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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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5년 유월 모날 모시, 보랏빛 날선 번개가 빨갛게 타오르는 칸나 꽃 위로 내려 꽂힙니다. 순간 하늘 사랑에 타오르는 심장을 가진 친구의 모습이 샤갈의 몽환적 그림처럼 시공간 속을 떠다닙니다.
그렇게 친구여, 초대받았던 성령강림주일 <그날>, <그곳>. 비로 인해 강물이 넘쳐나 연인 상드에게로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건반을 두드려댔던 쇼팽의 빗방울 소나타처럼,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주님을 그리며 <다시 갈릴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겐 또 하나의 큰 은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봄만 되면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흠뻑 취하여 물에 빠져 노란빛 수선화로 피어나는 공곶이 마을이, 붉은 동백꽃의 꽃잎이 선혈처럼 흐드려져 있는 지심도가, 이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포로수용소가, 천주교 순례길이 이웃하며 곁에 있다는 것 또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말씀드립니다. 아유타 왕국의 공주 허 황옥이 그날 그곳에 함께 했습니다. 그녀는 늘 제 삶의 숙제인 양 시간도 장소도 아랑곳없이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곤 합니다. 2천 년 전 인도에서부터 신랑되는 가야 김수로왕을 찾아온 그녀는 겨우 불과 16세였다 합니다.   일설엔 도마의 제자였다는 말도 들려옵니다. 여하튼 그녀가 붉은 기 꽂고 거친 바다 파랑(波浪) 헤치며 오직 신랑 생각에 뱃길도 배도 좋지 못했던 그 시절에, 도마가 시킨 대로 파사의 돌 다섯 덩이 싣고 그 멀고 먼 험한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수로왕릉 납릉정문 문설주 위에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문양이 있습니다. 또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이라 하여 돌 다섯 덩어리가 누각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연상되는지요...
친구여, 전 벳세다 들판의 오병이어를 떠올렸습니다. 동시에 이미 부활하시어 다시 갈릴리로 오셔서 제자들을 위해 하늘 숯불 위에 떡과 고기를 구워주시던 그분의 예표를 보았습니다. 여하튼 지금 잠자고 있는 허황옥 그녀 묘지 위는 참으로 쾌적합니다. 그 주변의 쑥, 씀바귀, 냉이, 미나리아제비, 민들레, 소리쟁이 등 그 줄기가 억세어지고 스러져 가며 말을 전합니다. “이미 봄이 저만큼 뒷전으로 물러났어요” 그 소리가 마치 친구가 언젠가 저를 가을, 그것도 황혼의 노인네로 부른 것과 같은 씁쓸함과 외로움으로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친구여, 조금도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곧 바로 제게 눈에 보이지 않는 봄날, 못다 핀 꽃 피우게 부채질하여 봄바람 보내 주겠노라는 친구의 바람에 이미 새로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서 있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 윤동주 <새로운 길>-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친구여,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에 모가지 드리우고 피흘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한 윤동주 님이 마치 친구만 같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일어서는, 날선 검,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로고스 시인 말입니다.
아니 오늘은 한 번에 지구 반 바퀴의 거리를 날 수 있다는 날개 큰 알바트로스 새 같습니다. 아니 이것도 아닌 침묵하고 있는, 단단하고 품위어린 산봉우리 품속 같습니다. 아니 또 이것도 아닌 다시 갈릴리로 오라는 주님을 닮은... 그래서 잠자고 있던 영혼을 깨우고 소명을 다시 일깨워주는 진정한 스승 같습니다,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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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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