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번제 준비를 하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으로 향하여 갔다. 그리고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그는 그의 하인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창 22:5)고 말한다. 히브리어 사본은 “우리가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하는 “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혼자 돌아오지 않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것을 하인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지라도 그는 분명 살아있는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시리라고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삭의 부활을 믿은 자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신앙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했을 때, 그는 근심이 가득하였고, 괴로워했다고 했다(창 11,12). 이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대로 그들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며, “이삭을 통해서 태어나야 네 자손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창 21:12)라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꼭 믿은 것 같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 이삭이 죽어 없어진다면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데도 근심하고 괴로워했던 그는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살려 도로 자기에게 주실 것을 믿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삭에게서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대범하고 주저 없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서 그의 하인들에게 번제를 드리고 “우리가” 돌아온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2016년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부활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의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천지창조의 권능을 믿었기에 그의 아들을 주저함 없이 번제로 바칠 수 있었다.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용기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헌신도, 다 부활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살리신 이에게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왜 두려운가? 왜 우리는 “아니요”라는 말을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피붙이와 우리의 소유에 대하여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집착하는가?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 속으로 부활을 믿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훈련을 받지 못하고, 연습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빌 3:10-1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그는 분명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대한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고난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부활절을 맞는 우리도 이러한 인생 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부활신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삭을 살리시고,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나도 살리시고, 우리도 살리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