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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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의주 출신
한석진(韓錫晋 1868.9.6~1939.8.20)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동부동에서 양반가문인 청주(淸州) 한씨 한지운(韓祉云)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9세 때부터 19세까지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종교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유교에 염증을 느끼고 의주에 있는 석숭산(石崇山)의 금강사(金剛寺)에 다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력(生命力)이 없음을 깨닫고 도교(道敎)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부친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때 이미 만주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돌아온 백홍준과 서상륜을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기독교에 관한 생명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또 의주의 김이련(金利鍊)으로부터도 기독교에로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유 받기도 하였다.
그는 1884년 고향 인근에 살고 있는 이일심(李一心)을 만나 결혼하였고, 기독교로의 개종에 대하여 부친의 만류로 머뭇거리다가 1887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한약재(漢藥材) 장사를 하면서 속국의 한을 깨닫고 기독교에 입신(入信)하게 된다.

마팻에게 세례 받고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891년 마팻 선교사가 의주에 오자 정식으로 기독교로 전향하겠다는 서약과 문답을 하고 세례(洗禮)를 받게 되었고, 그때 함께 세례 받은 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김정현과 김석례였다. 그는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마팻(S.Moffett)의 조사(助師)가 되었고, 평양에서 그와 함께 장대현(章臺峴)교회를 설립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석진은 1901년 마팻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장로회신학교(처음엔 신학반)에 입학, 190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예로운 한인 교역자가 되었다.
그는 계속 경성(京城)에 남아 마팻으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고 1893년 3월 6일 마포삼열과 그래함 리 스왈론과 함께 평양으로 올라갔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한석진의 이름으로 집 한 채를 구매하였으나 관찰사 민병석(閔丙奭)의 훼방과 주민들의 항의로 집을 물리는 바람에 처음 계획했던 전도활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선교부로부터 한석진은 평양에 교회개척의 명을 받고 의주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평양으로 불러와 거처를 정하고 5월에는 정식으로 살림집도 구입해 선교기지로 삼고 1893년 6월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이것이 넙다리골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1893년 6월 평양 넙다리교회 설립
그러나 1894년 이듬해 5월 10일 새벽 감리교 전도인 김창식(金昌植)과 함께 관찰사 민병식이 보낸 포졸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背敎)하지 않으면 사형을 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홀(W.J.Hall), 알렌(J.Allen), 스크랜턴(Scranton), 마팻(S.Moffett) 등의 노력으로 구출되었다.
1984년 6월 청일(淸日)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 융진(隆眞)으로 피난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희생적으로 전도한 결과 1898년에는 교인수가 950여 명에 달하였다. 그후 1899년 3월 장대현으로 교회를 옮겼다. 그리고 1900년 6월 장대현교회 건축기공예배를 감격스럽게 드렸다.
또한 그는 1896년 10월부터는 평양의 동쪽구역을 맡아 전담하였는데, 그때 소우물(將泉)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03년 6월에는 이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이때에 구동, 신의, 신애, 명의 학교를 세워 4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또 1908년 경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회의 규칙위원장을 맡아 민족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말 사실상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었다.
그는 1907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독노회가 설립될 당시 최초의 서기(書記)로 선출되었으며, 독노회 회록 서문을 기술하였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이천교회의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장로회 총회 창설때까지 그는 독노회 서기로 일하면서 전기한 노회록의 서문뿐만 아니라 신경(信經) 제정위원, 과정위원, 사무국위원 등으로 초기 조선장로교회의 체제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교단지 ‘예수교회보’ 창간
독노회는 1909년 <예수교회보> 발간을 그에게 맡겼으나 그해 10월에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모임을 교회로 조직하여 ‘동경한인교회’를 설립하고 3개월만에 귀국하여 1910년 2월 29일 그에게 맡겨졌던 <예수교회보>라는 교단지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총독부에 의해 신문 압수사건이 터지고, 그해 말 사장직에서 물러나 의주 맞은편에 있는 만주땅의 안동교회에 부임하여 1913년에는 교회를 신축하였다.
1912년 9월 역사적인 제1회 총회에서 서기로, 11월 경충노회에서는 노회장(老會長)으로, 1913년에는 부총회장으로 1917년에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17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6회 총회는 목사 장로 총대 76명과, 선교사 총대 42명이 모여 부회장이었던 한석진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선교를 위해 큰 공을 세웠던 언더우드(G.H.Underwood) 목사가 1916년 소천하자 그의 정신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의 총회장 재임시에 결의된 중요 안건들 가운데에는 ① 함경노회(함북·한남)를 분립하기로 하다. ② 전라노회도(전북·전남) 분립하기로 하다. ③ 총회산하 소학교가 544개, 학생이 16,742명으로 보고되다. ④ 천주교회 교인과 결혼하는 일은 위태한 일이기 때문에 당회가 성혼이 되지않도록 권면하기로 하다. ⑤ 불신자와 혼인한 사람에 대한 책벌과 해벌기간은 당회에 맡겨 처리케 하다.

불신 결혼은 부모까지 책벌
당시 불신자와 결혼한 교인은 부모까지 책벌하였는데 배우자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 해벌해 주었다. 권징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는 현대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겠다.
총회장을 역임한 한석진 목사는 마산교회(현 마산문창교회)를 사임하고 3.1운동에 가담했던 신의주교회 김병농 목사가 채포되어 교회가 빈 김목사 후임으로 부임해 김병농 목사의 옥바라지를 하며 목회를 하였다. 한석진 목사는 신의주교회가 계속 부흥성장 하자 1921년에는 신의주 제2교회로 분립해 주기도 했다.
한편 한석진 목사는 1917년 총회장 재임시절에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를 창설 주도함으로, 오늘날 에큐메니칼 정신인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앞장선 선견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총회에서 강원도 금강산 온정리에 세우기로 한 총회수양관 건축준비위원장을 맡아 수양관 건립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 목사의 모금운동과 노력으로 1930년 8900평의 대지 위에 2층으로 연건평 232평의 총회수양관을 <기독교수양관>이란 이름으로 완공하였다.
한국교회 사가인 김수진 박사는 한석진 목사에 대해 평하기를 “한석진 목사는 사상가나 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속 깊이 생명을 귀히 여기는 제일주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이 설립하고 건축했던 장대현교회가 자체 분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측과 교인측 양자를 설득해 3년간 지속되었던 교회 내부 알력을 인내와 사랑으로 해결해 낸 온유한 마음의 지도자였다”라고 했다.
이러한 한석진에게는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선교사들의 지나친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질책했고, 기득권을 내놓고 조선교회를 섬기라고 호령했다. 자기가 여러 곳에 교회개척을 할 때마다 선교사들이 건축비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거절하고 한국교회 자력으로 완성하였다. 선교사들을 향해 당신들이 할 일을 다했으면 속히 조선을 떠나라고 다그친 인물이 한석진 목사였다.
한석진 목사는 1939년 8월 20일 간경화 증세가 겹쳐 집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나이 71세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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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6회 총회장 한석진(韓錫晋)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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