 서양 근대문화의 소개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을 하면서 서양의 근대문화가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운영하면서 서양의 음악과 스포츠가 소개되었다. 음악에서는 교회의 예배와 함께 찬송가가 교육되면서 서양음악이 교육되었다. 한말에 서양선교사들이 근대학교를 세우면서 근대음악이 교육되었다. 이렇게 서양음악이 들어오고 다른 한 편으로 일본의 근대음악이 들어오면서 전통음악의 거의 해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서양음악은 교회에서의 찬송가와 근대학교들에서 찬송가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이와 함께 찬송가의 영향을 받아 창가들이 작곡되었는데, 이러한 창가에서는 기독교의 내용과 함께 우리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가도 들어있어 민족주의적인 정서와도 결합되었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스크랜턴(1832-1909)에 이어 제2대 이화학당 장이었던 로드와일러(1853-1921)가 존스( 1867-1919)와 함께 감리교회를 위해 편찬한 찬송가집인 찬미가(1892)인데, 악보가 없는 가사판으로 기존찬송가의 번역곡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1895년 수정, 증보되어 출간되었다. 언더우드는 1893년에 4성부 악보를 넣어 117곡을 수록한 찬성시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악보가 들어있는 찬송가였다. 이 찬송가 속에는 한국인이 지은 7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언더우드가 독단적으로 편집한 것을 비판하며 사용하지 않아 주로 남장로교회들이 사용하였다. 1895년에 리와 기포드 부인이 54곡을 수록한 찬셩시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북장로교가 사용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찬송가들이 간행되다가 1908년에 합동찬송가로 통합되어 간행되었다. 이러한 찬송가들은 한국인들에게 서양의 음악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작곡과 함께 서양음악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최초의 창가는 1896년 9월 9일 고종탄신일을 맞이하여 부른 황제탄신경축가이고 윤치호가 편집한 찬미가에는 우리나라 애국가와 거의 같은 가사가 실려 있다. 이 시기에 운율은 거의 서양의 것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이후에 가면 가사와 악곡이 다양해졌고, 김인식의 학도가는 한국인이 작곡하면서 고유한 운율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최남선의 경부철도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운율의 창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창가라는 용어가 음악과 문학에서 함께 사용하여 정의하기 쉬지 않으며, 음악의 경우의 용례에서도 첫째 찬송가 둘째 찬송가 선율을 차용하여 만든 모든 노래, 셋째 찬송가 이외에도 서양 노래의 선율을 차용하여 만든 모든 노래 등의 여러 용례가 있지만, 초기에는 이러한 세 가지의 의미로 주요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서양의 문학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선교사들의 번역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었고, 이 성경번역은 국문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글 보급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 번역된 대표적인 기독교 서적이 천로역정이었다. 천로역정은 1895년 게일이 번역을 하였고 김준근이 42컷의 삽화를 그려 기독교를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삽화가 한국의 기독교 미술의 효시인 셈이다. 그와 함께 천로역정을 중심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기독교의 교리와 예배에 관련하여 서양의 책들을 번역한 번역서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2. 사경회의 개최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후에 기독교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집중적인 성경공부인 사경회는 1890년 언더우드 집에 7명의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교육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 사경회는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지방교회의 지도자들을 서울로 모아 가르치는 형태가 있었고, 권서인이나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받는 사람들이 성경을 더 배우고자 하여 선교사를 찾아와 교육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정기적으로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교육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에 사경회는 일반적으로 남녀를 나누어서 실시하였고, 지역이나 치리회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고, 교육 대상인 교회 지도자, 주일학교 교사, 일반 신도 등을 으로 분류할 수도 있었다.
사경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성숙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사경회는 성경교육과 함께 위생과 자녀양육 등에 대한 서양문화가 전파되었고 이곳에서 교육받기 위해 한글을 배워야 했으므로 한글 보급에도 기여하였다. 사경회는 이와 함께 오후에 전도하여 저녁 집회에서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부흥회와도 연결되었다. 그리고 서울이나 선교사가 있는 지방중심도시에서 모이는 경우에 여러 지역사람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문화의 전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경회를 바탕으로 성경적인 기독교로 발전하였다. 이 사경회는 일종의 성경학원이면서 신앙대회와 문화강연회를 겸한 것이었다. 특별히 여성사경회는 여성들에게 가부장적인 가정질서를 벗어나 자기를 새롭게 인식하고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통해 남녀평등의식과 더 나아가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사경회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양성, 서양문화의 전파, 한글의 보급 등의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경회 과정에서 평양대부흥이 일어났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3. 기독교인들의 애국운동
기독교인들은 초기부터 애국충군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고종임금의 생일날을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선교사들은 을미사변 이후에 고종임금을 지켜주는 일을 감당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을 맺을 때에는 기독교인들도 반대집회를 열고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105인 사건은 명백히 기독교 박해사건이다. ‘105인사건’은 당시 식민지 치안을 맡았던 조선 총독부 경무 총감부에서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조작한 관제허위사건이다. 이 사건이 날조된 허위사건이었음은 재판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도 이미 명백히 밝혀졌다. 일제 경찰과 검찰은 이 사건에 선교사들을 연루시켜, 선교사들의 한국인에 대한 영향력도 견제하고자 했다.
105사건이 기독교 박해사건이라는 주장은 관련자들의 수기와 당시의 언론보도와 선교사들의 편지를 통해서 뒷받침되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일관되게 기독교 박해 사건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고, 판결문에서도 기독교와의 관련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특히 2심에서 105인 가운데 99명이 풀려나 기독교 박해사건이라는 인식이 약화되었다. 그런데 일본측의 심문 자료를 분석해 보아도 105인 사건이 기독교 박해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재윤, 김병연, 최창원 등은 아무런 혐의가 없었기 때문에 신문과정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그 신문조서가 105인 사건이 명백한 기독교박해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신문조서를 통해 살펴보면 첫째, 일제가 인식하기에 교회는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장소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가 하는 역할 때문이었다. 교회는 사람과 그 신문을 연결시켜 주었고, 우리나라와 외국신문을 연결시켜 주었다. 셋째, 교회의 기본적인 행동들, 예배, 전도, 헌금이 일제에 반하는 행동들이라 인식했기 때문이다. 넷째, 교회가 박해를 받은 이유는 치외법권을 가진 선교사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자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관련자 가운데 김창건, 안경록, 양전백, 장관선, 조덕찬, 최성주 6명의 성직자들은 당시와 그 이후의 행적에서 지역적인 영향력이 강하였고 3.1운동이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인물들의 교회를 통한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므로 105인 사건은 기독교인들 개인과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