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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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군 우보면 출신
이봉학(李鳳鶴 1919.1.9~2004.2.6) 목사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월 9일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우곡리 636-1번지에서 이군이씨와 정윤택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은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1904년 일제는 러시아에 전쟁을 도발, 조선은 일제의 전쟁기지로 화하여 일본군대에 유린되는 동시에 이땅에 통감부가 설치되게 이르렀고,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차례로 침탈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항일 무력투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당시 황성신문(皇成新聞)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다.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도 늑약(勒約)의 무효를 주장했고, 전국의 유생(儒生)들과 원로대신들까지도 이 협약(協約)을 규탄 상소하는가 하면 의열사(義烈士)들의 자결 순국사건들이 줄을 이어갔다.
1910년 8월엔 한일병합으로 조선의 국권은 명일천하(明日天下)에서 날강도질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의 앞날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조국의 현실 속에서 이봉학은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군위(軍威)는 경상도 오지 중의 오지였고,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중앙선 철도조차 없었던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너나 할것없이 먹고 살기가 힘든 농촌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 가는 열악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제는 공출이란 명분으로 농산물을 탈취, 일본으로 빼내어 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대구의 인근 지방인 경산(慶山) 자인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엔 친척들도 살고 있었지만 큰 도시 가까운 지방으로 나오면 벌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해서였던 것이다. 그 때가 이봉학의 나이 16세 때였다. 자인(慈仁)지방은 유림(儒林)들이 많아 향교도 있었으나, 비교적 교육환경은 그리 좋지않은 지역이었다.
이봉학은 자인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래에 비해 비교적 머리가 좋아 학업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1940년에는 대구공립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중등교육을 무난히 마치고 졸업하자마자 자기가 살고있던 자인면 사무소에 서기로 취직, 젊음을 불태우며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고, 청년기의 나이가 되어 결혼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마침 당시 경산과 인접해 있는 경북 청도(淸道)에 있는 신읍교회 유정순목사의 수양딸 김계희씨를 만나 천생의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다.

면서기를 거쳐 경찰학교 졸업
이봉학 청년은 키는 보통이었으나 타고난 건강이 있어 무슨 일에나 적극적이었고 한번 마음 먹으면 기어히 해 내고야 마는 강직함이 그에겐 있었다.
이후 면사무소 서기 자리에 얽매어 일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좀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침 경찰전문학교(국립)에 응시해 면서기직을 사임하고 경찰학교로 진학 2년의 전과정을 마치고, 첫 임지로 경북 청도경찰서로 임명받아 갔다.
청도는 평야는 30% 정도, 동쪽으론 거의 산지 형태의 지형이다. 유명한 일연(一然)의 고향이요, 그가 도를 닦았던 운문사(雲門寺)가 있고, 이곳엔 여승을 교육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명찰 가운데 하나요, 불교박물관이 있다.
이봉학에게는 개인적으로는 처가가 있는 곳이요, 부임하자마자 신읍교회에 나가며 열심으로 공무(公務)와 함께 신앙생활에도 적극적이었고 청도대성교회에 교역자가 이동되고 공백으로 있을 때엔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說敎者) 역할을 하는 일에도 빛을 발하였다.
그에겐 5남1녀의 자녀가 있다. 청도경찰서에 근무할 때, 장남 재문이 1941년 12월 23일 태어났다. 처음 아들이요 기도로 얻은 자식이었으니 얼마나 반갑고 기특한 자녀이었겠는가?
장남 재문(在文)은 초등학교를 청도에서 마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대구에 있는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유명한 계성학교(啓聖學校)로 진학했다. 그리고 학업을 마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까지 이수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사가 되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성역에 충성을 다하였다. 대구서문교회 부목사로  시작, 안수를 받은 후엔 대구봉덕교회에서 위임목사로 노회와 총회 고시부장을 비롯, 중직을 맡아 대구교계를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아버지 이봉학 목사의 총회 총무일을 볼 때와 부총회장과 총회장의 일을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고, 아버지에게 힘이 되었고 동역자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이재문 목사는 대구 대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임강사로, 조교수로, 정교수가 되어 그가 퇴임하기까지 많은 후배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이봉학 목사는 바쁜 공무원생활 가운데서도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자녀교육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가정에서는 일찍 홀로된 처형을 사별할 때까지 24년 동안 한 울안에 모시고 살았으며, 사모(김계희)는 집에서 잠자는 기억을 교인들이 모를 정도로 자녀들과 남편의 사역을 위해 평생 교회에서 철야하며 기도로 뒷받침한 기도의 어머니로 기도의 역군으로 그를 아는 신자들의 입에 회자화 되었다.
이봉학은 목사가 되기 전엔 교역자 없는 교회의 강단을 지켜낼 정도로 설교나 강의 봉사에 항상 열심이었고 적극적이어서 장로(長老)로 교회를 섬기면서도 보통사람들보다 배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경산경찰서로 전근되어 와서는 공무원으로써 장로로 경산중앙교회를 비롯해 청도대성교회와 안계중앙교회를 설립 하기도 했고, 청도대성교회에서는 자그만치 7년간 강단을 지키기도 했는데, 이봉학 장로가 성직자(목사)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경찰관 신분으로 있을 때는 경상북도 최우수 모범경찰상을 받기도 했으니 그의 성실함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50대 후반에 경찰공무원직 사임하고 신학교 입학
드디어 그는 경찰공무원직을 사임하고 대구에 있는 당시 대한장로회신학교(현 대신대학교 전신)에 진학, 신학훈련을 받으며 목회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50대 후반이었으니 그의 결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총회신학교를 거쳐 드디어 자기가 속한 경청노회(慶淸老會)에서 목사장립을 받은 후 의성 안계교회와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 및 경산중앙교회의 위임목사로 그의 마지막 인생을 목숨을 걸고 목회사역에 열정을 다하였다.
압량제일교회 재직시에 총회 총무로 2차(6년간)나 봉사하였는데 총회 행정과 재정자립을 닥는데 큰 이바지를 하였다. 이런 그의 강직함과 성실과 실천력을 인정해 그는 총무직을 마친 후 바로 교단 행정의 길인 부총회장(1990. 9)에 피선되었으며, 이듬해 1991년 9월 대구 동신교회에서 열린 제76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말년에 경청노회의 노회장을 비롯 경청노회 직영 성경전문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노회와 총회 안에 일어나는 잡다한 일들에 관여, 명쾌한 해결사로 혹은 협력자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그의 봉사직으로는 경중노회장, 경중노회고등성경학교 교장, 경청노회장,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및 감사, 대신대학교 강사, 교단지인 기독신문 실행이사 등. 그가 총회 총무 재직시엔 총회회관 건립시 11억원의 부채를 해결해 교단 행정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경청노회 총대로 20년간 연속 봉사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찬송가협의회 회장, 한국찬송가공회 공동회장(4회), 러시안선교회 총재, 사랑누리선교회 이사장, 북방선교대학원장, 총회원로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공력을 인정해 미국장로교신학대학으로부터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총회장 재직시에 결의 시행된 안건들을 보면, ① 노회분립(한남, 중부, 군산과 군산남, 수원노회를 남수원, 서수원으로) ② 노회조직(동남아) 및 노회북구로는 여수노회 ③ 이장림씨를 이단으로 규정하다 ④ 할렐루야기도원 생수에 신유능력, 유·무건은 비성경적임으로  금지하기로 하다 ⑤ 공예배 사용성경은 개역성경만을 사용하기로 하다 ⑥ 총회신학교에 입학할 편목대상 교단은 고려파, 예성, 기성, 감리교, 구세군 기타 장로교회로써 우리 교단의 신학과 교리를 같이 하고 학력과 자격을 구비한 자들에게만 응시키로 하다 ⑦ 모든 출판물은 총회가 직영하되 총회 임원회와 출판부가 협의하여 출판부를 관장하기로 하다 ⑧ 은급기금 조성을 위하여 각 교회 경상비 예산의 0.2%를 책정하여 납부하기로 하다. ⑨ 제7대 총무로 최병환 목사를 인준하다 ⑩ 기독신보사 사장, 주필은 사장과 주필 이외에는 타 부서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다 ⑪ 계룡교회 건축비 모금을 위해 목사장로 권사는 2만원 이상, 전도사는 1만원 이상 거출키로 하다 ⑫ 문서규정과 보수규정을 제정키로 하다.
이봉학 목사는 운동으로 평소 늘 자신의 건강을 관리했는데, 특히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특기가 탁구다. 그가 제직한 교회들마다 젊은이들이 그를 이겨낸 적이 없었고, 그가 총회 총무로 봉직할 때에도 총회의 젊은 직원들이 그를 이겨 본 적이 없다는 일화를 남기었다.
한마디로 그는 겉으로는 경찰관 출신이라 차가울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그를 대했던 주위의 모든 교계 인사들의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외유내강한 분으로 그를 기리게 된다는 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2004년 1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순간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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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제76회 총회장 이봉학(李鳳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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