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교회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에 있어
성숙한 교회는 성숙한 구성원들로 구성된다

sonYT.jpg
 

본고는 지난 3월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개최된 부산장신대학교 총동문회 ‘목회축제 및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주요부분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1. ‘선교적 교회론’은 목회를 위한 신학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라는 이야기는 학교교육의 허점을 비꼬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 교회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면 이것은 비극이다. 신학은 산 신학이 되어야 하며,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
물론 이론도 중요하고, 실천도 중요하다. 그러나 실천이 없는 사변적인 신학으로 중세의 교회처럼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을 것인가?”만 토론하다가 타락한 교회가 되게 하였던 전철을 밟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목회자들도 알아야 한다. 계획이 없는 목회는 설계가 없는 건축과 같다. 실제적인 적용 모델은 사적(私的)인 목회 간증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신학적인 이론에 근거한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선교적 교회론’과 목회를 위한 주제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비로소 생령이 되게하셨다(창 2:7).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라 함께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모여 있는 각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다(행 2:1-4). 교회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정의나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령님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선교학자 보쉬(David Bosch)에 의하면 성령은 선교를 시작하게 할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사역하여야 할 것인가를 안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기 자신의 계획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역을 이끄시고 안내해 주실 성령님을 기다려야 한다.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선교적 교회론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의 역동적인 삼위일체적 교회론을 성령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령님은 선교의 영이시다. 성령님이 교회에 임하신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님이 선교의 동인이 되신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게 한다는 해석은 20세기의 평신도신학(Theology of the laity)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성령님은 교회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시고 교회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의 초기 주장(1940년대)은 성령님은 교회의 범위 안에서 역사한다고 주장하였으나, 1950년대와 60대를 거치면서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일치의 신학을 강조한다. 특히 그의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일치의 근거는 단순한 십자가의 인내가 아니다. 성령 안에서의 친교(commun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라도 연합하여야 하며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와같은 성령님에 의한 역동적인 교회론 이전에 교회가 교회 존재 자체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선택과 회심, 무엇보다 회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은 선교적인 목회를 위한 중요한 주제를 제공한다.
실제적으로 이 방향은 목회자 중심으로 구분된 교회 안과 밖의 사역 구분이 아니고, 평신도 중심의 사역 방향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것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들에게 함께 주어진 명령이다.
안디옥교회는 원심력을 지닌 교회로 큰 무리들이 모였으며, 전도하는 교회였기에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은 교회이다(행 11:26). 또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행 1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안과 밖의 사역에 대한 구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교회가 ‘구원받는 수를 날마다 더해 가고’(행 2:47), 제자의 수가 삼천 명씩, 오천 명씩 늘어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 원리는 교회 활성화의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된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질적성장, 행 2:42)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내적성장, 행 2:42)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외적성장, 행 2:47),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음”(양적성장, 행 2:47)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성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당장에 밀어닥친 위기극복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예루살렘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디다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고 떡을 나누었으며(코이노니아), 구제와 봉사와 이웃을 섬겼다(디아코니아).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이론을 근거로 교회의 표어를 제시하였다.
“누구나 그리워서 찾아오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들이 “말씀이 그리워서,” “사랑이 그리워서” 찾아오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그리워서”찾아오는 교회가 되게 하여야 한다.

3. 역동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기구나 조직도 아니지만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모임도 아니다. 더러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교회가 활성화 되어 성장하는 방향을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교회는 생명체이다. 마치 사람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 버리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시체와 보이지 않은 영혼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교회도 통전적인 성격을 갖는다. 교회의 활성화 방향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사역 자체가 통전적이다.
역동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대개 ①성경적인 교회, 마치 어린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양을 섭취하고, 건강하게 호흡을 하며, 적당한 운동과 친구들끼리도 왕따를 당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자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②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을 갖춘 교회, ③건전한 정신과 사고를 가진 구성원들로 구성된 교회, ④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지도자, ⑤치명적인 질병이 없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정리해 보면 결국 선교적 교회론은 이와같은 건강한 교회를 전제로 하는 교회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주님의 교회임을 고백하는 교회론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교회론이다.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론이며, 올바른 지도자와 은혜를 받은 평신도들이 영문 밖으로 나아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자는 이글의 목적은 목회 사례 연구나 교회의 사업을 소개하고 실적을 보고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어떤 방법으로 선교적 교회론을 실제적인 목회에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임으로 마지막 결론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제언으로 마감하려고 한다.
첫째, 바른 교회론과 목회관은 언제나 건전한 신학적 바탕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근거가 가장 분명한 교회론이 선교적인 교회론이다.
둘째, 성숙한 교회는 언제나 성숙한 성도들로 구성됨을 알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상처와 고통으로 지쳐있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치유를 받아야 하며, 이들을 위한 배려가 시급하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교회라 하나 교회도 엄연히 세상 속에 존재한다. 교회가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넷째, 선교적 교회론은 종말론적인 교회론을 근거로 하는 교회의 신학이다. 앞으로 교회가 겪게 될 교회의 고난과 위기를 간파하고 이에 대하여 대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과의 소통 이전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 앞으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밖에 없다.
다섯째, 교회의 학문인 신학의 목표는 선교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실천적인 신학 이론이다. 교회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는 선교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본에 충실한 목회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이고, 이같은 교회론의 바른 목회적 적용이 교회가 가야할 바른 길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학술/ 선교적 교회론의 목회적 적용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