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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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철산 출신
김석창(金錫昌, 1876-1950)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 마을에서 운영하는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천자문을 습득하였다. 당시의 천자문 교육은 모든 향교와 개인사숙에서 밥벌이를 위해 학교 기초교육으로 문자를 암기식으로만 가르치는 교재가 아니었다.
천자문은 한 면에 8글자로 이루어진 125개의 문장으로써 이 문장을 통해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문학적인 요소가 가득담긴 책이며, 논어(論語)에서 주역(周易)까지 3500년 동안의 동양철학(東洋哲學)을 총망라한 인간교육을 위한 최고의 고전입문서이다. 김석창은 어릴 때 이미 인간의 귀중함과 윤리도덕의 기초를 잘 다졌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농토를 일구어 가면서 생활하다가 고향에서 결혼한 후에 전 가족이 선천(宣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미 이곳 선천은 미 북장로교가 선교부 자리를 잡고 선교에 몰두하고 있었다. 청년 김석창은 때마침 선천 선교부에서 선교에 힘을 쏟고 있는 위대모(Rev. Norman C. Whitmore, 魏大模)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 길로 부모들과 함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선천읍교회에 출석하였다.

신성학교 설립해 민족지도자 양성
김석창은 그때부터 위대모 선교사를 뒷바라지 하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이 무렵 선교부에서는 이곳 선천에도 미션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기에, 그 결과 1906년 드디어 남자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곳에는 1900년에 선천읍에 여성교육 기관인 보성여학교(普成女學校) 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때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지만, 남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도래된 것이다. 이름하여 신성학교(新成學校)가 설립된 것이다.
김석창은 신성학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이 겨례를 사랑하는 민족지도자를 기르는 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랫고, 이 일을 위해 자신도 이 학교를 위하는데 큰 몫을 감당하였다.
선천선교부는 김석창의 선교열의에 감동을 받았고, 위대모(N.C. Whitmore) 선교사는 김석창에게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교회지도자가 될 것을 권유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회자의 길로
이를 쾌히 허락한 청년조사 김석창은 곧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열심으로 정성을 다해 학업에 임하였고 교역자로써 필요한 신앙적인 인격도야에 최선을 다한 결과 1911년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11년 3월 제4회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평북노회에서는 그를 졸업과 동시에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를 개척 설립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김석창은 그해 가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자신이 개척 설립한 선천남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김석창 목사는 젊은 청년시절부터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가 관계하고 있는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전개된 1919년 3.1민족독립운동이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을 때, 김석창 목사는 신성학교 교사이면서 자기 교회 교인이었던 홍성익, 김지웅, 양준병 등과 함께 모여 의논하였다. 선천에서도 이미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1만세 시위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3.1만세운동과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구속
드디어 선천지방에서도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일본 경찰 당국은 평소 사상을 의심하고 있었던 김석창 목사를 지목해 그를 구속하였고, 그와 함께 모의했던 양쪽 학교의 교사들까지 구금, 평양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이듬해 1920년 4월에는 신성학교 출신인 박치의에 의해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에도 일제당국은 김석창 목사가 연계되었다며 그를 끌고가 그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결국 김석창 목사는 이 일로 인해 8년간의 긴 옥고를 치루었다. 김석창 목사는 이때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파로 평생동안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지날 수 밖에 없었다.
선천남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김석창 목사를 위해 옥바라지 하는 것은 물론 그의 가족들을 지극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일에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석창 목사는 그가 석방되던 해에 평북노회장에 당선되었고, 그는 이미 1919년과 1940년에 두번이나 노회장을 역임했으니, 이번에 세번째 노회장이 된 것은 지역내 교회들이 김 목사의 신앙 인격과 지도자로써 존경해 왔던 증거라 하겠다.

공산당의 피습으로 병고 얻어
해방 후 1946년에는 곽산교회(郭山敎會)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에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해 오랫동안 병고를 겪기도 하였다. 1947년 진갑을 맞이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이곳에서는 공산당의 횡포로 앞으로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것을 예견하고 모두들 남쪽으로 월남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를 위하여 교인 한 사람이라도 남이 있으면 목자로써 끝까지 돌보아야 할 임무가 있음으로 월남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였다.

6.25전쟁 중 공산군에 총살 당해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중에 북한 공산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그가 총회장에 피선되었던 해는 1926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렸던 제15회 총회였다. 당시 참석한 총대로는 목사 86명, 장로 86명 선교사 36명이었다.
이때 카나다장로교 선교부가 1925년 7월 본국에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연합해 카나다연합교회선교부로 개칭되었다. 이를 반대했던 카나다장로교 선교부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그들은 일본으로 선교지를 변경해 재일조선인교회를 지원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로 정상적인 목회활동은 못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선천남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이듬해 1946년에는 성역40주년 기념표창을 받기도 하였고, 집으로 귀가 도중 공산당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들을 예수의 사랑으로(마 5:44~45) 용서해주었다.

총회장 재직시 금강산수양관 설립결의
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활동을 기억하고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15회 총회 결의 사항을 살펴보면 ① 강원도 금강산에 교역자 수양관을 설립하기로 하다(대지 8,000평, 석조본관 2층 건물, 기숙사 및 정원을 조성하기로 함.) ② 1928년 7월 미국에서 개최될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대표로 파송하기로 함. ③ 총회 개최일자를 9월 제1차 주일 후 금요일 하오 8시에 개회하기로 의결하다.
일제하 어려웠던 동토의 식민지 시절에 이어 1919년 3.1민족독립운동과 6.25전쟁을 겪는 와중에서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이끌어온 한국기독교선교100년사에 아름답게 한송이의 백합화가 되어 한국교회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한 위대한 교회지도자로 대를 이어 향기를 발하고 있는 김석창 목사 같은 순교자적인 희생과 헌신 모범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김석창 목사야말로 우리들의 영원한 목자장(牧者長)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목자였다고 하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羊)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6)는 말씀대로 순교를 각오한 성실하고도 진실된 참목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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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15회 총회장 김석창(金錫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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