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영성운동, 획기적인 방향 전환 절실
한국교회 영적인 경험조차 자기중심적 성공과 번영의 도구로 이용
교회의 영성을 개인적 차원에 한정치 말고 사회적 차원으로 연결해야
우리 한국사회는 북한의 공산주의와 대처하면서 신 자본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신 자본주의의 역사적 배경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자본부의는 미국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어느 나라와도 비교되지 않는 참으로 광대하고 비옥한 땅으로 영국사람들이 이주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는 돈이 돈을 벌고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양극화가 형성되는데 대한 대책이 결핍되어 있었다. 석유가 터저 나오고 막대한 거부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마당에서 가난한 자는 점점 가난해지는 사회적 양극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앞에 놓고 등장하게 되는 것이 칼 막스Karl Marx)의 자본론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현실이 극한적인 입장에 이르러 노동자들이 궐기하여 자기들의 몫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막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사회학적으로 정리한 학자가 막스 베버(Max Weber)이다. 그는 칼빈주의와 자본주의 형성 사에 재미있는 연관성을 논의 하고 있다. 그 대략적인 논의는 칼빈의 예정론은 누가 구원을 받게 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 밖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칼빈의 초기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정설을 앞에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여 성실하게 살며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면서 근검절약하였기 때문에 돈이 축적되어 자본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 후면에서 크게 작용한 것이 칼빈주의의 공헌이다.
오늘 날까지도 미국사회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데는 그러한 종교적인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기 노력에 의해 형성된 부이지만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헌납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재벌들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기독교의 영성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 해답줘야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고찰하면서 한국교회가 정신적인 면에서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기독교의 영성문제가 오늘의 잘못된 사회적 경제적 현실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의 영성문제를 신중하게 논의하기로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한국의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의 영성은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한국사회에 공헌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고 하다.
나는 그러한 운동의 선구자로 인정되는 현대의 성자 헨리 나우엔(Henry Nouwen)의 삶을 검토하면서 그의 영성 이해가 오늘의 한국사회에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을 논의해 보기로 한다.
헨리 나우엔의 영성 이해
먼저 현대사회에 대한 나우엔의 기본적인 이해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경쟁 사회로 정의하고 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사회이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살벌한 현대사회에 있어서 나우엔이 말하는 경쟁의 개념은 경쟁위주로 치닫고 있는 현대인들을 향하여 귀중한 교훈을 주고있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무자비한 경쟁이라면 기독교의 대치개념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경쟁이란 무자비하고 자기중심 일변도의 극단적인 삶의 형태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독대의 경험을 통하여 참된 이웃을 발견하게 되고 경쟁위주의 현대사회에서 사랑과 동정의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의 영적인 경험이나 신비적인 경험이 개인중심적이 되기 쉬운 경향성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나우엔은 영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의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면을 다 같이 중요시 하고 있다. 즉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독대는 다시 세상 속으로 파고드는 수평적인 이웃과의 만남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영적인 경험이 오히려 경쟁사회에 있어서의 자기중심적인 성공과 번영의 도구로 이용되기 쉬운 경향성을 생각할 때에 나우엔의 영적 경험의 이차원성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할 것이다.
나우엔의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독대는 신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자비 (compassion)의 차원으로 우리들을 이끌어간다는 입장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영적인 경험이 단순히 개인중심적인 경험으로 끝나기 쉬운 것은 참된 영적인 경험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중세기의 이름난 신비주의자 에칼트(Eckhart)의 말을 빌린다면 내가 아무리 깊은 영적인 경험을 하고 있더라고 굶주리고 헐벗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신비적 경험에서 벗어나 그러한 이웃을 돕기 위해 세상 속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입장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흔히 한국교회의 영적인 경험이 극단적인 신앙적 이기주의에 빠져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경향성이 있다면 나우엔의 영적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1960년대부터 성공위주의 기복신앙으로 일관해 온 것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적극신앙운동은 미국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가 호전되어 가는 미국의 경제적 붐을 타고 등장하는 기복신앙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당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적극신앙운동의 기원은 1952년에 미국의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이 저술한 “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즉 [적극적인 사고의 힘]이라는 이론에서 출발한다. 그의 이론은 사회심리학적으로 단순한 성격의 것이다. 즉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오늘의 모든 일은 성공적으로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날의 모든 일은 성공적으로 성취된다는 단순한 생각이다. 그리하여 당시 미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호전되어 나가는 형편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잘 먹혀 들어가 슐러의 glass window church는 미증유의 발전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적극신앙운동이 1960년대의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루 아침에 거부가 되기도 하는 처지에서 그러한 적극신앙 운동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시초로 하여 전국교회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적극신앙운동은 한국의 샤마니즘과 연결되어 병고치는 은사를 겸하게 되어 한국교회 속에 확산되어 나갔다. 나는 이러한 운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성공일변도의 적극신앙운동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병들고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교회의 영성운동이 개인적인 성공과 축복 속에 매진되어 고통 받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힘이 되지 못한다면 나우엔의 입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의 영성이 오히려 경쟁위주에 있는 competition 중심의 현대사회 속에서 강한 자 힘센 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의 양극화를 결과하는 것 이상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성공위주의 기복사상 속에서는 서로 같이 느끼고 사랑하고 힘이 되어주는 자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앞만 바라다보며 질주하는 현대의 성공위주의 competition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이웃 사랑과 동정의 미덕은 어디로 살아져버린 것인가? 앞만 바라다보는 경쟁적 질주 사회의 흐름 속에서 그래도 옆을 바라다보며 뒤를 살펴보는 사랑과 동정의 아름다운 compassion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좀 뜸해졌지만 과거에 MBC를 비롯한 방송매체들의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은 심각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