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 출신
박명수(朴明洙 1916.7.0~2008.2.21) 목사는 경상북도 문경에서 밀양 박(朴)씨 문중의 박경문씨와 창녕 조(曹)씨 문중의 조옹중씨 사이에 3남의 맏이로 태어났다. 때는 3.1독립 만세 시위 사건이 있기 3년 전이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살림살이였으나 명수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교육열에 대단했던 부모덕에 여덟살이 되던 해에 문경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신학문(新學文)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또 부모님을 따라 문경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에서 열리는 성경암송대회에서는 항상 일등이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으나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까지 나갔다.
당시 어머니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명수가 꼭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명수는 이 기도를 듣고는 어머님께 화를 내었다. 나는 커서 천한 남의 종은 되기 싫으니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명수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종노릇 하는 것이 마귀 집안에서 상전노릇 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의 이 기도는 박명수의 그후 그의 삶의 바탕과 틀이 되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명수는 강하고 큰 뜻을 품은 친구들과 흘흥야학회를 만들어 15, 16세들의 또래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며 야학에서는 토론회와 웅변대회를 열기도 했다. 여기에서 반일독립운동을 일깨우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 농촌교회는 8개처를 돌보는 전도사님을 모시는 형편이라 교역자의 얼굴을 한달에 한번 꼴로 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명수 청년에게 종종 설교를 부탁했다. “가난해 두루마기 한벌도 없는 내가 어떻게 신성한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까? 저는 못합니다”라고 거절했다. 이를 안 부모님은 빚을 내어 두루마기 한 벌을 해주셨다.
성경학교 졸업 후 전도사로
1934년 18세 때 명수는 총각 집사가 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안동에 있는 인노절(Rev. Winn Roers Earl ; 印魯節) 선교사 기념성경학원(記念聖經學院)에 입학하였다. 문경에서 안동까지 20여 리가 되는 먼 거리였으나 성경연구와 설교를 위해서 열심을 다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비와 식비는 남자 기숙사 취사를 담당해 해결하였다.
이러던 중 1938년 총회가 산사참배를 결의했다. 학교는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게 되어 문을 닫자 명수 청년은 충북노회가 경영하는 청주성경학원으로 편입, 1941년 12월 15일 졸업했다.
명수 전도사가 19세 때 진병용씨의 딸 당시 만 17세의 진순례씨를 소개 받아 결혼했다. 그리고 20세가 되었을 때 선교부로부터 정식 전도인으로 임명을 받아 경북 예천군 풍양면 시장터에 있는 개척교회로 파송되었다.
1942년 4월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본인은 장로교 출신이어서 성결교신학교가 싫었다. 그러나 그의 은사인 독립운동가 이원영(李源永) 목사, 송창근(宋昌根) 목사 등이 당시로서는 가장 복음주의적인 학교이니 가도록 하라고 권해 입학하였다.
1943년 12월 7일 일제 말기에 독립운동 한다는 죄목으로 문경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혐의가 없어 풀려 아미데라스 오가미(天照大神)를 교회에 모시고 예배 보던지 교회문을 닫든지 하라는 당국의 통보에 이방신을 믿기보다는 교회당 문을 닫고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폐쇄하는 아픔을 스스로 겪었다.
‘전국 신학교학우회’ 조직 복음전도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소식이 강산을 뒤덮었다. “나는 파출소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광복을 알리고 8월 17일 문경교회 재건예배를 드린다고 광고를 했는데 160명의 성도들이 모여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1945년 재건된 경성신학교에 복학 신학생으로 잠시 반탁(신탁통치) 운동을 했으나 이건 아니다 싶어 민족복음화로 방향을 선회 6월 전국신학교학우회(연합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이었다. 당시 참여한 학교는 경성신학교를 비롯 협성신학교(현, 감신대), 연희대학(현 신라대), 베나디여자신학(영락교회 운영),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등이었다. 전도회를 조직 전국각지로 나가 복음전하는 일에 매진했다.
1946년부터 경성신학교 구내의 아현성결교회 전도사가 되었으나 12월에 인천에 있는 장로교 송현교회의 부름을 받고 담임 전도사로 부임해 사역하던 중 1947년 8월 31일 성결교 중부지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송현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성결교에서 안수받고 장로교에서 목회
그후 문경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대우는 송현교회보다 못했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부임한 그 해 연말에 안동선교부로부터 일제 때 박해와 피해를 받은 문경교회에 당시 돈으로 1백5만원 전후 복구비가 배상되어 문경교회는 교역자 식량조달을 위해 논 1000여 평과 목사사택 1동을 그 돈으로 구입했다.
1950년 예기치 못한 민족의 환란 6.25 전쟁이 터졌다. 주일새벽 미명에 북한괴뢰군이 3.8선을 돌파 파죽지세로 밀리고 밀려 문경도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박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김천으로, 대구, 온산과 감포까지 피난했다가, 정훈(政訓)이란 명분으로 군부대를 따라 문경으로 돌아왔다.
문경교회는 부흥해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했으나 경제가 어려웠다. 박목사는 가족들을 모아 ① 매일 한끼 죽을 먹는다. ②반찬을 사지 않는다. ③ 화장품을 사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주일날 온 교우들에도 함께 실천해 성전을 짓자고 선포하여 교회당을 지었다. 1957년 3월 노회에서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62년 4월 유서깊은 경중노회 의성읍교회로부터 청빙이 와 의성(義城)으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일제 때 항일운동으로 유명한 교회였다. 한국교회사적으로도 농촌운동가 유재기 목사, 이영식 목사, 정일영 목사, 조선출 목사, 박병훈 목사, 조성암 목사 등이 목회하였다.
서울 장로교 청량교회 부임
1968년 10월 9일 서울 청량교회의 부름을 받고 의성읍교회를 사임하고 부임하였다. 부임 당시 청량교회는 반지하교회였고 사택도 말이 아니었다. 당시 교회형편은 교인수도 적었지만 담임목사 사례비도 매월 정상적으로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다. 성실하게 말씀 중심목회로 심방하고 전도한 결과 교세가 점점 늘어났다. 부흥회 때면 강사들마다 “박목사님에게 무엇을 해드릴까요? 대우를 잘하라고 할까요, 성지순례 시켜 드리라고 할까요, 자동차를 사 드리라고 할까요”고 했다. 박목사는 그들에게 다 필요없으니 성경만 잘 가르쳐주고 가시라고 했다. 그래서 후로는 구속의 신앙, 십자가의 은총을 전하지 않고 기복주의를 조장하는 부흥강사는 절대로 모시지 않았다. 자기교회 부흥시킨 양심적이고도 성경 잘 가르치는 목회자를 부흥회 강사로 모셨다.
청량리에 와서도 교회를 또 새로 지어야 했다. 마침 이희재 집사가 와서 목사님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저의 회사(주시회사 장자 회장)도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한다며 건축비 전체의 2분의 1을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1983년 어려움 속에서도 900여평의 대성전을 완공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목민학사·목민평화의 집 운영
청량교회를 섬긴지 20년이 지나게 되었다. 은퇴준비를 하면서 은퇴 후에 할 일을 구상해 보았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자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떠올라 자기의 호(목민 牧民)을 따서 목민학사(牧民學舍) 계획을 세웠다. 교회은퇴금과 또 자녀들의 협력으로 1991년 2월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가옥 한 채를 구입, 농촌목회자 자녀들 중 서울로 대학진학한 자녀들을 받아 그들과 함께 예배하며 생활지도를 하기 시작했고, 또 1999년 2월 23일 한국농어촌선교회를 조직 농촌교회를 돕는 일을 병행하였고, 한평생 목회를 마치고 의지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여교역자들을 위한 목민평화의 집을 운영했다.
1985년 9월 17일에서 21일까지 당신이 시무하고 있는 청량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0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해외파송선교사는 본 총회 산하 현지노회에 가입토록 한다. ② 해외대회 참석시 총회를 대표하는 정식대표는 2명으로 한다. ③ 총회신학교 야간부는 폐지하기로 한다. ④ 외국영주권 및 시민권을 가진 자는 국내목회를 할 수 없다.(단 신학교수는 예외로 한다.) ⑤ 교단의 재단이사장은 교단대표인 총회장이 맡도록 한다. ⑥ 역대 총회록을 출판부에서 발행하기로 결의하다.
박명수 목사는 본교회에서 1989년 2월 23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92년 6월 2일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남긴 ‘죽어야 산다’라는 짧은 여정기에서 자신의 목회신조(牧會信條)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진실과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살아왔다. 진실한 생활을 보이고 교회와 교인을 먹이는데 전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신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목회신념(牧會信念)이다.”(목사 다운 목사 목민(牧民) 박명수 목사 추모글 모음집, 북코리아 2009, 서울 초판).
박명수 총회장은 2008년 2월 21일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93세를 읽기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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