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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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베드로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도들의 수장이요, 가시적 지상 교회의 수장으로 정해졌다”는 문서를 남긴 1870년 제1바티칸 회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한복음 21장 15-17절”과 “마태복음 16장 16-19절”을 인용했다.
요한복음 21장은 훗날 의도적으로 첨부되었다는 신학적 주장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부로 되돌아가려던 베드로가 황금에 보석을 박은 관을 쓰고 황금지팡이를 들고 나서는 별난 목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판타지는 그리스신화를 능가하는 재미를 제공 해준다. 또 신들의 사랑타령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어폐가 될지 모르겠으나, 고상하기만 한 바울의 사랑노래보다는 훨씬 쉽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어쩌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로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 만약 바울이 개입할 수 있는 기록이었더라면 그런 모양으로 후세에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하고 노래하는 바울이라면 말이다.
하긴 사랑에는 2등이 없다 했다. “자기 날 사랑해?”하고 묻는데, “박애정신으로...” 운운한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되기 십상. 사랑에는 차별화와 특수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남들이 다하는 그렇고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것이 사랑이란 괴물의 특성이 아니던가.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애드가 아란 포의  “Annabel Lee”의 시구가 생각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이전의 어떤 사랑보다, 우리보다 지혜로운 이들의 사랑보다 강한 것이었다.”는 억지. 그게 바로 사랑의 묘미인 것을.
20세기가 끝날 무렵, 이름깨나 날리는 학자들이 연애 중인 대학생을 대상으로, 혈중 호르몬 분석을 했다나.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등의 화학물질이 연애감정을 일으키는 요물이라고 발표했다는데, 이를 이용하면 사랑의 강도도 측정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여론조사로 등수를 매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를 능가하는 사랑의 언어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침묵>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꾸는 그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생전의 예수를 알고 있는 제자들과 그렇지 않는 바울을 비교하여 재미있는 글을 썼다. “예수의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와 생활을 함께 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 그 행동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스승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제멋대로의 제자노릇을 했지만... 하여튼 그들은 실제 인생에서 사귀었기 때문에, 그 추억은 생생하게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생전의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되기 이전의 예수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존재였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 죽음과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 이외에는 별로 관심거리가 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베드로의 사랑은 영원불변은 아니었고, 바울의 사랑노래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사랑이란 때로 한 눈도 팔고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강한 연애감정이 지속하는 기간은 길어도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라고 한다.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도 그랬을 지도 모른다. 예수가 어찌 그것을 모르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던 그가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으면서도 진정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다? 세 번 씩이나. 이것은 베드로의 아픔이 아니던가.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물으시는 예수의 물음에 불안해 진 것. 예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그러는 것이 사랑의 언어이거늘. “내 양 떼를 먹여라. “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껴안는다. 그러나 “내 양떼를 먹이라”는 쉽게 “네 양떼를 먹이라”로 바뀔 가능성이 처음부터 잠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그게 사실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 요한이 등장한다. 아니 베드로가 예수와 자신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의 가슴에 기대어 속삭이던 요한의 모습이 베드로의 상념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그가 어떻게 되던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너는 나를 따르라” 판타지는 무르익어간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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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을 먹이라”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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