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유럽의 종교개혁은 참된 교회 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 타락한 로마 가톨릭교회에 저항한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들을 바르게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비성경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말씀에 기초한 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저들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 시대에 들어와 행해지는 종교개혁 기념행사는 과거에 천착한 채 실천 없는 변질된 모습만 가득 차 있을 따름이다. 종교개혁 기념행사와 이론적인 학술대회 등은 오히려 우려할만한 형편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와 발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 이론만 난무하게 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금년(2015년)은 특별히 얀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517년이 되면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 95개 항의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지 500주년이 된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다양한 종교개혁 기념행사들이 열리게 되지만 금년에는 더욱 유난을 떠는 것 같다, 나아가 여러 교단들과 기독교 단체들은 벌써부터 2년 후의 행사를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냉철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교회를 개혁하는 일은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이 관례화되면 참다운 실천을 방해할 우려가 따른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써 마치 종교개혁자들의 대열에 선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올바르게 개혁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지가 있다면 몇 년 후에 있을 행사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개혁을 실천해야만 한다. 그것은 나중으로 미루어서 될 일이 아니다. 성경을 벗어난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이 있다면, 말씀을 아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정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심각한 질병에 걸렸는데 당장 치료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채 몇 년 후에 있을 칠순 잔치를 위한 다채로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환자는 더욱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태도는 환자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라 이기적인 탁상공론이 될 뿐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종교개혁 기념일이 끼어 있는 10월에만 떠들썩해 할 것이 아니라 매달 매일 개혁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2017년을 앞두고 많은 돈이 들어가는 성대한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준비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교회 내부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어야 한다. 교회를 위한 개혁은 특별한 때를 잡아 기념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제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 개혁은 상당한 어려움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행사는 그와 전혀 다르다. 거기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매력 있고 달콤한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제공된다.
우리는 교회 회복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고 피를 흘리며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어떤 형태든 사사로운 이득을 챙기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선배들을 욕보이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2년 후에 있을 기념행사가 아니라 지금 당장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부패한 한국 교회에 대한 현실적 개혁을 외면한 채 몇 년 후의 화려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와 같은 태도가 우선적인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될 과제이다. 설령 기념행사를 하더라도 그것은 실천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단순한 행사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 생명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 시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벌이는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보면 땅을 치고 한탄할 것이다. 그들은 나중의 후손들이 저들의 개혁운동을 기념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저들이 바란 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 교회가 건전하게 상속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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