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진정한 참회 없이 성숙한 그리스도인 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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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목사의 ‘집단 회개’는 평양 대각성부흥운동의 중심 알맹이

죄의 고백은 치유와 변화, 윤리의식 각성, 사회적 화해로 이어져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2월 월례회에서 이건영목사가 발제한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의 신앙을 사모하며’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Ⅰ.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 운동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로 시작된 평양 대각성운동
길선주 목사님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1869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자신의 병도 고치고 도(道)를 닦기 위해 관성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21세부터는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였으나 모두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마포삼열 목사님과 교분을 가지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탐구해 보라고 몇 가지 교리서를 전해 받아 그 책들을 탐독하면서 차차 기독교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길선주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거쳐 왔던 어떤 종교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죄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도적질, 간음, 살인 같은 죄는 거의 모든 민족이 죄로 치부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 즉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죄임을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처음이었다. 길선주의 회개는 바로 이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에 관한 것이었다. 1897년 7월 12일, 30세에 그는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길선주 목사님은 33세에 장대현교회에 장로로 선출되었고, 마포삼열 선교사는 그에게 장대현교회와 황해도 각 교회에서 목사를 돕는 조사(助事)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03년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새로 시작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제 1회 졸업생이 되어 그 해 설립된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여 20년 동안 시무하다가 교회의 분규로 이향리교회로 나와 목회하면서 전국 교회의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부흥운동은 일찍이 1903년 원산 지방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한 주간 성경공부를 겸한 기도회를 가질 때,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남감리회 소속 하디(R. A. Hardie) 선교사가 선교 사역의 결과가 없는 것을 통한히 여기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그 후 1906년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친구인 박치록 장로와 함께 규칙적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교인들이 계속 모이면서 300~500명이 매일 모이는 집회로 변했다. 장대현교회의 시무장로였던 길선주는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이때가 1906년 가을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기도회 중 하나인 새벽기도회가 비롯된 시점이다.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도사경회’ 기간에 일어났다. 1907년 1월 2일부터 약 2주간 동안 사경회가 진행되었다. 사경회 마지막 날인 15일 밤 길선주가 회개하는 모습을 그의 아들 길진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와 몇몇 선교사들은 길씨와 주씨 두 사람을 위해 특별 기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회개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길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방위량(W. N. Blair)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한 교인이 또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온갖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길진경, 『靈溪吉善宙』, 192.)
길선주의 회개는 우리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시무 장로였고, 또 장로회신학교 졸업반으로 6개월 후면 졸업을 하고, 그해 9월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인 최초 7인 목사 중 1인이 되는 분이다. 그런데 그의 회개의 내용이 “형제들을 질시했고, 방위량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는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 시에 고백된 일반적인 죄는 도적질, 간음, 심지어 살인 등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길선주는 그런 원초적인 죄가 아니라, 형제를 ‘질시하고 미워한 죄’를 회개했다는 점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죄는 강력한 회개를 일으킬 만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텐데,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바늘 끝 같은 작은 죄라도 참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Ⅱ. 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의 신앙
이기풍 목사님의 개심(改心)과 헌신
이기풍 목사님은 1868년 11월 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평양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서양인을 경계하였고, 청년 이기풍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집을 나서다 코 큰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분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였는데, 이기풍은 그의 도도한 모습이 보기 싫어 친구들과 떼 지어 몰려가 그의 집에 돌을 던졌다. 또한 마펫 선교사가 장터에서 무슨 책을 들고 서툰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반사적으로 발밑의 돌을 찾아 힘껏 날렸다. 날아간 돌이 마펫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기풍은 쓰러진 그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기풍은 원산으로 갔다. 기거서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았는데, 스왈른 선교사를 보고 이기풍은 자신이 돌로 쳐서 피 흘리게 했던 마펫 선교사가 계속 떠오르면서 마음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마루에서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그분은 너무 환하게 빛나셔서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고,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자꾸만 머리에 맴돌면서 회개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분의 증인으로서 어떤 것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스왈른 선교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왈른 선교사는 그의 체험을 듣더니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다. 복음은 그를 감격시켰고, 그의 내면에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이기풍은 스왈른 선교사의 조사 역할을 하며,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설교와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1898년부터 약 4년간 성경을 판매하고 보급하는 매서인이 되어 복음을 전했다. 1903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후 목사안수를 받고 초대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목사안수 후,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불리는 외국과 같은 땅이었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예수교를 굉장히 꺼렸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와 마펫 선교사의 격려와 기도로 조선장로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전도 초기에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죽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하고,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 취급하였다고 하며 청년들이 목을 졸라 죽이려고도 하였다. 영육이 약해진 이기풍 목사님이 평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마펫 선교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는 분투노력하시오.” 이 편지를 읽은 이기풍 목사님은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기쁨이 흘러 넘쳤으며 다시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영적 투쟁을 감당했다.
이후 이기풍 목사님은 전남 광구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고, 조선예수교장로회 10대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남 순천중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고흥에서 개척을 하다가 다시 제주도 선교를 위해 떠났다.
1934년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8년 9월에 장로교까지도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는데, 이기풍 목사님 역시 신사참배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죽어도 절하지 말라며 순수한 신앙을 가질 것을 항상 강조했다. 70세 이상은 취조와 고문이 법률로 금지되었지만, 이기풍 목사님은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초죽음 상태가 된 이기풍 목사님에게 출감조치가 결정되었지만, 나머지 목사님들이 출감하기 전까지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결국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이기풍 목사님은 여수 남면 우학리 섬에 목사관으로 옮겨졌고,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일주일 뒤 1942년 9월 20일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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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선배님들의 회개와 섬김과 순교의 신앙을 사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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