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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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신으로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작
김선두(金善斗, 1876-1949)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요람지로 알려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1년 처음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였다. 또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출입하다보니 평앙에 있는 숭실중학교를 졸업 후, 숭실전문학교에 진학, 숭실 사범 강습과(講習科)를 졸업하고, 1907년부터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봉사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이 출석하고 있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장로로 장립되었다. 같은 해 숭덕(崇德), 숭현(崇賢)학교 교감으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9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의 장로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교회에서 섬기는 장로직(長老職)을 겸임하면서도 선교사의 권고로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고 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그해 6월 조선장로교회 목사로 안수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하였다. 안수를 받자마자 바로 평양 서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15년엔 또 모교인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의 초빙을 받고 강사를 겸하였고, 같은 해에 평양노회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19년에 3.1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김 목사는 어느 누구 보다도 적극적으로 가담 활동하였다. 이때에 장로회 평양신학교 요청으로 출강하기도 하며 한편 송산리교회, 신암교회도 시무한바 있으며,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장으로, 평양노회 경내의 욱정교회, 봉천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봉천신학교(奉天神學校)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
특히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가 일제로부터 강요 당하자 김선두 목사는 이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이의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잠시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귀국하니 이미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어 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동안 일제 당국의 잔학한 학정이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북쪽에서의 심상찮은 기독교 박해 분위기를 느끼고 드디어 남한으로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교회사대사전 제1권 강병도편 기독지혜사 1994. 서울 p.292 참조).
김선두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제1,2,3,4,5회 졸업한 선배들을 제치고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부회장은 자신의 은사였던 마팻(Samel Moffett) 목사가 선임된 것을 보면 선교사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1918년 제7회 총회장으로 선출
그가 총회장이 된 해는 1918년 9월 31일에서 9월 5일 사이 선천북교회당(宣川北敎會堂)에서 모인 제7회 총회였다. 당시 사회를 맡았던 김선두 총회장은 각 교회에서 공예배시에는 반드시 한글(당시엔 언문이라 하였다)성경을 사용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신자들이 함께 부르는 한글찬송가 제창이 겸하게 되기에 이르렀고, 이 운동은 자연스럽게 한글을 몰라 찬송가도 자유로이 부르지 못하고 성경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없었던 평신도들 대상으로 개교회적으로 한글학교를 운영하게 되었고,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자는 계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자각은 1930년대에 이화학교 기독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여름방학 때마다 한글계몽운동이 일어났던 일들이 동기가 되었다. 당시 농촌계몽운동의 선봉에 섰던 최용신 양의 열화같은 농어촌의 생활개선과 일손돕기의 일환으로 전개된 봉사활동 속에는 무료로 의료봉사와 한글공부가 주요 활동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기독교계 안에서도 배민수 박사와 유재기목사를 비롯 농촌운동에 헌신한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확산되었다고 본다.

한글보급운동 적극 권장
우리 현대사에 한글보급운동에 가장 크게 공헌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성경을 우리 글로 읽고 찬송가를 한글로 부를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한국교회였던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의 야학(夜學)으로 이어졌다.
제7회 총회에서는 또 한편 북간도 용정(龍井)에 김내범 목사, 중국 단동 봉황성(鳳凰城) 관천에 차형준 목사, 북간도 목능현에 백봉수 목사를 선교사로 각각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중국산동성(山東省)에 중국인(漢族)을 상대로 선교를 계속 지원하기 위해서 홍승한, 방효원(方孝元) 목사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제7회 총회에서는 황해노회 김장호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함으로 목사직을 휴직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 오늘까지 한국교계 전문신학 학술지로 이어오고 있는 신학지남(神學指南)을 3월에 창간하기로 결의했다.
교회행정으로는 평북노회를 평북과 의주노회로 분립하기로 한 것인데, 장로교 초창기에 노회분립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초대교회의 열심과 부흥 발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총회석상에서 한센병(Leper) 환자들을 위한 특별헌금을 시행하는 등 교회 주위에 있는 소외 계층에 대한 선교열의를 엿볼 수도 있다. 김선두 목사는 총회장 재임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평양에서 전개된 3.1독립운동에도 자신이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으며, 독립운동 주모자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1918년) 제8회 조선야소교회장로회 총회시 총회장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개회예배 설교를 하지 못하였다. 이를 지켜본 주한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 가석방이라도 시켜 총회를 개회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9월 초에 모이는 총회를 10월로 연기해 놓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3.1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서 3년간 옥고
3년 간이란 긴 옥살이를 끝내고 출옥한 김선두 목사는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에 있는 송산교회(松山敎會)를 담임하면서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출강했다.
1926년에는 평안북도 선천(宣川)에 있는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1933년에는 함경북도 성진(城鎭)에 있는 옥정교회를 시무하였다. 그리고 이어 1935년부터 만주 봉천교회(奉天敎會)를 시무하였고, 1938년에는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었던 만주신학원(滿洲神學阮)을 설립하는데도 한 몫을 감당하였다.
김선두 목사는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를 적극 반대하면서 원만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단독으로 도일(渡日)해 일본 교계 지도자들과 기독교 정치인인 이비끼(一四信亮)와 마쯔야마(松山常部) 장로 등을 만나 그 뜻을 이루고자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김선두 목사는 부산으로 귀국하자마자 일본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즉시 유치장으로 끌려가 투옥됐다. 감옥에서의 그의 고통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자 바로 월남해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 현 총신대신대원 전신)을 재건하는데 참여해 힘을 합하였다.
김선두 목사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아들 김성락(金聖樂) 박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 김성락 박사는 1924년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1927년 장로회신학교를 21회로 졸업하고 도미해 신학박사(Th.D) 학위를 마치고 미국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하였다.
그는 서울에 재건된 모교 숭실대학교 이사회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1958년 숭실대학교 제2대 학장(1대는 한경직)을 역임하고 한국교계와 교육계에 크게 이받이 하기도 하였다. 김성락 박사는 임기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평생 그리던 고향땅 평양을 방문, 아버지 김선두 목사가 이루지 못한 실향의 서러움을 이루었다. 방북했을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김 주석이 김성락 박사에게 식사기도를 해달라고 하여 기도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월남해 통일을 바라며 기도했던 김선두 목사는 그리워하던 평양의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으나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주님의 품으로 1949년 6월 25일 73세를 일기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거룩한 생애를 마쳤다(총회를 섬긴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39-4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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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7회 총회장 김선두(金善斗)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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