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기성 교인들이 이단이라는 단체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으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곳의 가르침이 재미있고 귀에 쏘옥 들어온다는 것이다. 요즈음 세인들이 필요로 하는 바에 답을 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시원하게 행복을 안겨주는 비결을 저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몰리는 강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강사가 시원시원하게 강론할 뿐 아니라, 강의를 듣는 젊은이들도 상당히 운집되어 있다. 교회에서 빠져나간 젊은이들에게 성경과는 거리가 먼 동양철학과 경교회(네스토리안)를 혼합하여 강론 하는데, 듣는 청중은 그 강의가 정말 성경 강론인줄로만 알고 듣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의 시점에서, 교회 바깥의 젊은이들에게도 길과 진리를 보여주고 생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지성과 영성을 갖춘 지도자들을 제대로 훈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우리 교계의 구조는 젊은 지도자들이 일어서도록 하는 기반이 매우 부실하다. 우리 기성세력들이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구태를 벗어나질 못하고 권위적인 억압을 풀지 않아서, 신진들이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어 주검을 맞이한 그 다음 날, 제자들은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비통함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함에 대한 좌절감, 자신에 대한 분노,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그러나 삼일 후, 예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제일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다. 40일이 지나자, 승천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베드로는 동료들을 추스르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다. 저와 동료들이 힘을 내어서 기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엘리사가 그의 스승이 하늘로 돌아갈 때에, 저는 애타게 갈급해하는 기도가 있었다. 엘리야는 바짝 따라붙은 제자 엘리사를 불편해하면서 “너는 여기에 잠시 떨어져 있어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지만, 저는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붙었다.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스승이 묻자, “당신의 영감을 갑절로 받길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서, 원한다고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주고 싶다한들 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위에서 오는 것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도 받고, 불과 성령도 받으시질 아니하였던가?
베드로도 동료들과 함께 전심으로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의 불꽃을 받았다. 그의 머리에도 불이 당겨진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지도자들이 시대마다 ‘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전과는 달랐다. 그 곳에서 함께 기도하던 이들 모두가 성령을 받은 것이었다. 어린아이, 노인, 젊은이, 남종, 여종, 할 것 없이 차별되질 않고, 기도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입혀졌다. 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을 하고, 마치 모세의 동료 70인들이 능력에 취하여 쓰러졌던 것같이, 술에 취한 듯 하나님의 영에 흠뻑 취한 이들도 있었다. 에스겔이나 이사야, 요엘 선지자들이 증언하던 바와 같이, 지도자 한둘에게만 능력이 입혀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각 사람에게 주님의 성령이 임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열둘에게 능력을 입혀서 둘씩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에, 비록 제자들은 훈련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 땅으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각자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을 받고,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니, 세상이 구원을 얻고, 땅들이 요란하게 진동하였다. 악의 실체들이 결박을 당하고, 세상에서 패주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복음 선포가 이방인과의 접경에 이르자, 베드로는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다.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자, 성령이 그 이방인들 각 사람에게 내려오셨다. 여종이나 남종이나, 친구들까지도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 복음 전도자가 성령의 적극적인 인도에 민감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 선포가 명료하고 간결하였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분에게 권능을 입혀 주었고, 이방인에게는 통과제례가 복잡한 물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의 불로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수여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막을 올렸던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몰리는 강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강사가 시원시원하게 강론할 뿐 아니라, 강의를 듣는 젊은이들도 상당히 운집되어 있다. 교회에서 빠져나간 젊은이들에게 성경과는 거리가 먼 동양철학과 경교회(네스토리안)를 혼합하여 강론 하는데, 듣는 청중은 그 강의가 정말 성경 강론인줄로만 알고 듣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의 시점에서, 교회 바깥의 젊은이들에게도 길과 진리를 보여주고 생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지성과 영성을 갖춘 지도자들을 제대로 훈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우리 교계의 구조는 젊은 지도자들이 일어서도록 하는 기반이 매우 부실하다. 우리 기성세력들이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구태를 벗어나질 못하고 권위적인 억압을 풀지 않아서, 신진들이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어 주검을 맞이한 그 다음 날, 제자들은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비통함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함에 대한 좌절감, 자신에 대한 분노,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그러나 삼일 후, 예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제일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다. 40일이 지나자, 승천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베드로는 동료들을 추스르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다. 저와 동료들이 힘을 내어서 기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엘리사가 그의 스승이 하늘로 돌아갈 때에, 저는 애타게 갈급해하는 기도가 있었다. 엘리야는 바짝 따라붙은 제자 엘리사를 불편해하면서 “너는 여기에 잠시 떨어져 있어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지만, 저는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붙었다.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스승이 묻자, “당신의 영감을 갑절로 받길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서, 원한다고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주고 싶다한들 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위에서 오는 것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도 받고, 불과 성령도 받으시질 아니하였던가?
베드로도 동료들과 함께 전심으로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의 불꽃을 받았다. 그의 머리에도 불이 당겨진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지도자들이 시대마다 ‘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전과는 달랐다. 그 곳에서 함께 기도하던 이들 모두가 성령을 받은 것이었다. 어린아이, 노인, 젊은이, 남종, 여종, 할 것 없이 차별되질 않고, 기도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입혀졌다. 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을 하고, 마치 모세의 동료 70인들이 능력에 취하여 쓰러졌던 것같이, 술에 취한 듯 하나님의 영에 흠뻑 취한 이들도 있었다. 에스겔이나 이사야, 요엘 선지자들이 증언하던 바와 같이, 지도자 한둘에게만 능력이 입혀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각 사람에게 주님의 성령이 임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열둘에게 능력을 입혀서 둘씩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에, 비록 제자들은 훈련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 땅으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각자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을 받고,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니, 세상이 구원을 얻고, 땅들이 요란하게 진동하였다. 악의 실체들이 결박을 당하고, 세상에서 패주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복음 선포가 이방인과의 접경에 이르자, 베드로는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다.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자, 성령이 그 이방인들 각 사람에게 내려오셨다. 여종이나 남종이나, 친구들까지도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 복음 전도자가 성령의 적극적인 인도에 민감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 선포가 명료하고 간결하였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분에게 권능을 입혀 주었고, 이방인에게는 통과제례가 복잡한 물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의 불로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수여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막을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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