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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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평양 출생
김성택(金聖澤, 1875~1939.7.1) 목사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한문서숙(漢文書塾)에서 천자문, 사서오경 등을 익히며 한학을 갈고 닦았다. 유학에 심취해 있던 어느 날 평양시내를 돌아 다니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석진(韓錫晋) 목사일행을 만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한석진을 만난 것이 기독교로 입신(入信)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년 김성택은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 넓다리교회(후에 장대현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가 26세 되던 해에(1901년) 그가 전도받은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 교회 집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1906년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받았다.
1914년에는 강동군 소재 송오동교회 조사(助師)로 임명받아 목사도 되기 전에 설교자로, 전도자로 훈련을 받게된다. 1922년엔 마팻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한 후 제15회로 졸업을 하자마자 목사로 장립을 받고, 조사 때 시무한 바 있었던 강동군의 송오동교회로 다시 부임, 본격적인 조선야소교회장로회 소속 목사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해에 김성택 목사는 평양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
김성택애개 있어서 기독교 진리는 복음 중에 복음이었고 영혼을 소생케 하는 진리 중의 진리였다. 그는 기독교 진리에 몰입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진리의 핵심을 터득하면 터득할 수록 너무나 기뻣고 감격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쁜소식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열심히 전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셨던지 26세의 나이에 젊은 장로로 임직을 받았고, 당시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가 세례 받은지 5년만에 장로가 되었다고 모두들 부러워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평양선교부에 주재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e) 선교사는 너무나 기뻣다. 자신이 전도한 청년이 장로로 자신이 안수하여 교회의 기둥이 되고 전도에도 열심하니 이에 더 무엇을 바랬을까? 마팻선교사는 마음에 점을 찍어 놓고 유심히 지켜보아오던 차에 교역자로써의 자질까지 엿보이게 되자 서슴없이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으로 천거했고, 장로로서 송오동교회 조사로서 너무나 성실하게 주의 종으로서 모자람이 없이 봉사하는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1922년 평양노회 노회장 재임 중에 제11회 총회장 피선
김성택 목사는 1922년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던 그 해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경성의 승동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날 지방에서 참여한 총대는 목사 70명, 장로 70명(1명 불참), 선교사 31명이었다. 총회장으로 당선된 김성택 목사는 이미 장로로서 총회 총대로서 참석했던 일이 있었기에 의외의 인물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들 훌륭한 인물(人物)이 선출되었다고 당시의 총대일동은 환영했다.
그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장으로 선출되던 그날 마침 축하 사절단으로 내한한 사람 중에 만주주일학교연합회 회장 피어스 박스가 참석해 외국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있는 조선교회 신임총회장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있자 모든 총대들은 뜨거운 박수로 함께 축하하였다.
김성택 목사가 목사 되기 이전에 이미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로서 그의 봉사와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의 삶을 마펫 선교사가 눈여겨 보고 있었던 차에 장대현교회 교인들과 마팻 선교사가 한 마음이 되어 더 큰 인물을 키워야겠다는 마음들이 모아졌던 것이다.

마팻 선교사가 믿고 키운 인물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김성택 목사를 1914년엔 그의 책임당회 구역인 평양교외에 자리잡고 있던 강동군 소재 송오동교회(松吾洞敎會) 목사를 임명 일하게 하였으며, 1917년에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장로회신학교로 진학시키면서 그 교회를 지키도록 하였고,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주중에 기숙사에 머물다가 금요일 오후만 되면 송오동교회로 돌아와서 가족을 돌볼 시간도 잊은채 교인들을 심방하고, 심방이 끝나면 설교준비를 하였다. 또 주일 설교가 끝나면 다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노회의 일에 이르기까지 열심을 다하였다. 그 결과 교역자인 그가 신학교에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알차게 계속 성장해 갔다. 김성택은 이로써 그의 목회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 마팻에게만 아니라 평양교계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1922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김성택 목사가 송오동교회 지도자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에 목사로 장립되자마자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리더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과 어떠한 목사인가를 잘 평가해 주는 대목이요, 그의 총회장 피선은 이미 그는 평양노회에서나 장로회신학교에서 이미 검증 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응 말해 주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1923년에는 진남포 미석리교회 목사로 전임하였고, 그때 그는 평서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듬 해 1931년에는 평서노회장에 재선되어 그의 리더십이 더욱 빛나는 계기가 되었고 교단 총회 총회장을 준비하는 훈련의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1934년엔 같은 진남포 지역의 억이기교회로 전임하였고 이후 말년에는 안주노회(安洲老會)로 이적하였다.

총회장 재임시 조선 주일학교연합회 설립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 가운데는 ① 전국의 교회가 성장해감으로 총회에 파송되는 총대를 제한하기 위하여 5개 당회에서 목사와 장로를 각각 1명씩 총대로 선출하던 일을 10개 당회로 개정한 일과, ② 전남노회를 (전남·순천노회) 분립하기로 하였고, 한때 러시아 정교회로 이적해 갔던 최관홀 목사를 10년만에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받아주기로 한 일 ③ 함북노회를 (함북·시베리아노회) 분리하기로 하다. ④ 미국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희사금을 장로회신학교 신축기금으로 받기로 가결하다. ⑤ 무임목사라도 해노회가 총회 총대로 파견하는 경우 투표권을 주기로 하다. ⑥ 시베리아로 김현찬 최홍종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하다. ⑦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YMCA를 설립하기로 하다.
김성택 목사는 1939년 공로목사로 추대를 받았고, 만주노회로 이적한 후에는 정식 교회를 맡아 담임하지는 아니했으나 그 지역에 교회를 방문해 돌보고 있다가 1939년 7월 1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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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11회 총회장 김성택(金聖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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