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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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성경 주석가들이 로마서 6장에서 7장을 건너뛰고, 8장으로 곧바로 연결하려는 심정을 토로하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로마서 7장에서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신음 때문이리라. 의롭다 함과 평안과 즐거움 안에 있어야 할 크리스천이 ‘곤고함’에 노출되는 것 같아서일 것이리라. ‘크리스천’이란,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일 년 간 학습된 분들이, 비로소 주변의 시민들에게서 얻은 칭호였다. 이들은 안디옥 시민들이 지켜보았을 때에, 자신들과는 달리 거룩하게 구별되어지는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의 차이점은 일반적으로도 쉽게 구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의 차이점은, 그 도시에 살았던 시민들에게 공감될 수 있는 고무적인 변화가,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도드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학습한 사람들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헬라인들도 있었고, 당시 그 도시의 주민들도 있었고, 먼 곳에서부터 흘러들어온 자유인이나 노예들, 상인들도 있었으며, 우스운 표현이지만 여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나, 저들을 쉽게 하나로 호칭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그 칭호가 바로‘크리스천’이었다. 이런 칭호를 받게 된 사람들은 지역과 신분과 계급과 성차별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인격이나 공동체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바로 그 특별한 그 무엇들이 저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리게 하였던 것이다.
만일 저들이 누가 보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할 정도의 사람들 이었다면 어느 누구도 저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의 모습을 유추하건데, 저들은 가르침을 받은 복음의 지식에 대한 가치관도 확고하였지만, 세상의 어떠한 가치도 저들에게서 마음을 흔들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 서로 사랑함과 평안함과 자존감이 있었던 것이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열매가 확연하였기 때문이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비교적 빠르게 정체성이 형성이 되었으나, 고린도 공동체의 형성은 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안디옥을 비롯해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은 공동체들은 저마다 시간의 차이는 있었어도, 그 모두가 ‘크리스천’이라 칭함을 받기에는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지 않았다.
로마서 7장에서의 ‘곤고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미처 알지 못해서, 율법에서 떠나질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사는, 율법에 고착된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율법 뿐 만 아니라, 더 넓게 본다면, 옛 아담 적 에고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예수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서질 못한 사람을 말한 것이리라.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 단계를 벗어나서 이웃에게 시선을 향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없진 않겠지만, 이전의 삶을 정리하게 되고, 이웃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으로 자신의 장을 넓히게 된다. 이전에는 예수의 희생에 안주하여 머물러서, 예수님만이 홀로 십자가를 지셨으나, 이제는 나도 예수의 죽음 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안에서 나도 죽고,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예수가 주시는 구원 안으로 들어 왔다고 저마다 생각하지만, 아마도 전략적으로 예수와 타협한 것일 게다. 정치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이유 중에 하나는 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일 터이고, 연탄가게와 쌀가게 식당주인마저도 예수 보다는 이득을 쫓고 있다는 것에서 아주 자유로웠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저들을 교회당에서 볼 수는 있어도, 하나님나라 안에서 볼 수 없게 된다면, 분명히 가라지라는 판결을 받게 된 때문이리라.
과거에는 아무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저의 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확실하게 보인다면, 저는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죽음에서 일어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의 나라로 이미 들어온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날마다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써 살아간다. 만일에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면서 곤고함에서 자유하지 못하였다면, 자신의 삶의 구조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역동이, 아직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께 자신을 맡기고 따르면 ‘곤고함’이 사라지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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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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