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리 시대는 유전자와 염색체의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게놈(genome)으로 모든 생물의 세포에는 핵이 있고 핵 속에는 일정한 수의 염색체가 있으며 염색체 안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정보를 가진 DNA가 있다. 이제는 인간 유전지도인 게놈도 완성되어 오늘의 컴퓨터의 엄청난 발전을 본다. 그러나 아직도 밝히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가정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 무엇인가?”하는 것과 인간적인 문제를 비롯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인생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가?”하는 문제들은 삶에 던져진 물음들이 산재(散(在)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현명하고 지식이 높다고 해도 언제인가는 죽음에 이길 자 어느 누구도 없다. 삶에 대한 물음에 천태만상의 답을 가지고 자기 아집으로 집착하여 일생을 살아간다. 전도서 8장9절에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 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고 전도자는 말한다. 성서에서 보면 개미는 이성이나 감성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일부 물려받았다. 바로 이 특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밝히신다. 성서에는 사람이나, 땅에서 사는 것, 그 밖의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기록되도록 영감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읽고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자체는 ‘자기생각’이 없다. 동물은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 비판하지도 못하며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처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에는 원리원칙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과정으로 질서와 규칙이나 규범이 있기에 여기에 따르는 길이 참삶의 생활이 된다. 이것을 아는 인간은 철학적으로 회의(懷疑)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를 생각할 줄을 안다. 그리고 “고생을 하면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또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 또 다른 삶이 있는가?”하는 문제를 알고 해답을 하려는 여기에 철학의 자리가 놓인다. 소크라테스의 회의(懷疑)가 그리스 철학을 탄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신학의 발단이 되었고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철학의 기본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이 사유(思惟)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할 줄을 안다” 여기에 철학은 인간정신과 삶에 생활의 필수 영양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철학은 회의하고 대답을 하고 또 다시 질문을 한다. 이는 철학이 삶을 반성하게 하고 질문을 갖게 하여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런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으로 나누어 볼 때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묻고 답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가치관, 감정, 이성, 지혜, 사랑도 믿음도 없다. 철학을 Philosophy라 하는데 philos와 sophia가 합친 뜻은 에로스보다 더 높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알게 하여 철학이라 이름한다. 이는 인생이나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확실하고 엄밀하게 인식 비판하여 근본적으로 삶을 해결 하도록 현실에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과 구분된다. 많은 지식을 쌓아도 ‘내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답을 지식은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는 모든 이치에 의하여 잃고 얻는 것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리(事理)를 밝히고 잘 처리하는 재능을 지혜라 하는 것이다. 즉 지식은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실력을 지식이라 한다. 여기에 지식은 그 한계가 있다. 이는 지식으로 유식해질 수는 있지만 유능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지혜는 일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경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고로 지식은 어떤 것을 넓게 안다 하지만 지혜는 어떤 것을 깊게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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