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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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 출신
신세원(申世元 1935.7.17~2015.7.13) 목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817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국민학교를 거쳐 1949년 9월 의성중학교(義城中學校)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접하게 되었고, 교회(의성읍)에서는 소년부에 속해 열심으로 신앙생활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후 1950년 의성읍에 새로 오로교회가 세워졌는데 신세원은 교회를 오로교회로 옮겨 출석하였다. 그 이유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조성암(曺聖岩) 목사로부터 학습과 세례(洗禮)를 받고 본격적인 신앙에 몰두하였다.
1952년 2월 의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를즈음 1953년 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해 1956년 졸업과 함께 서울로 바로 올라와 앞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꿈을 펼치고자 기도하던 일이 그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낸 권정달씨가 그의 안동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신목사는 당시 서울 남산 위에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 예과에 입학하였다. 예과 과정을 마친 신세원은 1957년 6월 총회신학교 본과에 진학하자마자 군(軍) 소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하여 만3년간 복무한 후 1960년 2월 대한민국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제대 후 그해 9월 서울 용산역 앞에 임시교사(校舍)로 있던 총회신학교 본과 1학년 2학기에 복학해 본격적인 교역자 훈련을 받았다.
신세원 목사는 1961년 1월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勝洞敎會)에 시무하고 있던 이대영(李大榮) 목사의 부름을 받고 승동교회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면서 1962년 12월 총회신학교 본과를(제65회)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전임전도사로서 장로회 총회신학교대학원(神學碩士 과정)에 입학하여 1965년 의성읍교회에서 모인 경중노회(慶中老會)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았고, 1966년 3월 안계교회에서 모인 경중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대구 협성재단 교목으로 출발
목사안수를 받자 신목사는 서울 승동교회를 사임하고 대구에 있는 협성교육재단의 신진욱(申鎭旭) 장로의 부름을 받고 협성교육산하의 10개교의 신앙교육을 위한 교목(校牧)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동시에 대구에 있는 본교단 소속 지방신학교 가운데 하나인 대구신학교(大邱神學校, 현 대신대학교 전신)에서 히브리어(Hebrew)와 헬라어(Greek)를 비롯 칼빈주의(Calvinism)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8년 협성재단의 교목직을 사임하고 같은 시내에 있는 대구 문화교회(文化敎會)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신목사로는 최초의 단독목회 생활이었다. 문화교회를 담임하면서 미래의 한국사회와 목회현장을 내다보면서 뜻한 바 있어 당시 전국 유일의 한국사회사업대학(韓國社會事業大學, 현 대구대학교 전신)에 학사 편입으로 특수교육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수하고 1972년에 졸업하였다.
신세원목사가 정신지체자를 지도하는 이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앞으로 전개될 산업사회에서 발생하게 될 정신박약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세원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이 일은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대구문화교회 시무
한편 신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 문화교회의 당회에서는 신세원 목사의 학문적 재질을 인정하여 미국유학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79년 5월부터 1981년 6월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Pasadena)에 있는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한국교회의 설교 형태 분석을 주제로 목회학 박사학위(D.Min)를 취득하였으며, 미국 유학중에는 예장총회 소속 미주대회가 운영하는 미주신학교(美州神學校)에서 칼빈주의를 강의하기도 했다.
신목사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얼마되지 않아 서울의 창신교회(昌信敎會)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후원으로 유학을 했기에 당장 옮길 처지가 못되었다. 4년이 지난 1984년 11월 30일 대구 문화교회를 사임하고 창신교회에 부임했고, 같은해 12월 20일 위임식을 하였다.

서울 창신교회 부임 후 교회를 강남으로 옮겨 헌당
창신교회에 부임 후 첫번째 맞이한 큰 행사로는 교회설립 50주년 기념 희년행사였다. 기념예배를 비롯 50주년 기념화보집 간행과 교회 신축 등 과제가 산적하였다. 신목사가 부임한지 7개월만에 당회에서 종로구 숭인동 312의 2에 있는 교회건물을 매각하고 강남구 서초동 515번지로 건축이전 할 것을 결의하고 진행 중 1988년 봄 드디어 숭인동의 구 교회 대지가 매각되고 당년도 11월 20일에 이전예배를 드리고, 같은 11월 27일엔 미완공된 신축건물에서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드디어 1990년 5월 5일(토) 오전 11시 헌당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창신교회 70년사, 홍치모, 새한기획 2006. p.203 참고).
신세원 목사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한가지는 초기 한국교회사 관련 사료(史料)를 평생 수집한 8만여 점 자료를 그의 모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경기도 용인시)에 기증, 그의 호를 따 이름지은 문소기독교박물관을 만든 문화사역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박물관 제1전시실에 는 주로 초기 신학고서들과 주일학교 공과가 체계적으로 수집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기독교회 관계 초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3전시실에는 예배용품을 비롯 세계 각 선교지용품들이 수집 전시되어 있어 목회자들과 신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역사의 귀중성을 일깨워주는 한국교회 신앙관련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특이한 자료들로는 초기 평양신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수들 강의안(Print물)이 이채롭다(교회와 역사 : 박정규 목사 고희기념논문집 2009, 에덴닷컴 p.237).
그의 생존시에 남긴 말 가운데 개인적인 관심과 취미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교회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나의 책무라고 말한바 있다(기독교신문 2014. 5. 25 요즈음 어떻게 지나고 계십니까, 인터뷰기사 p.3). 그의 이 말은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명구라고 생각한다.

문소기독교박물관설립해 출신모교에 기증
신목사는 1997년 9월 23일 서울 충현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2회 총회에서 명예로운 총회장에 선출되어 교단 행정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2005년 10월 27일 창신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에게 뒤따르는 별명이 있다. 키가 크고 인물됨이 준수함에 기인한 것이지만 선비목사로 어떤 때는 영국신사처럼 깔끔해서 울어나는 신사목사로 후배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그가 가고 없는 지금도 지인들이 만나면 회자화 되고 있다.
그가 이끌었던 총회장 재임시에 결의된 안건들을 열거해 보면, ① 타교단과의 강단교류를 본 교단과 신앙고백이 같고 성경관과 구원관이 동일한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건전한 교단은 해 교회 당회장이 책임지고 교류하도록 한다. ② 전북노회를 (전북·호남) 분립한다. ③ 빈야드운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자는 다락방운동에 참여 하는자에 하는 것 같이 징계하기로 한다. ④ 개혁합신(合神)측과 본총회 출신은 영입하기로 하다. 개혁신학(합신)을 졸업한 목사는 총회신학원을 1년 수료하기로 하다. ⑤ 편목의 목사임직과 위임 기산는 정치 제15장 13조에 의하여 하기로 하되 강도사 인허때부터 교단가입으로 한다. ⑥ 외국 국적을 가진 목사 후보생(신학생)은 총신에서 각각 노회로 보내어 관리하기로 한다.
신세원 목사의 사역 전반부는 협성교육재단 산하의 교육목회와 대구문화교회의 학구적인 조용한 목회였다면, 후반 목회사역은 서울의 창신교회에서 꽃피운 목회황금기였다고 하겠다. 서울에서의 그의 목회 외적인 활동도 대한성서공회 이사를 비롯 기독교방송 등 기독교 관계의 여러 기관에 참여한 활동과 교단내의 경북노회 서기, 노회장, 노회록 출판위원회 출판부장을 비롯 총회에서도 고시부장, 서기, 부총회장, 기독신보 이사 등 여러 부서에서 교정(敎政)을 성공적으로 펼쳐 나갔기 때문이다.
전술한 대로 그의 사역 가운데 한 가지 의미있고 역사적인 열매는 소천 직전까지 교단지인 기독신문 지상에(문소칼럼)을 연재, 지도자들의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명칼럼을 연재한 열정을 불태웠던 일이라 하겠다.(기독신문사에 의해 문소칼럼집이 2권 간행됨)
필자는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옆에서 지켜본 신세원 목사야말로 전형적인 칼빈의 후예요, 인자하고도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요, 겸손의 미덕이 그의 언어와 행동에 물신 묻어나는 본받고 싶은 전형적인 장로교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어려움을 안고 시도 때도 없이 후배들이 그를 찾아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공적으로만 아니라 때로는 사적으로도 따뜻한 손길로 혹은 사랑의 대접으로 서운하지 않게 돌려보내는 모습을 필자는 여러차례 목격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세원 목사도 하늘나라에 쓰일 곳이 더 있어서인지 지난 2015년 7월 15일 자택에서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생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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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제82회 총회장 신세원(申世元)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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