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이 글은 지난 5월 28, 29일 서울 새문안교회 교육관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 기념 제9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에서 윤경로 장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가 특별강연으로 발표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자도: 경건, 열정, 희생 그리고 그의 삶” 가운데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상의 특징과 공적’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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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상의 특징과 공적
1885 년 4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내한하여 1916년 10월 하늘의 부름을 받기까지 31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 공적과 활동은 매우 다양 다기했습니다.
31년간의 한국에서 활동한 언더우드 목사의 주요 업적을 추려 보면, 새문안교회 목사로 섬기는 외에 한글 성경번역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경전서>의 번역을 주도하였고, 최초로 <찬양가>를 제작 보급하여 교회음악의 기초를 놓았으며, <한국어문법>과 <한영자전>, <영한자전>을 편찬하였고,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신문>을 간행하여 기독교언론의 기초를 놓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이 밖에 36개의 기독교단체 책임자, 연합신학대학 학장이자 심리학·철학·윤리학 교수, YMCA 이사장,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회 회장, 피어슨신학교 교장, 서울전도위원회 회장, 성경개혁위원회 회장, 선교회 집행·교육·재정위원회 위원, 세브란스병원 이사회 위원, 서울 초등학교 위원회와 연합공의회 법정위원회 위원 등 주요 직함만도 10여개 넘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그의 복음 선교사로서의 공적과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는 데 한정하고자 합니다.
재한 선교사 가운데 언더우드만큼 쉼 없이 선교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선교사는 없다 하겠습니다. 내한 초기 그의 열정적인 전도와 선교의 열정은 말년에도 전혀 늦춰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방대한 선교사업과 서신 교환을 위해 미국인 선교사 보조원을 포함하여 한국어와 영어에 능한 비서 두서너 명과 타이피스트 3~4명 외 한국인 번역자와 필경사를 옆에 두고 일했을” 정도로, 말년에도 그의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 예로 부인(L.H. Underwood)이 펴낸 ‘한국의 언더우드가(家. The Underwood of Korea ’(1918)에 보면 “1915년 4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한 해 동안에 각지로 보낸 편지 및 보고서가 무려 2,300여 통에 달할 만큼 열정적인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열정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한국을 향한 그의 선교열정이 적극적이었으며 시종여일(始終如一)했다는 점은 그가 한국교회에 남겨준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의 그 열정과 희생의 헌신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서도 당연히 필수적 요소인데 언더우드 역시 구원의 열정을 갖고 수많은 일들을 열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고 결국 이 땅에서 온 몸을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지방전도여행엔 한국인 동역자 대동
1900년대 접어들어 전도활동이 자유스러워지면서 그의 본격적인 지방전도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매우 독특한 전도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지방전도여행에는 한국인 동역자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들 가운데는 두서너 명으로 구성된 코르넷(cornet) 연주자와 환등기 기사를 꼭 대동하였습니다.
일단 전도집회 장소에 도착하면 우선 천막을 치고 그 앞에 대형 크기로 그려진 예수 초상화를 걸어 놓은 후 나팔수를 앞세워 주변 동네를 다니며 전도지를 돌리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운집하면 코르넷 연주자의 선도로 찬양가를 힘차게 부르고 이어 환등기를 돌려 마치 무성영화 시절 변사(辯士)의 구성진 소리모양 그림 설명이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참여한 지방전도여행이 특별히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미국인 언더우드 자신이 지방민들에게 더없는 호기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말로만 듣던 ‘파란 눈’(碧眼)의 ‘코쟁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코쟁이’ 외국인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방전도여행을 떠나면 적어도 하루에 짧게는 40리길, 길게는 60리길을 걸으며 전도여행을 강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남다른 전도방법을 살펴볼 때 매우 조직적인 두뇌와 사업가적 기질을 지닌 ‘수완가’였다는 점 등 그의 개인적인 특징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남다른 사업가적 솜씨 때문에 한때는 타자기 회사를 경영하는 형님으로부터 부사장 자리를 맡길 터이니 미국으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원일한 장로 증언).
이러한 사업가적 기질은 여러 면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는 초기 선교비 염출의 한 방법으로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학계에서 처음 공개된 1906년에 작성된 유언장에 보면 황해도 소래(松川)에 ‘소래비치회사’(Sorai Beach Company)를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였음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안식년이면 본국에 돌아가 미국 전 지역 교회를 돌며 한국선교를 위한 상당한 후원금을 모금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강점당한 1910년 한 해만도 선교지원금으로 17만 불을 모금하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사업적 수완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남다른 친화력과 뛰어난 조직력의 소유자였으며 일에 대한 추진력이 대단하였습니다. 즉 성경 보급과 판매를 위해 서울 중앙(새문안교회)에 도매서(都賣書, Colporteur; 宋淳明 장로)를 두고 지방 매서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며,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어려움에 봉착했던 한글성경 번역사업을 기필코 해 낸 일, 이 밖에 수십 개 선교단체의 책임을 맡아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뛰어난 조직가로서 인화력과 일에 대한 남다른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단·교파간의 선교지 분할 성공시켜
이 밖에도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 유산으로 교회의 연합정신과 일치운동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선교 활동이 자유스러워지자, 구미 각국의 여러 교단과 교파 선교사들이 대거 한국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하나의 선교의 장(場)을 놓고 교단과 교파 사이에 선교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여기에 이즈음 신구교(新舊敎) 간의 갈등과 반목이 한국에서 또한 재연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교회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던 이 시기 교파간 선교경쟁이 갈등과 대립으로 비화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 협조적인 호혜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언더우드의 연합정신과 인화력 및 지도력의 공헌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교단, 교파간의 선교지 분할을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선교기관과 교회 사이의 연합운동을 가능케 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선교지 분할은 훗날 한국교회를 교파주의적 교회와 지방색에 의한 교권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조치를 함으로써 일찍이 몰려올 교파간의 분쟁을 사전 봉쇄했으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연합과 일치운동의 전통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천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문안 강단에 에큐메니칼(Ecumenical, 교회일치 운동) 정신의 고양과 실천을 위해 다른 교단과 교파 교역자들을 세웠던 일이며, 기독교 연합행사를 주로 새문안교회에 유치했던 것도 그의 이러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연합신문의 창간이며, 연합찬송가의 발간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면서 기독교 연합교육기관으로서 연희대학교를 세운 것도 바로 그의 연합정신의 적극적인 표현이자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철학과 정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 선교적 유산은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새문안교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추모하며 이상에서 언급한 언더우드가 이 땅에 남겨놓은 신앙적 유산과 역사적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한국교회 특히 새문안 목회 강단과 교인들이 이어가야 할 사명이자, 마땅한 도리라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언더우드가 ‘회중교회’ 전통의 경건한 신앙 가문에서 물려받은 ①‘경건신앙’, 청소년기에 네덜란드 계통 ‘개혁교회’에서 배운 ②‘개혁신앙’,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은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신학을 통해 배운 ③‘선교신앙’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에 세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기둥 위에서 미지의 조선을 향해 선교의 결단을 내린 ‘개척정신’,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명령을 따라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쓴 초교파적 ‘연합정신’, 규모 있게 조직적, 체계적으로 각종 선교사역을 열정적으로 추진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와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십자가의 ‘희생정신’은 예수 그리스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제자도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야말로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명령한 제자도를 온전히 실천하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간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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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자도 : 경건, 열정,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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