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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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에서 춘천으로 가는 외곽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는데, 아주 커다란 분홍빛 태양이 처절한 빛을 띠고 산 아래로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멋있다. 그런 생각 끝에 내게도 멋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은 내 옆에 바짝 붙어서서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답게 살면서 아름다운 품위를 보이는 멋.
한편으로 이문동 철길이 내려다 보이는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늙은 개 한 마리가 있습니다. 딸아이가 학교 수위실에 버려져 있는 것을 데려온 잡종이긴 하였지만, 곰처럼 검은 털빛에 가슴 한복판과 왼쪽 발에 하얀 털이 그야말로 하얀 빛을 띠고 예뻤습니다. 나는 그 멋 때문에 녀석의 머리를 가끔 쓰다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녀석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유리창 너머로 주인이란 사람은 소파에 편히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거리는데, 주인이 내 준 음식이나 홀짝거리는 신세. 주인은 베란다 문을 열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 주변을 간질이기만 해도, 녀석은 주인 쪽으로 엉덩이를 쑥 내밀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좋아합니다. 역겨운 냄새가 심한지 녀석이 코를 킁킁거려 봅니다.
어렸을 적부터 왜 어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떤 것은 개나 돼지로 태어났을까요. 왜 녀석은 개로 태어나 주인에 대한 정을 떼지 못하면서 죽도록 주인 과 정을 나누며 살아야 할까요. 녀석은 아파도 아프다는, 추워도 춥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맘만 먹으면 여행 가방을 들고 어디든 떠나지만, 개는 주인이 이끌어 주지 않는 한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개나 돼지를 학살하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은퇴 후 시골로 귀향한 사람이 서울에서 귀한 분들 오셨다고 키우던 개를 잡으려는데, 그만 그 개가 목줄을 빠져나와 달아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한 후 집에 돌아왔더니 그 개가 그만 자신의 집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더랍니다. 주인은 자신이 키웠던 개를 잡으려 했던 것을 반성하고, 그 후 그 개를 극진히 키웠답니다.  
개 얘기가 나왔으니 성경 얘기도 해 보자.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한 얘기가 신약 처음부터 전개되지만, 개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주님은 모든 생물 가운데 인간을 제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창조하셨고, 질서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번성하도록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뜻에 의해서 개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사랑 안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에 그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도 이들 제자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도 잡혀 죽을까봐 무서워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에는 찾아가 당신의 깊은 상처를 보이시면서 제자들을 위로하셨고, 엠마오에 가는 두 제자에게는 실제로 동행하시며 그들의 말소리에 귀기울이셨습니다. 다시 고기 잡는 어부가 되려는 베드로에게는 직접 찾아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간절히 기도하는 120명의 제자들에게는 성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지를 활용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인간미를 언제 어디서든지 발현할 수가 있습니다. 개는 인간처럼 기도하고 간구하여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게 된 것은 복된 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영원 위에 흔적을 남기는 좋은 일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고, 자신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도 가야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음미하여 보려 합니다. 주님은 내가 주의 뜻에 따라 인간미를 발휘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며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밝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도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시작한 선교 헌금이 이 땅에 젊은 선교사들이 보내지는 열매를 맺은 것처럼, 지금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선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달란트를 복음 사역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작가는 글로써, 자본가는 물질로써,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로써, 선교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평신도 선교 말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도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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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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