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저자가 말하려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가 유아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율법은 모세로 인하여 왔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로 인하여 왔다함은 또 무엇일까? 요한 공동체는 빛과 어둠으로 그가 주장하려는 논제를 이분법적으로 이끌어 간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한다.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최고봉 니고데모를 책망하고 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알지 못하느냐? 저를 호되게 꾸짖으며, ‘위로부터 난자라야 하나님나라를 본다.’ 하였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지루하게 여겨질 만큼 또 다시 육으로 되받는다. 사람이 어떻게 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그것이 될법한 말씀이십니까? 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자아의 탄생을 경험하지 않으면, 또 다시 옛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의 내면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고 알고 있다면, 그의 교회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일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만큼 유기적인 공동체일 것이다. 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의 내면에서 퇴색되어 가고, 세속적 가치관에 희석이 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역시 예수가 허물려던 교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의 교회가 60주년이 될 당시, 그 보다 앞서서 세상에 나온 복음서들에서 비쳐지고 있는 교회 모습을, 마치 옛날로 되돌아 가는듯한 느낌을, 요한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 같다. 복음서마다 12이란 숫자를 특정화 시키고 있고, 일곱이 그 12와 비교될 때에 결코 뒤처지질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관심에서는 일곱 집사의 빛이 바래져있다. 당시의 세속적 수준을 넘어서질 못한다. 특히 요즈음 우리 토양에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던 사람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의 범위 보다는 성령의 면적이 작아진 듯 하고,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듯하고, 종내는 성령의 흔적마저 지워지게 된다.
그리스도론적인 교회론은 종교개혁을 할 즈음에 잠시 몇몇 개혁자들에게서 형성되는 듯하다가, 찻잔이 식기도 전에, 로마 가톨릭이 교회론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성령마저도 이 한국 땅에 들어서시자마자 교회의 포로가 되신 듯, 일부 목회자들이나 몇몇 학자들의 작은 관심만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타락한 교회들에 의해서 영광의 빛이 바래지고, 성령의 사역이 자취를 감추어 가는 모습은, 마치 제사장 엘리가 죽던 날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에서 떠나가지 않았던가? 만약 한국교회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길에서 돌아서질 못한다면, 개신교회는 쇠퇴하게 되고, 신도들은 로마가톨릭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 어느 미래학자의 주장 같이, 개신교는 500년간 진화되어온 로마가톨릭보다 심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이 공관복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소리침은 왜일까? 당시 교회들이 유대교의 박해보다도 더 위험한 요소가 교회 내부에 자리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을 복음서 맨 앞에서 그렇게 선포하셔야 했을까?
요한의 공동체에서는, 전례만 있던 교회가 변하여서 성도 개개인의 인격과 삶에서 생수가 솟아나 강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가 있다. 교회가 전례로 사용하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야기도 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모든 하객들의 흥이 떨어진 잔치 집에, 다시금 흥을 돋우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야곱의 우물에서만 물을 길어먹던 사마리아 인들이 비로소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된 영생의 이야기가 있다.
요한의 교회에는 특별히 어느 공동체보다도,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어 드린다. 왜 하필이면 기름을 발에다가 부은 것일까? 적어도 왕으로 그의 왕국에 입성할 채비를 차리는 것이라면 머리에다 기름을 부어야지, 어찌해서 발에다가 기름을 부어드린단 말인가? 요한의 교회는 위에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저들 모두가 ‘본 바요, 들은 바요, 만진 바요, 아는 바라’하였다. 요한 공동체 개개인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며, 피와 부활하심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텐트가 그의 백성을 덮으신 성전이 되었던 것이다. 요한의 교회에서 기름을 발에다가 붓는 까닭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이라야 비로소 하늘의 시민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니고데모는 지루하게 여겨질 만큼 또 다시 육으로 되받는다. 사람이 어떻게 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그것이 될법한 말씀이십니까? 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자아의 탄생을 경험하지 않으면, 또 다시 옛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의 내면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고 알고 있다면, 그의 교회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일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만큼 유기적인 공동체일 것이다. 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의 내면에서 퇴색되어 가고, 세속적 가치관에 희석이 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역시 예수가 허물려던 교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의 교회가 60주년이 될 당시, 그 보다 앞서서 세상에 나온 복음서들에서 비쳐지고 있는 교회 모습을, 마치 옛날로 되돌아 가는듯한 느낌을, 요한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 같다. 복음서마다 12이란 숫자를 특정화 시키고 있고, 일곱이 그 12와 비교될 때에 결코 뒤처지질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관심에서는 일곱 집사의 빛이 바래져있다. 당시의 세속적 수준을 넘어서질 못한다. 특히 요즈음 우리 토양에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던 사람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의 범위 보다는 성령의 면적이 작아진 듯 하고,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듯하고, 종내는 성령의 흔적마저 지워지게 된다.
그리스도론적인 교회론은 종교개혁을 할 즈음에 잠시 몇몇 개혁자들에게서 형성되는 듯하다가, 찻잔이 식기도 전에, 로마 가톨릭이 교회론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성령마저도 이 한국 땅에 들어서시자마자 교회의 포로가 되신 듯, 일부 목회자들이나 몇몇 학자들의 작은 관심만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타락한 교회들에 의해서 영광의 빛이 바래지고, 성령의 사역이 자취를 감추어 가는 모습은, 마치 제사장 엘리가 죽던 날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에서 떠나가지 않았던가? 만약 한국교회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길에서 돌아서질 못한다면, 개신교회는 쇠퇴하게 되고, 신도들은 로마가톨릭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 어느 미래학자의 주장 같이, 개신교는 500년간 진화되어온 로마가톨릭보다 심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이 공관복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소리침은 왜일까? 당시 교회들이 유대교의 박해보다도 더 위험한 요소가 교회 내부에 자리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을 복음서 맨 앞에서 그렇게 선포하셔야 했을까?
요한의 공동체에서는, 전례만 있던 교회가 변하여서 성도 개개인의 인격과 삶에서 생수가 솟아나 강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가 있다. 교회가 전례로 사용하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야기도 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모든 하객들의 흥이 떨어진 잔치 집에, 다시금 흥을 돋우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야곱의 우물에서만 물을 길어먹던 사마리아 인들이 비로소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된 영생의 이야기가 있다.
요한의 교회에는 특별히 어느 공동체보다도,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어 드린다. 왜 하필이면 기름을 발에다가 부은 것일까? 적어도 왕으로 그의 왕국에 입성할 채비를 차리는 것이라면 머리에다 기름을 부어야지, 어찌해서 발에다가 기름을 부어드린단 말인가? 요한의 교회는 위에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저들 모두가 ‘본 바요, 들은 바요, 만진 바요, 아는 바라’하였다. 요한 공동체 개개인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며, 피와 부활하심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텐트가 그의 백성을 덮으신 성전이 되었던 것이다. 요한의 교회에서 기름을 발에다가 붓는 까닭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이라야 비로소 하늘의 시민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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