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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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노라 하면, 마치 교회론적인 성령론을 다루는 듯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도행전의 기자가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집중 조명하려하기 때문인 것이었을까?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지도자 그룹인 산헤드린으로부터 불법적인 인민재판을 받아 시구문 바깥으로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하고, 이 박해가 시발점이 되어서 -사도행전의 기자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도 수많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잔멸하는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는 예수의 추종자라 할 근거가 될 만한 자들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처리되었다고 믿고, 당국은 한숨을 돌렸다. 박해자 앞잡이가 시리아로 발길을 돌린 그 이유와, 그러한 박해의 태풍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있는 듯 없는 듯이 그 땅에서 버젓이 살아있는 예수의 사도들의 이 이야기를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들어가기란 특별한 설명이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였기에, 요한도 예수가 그의 제자들 일행을 데리고서 과감하게 사마리아에 들어 가려한 이유를 장문으로 설명하려 했듯이, 누가는 사마리아로 경계선을 넘어간 이단아 같은 자를, 박해로 인해서 숨어들어간 것처럼 빌립의 이야기를 남겨주고 있다. 누가는 빌립의 전도로 온 사마리아가 충분이 주님께 돌아왔음에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질 아니하고, 베드로의 일행이 파송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니 저들이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 하였다. 사도들이 안수하기 이전에는 성령을 받은 일이 없었다는 부연은, 마치 로마교회가 진실보다 교회를 우선시하여,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영원한 동정녀-성모라는 특별함을 입히기 위해서, 예수의 형제들을 요셉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듯이, 교회론을 먼저 생각하는 기자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주의 손이 나타난 자에게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그에게 임하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제한 것이었을까(눅 11:20)?

 누가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처럼,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고 장시간 복음을 전하고 설명을 한다 해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식탁에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성찬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율법과 복음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율사들과 사제들의 가치관과 신앙이 예수가 전하는 복음과 달랐던 것처럼 만나기 어려운 질곡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를 주의 깊게 읽고, 그의 고른 숨소리를 경청하면, 누가가 적어도 오늘의 우리게 말하려는 바를 들을 수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서 할례를 받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된 크리스천들과 불편한 식탁을 같이 하였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야고보 그룹들과 맞닥뜨리었다. 여지없이 우려하던 일들이 벌어졌는데, 베드로에게 한 사람이 급하게 귓속말로 전달하자, 베드로는 교제 도중에 그의 일행들을 데리고 황급하게 자리를 뜨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황당한 일들이 어찌 여기 한 장면에서만 있었을까?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바울은 날카로운 양날 검 끝으로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이 이 일을 갈라디아 서신에서 명료하게 규명하였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없는 건너지 못할 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서, 오늘날 분단된 남과 북을 아무런 장애 없이 오르내리는 독수리처럼, 모든 이유와 각론을 잠재하고, 다리가 놓이고 오고가는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야기가 누가의 기록에 장문으로 반복되어 다루어졌다. 누가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언어와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긴 장문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교회론 적이면서도 성령론적인 교회론으로 구성하였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주 세밀하게 다뤄졌다. 베드로는 두렵기도 하였겠지만 낯선 이방인의 집으로 일행들과 함께 들어가 저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베드로의 복음 설교가 핵심에 이를 때에, 성령이 그 곳에 모인 이방인들 모두에게, 주인이나 노예나 하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남녀도 차별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각 사람에게 임하신 것이었다. 세례를 아니 줄 수 없게 되었고, 주님의 떡과 잔을 아니 나눌 수도 없게 되었다. 가르침만으로는 전달이 되질 않고, 실천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 전도자들의 한계가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려오시면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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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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