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계절이 바뀌면서 대형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한국교회들이 새벽부터 교회로 달려가 주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무적일 수밖에 없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우리게 종용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현 시점에서 보면 이보다 적절하신 말씀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주변국들이 변해도 너무나 과격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독일의 통일과는 또 다른 시간대에 들어선 것이 확실하다. 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한동안 지친 경우는 있었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두드려야 하는 입장이다. 우리의 자녀들과 저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될 것이리라.
주님이 우릴 위해 십자가까지 지고 가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바울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선물로 내어 놓으신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일을 위한 기도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약 창세기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 중에는 영성이 아주 민감하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리브가라는 여인일 것이다. 이 분은 자신의 신랑감 댁에서 오신 분이, 자기 마을 우물가에 당도한 것을 감응하고는, 용수철처럼 튀어서 우물가로 나온 것이다. 저녁시간이 이르자 우물가에 앉아서 기도하고, 이삭의 아내가 될,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브라함의 사람 엘리에셀은, 마치 공자님이 사람을 분별하던 방식처럼 이 여인을 관찰하였다. 마치 기도의 응답인양 이 여인네는 먼 길을 걸어온 나귀 때에게 물을 먹이고, 그 손님을 환대하여 자신의 집 사랑 방으로 모신다. 어디 이 뿐이랴 그 사람이 길을 재촉하여 당장 떠나자 하였을 때에, 두려움과 미련을 과감히 떨치고 따라 나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익숙해있다. 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시점에서는 괴리가 많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회막으로 향할 때에, 하나님도 모세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광의 구름 가운데에서 회막으로 내려 오셨다. 백성들이 볼 때에 마치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듯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졌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려고 다가서면 만나 주신다. 이미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의 공로로,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갈라져 있어서 문이 열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지만 우리가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때에야말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와 관련해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를 미리 당부하신 터이다.
마리아는 최초로 주님을 몸으로 맞이하고 환대한 여인이다. 여인 중에 이처럼 명예로운 분이 어디 또 있을까? 세례 요한의 아비 스가랴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게으름 피다가 벙어리가 되어서 나왔지만, 마리아는 어린 처녀의 입장에서도 즉각 주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이었다. 오늘 우리가 주님에게 다가가는 훈련도 필요하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에 ‘하나님은 숨기시고 왕은 그 숨긴 것을 찾아낸다.’라는 격언이 있음은 왜일까? 천국은 시간을 놓친 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마리아가 포착한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심뿐만이 아니었다. 그 녀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서도 돋보였다.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복중에서 낳은 아들이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성인이 되었을 때, 하늘의 뜻을 이루게 된 그 얼굴을 보려는 마음은 아무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예수가 건장한 청년들과 가나 잔칫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마침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진 상태였다. 마리아는 즉각 예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하였다. 예수의 때가 아직 아니긴 하였으나, 마리아의 때인 것은 분명하였다. 유대인들이 결례를 위해 사용되는 물 항아리는 인간의 전례나 규례의 한계를 보인다. 초대된 손님의 발을 물로 씻긴다 하여서 흥이 되살아날까? 세례 요한은 이르기를 ‘나는 물로 너희를 씻기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너희를 씻기신다.’ 하였다. 흥이 깨진 잔칫집에 필요로 한 것은 오로지 새로운 포도주일 뿐이리라. 물이 포도주로 바뀌자 즉각 흥이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마리아의 순간 포착으로 흥이 살아났으니, 마치 그 잔칫집에 우리 민족의 통일과 같은 흥과 노래가 찾아든 것이었다.
주님이 우릴 위해 십자가까지 지고 가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바울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선물로 내어 놓으신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일을 위한 기도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약 창세기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 중에는 영성이 아주 민감하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리브가라는 여인일 것이다. 이 분은 자신의 신랑감 댁에서 오신 분이, 자기 마을 우물가에 당도한 것을 감응하고는, 용수철처럼 튀어서 우물가로 나온 것이다. 저녁시간이 이르자 우물가에 앉아서 기도하고, 이삭의 아내가 될,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브라함의 사람 엘리에셀은, 마치 공자님이 사람을 분별하던 방식처럼 이 여인을 관찰하였다. 마치 기도의 응답인양 이 여인네는 먼 길을 걸어온 나귀 때에게 물을 먹이고, 그 손님을 환대하여 자신의 집 사랑 방으로 모신다. 어디 이 뿐이랴 그 사람이 길을 재촉하여 당장 떠나자 하였을 때에, 두려움과 미련을 과감히 떨치고 따라 나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익숙해있다. 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시점에서는 괴리가 많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회막으로 향할 때에, 하나님도 모세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광의 구름 가운데에서 회막으로 내려 오셨다. 백성들이 볼 때에 마치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듯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졌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려고 다가서면 만나 주신다. 이미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의 공로로,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갈라져 있어서 문이 열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지만 우리가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때에야말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와 관련해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를 미리 당부하신 터이다.
마리아는 최초로 주님을 몸으로 맞이하고 환대한 여인이다. 여인 중에 이처럼 명예로운 분이 어디 또 있을까? 세례 요한의 아비 스가랴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게으름 피다가 벙어리가 되어서 나왔지만, 마리아는 어린 처녀의 입장에서도 즉각 주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이었다. 오늘 우리가 주님에게 다가가는 훈련도 필요하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에 ‘하나님은 숨기시고 왕은 그 숨긴 것을 찾아낸다.’라는 격언이 있음은 왜일까? 천국은 시간을 놓친 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마리아가 포착한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심뿐만이 아니었다. 그 녀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서도 돋보였다.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복중에서 낳은 아들이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성인이 되었을 때, 하늘의 뜻을 이루게 된 그 얼굴을 보려는 마음은 아무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예수가 건장한 청년들과 가나 잔칫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마침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진 상태였다. 마리아는 즉각 예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하였다. 예수의 때가 아직 아니긴 하였으나, 마리아의 때인 것은 분명하였다. 유대인들이 결례를 위해 사용되는 물 항아리는 인간의 전례나 규례의 한계를 보인다. 초대된 손님의 발을 물로 씻긴다 하여서 흥이 되살아날까? 세례 요한은 이르기를 ‘나는 물로 너희를 씻기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너희를 씻기신다.’ 하였다. 흥이 깨진 잔칫집에 필요로 한 것은 오로지 새로운 포도주일 뿐이리라. 물이 포도주로 바뀌자 즉각 흥이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마리아의 순간 포착으로 흥이 살아났으니, 마치 그 잔칫집에 우리 민족의 통일과 같은 흥과 노래가 찾아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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