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사도 바울은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하셨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 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말씀하신다.산다는 것에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그러기에 삶의 시기와 때도 필요하며 여기에 시간속의 순간의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순한 것에 집착하며 만족하는 시기도 그 나름의 수준에서는 복잡하고 깊은 삶을 위한 준비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흐르는 시간 안에서 삶을 회복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삶은 내가 존재하는 삶에 의미를 찾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그것과 관계되어지는 모든 삶의 형태에서 스스로가 행복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한 생명으로 부지(扶持)하는 동안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그 삶이 공동체이며 삶의 바탕이 관계에 기인하기에 개인의 삶이 곧 사회이며 나라이고 이 세상이다. 여기에 따라서 삶은 끊임없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 사회와 한 나라 안에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삶에서 주어진 시간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 보면 ‘지금(只今)’이라는 이 순간에서 “지금”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이라는 풀이는 (只)’다만’이라는 말로 이제 ‘금’이라는 말로 ‘지금부터 시작하자’는 부사로 ‘이제’라는 말을 더 붙이며 상용하는 언어에서도 이를 알게 한다.
먼저 순간(瞬間)이라는 말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뜻으로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순간은 깜짝 지나가는 것이기에 ‘다음’이 없다. 이는 시간성과 무시간성의 통일성으로서 현재의 사실성의 순간을 잘 이용하면 영원한 현재로 심화시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 삶의 역사는 시간의 지나가 버림과 버린 시간의 의식이며 그와 동시에 내가 그러한 시간을 파악해야 하는 특히 옳은 순간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의식을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야 말로 한 현상으로서 지나가 버림과 그러한 현상을 통하여 또한 영원한 존재를 의식하는 것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시간성과 무시간성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으로 충만된 시간적 그 특성이 영원한 존재 현상으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그러한 영원성은 순간에 절대적으로 결합되어 그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순간과 영원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진리를 “바로 지금”이 터득하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헬라어에 시간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다. 그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이다.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이름 자체가 시간이라는 뜻이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초에 나오는 신으로 크로노스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시간을 의미한다. 부언(附言)하면 자연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통해 결정되는 시간을 말한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나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시간관리를 잘한다는 것은 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에 ‘카이로스시간’은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기회의 시간이며 결단의 시간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여기에 사람들은 각각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똑같은 하루 24시간을 살더라도 어떤 사람이 느끼는 24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의 시간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이의 한 시간의 느낌은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든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그 시간의 삶은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순간, 그 시간은 카이로스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자기의지와 결단에 의해 달려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육체적으로만 크로노스로 산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삶은 흘러가 버린 모든 것, 잃어버린 모든 것, 또한 아직 다가오지 않는 모든 것 들까지 불러 모아 하나로 일치하게 한다. 그럼으로 크로노스에 의해 산산이 부셔져 버린 반면에 카이로스 시간은 그것이 가진 의미와 삶의 가치들을 드러낸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일찍이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바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 때요 “바로 지금”이 삶의 구원의 날이라 고 힘주어 삶에 시간의 중요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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