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에 펴낸 화집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현대 도시의 스캔들과 악덕을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제목 <이 사람을 보라>는 물론 <요한복음서> 19장 5절에 나오는 빌라도의 말을 비튼 것이다.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죄인 예수를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 하자, 증오에 불타는 군중이 주먹을 뻗으며 외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죄와 허물을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고, 그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된다.
“Ecce Homo”라는 제목을 붙인 성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세 이후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렘브란트의 것이 가장 친근할 것.
오늘날에도 스캔들에 휩쓸린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라.”하는 구호에 의해서 군중 앞에 노출되고 희생제물이 되고 있다.
스캔들은 바나나 껍질이라 했던가. 길에 떨어진, 혹은 차려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꼴을 빗댄 것이다. 넘어진 사람이 넝마주이이거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면 동정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명사이거나 잘 차려 입은 숙녀라면 바로 스캔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모습이 험할수록 멋진 스캔들이 되는 것이고. ‘아차’ 하는 낭패스러움과 이어지는 공포의 표현을 대중들은 손뼉을 치며 즐기는 것이 스캔들의 생리요 법칙인 것이다.
우리는 넘어진 사람을 돌팔매질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로써 우리자신을 돌팔매질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넘어진 사람에게 허물과 죄를 씌워 추방하지만, 실상 추방당하는 그들에 의해서 구제받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스스로 자기의 허물과 죄를 던져 버릴 수가 없기에...
오늘날 일부 인사들에게는 남의 스캔들이 밥이 되어주고 있다. 적어도 심심풀이는 되어준다. “돌을 던지는 너희에겐 놀이이지만, 우리에겐 죽음이다.” 이솝 우화의 개구리의 항변은 흔해빠진 현실이 되어 있다.
현대는 자신의 스캔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적잖이 재미를 보기도 하는 세상이다. 스캔들을 기화로 유명해지면, 그 유명해진 자신을 드러내어 확고한 명사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수법을 이용한다. 스캔들을 자료로 책이나 영상을 만들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스캔들 산업이라 한단다.
스캔들은 인간이 이렇게도 기묘한 생물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굴러 넘어진 사람들을 다시 매질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있는 우리가 두렵다.
음행하다 들킨 여인이 예수 앞에 서있다. 예수가 누구든지 죄 없는 이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물러갔다고 신약성서는 기록한다. 만약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에서라도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무엇이 길래!”라며 부라린 눈으로 예수를 노려보며 돌을 들어 던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그 돌들은 당장에서 여인의 표피는 물론 심장까지 망가뜨려버릴 것이다. 마침내 돌은 예수에게로 향해질 것이고.
아니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고쳐 써보면 어떨까. 예수가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 하자, 끌려온 여인이 먼저 머리를 쳐들고서는 반라의 몸을 비틀어 교태를 부리면서 유유히 군중들 틈을 벗어나는 그림은 어떨까. 여인의 손가락이 V자를 그리고 있는 그림쯤은 이미 별난 그림이 아니지 않는가.
“이 사람을 보시오.”하고 그 누군가가 말해줄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는 “우리를 보시오!”하고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약성서>에서의 스캔들의 뜻은 예나 이제나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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