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마태보다 먼저 기록을 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을 둘러보고서는 그 다음날, 먼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고, 그 다음에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치들의 거래하는 상을 모조리 뒤엎어버린 것이었다. 부랴부랴 제사장들과 책임자들이 나와서 예수께 소리치기를 네가 무슨 권리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운다!’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30여년 뒤에 기록을 한 요한은 어떤 영문에서인지, 이 성전 퍼포먼스를 맨 앞으로 끌어내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는 성전으로 돌격한다. 요한이 이 장면을 기록한 때는 이미 이 예루살렘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얹히질 않는 상태로 무너져서, 폐허가 되어 있었던 때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에 그와 동행한 학자들 중에는 화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다마스쿠스를 지나면서 그린 사실화와, 그 직후에 나온 카메라의 발명으로 인해서 찍혀진 사진들을 보면 흉물스럽기가 짝이 없다. 이토록 폐허로 변해버린 성전을 요한은 이미 본 바요 들은 바요 아는 바였건만, 굳이 다시금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 함은 무슨 영문일까?
우리가 앞으로 삼십년 후,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한국교회를 되돌아보면서, 그때, 우리가 이 교회를 바르게 허물지를 못하여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며 긴 장문의 예레미야의 애가를 눈물로 읊게 되기 때문이어서 일까......?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여서 교회를 세운 이후, 바울이 우려하던 상황을 요한은 직면하고 있었다. 요한묵시록의 교회가 이를 잘 시사한다. 교회들이 이미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때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미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있다. 갤럽연구나 미래학자들의 연구보고서들을 보면 21세기의 종교는 이미 예측되어 나와 있다. 과거에, 기우제를 수없이 지내도 비가 오지를 않자, 제사상을 엎어버리고서는 마침내 종교를 바꿔버린,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재현되는 듯 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지금의 우리 기독교는 마치 예수교라 하기 보다는 율법적인 교회와 유사하다. 모세교회를 보면 한 사람 지도가가 나와서 신의 계시를 받고, 그가 가르치고 일러준 말과 신학을 조차서 길을 가야했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피라미드 구조를 탈피하질 못한다. 이미 유대인들마저도 지난 2,000년을 거치면서 제사장제도라든지, 혈통중심이었던 것을 깡그리 청산하였다. 저들의 회당이 작고 간편하지만 개개인 모두가 세상을 사는 지혜와 윤리가 가장 앞선다.
금세기 초부터 교회 권력자들의 몸집이 너무나 비대해지더니,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뇌졸중 장애가 온 상태이다. 한때는 중간의 문제가 얼마나 크던지 천사들이 일시적으로 중간 역할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이후부터는 이 시스템이 확연하게 달라진 것이다.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지명하던 것과 같이 노심초사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사도행전에서 보인 바와 같이,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하늘의 아들이 되는 권리가 생기고, 영생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기 때문에, 특별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도들 각 사람에게 부어진 기름부음과 각양 은사들을 존중해서, 저들이 갖고 있는 탤런트가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게 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장차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될 것이고, 교회가 사는 길도 될 것이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