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새해 “한 해가 온다”는 말씀으로 살려 한다. 오늘에 와서 새해 365날을 어떻게 맞을까? 하는 마음으로 새 해의 삶을 생각해 본다.
한 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구분한다. 이렇게 시절을 두는 것은 그 계절의 시기나 때가 있어 그 제철에 알맞은 시절을 따라 때를 찾아 사는 삶으로 사는 것을 살게 한다.
철이란 꽃피는 동산이나 흐르는 냇물에도 그리고 눈 내리는 골짜기 안에도 있다. 얼음이 풀리면 한 철이 지나가고 꽃이 피면 서서히 한철이 들어온다. 그리고 한 시절이이 가고 오는 것은 자연을 품는 때를 안다. 사람의 몸에도 머릿속의 혈관과 같이 같은 핏줄 속으로 철이 가고 철이 들어온다. 자연의 과일 속에 시절에 따라 철이 익혀 가듯이 인생의 삶에도 그 때의 철이 가고 때가 들어와 생명이 익혀가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 기력이 약해진다는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잃는다. 철이 드는 익은 과일은 향을 내고 아름다운 열매로 그 시절의 자태를 들어낸다. 이것이 나이를 먹어 익힌 삶이 늙어가면서도 삶을 익히는 것이다.
하루를 ‘한 날’이라함도 하루를 더 묵고 가기로 하여 하루를 이해하는 것으로 밤을 맞으면 어두운 밤이 지나 그 모양대로 있다가 있는 그대로 자다가 어제처럼 마냥 아침이 오니 또 하루를 산다. 이렇게 지나고 또 하루아침이 오고 밤을 지새우며 하루를 보내면 마침내 아침은 오고야 마는 신비를 깨닫게 한다.
‘한 해’를 말함도 ‘해가 가고 오는 때의 한해가 그 바뀜’을 가지고 한 해가 오는 의미를 알게 한다. 그래서 시간은 우리 삶의 밖에서 흐르다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강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일년 달력이 한장 한장 넘어가다 새 달이 오고 1년의 한해는 가고 오는 것으로 새해를 가리킨다. 그저 일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남기고 싶은 의미도 있어 메모들이 남기고 간 기억들로 새로운 의미를 갖기도 한다.
어제도 먼 과거처럼 뒤로 물러나고 지나온 세월이 까마득한 시절처럼 지내려 하지만 추억은 저 혼자 남는다. 마치 달리던 선수처럼 두리번거리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새해엔 마음껏 살아 보려는 새 각오가 생겨나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금(只今)이란 말은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되는) ‘시간’으로 현재를 말하고 시방(時方=바로 우리들이 떠날 때다)을 의미하여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책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권세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때 죽은 이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결합한다. 그 후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되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서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며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공이라는 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그의 목적을 수행하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과 하나님의 특성은 역사의 마지막 상황에 표출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한다. 예수 안에서 현재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궁극적으로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 주장들이 가리키는 마지막 일들은 현재의 사실들이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역사의 종말이며 목표인 그리스도와 동참하기 때문에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심판과 부활과 영생을 알게 하는 “바로 지금” 이라는 시간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행위임을 안다. 생명의 의미를 성서로 부터 정리해 보면, 생명은 변화하는 조건의 유동성 속에서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음을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자발적 활동과 경험에서 이를 가리키며, 또한 생명은 다른 개인들과 공존(Co-existence)으로 서술함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물리적 존재를 초월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신령적으로 이해함도 알게 한다.
이 생명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람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없고 다만 하나님이 그것을 멈추게 하실 수 있을 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게 한다. 그러면서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다.
한 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구분한다. 이렇게 시절을 두는 것은 그 계절의 시기나 때가 있어 그 제철에 알맞은 시절을 따라 때를 찾아 사는 삶으로 사는 것을 살게 한다.
철이란 꽃피는 동산이나 흐르는 냇물에도 그리고 눈 내리는 골짜기 안에도 있다. 얼음이 풀리면 한 철이 지나가고 꽃이 피면 서서히 한철이 들어온다. 그리고 한 시절이이 가고 오는 것은 자연을 품는 때를 안다. 사람의 몸에도 머릿속의 혈관과 같이 같은 핏줄 속으로 철이 가고 철이 들어온다. 자연의 과일 속에 시절에 따라 철이 익혀 가듯이 인생의 삶에도 그 때의 철이 가고 때가 들어와 생명이 익혀가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 기력이 약해진다는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잃는다. 철이 드는 익은 과일은 향을 내고 아름다운 열매로 그 시절의 자태를 들어낸다. 이것이 나이를 먹어 익힌 삶이 늙어가면서도 삶을 익히는 것이다.
하루를 ‘한 날’이라함도 하루를 더 묵고 가기로 하여 하루를 이해하는 것으로 밤을 맞으면 어두운 밤이 지나 그 모양대로 있다가 있는 그대로 자다가 어제처럼 마냥 아침이 오니 또 하루를 산다. 이렇게 지나고 또 하루아침이 오고 밤을 지새우며 하루를 보내면 마침내 아침은 오고야 마는 신비를 깨닫게 한다.
‘한 해’를 말함도 ‘해가 가고 오는 때의 한해가 그 바뀜’을 가지고 한 해가 오는 의미를 알게 한다. 그래서 시간은 우리 삶의 밖에서 흐르다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강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일년 달력이 한장 한장 넘어가다 새 달이 오고 1년의 한해는 가고 오는 것으로 새해를 가리킨다. 그저 일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남기고 싶은 의미도 있어 메모들이 남기고 간 기억들로 새로운 의미를 갖기도 한다.
어제도 먼 과거처럼 뒤로 물러나고 지나온 세월이 까마득한 시절처럼 지내려 하지만 추억은 저 혼자 남는다. 마치 달리던 선수처럼 두리번거리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새해엔 마음껏 살아 보려는 새 각오가 생겨나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금(只今)이란 말은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되는) ‘시간’으로 현재를 말하고 시방(時方=바로 우리들이 떠날 때다)을 의미하여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책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권세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때 죽은 이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결합한다. 그 후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되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서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며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공이라는 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그의 목적을 수행하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과 하나님의 특성은 역사의 마지막 상황에 표출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한다. 예수 안에서 현재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궁극적으로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 주장들이 가리키는 마지막 일들은 현재의 사실들이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역사의 종말이며 목표인 그리스도와 동참하기 때문에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심판과 부활과 영생을 알게 하는 “바로 지금” 이라는 시간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행위임을 안다. 생명의 의미를 성서로 부터 정리해 보면, 생명은 변화하는 조건의 유동성 속에서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음을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자발적 활동과 경험에서 이를 가리키며, 또한 생명은 다른 개인들과 공존(Co-existence)으로 서술함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물리적 존재를 초월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신령적으로 이해함도 알게 한다.
이 생명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람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없고 다만 하나님이 그것을 멈추게 하실 수 있을 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게 한다. 그러면서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