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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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용인 출신
전필순(全弼淳 1897.4.7~1977.2.14)) 목사는 경기도 용인시 외사면 석천리 농촌에서 전규식(全圭植)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일우(一愚)이다. 하나님 앞에 한 어리석은 인생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어렷을 적에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정평리교회 교인 심문택(沈文澤)이 세운 봉양학교(鳳暘學校)를 1912년에 졸업하고 가까이에 있는 실업학교(實業學校)로 진학, 1년간 잠업(蠶業)과 축산(畜産)에 관한 기술을 익혔다.
이 무렵 경성(京城) 연동교회에서 내려와 열심으로 전도하던 원세성, 박용희 등에게 전도를 받아 장평리교회 교인이 되었고, 1914년 당시 순회선교사였던 톰스(Rev.U. Selwys, Toms·都瑞元)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 간사로 있으면서 사립 아현보통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봉사하다가 나중엔 학감(學監)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 서기로 근무하였고, 1919년 1월부터는 연동교회 원세성(元世性)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조사(助師)로 부임 11월까지 거의 한 해동안 사역하였다. 당시 3.1독립운동의 주역들이었던 함태영, 이상재, 박용희, 김마리아 등 연동교회 교인들의 연락을 취하는 책임을 맡았고, 3.1운동 후에도 독립탄원서를 미국 영사관에 보내는 한편, 민족대표 33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렸으며,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연락을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추진해갔다. 이 일로 인해 그해 11월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1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민족독립운동으로 1년간 옥살이
1921년 5월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입학해 학업을 이수하고 1926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4월부터 연동교회 조사(Helper)로 있으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가서 교단 헌법에 따라 1개월간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1927년 6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묘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광화문에 위치하고 있는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출강했다. 1927년 일본에서 종교단체(통합)법안이 일본제국의회에 제출되자 장로교회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종교단체법안 제정 반대운동을 벌 이기도 하였다.

문서선교기관인 ‘기독창문사’창설
한때는 윤근(尹槿) 등과 함께 의논하고 조선예수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강연회를 펼치기도 하였고, 윤치호, 이상재, 박승봉, 유성준, 박용희 등과 함께 순수기독교 문서선교 사업기구인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 창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기독교창문사는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세운 조선야소교서회(C.L.S)와는 달리 조선인에 의해 설립된 출판사였다. 이 출판사의 대표적인 출판물 가운데는 일제 당국에 의해 출판이 보류되고 있었던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를 출판하였고, 또 당시 성경번역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카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사역(私譯) 성경전서를 출판했던 것이다. 이 게일의 사역성경전서는 당시 한학에 능했던 이원모(李元模)의 도움으로 직역이 아닌 의역(意譯)을 추구한 한국 성경번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출판물이었다.
이렇게 볼때 기독교문화사적으로나 출판사적인 의미에서 보다라도 기독교창문사를 설립한 것은 이 게일의 사역성경을 선교사들의 공동성경번역위원회 회원 전체가 인정하지 않은 관계로 당시의 대영성서공회의 출판에 막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치호씨의 도움으로 게일의 사역성경을 기독교창문사 이름으로 출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묘동교회 사임 후 기독신보 기자 활동
전필순 목사는 묘동교회를 사임한 후에는 기독신보(基督新報)에 기자로 입사해 사장에 이르렀고, 1933년에는 YMCA 이사, 피어선고등성경학원 이사장 겸 원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에 수송교회에 부임해 다시 목회사역을 감당했으며, 기독교사회복지 기구인 태화여자관 이사와 1937년엔 자기가 몸담아 일했던 기독신보 이사를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연동교회 100년사 고춘섭편저 금영문화사 1995, 서울 p.300-305,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 편, 기독교문사 1995. 5판 pp.824-825 참고).
전필순 목사는 민족적인 수난 역사 한 가운데서 민족과 함께 목자로서 지도자로서 괴로운 순간이 많았던 것이다.
1937년 7월 일본이 만주땅을 항해 소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이를 지지 찬양하는 편에 본의 아니게 서게 된다. 당시의 언론매체 매일신보(每日新報) 7월 25일자 호외(戶外)에 ‘太陽은 蒼空에 높이 떳다’라는 제목의 그의 글이 실린 것이다. 그 달 26일 종로 YMCA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각 종교단체 연합시국 강연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감리교회 양주삼 목사와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강연했다.

친일 활동에 가담
1938년 8월 윤치호 김우현 등과 함게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주최한 기독교애국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平議員)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남대문교회(南大門敎會)에서 경성노회지맹(京城老會支盟)을 결성할 때에는 노회장으로서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른바 친일행위의 현장에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일본록기연맹에서 간행하는 <록기(綠期)> 1937년 11월호에 “日本의 진정한 적은 어디에 있는가?”란 글에서 일본이 막대한 물자와 고귀한 피를 흘리는 이유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성업(大聖業)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대업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가 적(敵)이라고 하였다.
1941년 4월 연동교회로 재차 부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경성노회 노회장으로서 총회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미영타도좌담회(米英打倒座談會)에도 참석했다.
그는 또 1942년 시국강연회 연사로도 활동했고, 같은 해 2월 갈홍기, 심명섭 등과 함께 “국민문학(國民文學)”에서 주관하는 반도기독교의 개혁을 말한다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 부위원장을 맡았다.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일본기독교단 통리(統里) 도미타(富田蒲)의 래방을 계기로 기독교의 일본화의 급무라는 주제로 조선호텔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조선장로교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동참하기도 했다.
1942년 11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주최로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개최된 황군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에 정인과(鄭仁果), 김응순(金應珣) 등과 함께 참여했다. 같은 달 안국동교회(安國洞敎會)에서 경성노회와 경기노회가 합동해 경기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국립총력경기노회연맹을 맡으며 친일행각을 계속하였다.

연동교회 목사로 재차 부임
해방 후에도 계속 연동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4월 불구속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8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1953년 총회신학교 이사와 연세대학교 이사를 역임했고, 1957년 9월 19일에서 24일 부산중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그동안 일제 하에서 피치못할 정세 아래에서 죽지못해 친일했던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통열하게 뉘우치며 회개하였다.
애석하게도 전필순 목사는 1959년 9월 대전에서 모인(중앙교회) 제44회 총회가 정회된 후 당시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지했던 측이 서울에 올라와 전필순 목사가 시무하던 연동교회에 총회 속회를 하는데 동조함으로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가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당시 총회 결의안의 중요한 안건을 보면 ① 당시 동구권의 항가리 의거에 의연금을 보내기로 결의하였으며, ② 국제선교협력 모임었던 IMC대회에 한국대표로 한경직 목사와 유호준 목사를 파송하기로 하다.  ③ 외국 선교부는 해체하고 협동사업부를 두기로 하다 ④ 교회안 강단 전면에 십자가를 부착하지 않기로 가결하다.
전필순 목사는 1961년 6월 그가 섬기던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와 동시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 1963년 연세대학교에서는 그의 사역의 공로를 인정,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으며, 1977년 2월 14일 주님의 품으로 영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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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제42회 총회장 전필순(全弼淳)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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