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말하고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알게 하며 구원받는 인간으로 이를 총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의 궁극적인 근원과 의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하고, 이를 위해 흔히 말하는 유기적이고 심리적인 존재로서 현상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인간을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이유에 이르게 함을 알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죄인이며 구원받을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주인으로서 창조자와 구원자로서 입장을 가지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좋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고, 인간이 미완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이 삶이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는 성서의 증언은 매우 분명하게 이를 삶을 통해서 알게 한다.
세상의 삶의 모든 것은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없다. 이를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산상수훈에서 알게 한다. 하늘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어 표명하시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소금과 빛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불쌍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등.
이 팔복을 소유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임을 지적하신다. 이 사람은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사람을 지적한다. 소금이나 빛은 자기 삶을 녹여내는 희생의 제물임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삶은 세월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익혀내는 삶의 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사는 목적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혹은 먹이사슬 최상위 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등등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인간은 생태계에 악영향만 줄 뿐인데 차라리 없는 게 더 낫지 않나?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다른 여타 동물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생명의 고통을 공감해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고, 배려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가진 만큼 적절한 이기심도 가지고 있기에 생각만큼 되지가 않기에 불의를 저지른다.
대부분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언론에 나오는 여러 문젯거리를 항상 안주삼아 입에 달고 이야기하고 내일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문제를 인식했다면 그것을 해결로 실천해야 앞으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텐데 모두가 들어서 보고 말로 옮기는 것을 위주로 상식이나 된 것 처럼 일상의 말로 모든 문제를 아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삶은 마치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마시며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순리로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뿌린 것이 없으면 거두는 것이 없다는 것이 순리이다. 이치는 심어 거두게 하고 심는 만큼 거두며 때를 따라 시절을 알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이 이치이며 순리가 된다.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 하늘의 뜻, 하나님의 의지에 조화롭게 맞추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인간이 참으로 깨달음은 순종과 불순종, 또는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 또는 하나님과의 말씀에 연관된 인간의 책임이 지니는 합의이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을 행사하여야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래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신학에서 부터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 존재이어서 인간은 그가 살아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삶이 세월을 따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곧 삶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죄인이며 구원받을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주인으로서 창조자와 구원자로서 입장을 가지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좋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고, 인간이 미완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이 삶이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는 성서의 증언은 매우 분명하게 이를 삶을 통해서 알게 한다.
세상의 삶의 모든 것은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없다. 이를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산상수훈에서 알게 한다. 하늘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어 표명하시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소금과 빛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불쌍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등.
이 팔복을 소유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임을 지적하신다. 이 사람은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사람을 지적한다. 소금이나 빛은 자기 삶을 녹여내는 희생의 제물임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삶은 세월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익혀내는 삶의 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사는 목적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혹은 먹이사슬 최상위 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등등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인간은 생태계에 악영향만 줄 뿐인데 차라리 없는 게 더 낫지 않나?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다른 여타 동물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생명의 고통을 공감해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고, 배려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가진 만큼 적절한 이기심도 가지고 있기에 생각만큼 되지가 않기에 불의를 저지른다.
대부분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언론에 나오는 여러 문젯거리를 항상 안주삼아 입에 달고 이야기하고 내일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문제를 인식했다면 그것을 해결로 실천해야 앞으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텐데 모두가 들어서 보고 말로 옮기는 것을 위주로 상식이나 된 것 처럼 일상의 말로 모든 문제를 아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삶은 마치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마시며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순리로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뿌린 것이 없으면 거두는 것이 없다는 것이 순리이다. 이치는 심어 거두게 하고 심는 만큼 거두며 때를 따라 시절을 알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이 이치이며 순리가 된다.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 하늘의 뜻, 하나님의 의지에 조화롭게 맞추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인간이 참으로 깨달음은 순종과 불순종, 또는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 또는 하나님과의 말씀에 연관된 인간의 책임이 지니는 합의이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을 행사하여야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래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신학에서 부터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 존재이어서 인간은 그가 살아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삶이 세월을 따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곧 삶을 익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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