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종교적 관념에 의하면 “신의 완전성”은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을 수 없는 데에 있다. 우리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길은 이러한 신을 닮는 데에 있다. 이 신과 같이 속세의 모든 것을 해탈하여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에 자극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예수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돌로 지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요2;19-20). 그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이다(막 14;5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어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 1;14). 그리스도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 그런데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전이다(고전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고 하심에 주목한다.
성령 강림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깊은 절망감과 외로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한 다락방에 모였다.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깨우쳐 주시던 주님을 잃은 슬픔에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위로가 없었다. 유대 절기의 하나인 오순절 날 이들에게는 예정되었던 성령의 강림이 임하게 되었다. 진리를 온전하게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의 영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금요일에 한 알의 씨앗으로 예수가 심어졌고 부활의 아침에 그 씨앗은 생명의 꽃을 피워 내었다. 그리고 이제 오순절 날, 한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 위에 그 생명이 꽃이 향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향기를 맡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니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죄인들 가운데 계신다. 그는 죄인들의 죄를 괴로워하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자기를 떠난 탕자를 기다리듯 그들을 기다린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교회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도 계시고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며 그들의 고난에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 계시듯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있고 또한 몸속에 있다고 한 말은 “정신이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고, 이 정신의 에너지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살아 있는 에너지다”라고 한 말에서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한 삶”의 의미를 가져본다.
성령 강림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잊어버린 진실을 증언하게 한다. 그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우리들이 변화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좁은 생각의 반경이 넓어지고 우리의 닫혔던 마음이 열려 갈등과 분열 폭력과 미움 그리고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긍휼로서 감싸 안았던 사마리아인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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