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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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롭다함을 입은 것과, 희락과 평안임을 주저하지 않고 항상 선포할 수 있었던 바울은, 십자가의 은총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실하심을 입은 자가, 희락을 누리고 평안에 거주하는 자임을, 항시 그의 삶과 그의 신도들에게서 확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접하기 전까지는, 율법이 그의 지켜야 할 길이었고, 그가 항시 붙들던 생명이었으나, 율법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부터 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종교나 사회적 계율을 통에서는 자책감과 정죄의 감시를 벗어나질 못하는, 수용소 내에 있는 죄인과도 흡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유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로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여 집사 뵈뵈 는, 바울이 보낸 복음의 사신으로서 ‘집사’라기 보다는 로마시를 복음화 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스데반을 ‘집사’라는 틀에서 보려고 하는 사고의 프레임으로는, 당시 교회를 진멸하려는 사울의 박해 공작으로부터 베드로 군(群)이 살짝 비켜간 이유와, 정면으로 복음과 율법이 충돌한, 복음 선포 자 스데반 군(群)이 직격탄을 맞고 순교를 당하거나, 주변 국으로 피신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가 옹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 집사 ‘뵈뵈’ 마저도 단순히 바울의 복음서를 전달한 밀사 정도로 본다면 크나큰 오해가 될 것이다.
 당시 ‘복음’을 전달하는 자들은 복음의 모든 내용을 온전하게 학습한 달인들이었다. 복음의 내용을 온전하게 배우고 습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선교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전술도 뛰어났고, 인품도 바울 못지않게 온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전달자로서의 서비스로 그치질 아니하고 본을 보임이라든지, 사역에서 까지도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확실하게 시위하였다. 바울은 로마로 복음서를 보내면서, 복음을 숙지한 인격과, 복음을 왜곡하질 않고 온전하게 전달할 자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달변이라 할지라도 로마에서 일어나는 의혹을 잠재우고, 변론과 주장과 물리적 저항에 맞서서 끝까지 물러서질 아니하고 전선을 넓혀갈 용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이같이 ‘뵈뵈’를 선택한 것은 그녀가 인격적인 면에서도 바울을 안심시킬 수 있었고, 그의 복음을 소화하는 능력이나 전달하는 능력이, 다른 어느 사도들에 비해서 모자라질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뵈뵈’ 편에 보내는 복음의 수준에, ‘뵈뵈’의 인격이나 복음 이해도나 전달력이 수준에 못 미쳤다면, 바울이 수감된 지 3년 후,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에 볼 수 있었던 성과는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로마서 4장을 지나서 5장으로 나아가면,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요한이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들어내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한 바와 같다. 출애굽을 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있어서,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 갈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시려고 임재하시는 광경을 누구나 볼 수 있었듯이, 크리스천들도 역시 역사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며, 내면적으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빌립보서를 전달하는 자가 기쁨을 보이고 전달할 수 없다면 빌립보서 사신이 아니듯이, 바울의 복음을 로마에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기지 못하였다면, 분쟁과 갈등으로 소란스러운 로마 도시를 평화스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뵈뵈’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구원의 선물을 풍요하게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개개인들이 서로가 존중 받고,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들을 절제하며, 옛 ‘아담 적 자아’를 어떻게 다스리는 법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를 맛보고 기쁨의 샘이 그 배에서 솟아나서 흘러나는 사람은 강물을 이뤄내는 법이다. 메말랐던 황폐한 땅을 적셔주고, 온갖 과일나무들로 주변에서 자라도록, 환경을 이끌어낸 것이다. ‘뵈뵈’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였기에, 옛 자아를 방치하질 아니하고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장사지낼 수 있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것임을 보여줄 수 있었고, 그의 공동체는 차원 높은 평화와 연합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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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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